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칼럼]‘차부상회 민 근부’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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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
30년이 넘도록 수리를 한 적도, 청소를 한 적도, 문을 닫아본 적도 없는 강화도 외포리 ‘차부상회 민 근부’. 쉰아홉 살 우리 큰언니다. ‘차부상회’로 불리기도 하고, 희숙이 엄마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약사님’이라고 불러주는 사람에게 가장 친절하다. 외포리엔 약국이 없어 차부상회에서 ‘파스, 멀미약, 모기향’ 이렇게 딱 세 종류의 약을 파는 게 그 호칭의 근거다. 그렇게 불러주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금방 불친절해져서 뒤에다 대고 “약사님 이라고 부르면 돈 들어가나. 옘병.” 그러기도 한다.

우리 큰언니 세 살 적에 생부가 뻘건 완장 찬 사람들 따라서 이북으로 넘어가는 바람에 생과부가 된 우리 엄마가, 남북을 오가며 ‘전구다마’ 장사를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길이 막혀 이북으로 못 올라간 우리 아버지에게 재가를 하면서, 우리 큰언니는 우리 아버지의 의붓딸이 되었다.

의붓아버지가 의붓딸을 구박하는 건 흠도 아닐(?) 때라, 우리 큰 언니 일곱 살 때 남의 집 식모살이 갔단다. 남의 집 살이 보낸 어린 딸내미가 눈에 밟혀, 어느 날 그 집엘 몰래 가보니 가마솥보다 작은 아이가 가마솥을 닦는다고 부뚜막엘 올라가 솥 안에 반쯤은 빠져서 설거지를 하고 있더란다. 우리 엄마 죽기 전에 가장 많이 한 얘기였다. ‘근부 팔자는 지발 내 팔자 안 닮게 해 주시겨.’

우리 엄마 기도도 보람없이, 술김에 신나게 보증 서주는 걸 취미로 삼는 남편 덕분에, 장사하고 식당 일 하고 농사짓고 개 키워서 번 돈을, 보증 선 돈의 이자로 다 쑤셔박고도 모자라서 또 빚내고 그러면서도 그 흔한 가출도 한번 안하고 사는 게 나로서는 참 신기해서 한 번씩 물어보면 “개밥은 누가 주냐?” 그런 우리 큰언니다.

몇 년 전 설날. 진짜 추운 밤에 가게 물건 들여놓다 말고 큰언니 그런다. “내가 니헌테 죄진 거 있다.” 어조가 하도 진지해서 쉽게 묻지도 못하고 있는데, “십년 쯤 됐냐. 교원 노조 난리 났던 게… 그때 그 선상덜 말린다고 인천꺼정 갔었거덩.” “말려? 뭘?” “아니. 선상덜이 데모덜 허니라 아이덜 공부를 안 갈킬라 그러니까 데모겉은 거 허지 말라구.” “근데 왜 인천꺼지 갔어?” “희경인 인천서 고등핵교 댕겼잖냐?”

우리 큰언니 새끼들 넷 중에 그 중 공부 좀 한다 싶었던 셋째 딸내미는 자기 뼈골이 빠지는 한이 있더라도 꼭 선생을 만들고 싶어 무리를 해서라도 인천까지 유학을 보냈단다. 그런 딸내미 선생 만들어줘야 할 선생들이 데모질이나 한다고 테레비에서 떠들어대니 좀처럼 눈 뒤집히는 일 없는 우리 큰언니, 그땐 자기도 모르게 눈이 뒤집히더란다. 부모의 자식사랑이란 게 때로 이렇게 맹목적이다.

89년 인천의 B여고에서 우리 큰언니에게 악다구니를 당한 선생님이 계시거들랑 우리 큰언니 용서해 주시라. 자식 하나쯤은 번듯하게 키워서 “그래도 그 집 딸내미가 선생이라던데…” 그걸로라도 무시당하지 않고 얼굴 펴고 살고 싶었다고 그 추운 겨울 날 울면서 고해하던 우리 큰언니 그 대책 없는 꿈을 부디 용서해 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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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18 01: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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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칼럼
[희망칼럼]전교조의 임금인상투쟁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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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종강/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내가 대학을 다닌 30여 년 전에는 ‘공부 좀 한다’ 하는 대학생들은 “죽어도 ‘선생질’은 안 한다”는 말을 무슨 입버릇처럼 입에 달고 살았다. 여건이 충분히 되는데도 교직과목을 신청하지 않은 이유를 물으면 “교사자격증 따놓았다가 나중에 결국 선생 될까봐….”라고 답하곤 했다. 우등생들에게 ‘교사’란 직업은 인생 막장에서 선택하는 최후의 보루처럼 여겨졌다.

요즘은 그와 정반대다. 어릴 때부터 교사가 되는 것이 꿈이어서 책을 한 권 사줘도 “이런 책 읽으면 선생님 되나?” 묻곤 하던 딸아이가 고3이 되더니 “아빠, 상위 2% 안에 들어도 교대 가기 어렵대”라고 걱정 어린 얼굴로 말했다. 사범대학 들어가기도 마찬가지로 어려워서 딸아이는 요즘 “물을 마셔도 소화가 안 된다”고 할 정도로 ‘고3병’을 앓는다. “공부 못해도 괜찮으니 스트레스 받지 마라”고 인심 쓰는 것처럼 말해줘도 “공부를 못하면 내 마음이 안 편해”라고 얼굴을 찌푸리는 딸아이 모습은 마치 세상을 다 살아버린 사람 같다.

내가 아는 한, 교사의 봉급 인상이 일반 기업체 노동자의 임금 인상을 추월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매년 발표되는 교사와 공무원의 봉급 인상률은 일반 기업체 노동자의 평균 임금 인상률보다 항상 ‘매우’ 낮았다. 교사의 노동조건이 향상되는 속도가 다른 직장인들보다 결코 빠르지 않았다는 거다. 불가사의한 지점이 바로 여기다. 교사의 노동조건이 향상되는 속도가 다른 직종보다 결코 빠르지 않았는데 어쩌다가 ‘교사’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선호하는 직종으로 자리 잡게 됐을까? 결론은 다른 일자리들의 노동조건이 급속하게 추락했다는 것이다. 교사의 노동조건이 정체돼 있는 동안 다른 직종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은 오히려 후퇴했다는 것이다. ‘고용 불안’과 저임금 ‘비정규직’ 현상이 얼마나 심각해졌으면 상대적 저임금 직종의 상징이었던 교직과 공무원이 상한가 인기 직종이 됐을까?

초창기 전교조에 몸담았다가 청와대 비서관을 지낸 이가 “전교조가 교사의 이익만 대변한다”고 질타하자 수구 보수 언론은 쌍수를 들어 환영했고 비교적 진보적이라는 말을 듣던 언론조차 이에 맞장구를 쳤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대한민국의 전교조는 지나치게 비이기주의적인 집단이다. 그것은 저들이 흔히 말하는 ‘글로벌 스탠다드’의 기준으로 봐도 마찬가지다. 자본주의사회의 노동조합인 ‘전교조’는 식민지 40년, 분단 60년, 군사독재 30년이라는 비틀린 우리 역사 속에서 기이하게도 “사랑하는 제자들을 위해 해직당할 각오를 한 정의로운 교사들의 조직”으로 출발했다.

이제 전교조가 자본주의사회의 노동조합으로 서서히 자리잡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전교조가 1, 2급 정교사는 물론 학습지 교사와 보육교사, 학교식당 급식 노동자 등 교육 현장 내 광범위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투쟁에 나서는 것은 역사의 순리다. 선진국에서 경찰노조나 판사노조가 설립돼 사회 진보에 기여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2006년06월25일 14:0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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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칼럼]돌아온 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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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
슬기는 제 조카 아홉 명 중 여덟 번째입니다. 없는 집구석에서도 외아들이라고 신줏단지처럼 모셔졌던 제 남동생의 큰딸아입니다. 이 아이 백일 날 생모가 가출을 하고, 제 동생도 새끼 내팽개치고 행방불명이 된 후, 늙은 할아버지가 이 아이를 키웠습니다. 다리 저는 할아버지는 따라다닐 수 없으니 책상다리에 기저귀로 묶어놓고….

기저귀에 묶여있는 것보단 낫겠다 싶어 이 아이 18개월 때 제가 부산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해고자였을 뿐인 제게 와서 하도 굶어 울 기운도 없어 걀걀거리고, 전두환 이순자 구속시키라고 한참 데모할 때라, 등에 업힌 아이가 최루탄에 그 여린 살갗이 벌겋게 허는데도 연고 한번 못 발라주었습니다. 아이를 굶긴다는 게 얼마나 무참한 일인지, 전 그 이후 단 한 번도 슬기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질 못했습니다. 기저귀에 묶여 있는 게 낫겠다 싶어 이 아이는 다시 강화도 외포리의 책상다리에 묶이게 됩니다.

떠돌아다니던 지 애비가 여자랑 살림을 차리고 알량한 장사를 하는가 싶더니, IMF라는 게 터지고 다시 알거지가 됩니다. 새 엄마는 떠나고, 애비는 노숙자가 되었습니다. 음전한 범생이가 되는 게 오히려 비정상이었던 슬기는 열여덟 살까지 용케 견디다가 가출을 하게 됩니다. 있는 집 아이가 유학이라도 간 것처럼, 슬기에겐 그게 당연한 수순이었던 듯 아무도 이 아이를 찾지 않았습니다. 다만 명절날 아침, 말없이 끊는 전화가 외포리로 걸려오면, 음복주 한 잔에 큰 언니가 꺼이꺼이 울 뿐이었습니다. 길을 가다 그 또래 아이들이 보이면 한 번 더 뒤돌아봤을 뿐입니다. 그 때마다 울 기운도 없이 하얗게 누워 바라보던 어린아이의 눈빛이 떠올랐을 뿐입니다. 어디서 뭔 짓을 하든 굶기는 고모보다야 못하랴 자위했을 뿐입니다.

그런 슬기가 2년 만에 외포리로 돌아왔습니다. 나갈 땐 멀쩡했던 아이가 미쳐서 돌아왔습니다. 2년 만에 만난 아이가 제일 먼저 한 인사는 땅바닥을 버르적거리며 괴상한 소리를 내며 꺽꺽 숨넘어가게 우는 일이었습니다. 남자들만 보면 괴성을 지르며 불화살 맞은 짐승처럼 날뜁니다. 이 작은 아이 하나 보살피지 못했던 무책임한 어른들에게 복수라도 하는 듯, 잠도 안 자고 먹지도 않고 온종일 알 수 없는 소리만 중얼거리며, 긴긴 하루를 보내는 게 이 아이의 일과입니다. 이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만 할 뿐, 그게 사실로 굳어지는 저주가 내릴까 봐 아무도 입밖에 내질 못합니다. 자랄 때 제대로 먹질 못해 키가 150cm를 넘지 않고, 업으면 애기 때랑 똑같이 마른 삭정이 같은 슬기는 이쁜 ‘여자’도 아니고, 섹시한 ‘여자’도 아닙니다. 이 아이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이 아이에게 세상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걸까요.

오래 망설이고 고민하다 아직도 외포리에서 그러고 있는 슬기 얘기를 썼습니다. 가출을 하는 아이들에겐 그만한 사정이 있음을 헤아려 주십사 하는 것과 이 땅에서 버려진 아이들이 어떻게 망가지고 짓밟히는지를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죄책감이나 가책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는 길이 ‘객관화’라고 생각했기에….

2006년07월10일 20:2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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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6-07-17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희망칼럼
http://news.eduhope.net/news/search.php?board=%B1%B3%C0%B0%C8%F1%B8%C1-3&s_mode=all&g_mode=self&gid=12&s_arg=%C8%F1%B8%C1%C4%AE%B7%B3&start_date%5B0%5D=2006&start_date%5B1%5D=7&start_date%5B2%5D=17&end_date%5B0%5D=2006&end_date%5B1%5D=7&end_date%5B2%5D=17
 

공자님도 글로벌 스탠더드 세례
찬 돼지머리 고기도 먹기 쉽잖았던 20세기 공자
최근 중국에 전통문화 대표자 신분으로 부활
하나의 모습 띤 ‘표준상’ 전세계 보급한다는데…
내가 아는 공자만도 천의 얼굴이렷다
한겨레
» 유교 창시자인 공자의 후손들이 공씨 가문의 족보를 살펴보고 있다. 중국 동남부 푸젠성의 ‘공자 마을’로 알려진 시쥔 촌에는 126가구 600여명의 후손들이 모여 살고 있다. 푸저우/신화 연합
[관련기사]

변하는 중국, 변하지 않는 중국 ⑥

지난 달 13일 중국에서 공자 표준 조소상(彫塑像)이 공개되었다고 한다. 산동성 문화산업박람회 조직위원회와 중국공자기금회가 산동성 지난(濟南)에서 공자의 표준상 시제품(初稿)을 발표했다는 것이다. 지난 1월에 공모에 들어갔던 것이라고 하니 아무리 완성품이 아니고 시제품이라고는 하지만 급조한 느낌이 없지 않지만 엄격하면서도 친근한 느낌을 주는 육칠십 대의 공자의 모습을 재현하고자 각계의 의견을 수렴하는 등 상당히 공을 들였다고 한다. 향후 지속적으로 국내외의 여러 의견을 참고하여 오는 9월 공자 탄신 2557주년 제사 때에 최종 완성본을 정식으로 전세계에 공포할 예정이라고 한다. 바야흐로 글로벌 스탠더드를 강조하는 세계화의 시대에 이제 공자상마저 국제적 표준이 제정되는 것이다. 가장 산동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

돈도 재물도 없는 공자 사당은 썰렁

이러한 소식은 그간 간간이 들려오던 공자학원(Confucius Institute)의 세계적 확산, 공자에 대한 성대한 제사 그리고 유가 경전 읽기 붐 등 일련의 시리즈의 ‘완결판’으로 공자의 위상이 중국 전통문화의 대표자의 신분으로 ‘격상’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지난 20세기에 극복해야 할 구질서나 봉건문화의 상징으로 매도되던 공자가 21세기에 다시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지난 세기에 공자의 신세가 ‘하한가’만을 기록한 것은 아니었다. ‘상종가’를 구가하던 시절도 없지 않았다. 민국시대였던 1925년에 교육부가 주관해서 소학교에서 유가 경전을 읽도록 한 경우도 있었고, 1930년대에는 장제스가 신생활운동을 전개하면서 사유(四維, 예의염치)와 팔덕(八德, 충효인애신의화평)과 같은 유가 도덕을 강조한 경우도 있었다. 물론 신생활운동의 본질은 일본이 무력침공을 기도하자 공산당이 주도하는 항일구국의 기운에 대항해서 장제스 일파가 자신들의 군사독재체제를 확립하기 위해서 국민적 정신동원을 도모하려는 데에 있었지만….

» 작가 루쉰의 고향 샤오싱의 시엔헝 주점 앞에 서 있는 쿵이지상. 쿵이지 손가락 사이의 작은 물건은 소설에 등장하는 회향콩이다. 쿵이지는 아이들에게 더 이상 나눠줄 콩이 없다고 하면서 “군자는 다재다능한가, 다능하지 않은 법이다.(君子多乎哉 不多也)”라는 공자의 말을 연상시키는 “많지 않아. 많지 않아. 많은가? 많지 않다(不多不多 多乎哉 不多也)”라고 주절거린다.
돌이켜보면 한 무제에 의해 유교가 국교화된 이후 청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수천 년 동안 공자의 형상은 역사적으로 부침을 겪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폄훼보다는 포양된 경우가 많았다. “성인과 왕은 마치 한 핏줄인 쌍둥이 형제처럼 도처에서 궁지에 빠질 때마다 서로 의지하는 구석이 있다. … 왕은 그의 칭호를 성인에게 나누어 주어 왕이란 글자를 부르기 시작했다. 성인 또한 그의 칭호를 왕에게 나누어 주어 ‘성(聖)’자를 붙여 부르기 시작했다.” 후흑학(厚黑學)의 창시자 리쭝우의 이러한 지적은 역사적으로 공자가 추앙받을 수밖에 없었던 비밀의 한 자락을 말해준다. 공자는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이라는 왕의 칭호를 하사받았고 당대의 임금은 언제나 ‘성군’이었다. 그러나 일반 백성이 공자의 사당을 찾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우스개 소리 하나. 공자의 사당(文廟)은 한적하기 그지없는데 반해 관운장을 모시는 관제묘(關帝廟)라든지 재물을 관장하는 재신묘엔 항상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래 하루는 공자가 그들에게 물었다. 왜 나의 사당엔 사람이 없는데 당신들 사당엔 기도하는 사람들의 향냄새가 가득하냐고. 그들이 대답했다. 당신에게는 돈도 없고 칼도 없는데 누가 당신에게 와서 향불을 바치겠냐고….

5ㆍ4 시기의 공자를 타도하자는 타도공가점의 구호나 문혁 때의 비림비공 운동이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20세기의 공자는 쇠락한 문묘에서 몇 몇 제자들과 정겹게 “차가운 돼지 머리고기를 먹는 것”조차 쉽지 않은 신세였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서 공자는 칼 마르크스라는 아주 중요한 인물을 만난다. 마치 700여년 전쯤에 주희(朱熹)를 통해 부처를 만났듯이. 궈모러의 역사소품 모음집인 <족발(豕蹄)> 가운데에는 이러한 공자와 마르크스의 세기적 만남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들어 있다. 제목은 ‘마르크스, 문묘에 가다’(1925년)

마르크시즘 공자 통해 중국에 뿌리

» 최근 발표된 공자 표준상. <중국사상사>로 유명한 전 국가도서관장 런지위는 가장 산동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에 온 마르크스가 공자를 만나기 위해 상하이의 문묘(文廟)를 찾아갔다. 마르크스가 먼저 공자를 찾은 것은 어떤 사람한테서 자신의 사상이 공자의 사상과 다르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건 중대한 문제였다. 만약 자신의 사상이 정말로 공자의 사상과 모순된다면 공자의 사상이 여전히 보편적으로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는 중국에서 자신의 사상을 실현시킨다는 것은 요원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 때 마침 공자는 안회, 자로 그리고 자공과 같은 가까운 제자들과 차가운 돼지 머리고기를 먹고 있던 중이었다. 불원천리하고 찾아온 수염많은 게같은(개가 아니라) 얼굴을 한 인물이 마르크스라는 것을 안 공자는 크게 기뻐한다. 공자도 이미 마르크스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러시아 10월 혁명의 포성이 중국에게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져다주었기” 때문이었다. 마르크스가 먼저 공자에게 가르침을 청했지만 공자는 자신의 사상이 체계가 없다며 사양한다. 그리하여 마르크스는 먼저 자신의 사상을 개괄적으로 소개한다.

마르크스는 우선 자신의 사상의 기본적 출발점이 이 세상과 인생에 대한 철저한 긍정에 있음을 밝힌다. 이에 공자는 자신의 사상도 마찬가지라고 말하면서 마르크스가 생각하는 이상적 세계는 무엇이냐고 묻는다. 마르크스는 만인이 한사람처럼 자유롭고 평등하게 자신의 재능을 발전시키고, 그들 모두 있는 힘껏 일하되 보수를 바라지 않으며, 생활 보장을 받아 춥고 굶주릴 걱정이 없는 이른바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한 만큼 가져가는” 공산사회가 바로 자신의 이상적 세계라고 말한다. 이 말에 점잖은 공자도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큰 도가 행해지는 세상에서는 천하가 만인의 것이 된다. 사람들은 현자와 능력있는 자를 선출하며 믿음과 화목을 중시하게 된다.…재물이 헛되이 낭비되는 것을 싫어하지만 그렇다고 사사로이 독점하지도 않는다. 힘써 일하지 않는 것을 미워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사적 이익만을 위해 힘을 쓰지는 않는다…” 이러한 자신의 대동(大同)세계의 이상이 마르크스의 그것과 너무도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냉정하게 자신의 이상이 공상가들과 다르다고 힘주어 말한다. 공자 당신은 기껏해야 ‘공상적 사회주의자’에 불과하다는 듯이. 마르크스는 자신의 주장은 “적은 것을 걱정하지 말고 균등하지 못한 것을 걱정하라”는 것이 아니라 “적은 것도 걱정하고 균등하지 못한 것도 걱정하라”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그러자 공자는 물질을 존중하는 것이 본래 중국의 전통사상이었으며, 이러한 중국의 전통사상과 자신의 사상은 근본적으로 당신과 마찬가지로 산업을 발전시킨 이후에 균등한 분배를 강조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결국 마르크스는 2천여년 전 이 먼 동방에 이렇게 훌륭한 자신의 동지가 있었다는 사실에 감탄한다.

공자보다 노자가 빈말쟁이

» 황희경/영산대 교수·중국철학
이는 궈모러가 마르크시즘이 중국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지어낸 가상적 이야기이지만 여기엔 두 사람의 핵심 사상을 아주 간략하게 요약하면서 공자와 마르크스를 화해시키는 미덕이 있다. 하지만 궈모러의 이러한 노력은 나중에 마오에 의해 신랄하게 비판을 받았다. 마르크스(민주제) 플러스 진시황(집중제)을 자임했던 마오가 공자를 비판한 것은 그가 빈말쟁이였기 때문이라는 점은 이미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마오가 높이 추앙했던 루쉰은 노자와 비교하면서 공자를 이렇게 긍정한 적이 있다. “공자와 노자가 논쟁을 벌였을 때, 공자가 이기고 노자가 졌다고 나는 생각한다. 노자는 부드러움(柔)을 숭상한다. (유가의) ‘유(儒)는 유(柔)’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공자도 부드러움을 숭상한다. 그러나 공자는 부드러움으로써 나아갔고 노자는 부드러움으로써 물러섰다. 관건은 공자는 ‘안되는 줄 알면서 하는’ 실행자였고, 노자는 큰 소리나 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하지 않음이 없는(無爲而無不爲)’ 공담가였다는 데에 있다. 모든 것을 다 하려면 어쩔 수 없이 아무 것도 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무언가 하나라도 하려면 한계를 설정해야 하고 그것은 곧 모든 것을 다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자의 표준상이 공개되었다는 소식을 전했지만 사실 공자의 모습은 하나일 수 없다. 부처와 대결했던 주희의 공자에게서는 어느덧 선사(禪師)의 분위기가 배어 있고, 세계 정부를 구상했던 캉유웨이의 공자에게서는 분열된 난세 속에서 통일을 체현하고자 있는 힘이 느껴진다. 불안한 세계화의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일까. 나는 <논어>를 읽다가 문득 문득 공자에게서 ‘공을기’(쿵이지: 루쉰의 단편소설 제목이자 주인공)의 그림자가 보인다. 아마도 잘못 보았을 것이다.

황희경/영산대 교수·중국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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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는 단지 빈말을 했고 진시황은 진정 일을 했다
산 비가 내리려니 누각엔 바람이 가득했다
마오 암살 기도한 ‘린뱌오 사건’ 계기로
“린뱌오가 나를 진시황이라 욕했습니다”
마오, 진시황이 그랬듯 공자 비판 ‘비림비공운동’
한겨레
» 2006년은 중국 문화대혁명이 일어난 지 40돌이 되는 해다. 마오쩌둥 전 국가주석에 대한 평가를 엇갈리게 만드는 문화대혁명에 대한 평가는 장차 또 어떻게 바뀌어갈까. 지난 2일 베이징 시장의 문화대혁명 기념품 가게에서 손님이 마오를 추억하는 포스터를 들고 있다. 베이징/AFP 연합
[관련기사]
변하는 중국, 변하지 않는 중국 ⑤

아큐가 아니라 IQ가 75인 포레스트 검프가 항상 바보 같지는 않았다. <포레스트 검프>를 보면 포레스트가 미국 탁구 대표팀 선수로 중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뒤에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중국에 대한 인상을 묻는 사회자의 질문에 어눌하지만 매우 ‘예리하게’ 중국을 단 두 문장으로 개괄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람들이 거의 가진 게 없어요.” “그들은 교회에 가지 않아요.” 사회자는 상상(imagine)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하자 포레스트 검프 옆에 앉아 있던 딱정벌레(비틀즈) 그룹의 영혼, 존 레논은 노력하기만 한다면 그건 쉬운 일이라고 말한다. 마치 그의 불후의 명곡 이매진의 노랫말처럼. “상상해보세요 국경이 없는 세상을/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누굴 죽이거나 죽을 이유도 없겠지요 / 종교도 없어지겠지요/ 상상해보세요 모든 사람이 평화스럽게 사는 것을 / 상상해보세요 소유가 없는 세상을 / 당신이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소유가 없다면 탐욕도 굶주림도 없고/ 사람은 모두 한 형제가 될 텐데/ 상상해보세요 모든 사람이 이 세상을 함께 공유하는 것을” 로버트 제멕키스 감독은 포레스트 검프의 입을 통해 미국의 보수세력의 입장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존 레논과 같은 반전 평화주의자들이 꿈꾸는(이매진) 세상, 즉 종교도 없고 소유도 없는 세상은 바로 우리의 포레스트 검프가 방문하고 돌아온 “가진 것이 없고 교회도 가지 않는” 다시 말하면 지독하게 가난하고, 신을 업신여기는 불경스런 중국과 같은 세계라고 슬쩍 비꼬고 있는 것이다. 성동격서.

사실 1971년 4월10일부터 17일까지 미국 탁구 대표단과 기자들이 방문했던 당시 중국에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가난했으며 물론 교회에도 가지 않았다. 그 정도가 아니라 ‘대동란’의 와중에 있었다. 다시 말하면 문화대혁명이라는 인류사에 그 유래를 찾을 수 없을 대격동, 대실험 속에 처해 있었다. 그런데 미국 선수단이 이러한 중국을 방문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직전에 일본 나고야에서 열린 세계 탁구선수권대회에 참가했다가 중국쪽의 방문 초청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핑퐁외교’ 없었다면 동유럽 신세

» 1972년 2월 냉전체제를 뒤흔든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중국방문 때 중국 노동자들과 얘기하는 닉슨 대통령.
이를 두고 핑퐁외교라고 부르지만 마오는 1970년에 에드거 스노를 만나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리처드 닉슨에게 초청 의사를 전하는 등 이전부터 같은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을 벗어나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시도하기 시작했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닉슨 대통령은 1972년에 중국을 방문하여 관계 정상화에 합의하게 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중국과 미국이 소련을 겨냥한 전략적 제휴관계를 맺은 것이다. 문혁의 와중에 있었다고 해서 중국이 10년 동안 세계와 단절되어 국내에 대혼란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이와 같이 향후 새로운 동북아 구도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 결정이 내려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만약 이 때 중국이 미국과 관계를 정상화하지 않고 소련 일변도로 나아갔더라면 중국은 오늘날 동유럽의 신세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 중국 공산당에 치명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이른바 린뱌오(임표) 사건이다.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린뱌오는 인민해방군을 동원하여 문혁 초기의 혼란을 수습하는 등 급부상하여 1969년 중국공산당 제9기 전국대표대회에서 마오의 후계자로까지 지명되었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마오 암살 쿠데타를 기도하다가 발각되어 가족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소련으로 탈출하던 중 연료 부족으로 몽고에서 추락하여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는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에 반대하는 등 여러가지 문제로 마오와 이전부터 충돌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린뱌오 사건이 당시 일흔 여덟 살의 마오에게 끼친 정신적 타격은 엄청난 것이었다. 왜냐하면 어찌되었든 그는 아주 일찍부터 공산당에 가입하여 대장정을 함께 했으며 결국 후계자의 지위에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군부 내에 그의 세력들도 많이 있었다. 마오의 권위도 추락했고 공산당에 대한 신뢰도 하락했다. 따라서 이 사건 이후 마오의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기 시작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자신을 반성하는 가운데 유가에 반대한 루쉰을 다시금 떠올렸다. 린뱌오 사건이 있은 지 두 달 후 마오는 한 좌담회에 참석해서 아주 흥미로운 발언을 한다. “나는 동지들이 루쉰의 잡문을 보기를 권합니다. 루쉰은 중국의 제일의 성인입니다. 중국의 제일의 성인은 공자가 아닙니다. 나 또한 아닙니다. 나는 현인(賢人), 즉 성인의 학생에 해당합니다.” 이는 일찍이 옌안에 있을 때 루쉰을 논하면서 “공자는 봉건사회의 성인이고 루쉰은 현대 중국의 성인”이라고 한 발언과 미묘한 차이가 있다. 만년의 마오는 더 이상 루쉰과 공자를 위대한 성인으로 병칭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산 비가 내리려니 (중국이라는) 누각엔 바람이 가득했다.” 1973년 드디어 공자에 대한 비판이 시작된다. 마오는 당시 중국을 방문한 이집트 부총통을 접견했을 때 외빈들 앞에서 “진시황은 중국 봉건사회의 제일 유명한 황제입니다. 나도 진시황입니다. 린뱌오가 나를 진시황이라고 욕했습니다. 중국은 예로부터 두 파로 나뉩니다. 한 파는 진시황이 좋다고 말하고 다른 한 파는 진시황이 나쁘다고 말합니다. 나는 진시황에 찬성하고 공자에 반대합니다.”라고 천명했다. 그가 이런 생각을 드러낸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이전에도 “진시황이 뭐가 대단한가? 그는 단지 460명의 유생을 생매장했지만 우리는 4만6천여명 유생을 생매장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보고 진시황 같다고 욕하는데 우리는 모두 인정한다. 실제로 그렇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그들이 말한 것이 아직 충분하지 않아서 우리가 더 보충해야 한다는 점이다.”라고 말한 적도 있다.(1958)

린뱌오, 소련으로 가다 비행기 추락

그가 공자에 반대하고 진시황을 높이 평가한 것은 공자는 단지 빈말을 했을 따름이지만 진시황은 진정으로 일을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공자를 받드는 사람들이 평소에 옳은 소리를 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일을 할 때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진시황은 어떤가. 처음으로 중국을 통일하고, 문자와 도량형을 통일했으며, 세습을 인정하지 않는 중앙집권적인 국가를 건설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진시황은 집중제의 한 상징이었다. 그렇지만 마오가 진시황과 공자를 병칭하고 있는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단지 빈말을 한” 공자였지만 그러한 공자 사상의 영향력은 중국에서 정말로 뿌리 깊은 것이었다. 그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종교가 없는 중국에서 공자는 지식인들의 ‘교주’였다. 이러한 사정은 공산당에 반대한 경우에 해당되는 것일 뿐만이 아니라 저명한 사학자인 궈모러(郭沫若)와 같이 아주 일찍부터 공산당과 함께 한 지식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궈모러는 <십비판서>(우리말 번역본 제목은 <중국 고대 사상사>)에서 일찍이 공자를 인본주의자로 상당히 긍정적으로 묘사한 적이 있었는데, 마오는 이를 두고 그가 공자를 받들고 법가에 반대했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그는 이러한 입장은 국민당이나 린뱌오의 견해와 마찬가지라고 하면서 공자 비판을 린뱌오 비판과 연결시킨다. 이러한 마오의 생각은 장칭을 위시한 사인방에 의해서 대중운동으로 증폭되기에 이른다. 이른바 ‘비림비공’운동이 그것이다. 공자는 노예제로부터 봉건제로 이행하는 춘추말기에 몰락한 노예주 계급을 대표해서 노예제 부활을 도모한 보수반동의 사상가로 평가되어 비판받기에 이른다. 사실 지나친 것은 모자란 것과 같다(과유불급)는 공자의 중용 사상은 마오와 체질적으로 맞지 않았다. 질서와 안정을 중시하는 공자의 사상과 옛 것을 타파하지 않고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없다는 마오의 혁명사상은 본질적으로 모순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비림비공 운동은 이미 린뱌오 사건 이후 이미 빛을 잃어버린 문혁의 회광반조(回光返照)에 불과한 비극이었다.

‘과유불급’ 공자사상 마오와 상극

» 황희경/영산대 교수·중국철학
지난 5월은 마침 문혁 발발 40주년을 맞는 달이었다. 그리하여 중국 당국이 문혁에 관한 보도를 통제하고 있다는 뉴스가 우리 언론에 약속이나 한 듯이 보도되었다. 예를 들어 중국의 유명 포털 사이트인 ‘바이두’에 문화대혁명을 검색해보면 “당신의 검색어는 법률에 저촉될 수 있다”는 메시지가 뜬다는 것이었다. 호기심에서 한번 해보았다.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문혁이라고 치니 수많은 자료를 검색할 수 있었다. 하루가 지나니 ‘문화대혁명’마저도 이상이 없었다. 문혁은 철저하게 부정하는 것이 그동안 중국의 주류적 관념이었다. 하지만 최근 중국의 유명한 작가인 한샤오꿍이 “편견을 더하거나 기억을 왜곡하지 않는다면 빈궁한 대국이 급속히 발전하려는 가운데 겪은 재난은 우리들이 주변에서 흔히 겪는 사랑 혹은 원한보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그동안의 문혁 담론을 비판한 글을 발표하기도 하는 등 새로운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다. 과거사 청산을 말하면 민감한 반응을 보이다가도 남의 문혁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미친 짓이라거나 연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고 쉽게 비판하는 것은 ‘아큐’의 정신승리법이 아니면 ‘포레스트 검프’의 복잡한(?) 단순함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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