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벤트형 담임이 되지말자' 결심했는데 으~

10일 금요일, 수업이 두 시간 밖에 없기에 이런 저런 일을 하다가 아이들 명렬을 예쁜 종이에 인쇄하고 코팅했다. 도우미에게 자르도록 부탁해두었는데 옆자리 샘이 수업시간에 그걸 자르고 있기에 '압수'해 왔다면서 단정하게 잘라진 명렬 42장을 내게 건네주었다. 별로 아이들을 야단칠 생각은 들지않고 '아, 다 됐네. 이쁜 눔들 ^^' 이런 생각만 났다. ㅋ~~

종례시간, 토요휴무제 안내 및 자기주도용 학습지를 나눠준 뒤, 칠판에 '이벤트 2 - 반 친구들 얼굴, 이름 외우기'라고 썼다. 준비한 '쌈박한' 명렬표를 나눠주며 월요일까지 외워오라고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저절로 다 알아가겠지만 간혹 1년이 다 가도록 서로 이름 한 번 안 불러보고 지나치는 아이들이 있음을 알기에, 그리고 담임이라는 이유로 나만 열심히 아이들 얼굴, 이름을 외우는 것이 조금은 '억울' 해서 몇 해전부터 써먹는 수법이다. 이전에는 "반 친구들 이름 외우기 시험본다. 100점 받으면 상품있지" 이렇게 운을 떼었는데 이것마저 '시험'이라는 굴레를 씌우기가 아이들에게 미안해서 엊그제 이어 내친김에 '이벤트'라는 이름을 또 써먹는다.

"이벤트? 이번에는 뭐 주는데요?", "나는 벌써 다 외우는데..", "샘~ 저는 노랑색 주세요.", "저는 분홍색이요~" 명렬표를 나눠줄 때 아이들이 내게 던진 말이다. ㅋㅋ 첫번째 이벤트의 상품-뻥튀기의 여파가 아직 사라지기 전인지 아이들의 관심을 끄는 데는 일단 성공한 것 같다.

그나저나... 이름을 외웠다는 걸 어떻게 증명하지? 명렬에 빈칸 채우기? 이렇게 시험형식으로 보는 건 싫은데... 매번 먹는 것을 상으로 주는 것도 좀 그렇고.. 담임이 늘 뭔가 물질적인 보상을 해주는 것도 그리 교육적인 것 같지는 않고.... 뭐 좋은 방법 없을까? 고민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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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6-03-11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품 1. 김춘수 '꽃'을 예쁜 종이에 코팅해서 준다.
 

공부를 어떻게 사랑하지?
어른들의 생각이 달라지면 아이들도 달라집니다
  안준철(jjbird7) 기자   
오래 전에 담임을 맡았던 한 제자에게서 편지가 왔습니다. 그는 지난 1월에 군복무를 마치고 경찰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서울 노량진 고시학원에 다니고 있다고 했습니다. 편지 내용을 보니 아마도 오랜만에 영어 공부를 하다가 제 생각이 났던 모양입니다.

'예전에 수업시간에 1형식 2형식 설명하실 때 제대로 한번 들어서 공부 좀 해둘 껄 이런 후회가 좀 들었습니다. 평소 공부에 취미도 없던 제가 남들처럼 5시간 자면서 나머지 시간 공부에 매진한다는 게 쉽지도 않고 내가 할 수 있을까, 어떻게 공부해야하지 그런 공부요령 등 또한 2년 정도 해서 안 되면 어쩌나 그런 생각들로 처음부터 마구 흔들리고 있습니다. 다시 고등학교 생활로 돌아갈 수 있다면 공부 열심히 할 것 같습니다.'

편지를 다 읽고나자 빙그레 웃음이 지어지면서도 마음 한 편에서는 사회에 첫발을 내딛기 위해 애쓰고 있는 제자가 안쓰러워 보이기도 했습니다. 가까운 곳에 살면 시간을 내어 영어 기초라도 다시 잡아주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한번 제자는 영원한 제자인 모양이지요. 어쨌든 저는 편지를 보내온 제자에게 뭔가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에 서둘러 답장을 썼습니다. 그중에는 이런 내용도 있었습니다.

'공부에는 왕도가 없단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공부 자체를 사랑하는 일이지. 모든 일이 그렇잖아. 좋아하고 즐기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실력이 늘게 되어 있지.'

이 편지를 받은 제자는 공부를 사랑하라는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거나 조금은 이상하게 들렸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공부에 취미가 없고 아직은 세상 물정을 몰라 공부를 게을리 했던 과거 학창시절과는 달리 이제는 적자생존의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기 싫은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하는 처지에 공부를 사랑하라는 말이 조금은 낯설고 한가하게 들렸을 수도 있겠지요.

저는 학창시절에 공부를 썩 잘하는 학생은 아니었습니다. 공부하는 재미에 흠뻑 빠지기 시작한 것은 편지를 보내온 제자처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참이 지나서였습니다. 뒤늦게 속을 차리고 대학에 가기 위해 도서관에 박혀 공부를 하는데 처음에는 하기 싫은 공부를 억지로 하느라 이를 악물고 버티다가 어느 날인가 영어문장을 해석하던 중에 갑자기 몸과 마음이 아주 편안해진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가 흥미를 느낀 것은 영어 자체라기보다는 해석된 문장의 내용이었습니다. 영어독해 예문은 대체로 저명한 작가의 책이나 논문에 실린 명문장이었기에 사전과 씨름하며 어렵사리 문장을 해석하다보면 마치 흙 속에서 보석이라도 캐낸 듯한 그런 기분이 들곤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루 서너 시간 수면을 취하고 온종일 공부를 해도 피로한 줄을 몰랐던 것이지요. 그 후로는 차츰 다른 과목들도 시험을 치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지식을 접하는 흥분과 희열 속에서 날밤을 세우곤 했습니다.

저는 명절 때 어린 조카들을 만나면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말을 잘 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공부를 사랑해보라고 넌지시 말을 건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말은 너무 당연하고 너무 익숙하다보니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새고 맙니다. 그러니 하나마나한 말이 되고 말지요. 하지만 공부를 사랑하라는 말은 어딘지 이상하고 낯선 표현이기에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효과가 있습니다. 공부를 사랑하라고? 공부를 어떻게 사랑하지? 이렇게 말이지요.

이런 심리적인 효과도 노릴 수 있지만, 지식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공부를 오래 지속하기 힘든 것도 사실입니다. 그것은 마치 마라톤 그 자체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마라톤 선수로 성공하기 어려운 것과도 같은 이치이지요. 실제로 중학교, 혹은 고등학교 1, 2학년 때까지는 상위권을 유지해오던 학생들이 고3이 되면서 갑자기 성적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십중팔구는 공부 그 자체에 대한 매력을 느끼지 못한 학생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지요.

짧은 기간에 이룰 수 있는 것은 그 자체를 사랑하지 않아도 어떤 목표점에 도달하기 위한 성실한 노력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가령, 운전면허증을 딴다든지 타이핑 속도를 늘린다든지 하는 것 말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십 년 이상 공을 들여야 하는 학교 공부는 일류 대학입학이라는 한 가지 목표의식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일이 년도 아니고 십 년 이상을 공부에 몰두해야 하면서도 공부를 사랑할 수 없다면 그보다 불행한 일도 없을 것입니다. 또한, 같은 노력을 기울인다고 가정했을 때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과의 결과는 큰 차이가 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요즘 대안학교에 대한 말이 무성한데 대안학교와 일반학교와의 차이점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학생들로 하여금 공부를 사랑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주는 것이 대안학교의 최대 관심사라면 일반학교에서는 그런 배려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공부 그 자체보다는 시험 점수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 제도권 학교의 현실이지요. 그런 환경 속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도 행복한 삶을 누리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너무 오랜 기간 학교에 갇혀 행복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 왔으니까요.

가정에서나 학교에서나 아이들로 하여금 공부를 사랑하게 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부모나 교사의 생각이 달라지면 아이들도 달라집니다. 얼마 전에 저는 올해 대학졸업반이 되는 아들과 잠깐 짬을 내어 산을 찾았습니다. 산을 내려오면서 아내의 부탁도 있고 해서 임용고사를 눈앞에 둔 아들에게 최선을 다해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말을 할 뻔하다가 다행히도 이렇게 말을 고쳐서 했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공부를 열심히, 아니 공부를 사랑해라. 너무 임용고사만 생각하지 말고 그 후에 네가 학교에서 만날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공부해라. 네가 배우는 지식이 결국은 아이들을 사랑하는데 필요한 지식이니까.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네 스스로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행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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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펌 (2005-03-17 19:47:38, Hit : 641, Vote : 3
제목  ‘불안’이 지배하는 사회 / 홍세화


‘민주화된 시대’라고 하지만, 이 사회를 배회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불안’이라는 이름의 유령이다. 연일 신문지상을 장식하는 각종 경제지표와 달리,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불안은 사회 구성원들의 내면 깊은 곳에 자리잡아 존재에 대한 성찰적 질문을 애당초 불가능하게 만든다. 한국사회가 자랑하는 역동성도 사회 구성원들이 품은 열망과 꿈의 반영이라기보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이 추동하는 것이다.
대학에 갓 입학한 젊은이들이 취업 준비에 마음을 써야 할 만큼 실업에 대한 불안을 겪어야 하고, 정규직 노동자들은 비정규직으로, 근로 빈곤층으로 내몰리는 불안을 살아야 하는 게 이땅의 구체적 현실이다. 그것은 교육·의료·주택·노후 등 공공성이 실종되고 모두 개인이 해결해야 하는 사회의 반영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고령화 사회가 제기되면서 이 불안을 더욱 가중시키고 있다. 사회 구성원들은 한 번 실업의 구렁텅이에 빠지면 헤어나기 어렵고, 비정규직이 되면 정규직으로 되돌아올 수 없으며, 근로 빈곤층으로 내몰리면 근로와 빈곤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는 60% 가량이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규정했는데, 오늘날 그 비율은 25%에 지나지 않고 70% 이상이 미래를 어둡게 내다보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사회 구성원 사이의 연대의식을 기대할 수 없다. 참여정부가 미국에 대한 불안 때문에 야만적인 이라크 침략전쟁에 동참했다면, 불안에 내몰린 사람들은 인간의 길에 대해 성찰하고 모색할 처지에 놓이지 못한 것이다.

실제로, 오늘 이 사회의 젊은이들은 인간에 대한 물음을 던지지 않으며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이나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들의 탈정치화 성향이 기존 정치를 온존시키는 정치의 또다른 모습이라는 점을 인식하기엔 그들의 의식을 지배하는 것은 오직 ‘소유’에 대한 관심과 모색뿐이다. 그와 같은 의식에 대한 반성적 성찰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탓만으로 돌리기엔 이 사회를 지배하는 불안은 젊은 구성원들에게 자기 소외의 길을 강요한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은 안보 이데올로기로 사회 구성원들을 통제했다. 국가주의 교육과 도구화된 언론을 통하여 구성원들에게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을 갖도록 꾀했지만, 다른 한편, 물리력에 의한 억압적 상황에서 적잖은 사람들은 실존적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졌고, 정의와 평등, 연대의식을 모색했다. 지배세력의 안보 이데올로기가 아무리 강력하고 집요해도 성찰적 존재에 관심을 가진 사회 구성원들의 내면까지 지배한 것은 아니었다.

오늘날 안보와 반공 대신 들어선 것이 자본과 시장이다. 그리고 자본과 시장의 논리에 갇혀 공공성과 사회적 권리를 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민주화된 시대는 권위주의 정권 시대와 큰 차이가 없다. 가장 심각하고 중대한 문제는 신자유주의가 성찰하는 존재들을 ‘비효율’이라는 이름으로 퇴출시키는 데 성공함으로써 신자유주의에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존재 자체를 무너뜨리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시장경쟁을 합리화한 구호였던 ‘균등한 기회’조차 이미 자본과 시장이 허락하지 않는데, 이를 변화시키기 위한 비판적 의식과 저항은 사라지고 없다. 이런 신자유주의의 자기 완결성이 아예 서민들에겐 그저 로또복권의 허망한 꿈속을 헤매거나 불안 속에서 허우적댈 자유만 남았을 뿐이다.

생산적 복지든 참여 복지든 말은 그럴듯하지만 이 사회를 지배하는 불안이라는 질병을 치유할 수 없다. 사회 안전망 확충에 대한 확고한 의지와 함께,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나아갈 수 있고 근로 빈곤층에서 헤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줄 수 없다면 불안이 신자유주의의 강력한 무기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무현 정권은 비정규직 양산 법을 관철하려고 하면서 그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

홍세화 기획위원 hong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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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06-03-14 1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죄의식이 천오백년동안 사람을 움직였다면,  '불안'은 또 다른 천년을 꿈꾸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혼'마저 빼내기위해 혈안된 자본은 끊임없는 '불안'의 그늘로 스스로 성장시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기위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발버둥은 끊임없이 자신의 쳇바퀴에 자신을 학대시키는 것인지 모르도록 집요한 것 같습니다. 

정규직은 정규직대로, 비정규직은 비정규직대로, 중소기업 임원과 사장은 사장대로, 불안 속에 자신의 영혼을 팔아먹으며, 제 속도를 부지런히 높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그때 자신의 이익이 중요할 뿐이지, 어떻게 남생각할 여유가 있겠는지요? 비정규직은 정규직이 되면 그 동안 자신이 몸담던 그늘은 다 남일이 되고, 정규직은 임원이 되면 다 남일이 되고... ...

자본의 시대는 어느 덧, 예측이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잘 나가는 일터라도, 그 나락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자본에게 안락한 고용과 평화로움을 요구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되는 이야깁니다. 나락으로 추락하기 않게 하기위해 스스로 몸에 채찍질을 가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듭니다. 기껏해야  마조히즘의 쾌락밖에 남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마음이나 정신이 쉴 곳 마저 없는 현실은 점점 더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 싶습니다. 하지만 시작할 곳도 거기서부터 일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요? 채찍과 당근에 익숙해진 우리의 지친 몸과 영혼에겐 떨어진 바닥에서도 새싹이 돋고 피고,  남생각하는 공간에서, 함께 해보는 일들에서, 취미삼아 해보는 자발적 가난에서 애초 기초없이 시작한 자본의 바벨탑은 무너지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공적인 영역은 시선을 돌리는데에서 시작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요? 마음의 시선. 일주일에 한 시간이라도 지역과 사회, 남 생각해보는데서... ... 취미삼아 남 일 해보는데서...... 말로 하지 말고.. 공동의 노동자의식과 공적인 시민의식의 샘물마저 말라버린 척박한 현실에서 그래도 해 봐야 할 것 들은 아닐까요?

 


이름
  한겨레펌 (2005-05-12 13:03:05, Hit : 736, Vote : 8
제목  사람 되세요! / 홍세화


오랜 외국생활 뒤 귀국하자마자 ‘부자 되세요!’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그 속에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물신주의를 힐난하는 반어법의 어조가 담긴 것으로 이해했다. 그것이 나의 순전한 오해였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줍니다”라는 광고 문구를 들을 때였다. 실제로 나는 그 말을 듣고 속이 뒤집어질 듯한 충격을 받았다. 아무리 천박한 사회라 할지라도 ‘배부른 돼지’를 지향하는 사회가 아니라면 넘어선 안 되는 선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이미 그 선을 넘어 ‘소유’(당신이 사는 곳)가 ‘존재’(당신이 누구인지)를 규정하는 것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사회가 되어 있었다.
이런 사회에서 진정한 ‘사회개혁’은 무엇보다 새로운 가치관 형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따라서 개혁세력이 진정한 개혁세력이기 위해서는 이 사회를 지배하는 물신주의와 긴장하면서 공공성과 연대의식에 기초한 새로운 가치관이 사회에 뿌리내리도록 모색하고 제도화해야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당신의 능력을 보여 주세요!”에서 말하는 능력이, 기존 사회귀족의 그것과 개혁세력의 그것은 질적으로 다른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른바 실용주의 노선은 효율과 경쟁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 아래 사회 구성원들에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유재산 축적 노력에 공공성조차 개입하지 않게 하면서 기존 사회귀족의 물신주의 헤게모니에 더욱 귀의하도록 작용하고 있다.

고유 업무와 무관하므로 불법·탈법의 땅투기도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한다. 청와대에서 나온 발언이다. 이것은 한 인사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개혁’ 세력의 가치관에서 사회귀족의 가치관에 대한 긴장이 사라지고 없다는 점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들에게서 새로운 가치관과 문화적 감수성이 사라졌을 때, 개혁의 건강한 긴장은 유지될 수 없다. 가령 국가보안법 폐지에는 국민 과반수가 반대한다는 이유라도 있다면, 국민의 80% 이상이 찬성하는 사립학교법 개정이 계속 표류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학재단의 집요한 로비활동과 물량공세 가능성에 저항할 만한 개혁 담지자로서의 가치관이 없는 탓 아닌가?

지금까지 ‘해먹던 놈이 또 해먹는’ 역사의 반복에 그래도 좌절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아직은 역부족’이라는 현실 이해 때문이었다. 그러나 개혁을 표방한 세력이 사회 상층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오늘 새로운 가치관 형성에 실패하고 실용주의를 내걸 때, ‘그놈이 그놈’인 현실은 그대로인 채, 4·30 재보선 결과가 보여주듯이 독재자의 현판은 물신주의와 함께 다시 제자리를 찾을 것이다.

출발이 남과 달라서 수백억원대의 재산가인 홍석현씨가 탈세 전력에도 불구하고 ‘개혁’ 세력에게서 능력을 인정받고, 삼성의 ‘무노조’ 신화와 그 관철을 위한 각종 노동 탄압이 ‘개혁’세력에게 아무런 윤리적 부담도 주지 않는 현실이다. 그런 삼성 회장에게 명예 철학박사 학위를 주는 행위의 부당함을 지적한 학생들에게 ‘젊은이들의 열정’을 말할 수 있는 여유는, 인문정신을 파는 행위까지 마다지 않은 대학 당국의 비굴함에 대한 반응으로만 이해해선 안 된다. ‘개혁’ 세력이 사회귀족의 가치관, 그리고 골프, 원정출산, 조기유학, 고액과외, 부동산, 주식투자를 통한 재산 증식의 문화와 다른 새로운 가치관과 문화를 보여주기는커녕 스스로 물신주의 가치관에 포섭되고 있기 때문이다.

‘개혁’ 세력에게서 ‘민중’이 사라졌을 때, 새로운 가치관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그들보다 인문학을 돈 주고 판 대학 당국에 항의한 고대생들에게서 희망의 싹을 본다. 대신 대학당국의 인사들과 오히려 학생들을 꾸짖는 ‘점잖은’ 인사들에게 던져주고 싶은 말이 있다. 부자 되기 전에 “사람 되세요!”

홍세화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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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대학 수학능력 시험을 마쳤다. 그동안 “대학 가서 미팅 할래, 공장 가서 미싱 할래”라는 구호를 당연한 말인 양 받아들였다. 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이 자아실현의 능력을 갖추도록 하는 데 있다면, 그것은 ‘타자에 대한 상상력’을 전제한다. 그러나 그대에게 타자는 더불어 사는 연대의 대상이 아니라 경쟁대상이었을 뿐이다. 무엇보다 그대는 노동의 가치를 능멸하는 반교육적 환경에 있었다는 점을 성찰해야 한다. 왜냐하면, 앞으로 노동자가 될 가능성이 높은 그대가 이미 ‘나를 배반하는 의식’을 내면화하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우리나라 헌법 제1조는 말하고 있지만, 그대는 공교육 과정을 통해 민주공화국의 구성원으로서 민주적 시민의식과 공공성의 가치관을 형성하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 이래 이 땅의 뒤틀린 역사는 지속되고 있다. 아무리 사회 구성원들이 물신주의에 오염되어 경제동물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나라의 기본을 농락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유신체제 시절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으로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여덟 분에 대한 재심이 결정된 이 시간에도 우리는 참담한 역설 앞에 서 있다. 민주주의를 유린한 독재자의 후광을 입은 사람이 걸핏하면 국가 정체성을 문제 삼는 적반하장이 관철되고 있지 아니한가.

민주적 시민의식과 공공성의 가치관을 형성하지 못한 채 반노동자적 반민중적 의식마저 지닌 그대는 앞으로 대학에 입학하든 아니든 인간과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이나 관심을 갖는 대신 오직 소유를 위한 집착에 머물기 쉽다. 정치적 동물인 인간으로서 비판정신과 인문정신을 함양하는 대신 토익점수, 학점, 취업준비에 매몰되기 쉬운 것이다. 또 그대는 앞으로 ‘탈정치’를 자랑스럽게 말할지 모른다. 그것이 그대가 혐오하는 정치를 온존시키는 강력한 힘이 된다는 점조차 모른 채.

젊음에겐 인간의 존엄성 회복과 사회정의에의 열망이 있어야 한다. 오염되지 않는 인간 영혼의 자유로운 활보가 가능한 세상을 꿈꾼다는 것만으로도 젊음은 언제나 희망의 근거다. 사회 양극화에 관한 말만 무성할 뿐, 그것을 극복하려는 구체적 행동이 잘 보이지 않는 현실 앞에 서게 된 그대에게 시대에 불온하라고 요구하는 이유는 젊음이 우리 희망의 거처이기 때문이다. 억압과 불안을 지배의 주요 기제로 하는 사회일수록 자유와 저항은 그 자체로 불온이다.

수능을 마친 그대에게 우리 현대사를 공부할 것과 함께 두 가지를 간곡하게 당부한다. 첫째는 인간성의 항체를 기르라는 것이다. 이 사회를 지배하는 물신주의는 밀물처럼 일상적으로 그대에게 압박해 올 것이다. 그대는 끊임없이 물질과 보이는 것의 크기로 비교당할 것이다. 그것에 늠름하게 맞설 수 있으려면 일상적 성찰이 담보한 탄탄한 가치관이 요구된다. 부디 ‘세계와 만나는 창’인 책을 벗하라. 둘째는 자기성숙의 모색을 게을리하지 말라는 것이다. 서열화된 대학에 입학하려는 경쟁으로 자기성숙의 과정을 마감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에게 허용된 삶의 길이에 비하면, 수능은 아주 작은 계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회 구성원은 일생 동안 오직 두 번 긴장한다. 대학입시 때 한번, 그리고 임용이나 취직할 때 한 번의 두 번뿐이다. 만약 그대가 진정한 자유인이 되려고 한다면, 죽는 순간까지 자기성숙의 긴장을 놓지 않아야 한다. 누구에게나 가장 소중한 것이 자기 자신의 삶일진대, 부끄러움은 없고 뻔뻔함이 판치는 사회에서 젊음은 이 시대에 ‘불온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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