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이 넘도록 수리를 한 적도, 청소를 한 적도, 문을 닫아본 적도 없는 강화도 외포리 ‘차부상회 민 근부’. 쉰아홉 살 우리 큰언니다. ‘차부상회’로 불리기도 하고, 희숙이 엄마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약사님’이라고 불러주는 사람에게 가장 친절하다. 외포리엔 약국이 없어 차부상회에서 ‘파스, 멀미약, 모기향’ 이렇게 딱 세 종류의 약을 파는 게 그 호칭의 근거다. 그렇게 불러주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금방 불친절해져서 뒤에다 대고 “약사님 이라고 부르면 돈 들어가나. 옘병.” 그러기도 한다.
우리 큰언니 세 살 적에 생부가 뻘건 완장 찬 사람들 따라서 이북으로 넘어가는 바람에 생과부가 된 우리 엄마가, 남북을 오가며 ‘전구다마’ 장사를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길이 막혀 이북으로 못 올라간 우리 아버지에게 재가를 하면서, 우리 큰언니는 우리 아버지의 의붓딸이 되었다.
의붓아버지가 의붓딸을 구박하는 건 흠도 아닐(?) 때라, 우리 큰 언니 일곱 살 때 남의 집 식모살이 갔단다. 남의 집 살이 보낸 어린 딸내미가 눈에 밟혀, 어느 날 그 집엘 몰래 가보니 가마솥보다 작은 아이가 가마솥을 닦는다고 부뚜막엘 올라가 솥 안에 반쯤은 빠져서 설거지를 하고 있더란다. 우리 엄마 죽기 전에 가장 많이 한 얘기였다. ‘근부 팔자는 지발 내 팔자 안 닮게 해 주시겨.’
우리 엄마 기도도 보람없이, 술김에 신나게 보증 서주는 걸 취미로 삼는 남편 덕분에, 장사하고 식당 일 하고 농사짓고 개 키워서 번 돈을, 보증 선 돈의 이자로 다 쑤셔박고도 모자라서 또 빚내고 그러면서도 그 흔한 가출도 한번 안하고 사는 게 나로서는 참 신기해서 한 번씩 물어보면 “개밥은 누가 주냐?” 그런 우리 큰언니다.
몇 년 전 설날. 진짜 추운 밤에 가게 물건 들여놓다 말고 큰언니 그런다. “내가 니헌테 죄진 거 있다.” 어조가 하도 진지해서 쉽게 묻지도 못하고 있는데, “십년 쯤 됐냐. 교원 노조 난리 났던 게… 그때 그 선상덜 말린다고 인천꺼정 갔었거덩.” “말려? 뭘?” “아니. 선상덜이 데모덜 허니라 아이덜 공부를 안 갈킬라 그러니까 데모겉은 거 허지 말라구.” “근데 왜 인천꺼지 갔어?” “희경인 인천서 고등핵교 댕겼잖냐?”
우리 큰언니 새끼들 넷 중에 그 중 공부 좀 한다 싶었던 셋째 딸내미는 자기 뼈골이 빠지는 한이 있더라도 꼭 선생을 만들고 싶어 무리를 해서라도 인천까지 유학을 보냈단다. 그런 딸내미 선생 만들어줘야 할 선생들이 데모질이나 한다고 테레비에서 떠들어대니 좀처럼 눈 뒤집히는 일 없는 우리 큰언니, 그땐 자기도 모르게 눈이 뒤집히더란다. 부모의 자식사랑이란 게 때로 이렇게 맹목적이다.
89년 인천의 B여고에서 우리 큰언니에게 악다구니를 당한 선생님이 계시거들랑 우리 큰언니 용서해 주시라. 자식 하나쯤은 번듯하게 키워서 “그래도 그 집 딸내미가 선생이라던데…” 그걸로라도 무시당하지 않고 얼굴 펴고 살고 싶었다고 그 추운 겨울 날 울면서 고해하던 우리 큰언니 그 대책 없는 꿈을 부디 용서해 주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