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전에 반장의 지시에 따라 성독과제물을 교과서 복사본과 함께 제출하고 클럽활동 활동 계획서도 냈다.

5,6교시엔 권정안샘 내주신 과제물을 작성하는 시험. 미리 제시한 과제물과 함께 깜짝 과제도 있었다. '자신이 평소에 좋아하는 문장을 쓰고 이유를 쓰시오' 워낙 악필에 쓰는 속도도 느려터져가지고 요약본을 가지고 들어갔음에도 쩔쩔 매다가... ㅠㅠ 대충 쓰고 나왔다.

 "學而不思卽罔, 思而不學卽殆"를 썼다. '배우면서 생각하지 않으면 (실체가) 없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험하다'는 [論語]의 한 구절이다. (이 풀이가 정확한 지는 잘 모르겠다.) 학문과 사유는 함께 나아가야 하는 작업이고 둘 중 어느 하나가 소홀할 때 자신의 것이 되지 않거나 자신만의 편견에 빠지기 쉽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물론 學과 思 이후에는 합당한 行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야말로 참된 공부가 될 것이며 삶이 될 것이므로. 정작 답지에는 어떻게 썼는지 생각이 안 난다. 도대체 마지막에 "盡人事待天命"은 왜 썼을까? 에잉~

휴~ 이제 시작인데 벌써부터 진이 빠진다. 내일도 신용호 샘의 [한시특강] 시험이다. 대충 열심히 쳐야지~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BRINY 2006-08-18 0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충 열심히요^^

해콩 2006-08-18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네, 대충 열심히요!! 브리니님은 언제 끝나시나요? 혹 벌써 끝내셨나? 그럼, 약오르는뎅~
 

中, 지난해 6월 농산물 양보 뜻 밝히며 요청
- 김현종 본부장 7월 미국에 중국 움직임 알려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의 핵심쟁점은 당연히 ‘우리 국익에 도움이 되는가’ 하는 점이다. 많은 국민들은 여기에 하나 더 붙여 “한-미 자유무역협정이 왜 이렇게 갑자기 시작됐는가?” 하는 점에 고개를 갸웃거린다. 가 9일 단독입수한 2005년 9월12일자 제5차 대외경제위원회 안건 자료는 한-미 자유무역협정 협상을 둘러싼 이런 의문에 상당 부분 답을 해준다.

애초 정부는 2003년 9월 작성한 ‘자유무역협정 추진 로드맵’에서 대상국 선정을 두고 “부담이 적은 국가에서 거대·선진 경제권으로 점차 확대해 간다”는 원칙을 세웠다. 거대 경제권에서는 예외적으로 한-일 협정에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미국·유럽연합·중국 쪽은 중장기적 과제였다.

하지만 한-일 협정 추진은 일본 쪽의 소극적 태도로 진전을 보지 못한다.

정부는 미국이나 중국과 관련해서는 중국과 자유무역협정을 추진하는 게 더 유리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2004년 12월에 열린 제3차 대외경제위원회 안건을 보면 일본·미국· 중국 등 거대경제권과의 자유무역협정 추진 순서는 일본→미국→중국 순으로 정해진 것으로 나온다. 정부는 당시 2005년 1월부터 미국과 6개월 정도 예비점검협의를 추진하기로 결정한다. 반면 당시 중국과는 민간 연구기관 간에 공동연구를 진행하는 정도에 머물러 있었다. 경제적 효과에서 앞서는 중국 대신 미국을 우선적으로 추진하기로 한 이유는 대외경제위 안건만 보면 불분명하다.

정부는 2005년 1~6월 사이에 세 차례에 걸쳐 미국과 실무점검협의를 열었으나 바로 걸림돌에 부닥친다. 미국이 쇠고기, 스크린쿼터 등 양국간 핵심 통상현안에 대해 한국의 양보를 협정 추진의 전제로 내걸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강경한 태도에 우리 정부도 2005년 4월 제4차 대외경제위원회 회의자료에서 “양국간 주요 통상현안이 해결되지 않는 한, 한-미 자유무역협정 논의가 진전을 보이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고 어려움을 털어놨다.

중국의 갑작스런 제안으로 상황은 급변한다. 중국은 지난해 5월께부터 갑자기 그동안의 유보적 태도를 바꿔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자유무역협정 담당 부서인 중국 상무부 이샤오준 차관보는 중국주재 한국공사와 나눈 비공식 면담 자리에서 “중국 쪽은 한-중 자유무역협정을 우선적 어젠다로 검토하고 있다”며 “우리 쪽에 11월 아펙 정상회의 때까지 분명한 입장을 제시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 과정에서 중국은 한-중 협정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던 농산물 문제에 대해서도 대폭 양보하겠다는 뜻을 전달해 왔다. 한-중 자유무역협정 추진과 관련해 우리 쪽은 중국산 농산물로 말미암은 피해 우려 때문에, 중국 쪽은 대한국 무역적자 악화 우려 때문에 주저했는데, 중국이 파격적인 제안을 하고 나선 것이다.

완강했던 미국이 다소 완화된 태도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8월께부터다. 이전까지만 해도 협상 시작 전에 양국간 통상 현안을 완전히 해결해야 한다고 고집했던 미국이 이맘때부터 통상 현안에서 단계적 진전이 있으면 협상을 시작할 수 있음을 시사하고 나선 것이다. 에이미 잭슨 무역대표부 한국담당 부대표보는 지난해 8월 “쇠고기, 스크린쿼터가 완전히 해결되고 나머지 분야에서 진전이 있다면 한-미 협정에 대한 의회 및 업계 설득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미국 쪽 변화를 불러온 촉발제는 중국의 갑작스런 제안으로 추정된다.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은 지난해 7월 방미해 중국의 갑작스런 제안에 대한 미국 쪽의 의중 파악에 나섰다. 당시 미국의 한국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마커스 놀런드 국제경제연구소(IIE) 연구위원과 로버트 갈루치 조지타운대 외교대학원장은 김 본부장과 만난 자리에서, 한국이 중국과 먼저 자유무역협정을 맺는 것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시했다. 대외경제위원회 안건 자료를 보면 한국 정부가 미국 정부와 의회 등 공식기관의 의견을 들었다는 흔적은 없다.

정부는 지난해 9월 제5차 대외경제위원회에서 미국 쪽의 강한 우려와 한-중 자유무역협정이 갖는 문제점들을 검토한 끝에 ‘국내외적 민감성’이라는 이유를 들어 한-중 아닌 한-미 자유무역협정의 조속 추진을 결정했다. 우리 정부는 한 달 뒤인 10월 한-미 통상현안 분기별 점검회의에서 스크린쿼터, 쇠고기, 자동차, 의약품 등 ‘4대 선결조건’을 미국에 양보하면서 한-미 협정의 본격적인 시작을 위한 걸림돌을 치운다. 노무현 대통령도 이런 급속한 상황 진전에 대해 지난 6월 대외경제위원회를 주재하면서 “지난해 말에 미국이 뜻밖에 수용 자세로 나와서 갑자기 된 감이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안창현 기자 blue@hani.co.kr



자료공개한 민주노동당 심상정 의원
“미국도 협정체결에 적극적…정부내 친미파가 졸속추진”

“드디어 한-미 자유무역협정 졸속 추진의 수수께끼가 풀리기 시작했다. ”

심상정 민주노동당 의원(5c사진)은 9일 ‘제5차 대외경제위원회 안건’ 자료를 통해 지난해 5~9월 자유무역협정 추진을 둘러싸고 중국과 미국, 그 사이에 낀 우리 정부의 물밑 움직임이 드러난 것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중국이 먼저 적극적으로 한-중 자유무역협정 체결 의사를 밝혀오자, 미국은 이에 대해 강력 경고했으며, 우리정부가 그 사이에서 고민하다 한-미 자유무역협정 추진쪽으로 최종 결정한 일련의 과정이 밝혀졌다는 것이다.

심 의원은 “그동안 우리 정부는 한-미 자유무역협정에 대해 ‘우리가 먼저 요구했다’고 주장했지만, 자료를 보면 미국 쪽도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적극적이었다는 정황이 드러난다”며 “한미간 협상 시작의 배경이 조금씩 밝혀지기 시작한 것”이라고 말했다.

심 의원이 주목한 것은 이제껏 미국이 다른 나라와 맺어왔던 자유무역협정이 무엇 때문이었냐는 대목이다. 미국은 지금까지 이스라엘, 요르단, 오스트레일리아 등 15건의 자유무역협정을 맺었다. 심 의원은 “미국이 한-미 자유무역협정에 나선 것은 그냥 한국이 그동안 머뭇거리던 4대 선결조건을 양보했기 때문만은 아니다”라며 “더 중요한 이유는 중국이라는 변수가 등장함에 따라 동아시아 주도권 유지라는 전략 차원에서 협상 개시를 결정했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 추진에 경제적 이유 뿐만 아니라 외교안보적 측면이 강하게 작용했다는 해석이다.

심 의원은 또 미국과 중국이 맞서는 상황에서 우리 정부가 일방적으로 미국 쪽으로 기울었던 이유로 정부 내 일부 ‘친미파’를 지목했다. 심 의원은 “국익을 지키기 위해 미국과 중국이 각각 전략적 접근을 하는 것처럼 우리 정부는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독자적 전략을 갖고 있어야 했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상교섭본부장이 미국까지 찾아가 자문을 구하는 것은 사대주의적 자세로 비친다”고 말했다.

심 의원은 “결국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미국의 전략적 필요와 국익을 무조건 미국 쪽에서만 찾으려 하는 국내 친미진영의 생각이 맞아 떨어져 시작된 것”이라고 말했다. 심 의원은 또 앞으로 한-미 협상 추진과 관련해서는 “이렇게 새로운 사실이 밝혀진 만큼 협상을 원점에서 재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안창현 기자 blue@hani.co.kr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달팽이 > 마음의 공복

무란 없는 것이 아니라 비워져 있는 것.

비워져 있는 것은 곧 채울 수 있는 것을 말하는 것.

늘 비워둠으로써 얻어지는 마음의 공복.

 

한 번 화두를 꺼내면 접을 수 없는 그대에게

어찌 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직도 생과 사의 화두 속에 파묻혀 있는가.

이젠 벗어나 시냇물에 발이나 담가보게.

 

 

                              - 경봉 스님이 효봉 스님에게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1879 년 메이지 정부는 군 (軍) 의 의견을 받아들여 초혼사를 야스쿠니신사로 개칭했다 .
이후 군부의 성장에 따라 1882 년 ‘군인칙유' (천황이 군의 통수권자이며, 군인은 천황의 군대로서 절대 충성의 의무가 있다.) 를 내린 뒤, 1887 년 야스쿠니신사를 육.해군성의 독점적 관할하에 두도록 했고,
야스쿠니의 지위도 천황의 조상신이나 황족을 모시는 신사에 다음가는 별격관폐사 (別格官幣社) 로
승격시켰다. 이후 청일전쟁을 (1894) 필두로 , 러일전쟁 (1904), 중일전쟁 (1937), 태평양전쟁 (1941) 등
1945 년 8 월 제 2 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일본의 대외 침략전쟁에서 죽은 이들이 모두 야스쿠니신사에
모셔졌다.

 


1939 년 3 월부터 일본정부는 지방에 있는 초혼사들을 호국신사 (護國神社 ) 로 개칭하고 야스쿠니신사와 같은 기능을 하게 했다 . 같은 의미로 각 마을에는 충혼비가 세워졌다 . 지금도 일본 전역에는 야스쿠니신사를 정점으로 호국신사와 충혼비가 여러 지역에 세워져 있다


1976년 5월 일본 국회도서관 조사입법고사국 (調査立法考査局)이 정리한 「야스쿠니신사문제자료집」에는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돼 (‘함께 모셔져 있다'는 뜻) 있는 ‘조선' 출신이 20,636명이라고 되어 있다. 2001년 8월 12일 동경신문 (東京新聞)은 그 수를 21,181명으로 보도했다. 545 명이 늘었다. 앞의 자료집에 따르면 “ 1946년 이후 37회에 걸쳐 합사가 이루어졌다”니 그 사이에도 추가 합사가 진행됐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보도의 정확성은 확인할 수 없다. 야스쿠니신사가 명부 공개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한국정부는 1971년부터 총 다섯 차례에 걸쳐 일본정부로부터 일제시대 때 강제징용을 당했던 48만 명 분의 명부를 넘겨받았다. 해방 60주년 만에 국가 차원의 일제 하 강제동원 진상조사가 시작된 올해, 한국정부는 48만 명 가운데 19,956명의 명부에 ‘합사'라는 글자가 찍혀 있음을 확인했다


<안녕 , 사요나라> 주인공 이희자씨는 부친이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돼 있다는 사실을 1997년에 알았다. 1992년 강제징용자 명부에서 부친의 사망기록을 확인하고도 5년이 흐른 뒤였다. 명부에 적힌 ‘합사'라는 단어의 의미를 몰랐기 때문이다. 육군 군속으로 끌려간 부친 이사현씨는 1944년 6월 중국 광서성에서 사망했고, 1959년 4월 야스쿠니에 합사됐다. 1944년에 돌아가신 양반이 어째서 해방 되고도 십수년 뒤에 야스쿠니에 합사됐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야스쿠니신사는 일본인 유족들에게는 합사사실을 통보했다. 

 

한국과 대만의 유족들, 그리고 오키나와와 일본인 유족 가운데서도 합사취하를 요구하는 이들이 있다.
이에 대해 야스쿠니는 이렇게 답해왔다.
-> 전사한 시점에는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사후에도 일본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
     일본인으로 전투에 참가한 이상, 야스쿠니 합사는 당연하다.
-> 일본군인으로 죽으면 야스쿠니신사로 돌아간다는 마음으로 싸우다 죽었기 때문에
    유족이 신청하여 취하할 수 없다.
-> 합사를 취하한 전례가 없다.
-> 신도의 교리상 한번 신으로 모신 이를 취하할 수 없다.

* 대만인 합사자수는 국회도서관 발행「자료집」27,656 명, 동경신문 보도로는 27,863명이다.
* 오해 하나 : 야스쿠니신사에는 유골이 없다. 위패가 있는 것도 아니다 . 야스쿠니가 혼령을 모시는 방법은 ‘영세부'라는 데 이름을 올리는 것이다.
 

 


2001년 4월 25일 고이즈미 자민당총재 8.15 참배 공언
2001년 4월 26일 고이즈미총리 취임
2001년 8월 13일 고이즈미총리 야스쿠니신사 첫 참배
2002년 4월 21일 고이즈미총리 두 번째 야스쿠니신사 참배
2003년 1월 14일 고이즈미총리 세 번째 야스쿠니신사 참배
2004년 1월 1일 고이즈미총리 네 번째 야스쿠니신사 참배 . 헌화료 3만엔 봉납
2005년 3월 7일 자민당 신헌법 기초위원회 사회적 의례와 풍습적인 행사의 범위라면 국가나 자치단체에 의한 일정의 종교활동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규정을 개정할 방침이라고 천명
2005년 8월 1일 자민당 신헌법기초위원회 신헌법 초안 발표. 제 20조 (신교의 자유) : 국가 및 공공단체는 사회적 의례의 범위내에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 종교교육 그 밖의 종교적 활동을 해서는 안된다.
2005년 10월 17일 고이즈미 다섯 번째 참배

2006년 8월 15일도 참배했다고 하니 모두 여섯 번 참배
 

2001년 6월 29일 한국인 군인, 군속과 그 유족 252명은 야스쿠니신사합사취하 등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동경지방 재판소에 제소하였다 . 이 소송의 주요한 청구취지는 ,

① 원고 친족의 종교법인 야스쿠니신사에의 합사를 철폐하고

② 희생자 유골을 반환하고

③ 원고 친족의 생사, 사망한 경우는 그 연월일, 장소, 원인, 태양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손해배상을 하고

④ 사죄문을 원고에게 교부하고 그 사죄문을 한국과 일본의 주요 일간지에 게재하라는 것이다 .

2001 년 11 월 1 일 오사카 , 마쯔야마 후쿠오카지방재판소 고이즈미총리 야스쿠니신사참배위헌소송 제소 ( 한국인 119 명 원고로 참여 )

고이즈미총리 원고들을 향해 ‘이상한 사람들' 로 지칭하며 망언 .

2001년 12월 25일 한국인 유족 등 고이즈미총리 ‘이상한 사람들' 발언에 대해 오사카지방재판소에 명예훼손 제소

2003년 9월 26일 야스쿠니명예훼손 판결. 재판부 총리대신 공적입장에서는 부적절한 발언 지적, 청구는 기각 .

2004년 2월 27일 오사카지방재판소 판결 , 공적참배 인정 . 위헌 , 손해배상청구는 기각 .

2005년 7월 26일 오사카고등재판소 총리의 야스쿠니신사참배 헌법 위반여부 판단하지 않은 채 기각 판결 .


야스쿠니신사는 120년도 넘는 역사가 깊은 신사입니다. 쇄국정책을 폈던 일본에게 외국은 혹독하게 개국을 요구했습니다. 나라는 개국파와 쇄국파로 국론이 크게 분열돼 혼란스러웠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그때까지 300년 넘게 일본의 정치를 맡았던 도쿠가와 막부는 이 난국을 타개할 힘을 잃어버려 천황각하에 정권을 돌려준 것입니다.

그 후 천황각하 아래 모든 일본인들이 하나의 마음이 되어 아름다운 일본의 전통을 되찾고, 근대적인 찬란한 나라를 만들고 세계인들과 사이좋게 지내자는 생각이 싹텄습니다. 그리고 일본이 재탄생 하는 가운데 불행한 국내 전쟁이 발발, 나라를 위해 생명을 바친 많은 사람이 나온 것입니다.

새로운 역사를 만들기 위해 전사한 그들의 업적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메이지 천황은 메이지 2년 6월,
'도쿄초혼사 '라는 이름으로 신사를 건립했습니다. 그리고 메이지 12년 지금의 ‘야스쿠니신사'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메이지천황이 명명한 ‘야스쿠니(靖國)'라는 이름에는 ‘나라를 평안히 해서 언제까지나 평화로운 나라로 만들자'라는 천황각하의 깊은 심정이 담겨져 있습니다(‘靖'라는 글자는 ‘安'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야스쿠니신사가 모시는 신들은 모두 천황각하의 심정처럼 영원한 평화를 기원하면서 일본을 지키기 위해 존귀한 생명을 나라에 바친 분들입니다. 일본의 독립과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서는 슬픈 일이지만 청일전쟁 러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 만주사변 그리고 대동아전쟁(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습니다. 메이지천황은 러일전쟁이 발발했을 때 “세계의 국가들은 모두 형제와 마찬가지인데 왜 평화가 깨지고 마는가”라는 슬픈 노래를 읊었습니다. 전쟁은 정말로 슬픈 사건이지만 일본의 독립을 굳건히 지키고 주위 아시아 국가들과 함께 평화롭게 번영하기 위해서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전쟁에서 생명을 바친 많은 분들이 야스쿠니신사의 신으로 계십니다.

야스쿠니신사에는 군인들뿐만 아니라 여성 신들도 57,000 여주 (柱) 가 계십니다. 여러분과 같은 또래의 소년·소녀뿐만 아니라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어린이들도 모시고 있습니다. 대동아전쟁의 경우 , 오키나와에 미군이 공격해 왔을 때 군인과 함께 맞선 중학생들이 있습니다. 고향 오키나와를 지키기 위해 오키나와 사범학교와 현립 제 1 중학 , 제 2 중학 등 9 개교의 남자생도 1,600 명이 ‘철혈근황대'라는 이름으로 군인과 똑같이 싸웠습니다. 또 ‘히메유리부대' ‘시라우메부대' 등의 여자생도 460여명이 간호부로서 전장에서 활약했으며 탄환과 식량을 등에 지고 전쟁터를 누볐습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이 전사했으며, 지금은 야스쿠니신사에 모셔져 편히 잠들고 계십니다. 적 잠수함의 어뢰공격을 받아 최후를 맞은 1500명도 있습니다 .이 가운데에는 700명의 소학교 아동도 있었습니다 . 간호부, 종군기자들 모두 조국 일본을 위해 생명을 바친 존엄한 신령으로 소중하게 모시고 있습니다. 또 대동아전쟁이 끝났을 때 전쟁의 책임을 전부 짊어지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도 있습니다. 게다가 전후 일본과 싸웠던 연합군의 일방적인 껍데기 재판에 의해 ‘전쟁범죄인'이라는 누명을 쓰고 무참히 죽은 1068명도 계십니다 .

야스쿠니신사는 국민 모두가 참배하는 신사입니다.
야스쿠니신사의 신들은 ‘일본의 독립과 평화가 영원히 계속되도록, 그리고 선조가 남겨준 일본의 찬란한 전통과 역사가 언제까지나 이어지기를' 기원하며 전쟁터에서 귀중한 생명을 바친 것입니다. 일본이 지금 평화롭게 번영하고 있는 것은 야스쿠니신사에 모셔진 신들의 덕분입니다. 이 분들이 전쟁 때 자신의 생명까지 바치며 지켜준 ‘우리들의 일본'을 지금부터라도 소중히 간직하십시오 .그리고 다같이 야스쿠니신사에 참배 , 신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바쳐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을 맹세합시다 . 흰 비둘기도 신사의 정원 위를 날면서 여러분이 참배하러 오는 것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해콩 2006-08-17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815기획 야스쿠니와의 전쟁 제1편-야스쿠니와 세 여자


◎ 방송일시 : 2006년 8월 13일 (일) 밤 8시, KBS 1TV
◎ 글·연출 : 이호경

◎ 주요내용


'안녕, 사요나라'라는 제목의 한일합작 다큐멘터리가 있습니다.

한일 양국의 시민단체가 주도해서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이 영화는,
아버지가 야스쿠니에 합사된 이희자 씨(태평양전쟁 피해보상 추진위원회 대표)와
그녀의 야스쿠니와의 싸움을 돕는 양심적인 일본인 후루카와 씨의 이야기입니다.

'안녕, 사요나라'를 눈물 흘려가며 감명 깊게 본 것이 5월 초 무렵이었습니다 .
영화를 보고 나서, 아버지가 야스쿠니에 무단 합사된 이희자 씨와 그 반대의 입장에
있는 일본인을 비교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번뜩 들었습니다.
서둘러 A급 전범 도죠 히데키의 손녀이며, 이미 한 차례 KBS와 인연이 있는
도죠 유우코와 연락을 취해 그녀를 섭외할 수 있었습니다.

A급 전범 도죠 히데키, 그의 손녀 도죠 유우코


유우코 씨의 할아버지 도죠 히데키는 육군대장이자 진주만 공격을 결정한
전쟁내각의 수상이었던 인물로 1978년 야스쿠니에 합사되었습니다.
도죠 유우코는 현재 일본에서 야스쿠니의 입장을 가장 분명히 대변하는 여성으로
이름이 높습니다. 일본에서 그녀를 취재하던 도중, 몇 군데의 일본 언론으로부터
'도죠 유우코를 취재하는 KBS'를 취재하고 싶다는 제의를 받았을 정도로
그녀의 지명도는 높더군요.

야스쿠니로 진격하라, 가오진 쑤메이


이희자와 도죠 유우코, 두 여성의 이야기를 촬영하던 도중,
타이완 원주민 출신 국회의원 가오진 쑤메이(원주민명 지와스 아리)를 알게 됐습니다.
가오진 쑤메이.
영화 "결혼피로연"의 여자주인공으로부터 5년 전 국회의원으로 변신한,
특별한 이력의 여자.

그녀의 활동 전적을 조사해 보니, 그동안 정말 목숨을 걸고 야스쿠니와 싸워왔더군요.
특히 그녀는 일본우익의 테러 대상 명단에 올라있어 일본 경찰까지 쑤메이의 활동에
바짝 긴장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녀가 야스쿠니에 요구하는 것은 단하나 "還我祖靈"이었습니다.
야스쿠니에 합사된 대만 원주민 2만 8천여 명의 영혼을 돌려달라는 것입니다.
그녀의 미모와 폭발적인 투쟁방법에 매료된 취재팀은 지체 없이 대만으로 날아갔습니다.

세 여자, 서울에 모이다


취재가 끝나고 난 뒤,
촬영팀은 이 세 명이 한자리에 모여 야스쿠니에 대해 이야기할 자리를 제안했고,
세 여성 모두 '처음 있는 일인 만큼' 흔쾌히 응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지난 7월 19일, 이희자, 도죠 유우코, 가오진 쑤메이,
야스쿠니를 둘러싼 세 여성이 마침내 서울에 모였습니다.

대담을 위해 KBS 스튜디오에 모인 세 사람 모두에게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습니다.
특히 적진(?)에 필마단기로 뛰어든 도죠 유우코 씨는
통역에게 '무섭다, 불안하다'란 말을 반복했다고 합니다.

자기 소개로부터 시작한 토론-
긴장했던 것처럼 보이던 도죠 유우코 ,
그러나 그녀는 곧장 야스쿠니를 옹호하는 모든 논리를 풀어놓았습니다.
촬영장의 모든 스탭들이 "일본인은 정말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구나!"하는
경악에 휩싸였습니다. 이에 맞서 이어진 이희자 씨와 가오진 쑤메이의 반론.
잔뜩 날이 선 분위기 속에서 두 시간 반 동안 이어진 토론은
결국 언성을 높이던 당사자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파국을 맞이했습니다.
도저히 좁혀질 수 없는 의견차 만을 확인한 채.


야스쿠니 신사와 밀접히 연관된 세 여자의 삶과 의견을 지켜보는 동안,
야스쿠니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는 주말 저녁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생각의 옳고 그름은 차치하더라도,
먼 길 찾아와 일본인의 속마음을 털어놔 준 유우코 씨의 용기에 감사 드립니다.

-----------------------

815기획 야스쿠니와의 전쟁 제2편
국제공동투쟁의 기록


◎ 방송일시 : 2006년 8월 20일 (일) 밤 8시, KBS 1TV
◎ 글·연출 : 이호경

◎ 주요내용

위령(慰靈)과 현창(顯彰),

야스쿠니 신사의 본질적인 기능은 위의 두 가지를 말합니다.
야스쿠니를 반대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부하는 것은 침략 전쟁에 참가해
죽어갔던 과거를 찬양하고 또 다른 죽음을 장려하는 `현창` 입니다.
피붙이가 이런 시설에 신으로 모셔진 것에 반대하는 한국과 일본 그리고
타이완의 유족들이 있고, 정치 지도자가 이 시설에 참배하는 것을 반대하는
일본의 양심 세력들이 있습니다.
 


작년부터 야스쿠니와 싸우는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 뭉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올해 드디어, 야스쿠니에 대한 개별적 대응에 한계를 느끼고 야스쿠니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국제 연대 조직 <反야스쿠니 공동 행동>을 결성했습니다.
'야스쿠니는 일본 고유의 문화이므로 반대 운동은 내정간섭'이라는 일본 측 주장과 달리
이제 야스쿠니는 국제적인 이슈가 되고 말았습니다.

<反야스쿠니 공동 행동>은 올해 8월 야스쿠니와의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反야스쿠니 공동행동>의 깃발을 들고,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 야스쿠니로 한국에서,
타이완에서, 그리고 일본 각지에서 야스쿠니 반대자들이 모입니다.

2006년 8월15일 우리는 야스쿠니로 간다 !

"살이 부르르 떨리는 분노를 느꼈지만, 이제 다시 시작입니다. " 


이희자


태평양전쟁 피해보상 추진 위원회 대표.
1945년 6월 중국전선에 강제 동원되어 전사한
아버지가 야스쿠니에 합사됨.
5년 전 부친을 야스쿠니에 무단 합사한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제기. 2006년 5월 25일 기각결정.


"이것은 정치의 문제가 아니라, 양심, 시비, 공정, 평화의 문제입니다." 


가오진 쑤메이


대만 원주민 국회의원.
50년에 이르는 식민통치의 기억.
야스쿠니에 합사된 2만 8천여 대만 원주민의 이름을
영새부에서 지우기 위해 투쟁 중.
고이즈미의 야스쿠니 참배를 고소한 결과
작년 9월 오사카지재에서 '수상의 신사참배는
위헌'이라는 획기적인 헌법판단을 쟁취.
그러나 위헌 결정 직후 고이즈미는 임기 중 다섯
번째 야스쿠니 참배 강행. 올해 일본 우익들이
대만에 설치한 `원주민 전사자를 위한 기념비`를
철거한 탓에 일본 우익 테러의 표적이 됨.


"입을 다물고 있으면 침략전쟁을 시인하는 것이 되고
이것은 피해를 입은 주변국가에 대해 죄를 짓는 것입니다"


쓰노다 사부로


기독교 목사.
크리스챤이었던 두 형이 태평양 전쟁 때
전사되어 야스쿠니에 합사됨.
1968년 야스쿠니에 합사된 두형을 빼
달라고 최초로 야스쿠니에 합사 취하 요청.


"내 아이들과 손주, 오키나와에 사는 사람들이 제2차 세계대전처럼 말려들지 않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것이 야스쿠니 참배에의 싸움이에요."


긴죠 미노루


오키나와의 독립을 꿈꾸는 조각가.
남태평양에서 전사한 아버지의 유골이 단팥빵과
함께 집에 도착. 그 단팥빵을 허겁지겁 먹었던
기억이 생생함.
나이가 들어 오키나와 비극의 근대사를 공부하면서
일본에 이용된 아버지의 죽음을 '개죽음'이라고
표현해 어머니와 다툼.
<오키나와 야스쿠니 위헌 소송단> 활동을 주도,
아버지의 전사를 침략 전쟁의 이데올로기로
이용하는 고이즈미의 야스쿠니 참배를 고소.


"전 원래 소송을 하거나 밖에 나가서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없는, 내성적인 성격입니다.
그러나 (두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분노와 슬픔을 이 재판에서 표출하고자 하는
생각으로, 충혼비 소송에 뛰어들게 되었습니다."

 

오늘, 강남영 샘의 수업은 그야말로 자료의 바다였다. 수업에 대한 그 분의 열정은 정말 대단한 것이어서 우리들에게 풀어먹이시려고 가지고 온 자료는 대단했다. 10년 동안 모으고 정리하고 그걸 다시 사용하기 편리하게 각종 컴터 기능을 활용해서 프로그램을 아예 만드셨다. 흠... 몇 가지 자료 가지고 금쪽처럼 아끼던 내 모습이 계속 부끄러워졌다.

다양한 방법의 수행평가를 하신다는데 솔직히 시간이 넘 짧아 이해하기 힘들었고 교과서를 버리고 推句로 하는 수업에 '삘'이 꽂힌다. 그렇지 않아도 [충남교육연구소]사이트에서 권정안 샘의 추구 강의 자료를 보았는데 둘을 같이 접목해서 수업한다면 한자, 한자어, 한문문장에 한시,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여러가지 철학적인 사유까지 한 방에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 현실적인 어려움은 있을 것도 같은데...

인상에 남는 몇 가지 내용 정리

1. 정기 지필 고사 때에는 시험범위를 누적적으로 적용하라.

2. 시험 문제는 절대로 '가'가 나오는 법이 없도록, 모든 학생이 기본 60점-양은 받도록 출제하라. 상위 학생들을 위해서는 한 두 문제만 어렵게.

3. 시험문제 은행을 만들어 공개하라. 유인가 확실하다.

4. 수행평가 - 학생들의 질문 횟수를 수행평가 점수에 반영하라. (학교 홈피의 쪽지/질문 기능 활용)

5. 학년 초 진단평가는 반드시 필요하다. 아이들의 수준을 제대로 알아야한다.

6. 아이들의 수준에 따라, 실천 가능한 과제를 내어주어야한다. (과제는 아이들과의 끊임없는 communication이다.)

7. 항상 생각하라. "나 때문에 학생들이 얼마나 '긍정적'으로 변화되었는가"

8. 학생평가=교사평가. 아이들이 받는 점수는 곧 나의 수업점수이다.

9. 우리 선조들의 초학 교재를 만만히 보지말고 꼭 한번 되짚어보라.

 

* 추구를 활용한 수업 방법*

1. 자전이용 뜻음찾기

짝이랑 함께 필순에 맞게 한자 정확하게 쓰기 시험

2. 번역 시키기 (한자의 뜻을 조사/어미로 연결하기. 고학년일 경우 숨은 뜻 찾기)

3. 성독을 통한 암기

4. 외워쓰기

5.  한시 지어보기-모둠별 활동 (2.3으로 의미단락 끊어서/압운/대구/기승전결 등등에 따라 가산점 부여)

6. 한 구 주고 대구 지어보기

7. 풀이 주고 문장 지어보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