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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행복을 기도드리는             

                                                            신동엽


그의 행복을 기도 드리는 유일한 사람이 되자.

그의 파랑새처럼 여린 목숨이 이쓰지 않고 살아가도록

길을 도와 주는 머슴이 되자.

그는 살아가고 싶어서 심장이 팔뜨닥거리고 눈이 눈물처럼

빛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나의 그림자도 아니며 없어질 실재도 아닌 것이다.

그는 저기 태양을 우러러 따라가는 해바라기와 같이

독립된 하나의 어여쁘고 싶은 목숨인 것이다.

어여쁘고 싶은 그의 목숨에 끄나풀이 되어선 못쓴다.

당길 힘이 없으면 끊어 버리자.

그리하여 싶으도록 걸어가는 그의 검은 눈동자의 행복을

기도 드리는 유일한 사람이 되자.

그는 다만 나와 인연이 있었던

어여쁘고 깨끗이 살아가고 싶어하는 정한 몸알일 따름.

그리하여 만에 혹 머언 훗날 나의 영역이 커져

그의 사는 세상까지 미치면 그땐

순리로 합칠 날 있을지도 모을 일일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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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5-07-09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시집에 나오는 시일까...

글샘 2005-07-09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989년 간행된 신동엽의 시집 《꽃같이 그대 쓰러지는》에 수록되어 있는 유작(遺作)이라네요. ^^ 주말 즐겁게 보내세요~~~

해콩 2005-07-10 1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걱... 89년 ... 검색해봤더니 역시나 없네요.. 아예 '품절'이라는 말도 안떠요.. ㅜㅜ
 
 전출처 : 느티나무 > 아이들을 어떻게 만날 것인가?

 

아이들을 어떻게 만날 것인가 

                                               

                                                  안 준 철/순천 효산고 교사


하나. 교사는 역할 뒤로 숨을 수가 없다.

                                                       

한 유명한 사진작가가 친구에게 가난한 인디언 마을의 고난과 절망에 대해 이야기했다.

“여자들은 임신 중이고, 아이들은 병들었고, 남자들은 일하러 밖에 나가 있고, 마을은 폐허이고, 땅은 초토화되어 있었어.”

“넌 뭘 했는데?”

“그들의 모습을 컬러 사진에 담았어.”

사진작가는 대답했다.


이 사진작가와는 달리, 교사들은 역할 뒤로 숨을 수가 없다.(하임 G 기너트의 교사와 학생 사이에서)


학급에는 거의 필연적으로 집안 환경이 어렵거나, 과거의 그늘진 삶으로 인해 심성이 뒤틀려 있거나,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진실성이 결여되어 있거나, 거짓말을 습관적으로 잘하거나, 어떤 일에도 의욕을 보이지 않거나 하는 그런 아이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교사에게 그들은 감상이나 취재의 대상이 아니라 그들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야 하는, 피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입니다.

그들을 껴안고 사랑하든, 무관심으로 대하든 그것은 교사 개인의 선택이지만, 어느 편을 선택하든 그 역할 뒤로 숨을 수는 없습니다. 가령, 한 아이에게 무관심하게 되면 그 무관심으로 모든 일이 끝나지는 않습니다. 그 무관심으로 인해 발생되는 후속의 사건을 교사자신이 감당해야만 합니다.  


둘. 교육적 상상력에 대하여


수업시간에 영어 단어를 설명하다가 내 스스로 뭉클한 감동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일종의 나르시시즘인 셈입니다. 낭만적인 시구 하나로 학생들의 시선을 끌 수 있었던 호시절도 아닌데 자기 말에 스스로 도취되는 이런 촌스러운 선생님을 향해 눈을 반짝여줄 순진하고 만만한 제자들이 얼마나 될까요?

훌륭한 시편과 견줄만한 팝송으로 수업을 하면서도 한 줄의 가사가 주는 감동을 전달하기 위해 제가 치러야하는 인내와 극한의 감정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도 제 가슴에서는 여전히 뭉클뭉클 솟구치는 것이 있으니 이를 어쩝니까? 어느 날 영어시간, 저는 '코스모스(cosmos)'라는 단어를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저는 꽃 한 송이에서도 우주를 봅니다. 선생님이 시인이어서 그럴까요? 그렇지 않아요. 이것은 시적 상상력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과학적 상식에 가깝습니다. 생각해보세요. 태양의 도움 없이 한 송이 꽃이 피어날 수 있을까요? 그리고 태양은 저 혼자서 일을 합니까? 태양계의 여러 천체는 만유인력에 의해서 서로 연결되어 있고 정연한 역학계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천체 중 하나라도 문제가 생겨서 균형이 깨어지면 태양의 위치가 달라집니다. 태양이 지구에 조금만 가까워져도 꽃은 타죽고 말겠지요. 이렇듯이 꽃 한 송이를 피우는데 온 우주가 협력하고 공을 들이는 것입니다. 코스모스가 하나의 꽃 이름이면서 우주, 혹은 질서라는 뜻을 가지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들어보니 그럴 듯한 지 귀를 쫑긋하고 관심을 기울이는 아이들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저는 그 중 한 아이에게 다가갔습니다. 숙제를 네 번씩이나 해오지 않은 아이입니다.

"네가 어떻게 태어났지? 누가 널 만들었냐고?"

"예? 그건 말하기가 좀 뭐한데요."

"오버하긴? 네 엄마 아빠가 널 만드셨잖아. 그럼 네 엄마 아빤 누가 만드셨지?"

"그거야, 할아버지 할머니가…."

"그래. 그러면 할아버지 할머니는 누가 만드셨지? 물론 증조할아버지 할머니께서 만드셨겠지. 그런 식으로 계속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최초의 인간이 나오겠지. 그 사람은 누가 만들었을까? 두 가지 주장이 있어. 신이 만들었다. 아니다. 원숭이가 진화해서 사람이 되었다. 난 전자 쪽인데 만약 신이 인간을 만들었다면 넌 신의 아들이야.

그리고 말이야, 그 최초의 조상부터 너에게 이르기까지 천재지변이라도 생겨 한 사람이라도 목숨을 잃었다면 넌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거야. 너 한 사람을 태어나게 하기 위해 전 우주, 전 역사가 동원되었다는 얘기야. 네가 그런 사람이야. 그런데 4관왕이 뭐야 4관왕이? 앞으로 잘 할 거야 어쩔 거야?"

"잘 하겠습니다."

참으로 신통방통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녀석의 입에서 그런 말이 거침없이 튀어나오다니요? 제 자신도 이상한지 어리둥절한 표정입니다. 그런데 4관왕이라니요? 그것은 숙제를 네 번 해오지 않은 아이에게 붙여준 별칭입니다. 처음에는 "별이 네 개네"하는 식으로 말했다가 아차 싶어 말을 바꾼 것입니다. 숙제를 해오지 않는 아이들을 향해 던지곤 했던 부정적인 언어들도 이런 식으로 변했습니다.

"오늘 숙제를 해오지 않은 학생들 고마워요. 수행평가 점수를 모두 만점을 줄 수는 없는데 선생님 곤란을 겪지 않도록 스스로 알아서 점수를 깎아 주었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자, 우리 모두를 위해 희생정신을 발휘해준 친구들에게 모두 박수."

꾸중을 들어야 할 자리에서 오히려 박수를 받은 아이들의 표정을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어떤 말을 해도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아이들의 눈에서 동요의 빛이 일기도 합니다. 아무리 무감각한 아이라도 교사가 사용하는 언어의 질감을 가릴 줄은 압니다.

저는 저대로 아이들을 무시하거나 경멸하지 않고도 교사의 뜻을 전달할 수 있는 즐거움도 있습니다. 그 즐거움의 시간은 물론 반성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저는 시를 쓸 때는 시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시를 쓰지만 아이들을 만날 때는 교육적 상상력을 발휘하곤 합니다. 

어느 핸가 저는 점심시간에 학교 등나무 아래를 걷고 있었습니다. 제 옆에는 두 아이가 함께 있었다. 두 우주와 함께 걷고 있는 저는 마냥 행복했습니다. 제가 그들의 삶에 작은 영향을 끼칠 수도 있는 교사라는 사실이 새삼 가슴을 뭉클하게 했습니다. 물론 이것을 교육적 상상력의 결과입니다.

초임교사시절, 저는 제게로 온 아이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교사가 되고 싶어 안달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교사가 되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것이 아이들 대한 사랑이 아니라 훌륭한 교사가 되기 위한 나의 욕심이었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6월의 등나무 숲은 거대한 터널이 되어 하늘을 가리고 있었습니다. 그 등나무 터널이 그늘을 만들어준 것은 고마운 일이었으나 아이들과 함께 푸르고 눈부신 하늘을 볼 수 없는 것이 아쉽기도 했습니다. 오랫동안 등나무 터널 안에만 있다 보면 그 위에 푸른 하늘이 있다는 사실조차 까마득히 잊어버릴 것만 같았습니다.

다행히도 등나무 숲에는 작은 틈새들이 있었습니다. 빛의 알갱이들이 쏟아져 내리는 그 틈새들을 들여다보다 말고 저는 황급히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냈습니다.


나는 네게 틈새가 되고 싶다/어릴 적 아버지와 함께 먼 길 가다가/해찰하여 눈 마주친 소년처럼/간이역에 핀 코스모스처럼/틈새에서 피었다 지는 풍경이 되고 싶다//네게 맑은 물 내어주는 틈새가 되고 싶다/그렇지, 맑은 물은 언제나 틈새에서 흘러나오지/깊은 틈새에서 흘러나오지/그 틈새에서 흐르는 맑은 물이 되고 싶다//나는 네게 작은 틈새가 되고 싶다/까맣게 하늘을 가린 여름 등나무 숲/그 너머에 푸른 하늘이 있다고 일러주는/나뭇잎 사이, 작은 틈새가 되고 싶다. -시, <틈새> 모두


요즘 아이들은 왜 교사의 말에 감동하지 않을까요? 지식에서 점수만을 취하고 감동을 지워버린 입시위주 교육이 그 주범일 테지만 이런 현상에 대하여 너무 쉽게, 너무 빨리 지쳐버린 우리 교사들에게도 책임이 있지 않을까요? 교사가 꿈꾸지 않는데 학생들이 어떻게 꿈을 꿀 수 있을까요? 


셋. 천천한 걸음걸이로 

 

“넌 여기 앉고, 넌 저기 앉아.”

말도 없이 학교를 나가버린 두 아이에게 종이 한 장씩을 건네며 던진 말입니다. 텅 빈 열람실에 싸늘하게 울려 퍼진 제 목소리에 놀란 것은 아이들이 아니라 바로 저 자신이었습니다. 평소 제 담임선생을 남자친구 대하듯 하던 녀석들이었으니 갑자기 돌변한 저의 태도가 낯설기도 했겠지만 그렇다고 겁을 먹은 눈치는 아니었습니다.

“내년에 꼭 담임해주세요. 안 그러면 저 학교 자퇴할래요.”

지난해 겨울방학을 며칠 앞두고 그런 말을 내비쳤을 때는 “내가 담임하면 너희들 마음 놓고 말썽 피우려고 그러지?” 하고 농담조로 넘기고 말았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정말 담임을 맡아볼까?’ 하는 생각을 품어보기도 했었습니다.

어떤 동기에서든 나를 선택해준 아이들이 고마웠던 것입니다. 수업시간이면 고개를 푹 숙이고 있거나, 휴대폰을 가지고 놀거나, 줄기차게 잡담을 하기 일쑤인 녀석들이 버겁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말입니다.

담임을 맡고 싶다고 맡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정말 우연히도 단짝이었던 세 아이 모두 우리 반이 되었습니다. 그 중 한 아이는 신바람이 나는지 뜬금없이 반장을 하겠다고 나섰고, 두 아이도 덩달아 학교생활에 열의를 보이면서 삼월 한 달은 순조롭게 지나갔습니다.

사건이 터진 것은 달력이 삼월에서 사월로 넘어가던 바로 그날이었습니다. 자리 배정이 문제의 발단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번호순으로 자리에 앉다가 다음 달부터 제비뽑기로 자리를 정하기로 했는데 막상 자리를 바꿀 날이 다가 오자 뒷자리에 앉은 아이들이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했던 것입니다. 한 아이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습니다.

“저 자리 바꾸면 학교 그만 둘래요.”

“그러든지 말든지. 그만 두면 네 손해지, 내 손해냐?”

겉으로는 그렇게 시큰둥하게 대꾸를 했지만 속으로는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했습니다. 학교에는 논리적으로 따져서 잘못을 인정하게 하고 따끔하게 혼을 내주는 방식으로는 아무런 발전을 기대할 수 없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 대개는 학생을 위해서가 아니라 교사 자신의 화를 풀기에 급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결과는 언제나 비참합니다.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그날 자리배정에 불만을 품고 말도 없이 학교를 나가버린 두 아이에게 저는 까마득한 절망을 느끼면서도, 그럴 아이들이 아닌데…, 하고 한 가닥 믿음을 버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한 달 동안 보여준 변화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면, 결국 그들 안에서 나온 것이 확실하다면, 뭔가 길이 있으리라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다음 날 학교에 온 아이들에게 종이를 내주면서 반성문이나 경위서가 아닌 편지를 써보라고 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습니다.

‘먼저 죄송하다는 말부터 드리고 싶어요. (…) 분명 먼저 제비뽑기로 한 다음 앞자리가 됐든 뒷자리가 됐든 양해를 구하고 바꿔준다는 말로 전 선생님의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이제부터 학교에서 갑자기 나가거나 전화 한 통 없이 결석하는 일은 없도록 노력할게요. 저희 마음은 정말 그게 아니에요. 저희 마음속에 들어와 보지 않는 이상 잘 모르시겠지만, 이번에는 정말 저희가 잘못한 것 잘 알아요. 정말 죄송해요.’

‘아, 그러면 그렇지. 그런 오해가 있었구나!’

자초지종은 이랬습니다. 먼저 제비를 뽑기를 한 다음 눈이 나쁘거나 키가 크거나 해서 자리를 바꿀 필요가 있는 아이들을 위해 다시 자리를 조정하는 시간을 갖게 되는데, 앞자리에 앉게 되거든 그때 아이들에게 양해를 얻고 뒷자리로 바꿔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 말을 오해한 것이 분명하지만, 혹시라도 자리 문제로 그동안 누려온 평화가 깨지지나 않을까 염려하여 내 쪽에서 애매모호하게 말을 했을 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날 저는 그것까지 두 아이에게 사과를 하고 그들과 뜨겁게 화해를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달랐습니다. 저와 철썩 같이 한 약속을 저버리고 말도 없이 학교를 나가버린 것이 벌써 세 번째였고, 게다가 잘못을 뉘우치는 빛이 없어 보이는 것이 더 큰 문제였습니다. 한 순간 머릿속이 캄캄해졌습니다. 이 아이들은 과연 어떤 아이들인가. 누구 말대로 나는 혹시 아이들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진실이 통하지 않는 이 아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저는 아이들에게 솔직하게 써달라는 부탁을 한 뒤에 잠시 밖으로 나왔습니다. 슬프고 답답한 마음에 누군가와 상의해보고 싶기도 했지만 이런 경우 열이면 아홉은 아이들의 진심을 의심하는 쪽으로 얘기가 나올 것이 뻔했습니다. 학교 운동장에는 봄인데도 낙엽이 한 장 뒹굴고 있었습니다. 푸른 낙엽이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줍기 위해 허리를 숙이다가 문득 오래 전에 썼던 시가 한 편 떠올랐습니다.


허리를 숙이고 낙엽을 줍는다

허리를 숙일 때의 천천한 동작을 즐긴다

땅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보는 것도 좋다

작은 것들이 커 보인다

겨울을 나려는 듯, 함께 먼 길을 가는

땅에 사는 작은 생명들

허리를 숙이고 낙엽을 줍다보면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 같다

자연히 낙엽 줍는 손길이 늦어진다

성급히 쓸다보면 쓰레기가 되는 것들이

천천히 줍다보면 낙엽이 된다.


-시, ‘낙엽 줍기’


저는 푸른 낙엽 한 장을 손에 든 채 다시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아이들은 아직도 열심히 무언가를 적고 있었습니다. 무엇을 쓰고 있을까? 그것을 읽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이상하게도 한 가지 분명해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아직 철없는 아이들이지만 거짓말을 하지는 않으리라는 것. 왜냐하면 내가 솔직하게 써달라고 부탁했으니까. 우린 그렇게 서로 약속을 지키며 믿음과 사랑만으로 한 달을 보낸 적이 있으니까. 저는 천천한 걸음걸이로 아이들에게 다가갔습니다. 나의 성급함으로 자칫 푸른 낙엽이 될 뻔한 아이에게.


넷. 조퇴하러 온 아이와의 대화

 

몸이 아프거나 남학생에게는 없는 일을 치르느라 허리가 반쯤 접혀져서 교무실을 찾아오는 아이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꾀병인지 아닌지 옥석을 가려서 조치를 해주면 되지만, 문제는 이런 아이들입니다.

"선생님, 저 조퇴 좀 시켜 주세요."

"왜 어디가 아파?"

"솔직히 말해요?"

"당연하지. 그럼 거짓말하려고 했어?"

"그냥 학교에 있기 싫어요."

이런 경우는 일단 심호흡부터 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고, 버럭 화부터 내버리면 다음부터는 담임에게 솔직한 속내를 털어놓지도 않을뿐더러, 그동안 잘 다져놓은 아이들과의 인간관계가 깨질 염려도 있습니다.

"왜 무슨 일이 있었어?"

"아니요."

"아닌데 왜?"

"그냥 학교에 있기 싫어요."

"왜 싫은데?"

"그냥요."

여기까지는 탐색전입니다. 별로 뜻 없는 말을 던지긴 했지만 그 사이 아이의 표정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한 가지 꼭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조퇴를 청하러 온 아이와 대화를 나누는 것도 엄연한 교육행위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귀찮아하거나 짜증을 내버리면 그만큼 아이에게 다가갈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잃게 되지요.

"선생님, 오늘 딱 하루만 조퇴시켜 주세요."

"그럼 내일부터 잘 하겠다?"

"예. 정말 잘 할 수 있어요."

(고개를 가로 젓는다)

"(간절한 어조로) 선생님, 정말 약속할게요."

"좋아. 대신 5교시까지는 버텨봐."

일단 조퇴를 해준다고 허락을 한 셈이니 지금 당장 해달라고 막무가내로 나오기는 어렵습니다. 결국은 5교시까지 버티는 쪽으로 마음을 돌리기 마련이지요. 이런 경우, 대개는 5교시까지 참았던 것이 억울해서라도 계속 학교에 눌러 있든지, 친구들과 깔깔대며 다니다가 조퇴를 허락받으러 간 사실조차 잊어버리기도 합니다.

말도 안 되는(교사가 봤을 때) 이유로 조퇴를 청하러 온 아이들을 야단을 치거나 일방적으로 설득하여 돌려보내지 않고 이런 조건을 내거는 것은 어떤 경우라도 대화의 창을 열어놓기 위해서입니다. 대화를 통해 아이들의 생각을 키워줄 수 있기에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일들을 대화의 기회로 삼으려는 것이지요.

아이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깜짝 놀랄 만큼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거나, 아예 생각 같은 것을 안 하고 사는 듯한 아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알고 보면 아이들도 자기 나름대로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조퇴를 청하러 왔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간 한 아이와 나눈 대화입니다.

"선생님 근데요,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어요."

"뭔데?"

"제가 조퇴를 해달라고 하면 그냥 해주면 되잖아요."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요, 조퇴해주고 출석부에 조퇴했다고 표시를 하고, 무단 결과를 하면 무단 결과했다고 하면 되잖아요."

"조퇴나 결과에 대한 책임을 네가 지는데 왜 못하게 하느냐 이거냐?"

"제 말이 바로 그 말이라니까요."

아이의 표정을 보니 조퇴를 하고 싶어서 안달하던 조금 전의 모습이 아닙니다. 눈에 호기심이 잔뜩 묻어 있는 것이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가만 생각해보니 그 아이의 말이 전혀 엉뚱하거나 틀린 말도 아닙니다. 이제 곧 발을 들이게 될 대학은 그런 일종의 자율규칙이 적용되는 곳이기도 하니까요.

"그래, 너다운 말이다. 사실은 나도 그러고 싶어. 모든 행동을 자신이 책임지게 하는 거지."

"맞아요. 제 인생 제가 책임지겠다는데 왜 못하게 하느냔 말예요."

"그런데 말이야. 너 학교에 있기 싫을 때마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나갈 수가 있다면 한 달이면 몇 번이나 밖에 나가려고 할까? 열 번, 아니 스무 번, 아마 거의 매일일지도 모르지?"

"솔직히 그럴 것 같아요."

"그럼 공부는 끝난 거네. 그리고 말이야. 만약 선생님 허락도 없이 학교를 나가버렸다고 해봐. 그런데도 다음 날 선생님이 널 보고 아무 말도 않는 거야. 그러면 좀 이상하지 않겠니? 너한테 관심이 없는 담임이 아니라면 말이야. 어때?"

"그래요. 이상할 것 같아요."

"바로 그거야. 너 무슨 잘못을 저지르거나 하면 네 이웃집 아줌마가 너에게 화내던? 아니잖아. 네 엄마가 화를 내시는 거지. 왜 그런다고 생각해?"

"절 사랑하시니까요."

"그래. 나도 널 사랑해. 그래서 네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둘 순 없는 거야. 널 사랑하니까."

"그럼, 선생님 제발 저를 사랑하지 말아 주세요."

"뭐? 너 정말이지?"

"대신, 저 조퇴해달라고 할 때만요."

"이런 똥강아지!"

‘똥강아지’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풀면 곤란합니다. 물론 아이들은 그것이 제가 사용하는 최대의 애칭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문제가 없지만 말입니다. 저는 그날 대화를 이렇게 마무리했습니다.

"오늘 네가 했던 말 선생님은 좋게 생각했어. 그만큼 네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겠다는 말이니까. 어쩌면 넌 대학생 수준의 사고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조금은 일러. 그래서 위험하기도 하고. 그것은 누구보다도 네 자신이 더 잘 알거야. 이제 아무 생각 말고 중간고사 준비나 해. 학생이 공부에 관심을 잃게 되면 불행할 수밖에 없는 거야. 밖에서 아무리 재미있는 일이 있어도 하루 7시간은 학교에 있어야 하잖아."

그 말을 듣는 아이의 표정은 진지함 반, 설득을 당해서 다시는 조퇴를 할 수 없게 된 절망감(?) 반이었습니다. 문득 그런 반반씩 섞인 미완성 상태가 아이들의 참 모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완전한 자유를 줄 수는 없지만 대화의 창마저 닫아버린다면 얼마나 답답해할까 하는 생각도 해보면서 말입니다.

생일을 맞은 아이들에게 전해주는 축하시도 하나의 대화인 셈입니다. 지난 금요일에 생일을 맞이한 OO도 2학년으로 진급하면서 친한 친구와 반이 갈리자 잠깐 학교생활에 취미를 잃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출석을 부를 때마다 예쁜 웃음을 방긋 지어줄 만큼 밝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OO에게 준 생일시입니다.


  너를 위한 작은 징검다리가 되었으면


지금은 새벽 4시,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너에게 편지가 왔을까 궁금했는데

'사랑하는 선생님께…'라는

반가운 글씨가 눈을 즐겁게 하는구나.


대학에도 가고 싶고, 취업도 하고 싶고

돈도 디따 많이 벌고 싶고

미용도 배우고 싶고, 춤도 배우고 싶고

그러나 아직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고…


이것이 우리 OO의 현주소구나.

그런데 넌 알고 있을까?


대학에 가든, 돈을 디따 많이 벌든

무엇이든 한 순간에 이룰 수는 없다는 거

무엇이든 아픔과 고통이 뒤따른다는 거

그것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는 거


OO야,

너의 열일곱과 열여덟의 사이가

깊고 푸른 강 하나를 건너듯

그렇게 큰 걸음이었으면 좋겠다.


강을 건너와서는

후회 없이 살아온 지난 시간들을

너의 그 환한 미소로

예쁘게 환송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 그때 나는 네가 발 딛고 건너는

작은 징검다리였으면 좋겠다.


2005년 4월 29일

사랑하는 OO의 생일을 축하하며, 담임선생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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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7.8 (금) 20:40   도깨비뉴스   도깨비뉴스 기사보기
"커닝, 교장도 한다 우리도 하자"
[도깨비 뉴스]

인터넷에 특정주제의 글이 많이 돌아 다닌다는 것은 그 주제에 대해 그만큼 네티즌들이 재미 있어한다, 또 그 주제와 관련한 행위를 하는 네티즌이 많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인터넷에 커닝과 관련한 게시물이 넘치고 있습니다.
물론 PC 통신 시절부터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지만 대학생들의 기말시험이 끝나고 중고생들의 기말시험이 다가오고 있는 시점이기 때문이라 그런지 최근 들어 휠씬 더 많아지고 내용도 기상천외한 것이 많습니다. 우리 학생들 사이에 커닝이 일상화 된 것일까요?

곁눈질로 살짝, 몸을 툭툭 치거나 책상을 두드려 답을 전달하는 등의 커닝은 이제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이제 커닝에 있어서도 개인의 철저한 준비성과 대담한 능력이 요구된다고나 할까요?
시험 예상 문제를 찍어내는 탁월한 안목, 핵심만 요약하는 능력, 걸리지 않게 보는 기발한 아이디어, 그리고 태연하게 커닝하는 대범함. 요즘 학생들은 자신만의 노하우를 가지고 시험 전에 철저하게 커닝 준비를 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점점 더 치밀해져가는 커닝 기법들 때문에 커닝하는 학생들을 잡아내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손바닥에 가득 커닝 내용을 써놓은 모습


▲손가락 사이사이에 안 보이도록 커닝 내용을 써놓은 소심형




▲책상과 벽면 가득히 커닝 내용을 써놓은 모습

손바닥과 책상, 벽은 기본이라고 하는데요, "어느 대학교의 한 전공시험 시간에는 한 시간 전에 가도 자리가 없다. 다들 일찍 와서 명당을 잡아 책상에 빼곡하게 도배를 하기 위해서"라는 내용의 글도 있네요.
커닝을 하는 학생들을 소심형과 대담형으로 나누기도 합니다. 소심형은 손가락 사이사이, 그리고 책상과 벽 한 구석에 작게 써 놓고 겨우겨우 보는 반면, 대담형은 손바닥 가득, 책상과 벽 전체에 커닝 내용을 써 놓고 마음 편하게 커닝을 한다고 합니다.



▲허벅지에 커닝 내용을 써놓은 모습


▲발 안쪽에 커닝 내용을 써놓은 모습

그뿐만이 아니라 허벅지, 발 안쪽 등 모든 신체부위를 이용하여 커닝을 합니다. 반바지나 치마를 입고 허벅지에 커닝 내용을 쓴 뒤 살짝 살짝 올려가면서 보는 이 방법은 주로 여자들이 많이 사용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발 안쪽에 직접 쓴다거나, 운동화 안쪽에 포스트잇을  붙여 다리를 한 쪽 무릎 위로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커닝을 합니다.

또한 투명한 볼펜 속에 커닝 페이퍼를 끼워 넣고 볼펜을 돌려가며 커닝하는 방법, 책상 서랍, OHP 필름을 이용하는 방법, 휴대폰으로 커닝 내용을 찍거나 직접 휴대폰으로 답을 주고받는 것 또한 자주 쓰이는 커닝 기법이라고 합니다.




이 외에도 온라인상에 가지각색의 커닝 기법들이 떠돌고 있으며, 커닝에 관한 게시물이 하나의 유머로 자리 잡고 있는데요. 요즘은 ‘컨닝부대’ 라고 하는 패러디물이 인기입니다.



이 패러디는 2003년 디시인사이드 밀갤에 처음 올라온 솔로부대 포스터를 이용한 것입니다. 도깨비 뉴스에서도 몇차례 소개된 솔로부대 포스터는 이후 투표부대 칼퇴부대 등의 포스터로 이용되기도 했습니다.

커닝하는 학생들은 커닝을 안 하고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을 보고 이렇게 까지도 말을 한다고 합니다.

▶왜 그렇게 힘들여서 공부를 하는 거야? 그냥 커닝하면 되잖아!
▶열심히 공부해서 A⁺ 받는 것보다 그냥 커닝하고 A 받는 게 훨씬 낫지!
▶책을 씹어 먹었냐? 무식하기는...
때문에 열심히 공부해서 능력껏 시험을 보는 학생들이 억울해하고 오히려 자신이 손해 본다는 생각을 한다고 합니다.

지난 5월 25일 ‘전국대학생커닝추방운동 출범 기자회견 및 캠페인’이 열릴 정도이니 커닝 관련 게시물이 결코 네티즌들의 놀이이기만 한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전국대학생커닝추방운동 관련기사 보러가기
http://www.chtoday.co.kr/template/news_view.htm?code=cam&id=3608

한편 매체에서 7일 서울 동부지검이 중간고사 시험문제지와 답안지를 미리 빼돌려 학부모에게 건넨 혐의(업무방해)로 서울 강동구 소재 D고 전 교장 김모(60)씨를 구속기소했다는 기사가 올라오자 네티즌들은 교장이 제자들에게 돈받고 커닝을 시켜 주는 마당에 교사들이 커닝학생 더러 뭐라할 수 있을까 라는 등의 자조섞인 댓글이 올라 오기도 하고 있습니다.


컨닝부대 출처
: http://board.pullbbang.com/nboard/view.pull?tb=fun&b_num=64795


도깨비 뉴스 인턴 리포터 = 김시은 5nly4u@hanmail.net
                                    최정아 cja091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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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우주 2005-07-09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커닝에 대해서는 정말 화가 나서 말하고 싶지가 않아요. 이럴 때 참 암담한 마음이 된답니다. 무엇을 위한 공부인지. 참 암담해요.
 
 전출처 : 글샘 > 가장 감명 깊은 주례사

그래도 남는 것은 오직 사랑뿐, 이아무개

웃음으로 넘기지 말고 대답해 주시게. 내가 그냥 한번 물오보느라고 묻는 게 아닐세. 정말로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고 있는가?
고맙네. 신랑도 신부도 여기 식장에 가득 찬 증인들 앞에서 각각 "그렇다" "사랑한다"고 대답해 주었네. 역시 기대했던 대답을 해주는군. 아무렴.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오늘 이 자리에 이런 모습으로 나란히 서 있을 까닭이 없겠지. 그러면 내가 쓸데없이 공연한 질문을 한 것일까? 아닐세. 나도 그냥 한번 물어보는 게 아니라고 하지 않았나.
자, 두 사람이 서로 사랑을 한다니 이제 내가 달리 묻겠네. 대답해 주시게.

두 사람은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서로 사랑한다고 했는데 과연 시방 사랑이 어떤 건지 알고서 하는 건가?
대답을 망설이는군. 그럼 그럴테지. 내 보기에 자네들은 아직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네. 그걸 알 턱이 없지. 大學이라는 책을 보면, 처녀가 아이를 낳아 기르는 법을 터득한 뒤에 시집가는 법이 없다는 말씀이 있네. 자네 두 사람은 지금 서로 사랑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그게 아닐세. 두 삶은 이제 겨우 사랑이 무엇인지 그것을 배우기 위한 첫걸음을 내딛고 있는 것이라네.
가정(家庭)이란, 남녀가 만나 짝을 짓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그러다가 이런 일 저런 일 겪으면서 세월과 함께 적당히 늙어가는 그런 게 아닐세. 가정이 그런 것이라면 세상에 누가 이른바 '성공적인 가정'을 이루지 못하겠는가? 신체 건강한 남녀라면 크게 애쓸 것도 없이 그쯤이야 얼마든지 만들 수 있지 않겠나?

아닐세. 가정이란 그렇게 통속적이고 만만한 물건이 아니야.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절대 가치로 보자는 것도 아닐세. 우리에게 서로 만나 결혼할 권리와 자유가 있다면 경우에 따라 헤어질 권리와 자유도 있다고 나는 생각하네. 흔히 말하는 대로 '가정을 지키기 위해' 남편이든 아내든 그 인생이 파멸된다면 그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닐세. 나는 그런 논리에, 그런 억지 주장에 찬성할 수가 없네. 오늘같이 좋은 날, 헤어진다는 말을 입에 올려서 미안하네만, 내 생각을 사실대로 말한 것뿐일세. 자네 두 사람 살다가 문제가 생기거든 망설일 것 없이 갈라서라는 이야기가 아닌 줄은 알고 있겠지? 다만 가정은 인간이 기필코 지켜야 하는 절대 가치가 아니라는 얘길세.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얼마든지 뜻 깊고 고상한 삶을 창조하지 않는가.

나는 이렇게 생각하네. 가정이란 사랑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참된 사랑인지를 배우는 학교라고. 물론 사랑을 학습할 만한 곳이 어찌 가정 한 군데 뿐이겠는가만, 운명처럼 만난 남녀가 한 지붕 아래 살을 섞으며 살아야 하는 가정이야말로 과연 인간이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배울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장소 아니겠는가? 가정이야말로 "사랑 있으면 천국, 사랑 없으면 지옥"이라는 말의 의미를 온몸으로 실감할 수 있는 곳일세.
그런데 천국이 어떤 곳인지를 제대로 알려면 천국에서만 살아서는 안 되겠지? 지옥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천국에 살면서도 천국이 어떤 덴지 모르는 법이니까. 그것은 빛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이 어둠을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일세. 어찌 생각하는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눈먼 상태로 태어난 사람이 과연 어둠이 어떤 것인지를 알까? 밤이 얼마나 어두운지를 그에게 가르쳐줄 수 있을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겠지. 번뇌가 없으면 열반도 없다네. 그래서 번뇌 곧 열반이라고 하지 않는가.

사랑 있는 천국을 알고자 한다면 사랑 없는 지옥을 겪어 보아야 하네. 부부간의 갈등과 다툼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 있다네. 그것 자체가 소중하다기 보다 그것을 통해 화해와 일치의 진가를 알게 되니까 그래서 소중하다는 얘기지.
부디 진지하시게. 헤르만 헤세가 말하기를, 신은 인간의 모든 것을 용납할 수 있지만 진지하지 않는 자에게만은 등을 돌린다고 했네. 두 사람이 사랑을 배우고 익히는 학교에 입학한 것을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축하하네. 물론, 그대 둘이  왜 서로 사랑한다고 고백했는데 그것도 사랑은 사랑이겠지. 아무렴! 왜 아니겠나.

그러나 아직은 아닐세. 아직 두 사람은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해야 정직한 고백이 될 걸세. 그래야 이제부터 전개될 두 사람의 결혼 생활에 희망과 기대를 걸어볼 수 있지 않겠는가? 이미 종점에 도달한 사람에게는 희망도 기대도 있을 수 없다네.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 정말로 깨달은 사람이라면(자신이 '사랑' 그 자체인 사람이라면) "시집가는 일도 장가가는 일도 없는 나라"(예수가 말한 천국)에서 살고 있을 터인즉 그런 사람에게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 배워보겠다는 희망 따위가 있을 리 없잖겠나?

지금 자네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져 있는 것일는지 모르겠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축하받을 일이지만, 거듭 말하거니와 이제 시작일세. 거기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네. 두 사람은 우선 '빠져 있는 사랑'에서 나와 '존재하는 사랑'으로 들어가야 하네. 여기, 완전한 사랑으로 가는 오솔길에 대하여 대팩 초프라(Deepak Chopra)가 쓴 글(The Path to Love)에서 한 구절 읽어보기로 하세.

다음 단계는 로맨스(연애)는 흔히 결혼이라는 이름의 위탁된 관계로 들어간다. 여기서 오솔길이 바뀐다. 사랑에 빠져 있음(falling in love)은 끝나고 사랑에 존재함(being in love)이 시작된다. 이 단계에서 부부는 자기를 내어줌으로써 자기를 양육하는 법을 배운다. '자기를 내어줌'(surrender)은 모든 영적 관계의 열쇠가 되는 말이다. 자기를 내어줌으로써, 이기적이고 남을 사랑할 줄 모르는 에고(ego)의 욕구들이 영(靈)의 욕구로, 성숙하려는 욕구로 바뀐다. 당신이 성숙한 그만큼 얕고 거짓된 (사랑의) 감정(feeling)이 깊고 참된 (사랑의) 정서(emotion)로 바뀐다. 그리하여 자비, 신뢰, 헌신, 섬김이 현실로 이루어진다. 그렇게 될 때 결혼은 신성하다. 그와 같은 결혼 생활은 거룩한 바탕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결코 비틀거리거나 넘어지지 않는다. 그 결혼은 또한 순진무구하여 흠이 없다. 결혼 생활을 하는 유일한 동기가 사랑하는 것이요, 남을 섬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우습지도 않은 이야기를 들었네. 그날의 화제가 부부 사이에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어떻게 '틀어잡고 사는가'였는데, 한 신부가 첫날밤 자기 신랑 틀어잡은 사연을 자랑인 양 털어놓더군. 그 내용을 재구성하면 대충 이와 같았지.
첫날 밤 제주도 한 호텔에 들었는데 신랑이 침대 위로 올라가더니 신부에게 자기 양말을 벗기라고 한다.
"양말 좀 벗겨줘."
신부가 입술을 걀쭉하게 실그러뜨리며 내려다본다.
"양말 좀 벗기라니까!"
이윽고 신부의 앙칼진 목소리.
"자기는 손 없나?"
여기서 물러나면 안 된다고 신랑은 신랑대로 신부는 신부대로 새삼 전의를 돋운다.
"정말 못 벗기겠어?"
"못 벗겨."
두 사람은 각자, 첫날밤 기선을 제압하지 못하면 평생 고달프니까 절대 밀려서는 안 된다는, 선배 고참들의 충고를 되새긴다.
"안 벗기면 나 이대로 가버린다."
"맘대로!"
이윽고 성난 신랑, 문을 박차고 뛰쳐나가는데 신부는 오히려 딸깍 소리도 요란하게 문을 잠근다. 공방전은 자정 넘어 백기를 들고 돌아온 신랑이 호텔 방문을 두드리는 것으로 일단락되고, 그 뒤로 "아직까지는 남편을 확 틀어잡고 산다"는 이야기.

어떤가? 하기는 그렇게 살면서도 나름대로 인생의 '재미'를 느낀다면 뭐라고 시비를 걸 것까지야 없겠지. 그러나 결혼 생활의 맛을 어찌 상대방을 틀어잡고 사는 데서 찾으려 한단 말인가?
다시 한 번 두 사람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하네. 부디 오늘 입학한 사랑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여 우등생들이 되기 바라네. 그리하여 다른 것에는 몰라도 '사랑'에 관해서만큼은 깊고 진실한 일가견을 이루시고, 그렇게 배운 사랑의 기술로 아무쪼록 기울어진 세상 바로 세우고 병든 사회 건강하게 만드는 일에 한몫 거드는 내외가 되시기를 바라네.

앞으로 두 사람이 무슨 일을 하게 되더라도 그 일을 통하여 사랑을 배우고 익히는 것에 목표를 세운다면, 그렇게만 한다면 자네들 하는 일마다 옳고 바르고 아름답고 유익하고 기특하고 장하지 않겠는가? 부디, 주례자의 상투적인 잔소리라 여기지 말고 명심해 두시게. 사랑이 모든 것의 모든 것이요, 사랑이 없으면 인생사 제아무리 시끄럽고 거창해 보여도 한낱 물거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끝으로, 두 사람의 앞날이 오직 사랑으로 시작하여 사랑으로 귀결되기를 바라며 <베다 Veda>의 한 구절을 함께 읽어 보겠네.

생명 곧 사랑이요, 사랑 곧 생명이다. 사랑 아니면 무엇이 사람 몸을 하나로 통일·유지시키는가? 인간의 욕망이란, 자기 사랑 아니고 무엇인가? 인간의 지식이란, 진리 사랑이 아니고 무엇인가? 방법과 모양은 잘못될 수 있겠지만 그것들 뒤에 숨은 동기는 언제나 사랑, 나와 나의 것에 대한 사랑이다. 나와 나의 것은 작을 수도 있지만, 혹은 우주를 깨뜨리고 껴안을 만큼 클 수도 있지마, 그래도 남는 것은 오직 사랑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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