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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6-09-01 0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귀뚜라미 엽서를 읽으며 '가을'을 생각한다. 아침엔 살갗에 닿는 바람의 느낌이 참 좋다. 베란다에 나가서 동 터 오는 하늘을 보며 이를 닦았다. ^^
가을이라 그런지 들고 나는 옛생각도 많고... 페이퍼에 적어볼까 했는데 출근하면서 다 잊었다. --;
 

제 서재 마이페이퍼에 댓글을 써도 올라가질 않네요.

[더좋은샘] -'몽둥이를 놓자 폭력이 보였다' 밑에... ㅠㅠ


이게 무슨 조화인지....

세 번이나 댓글을 썼는데 다 날아갔다는...

님들... 우찌된 영문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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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06-08-31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이는 것은 제대로 보이는뎁쇼. 댓글 1,2,3 말이죠. 잘 보입니다요.

해콩 2006-08-31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보이는 건 문제 없는데 제 서재에 제가 쓴 댓글은 올라가질 않는답니다.
어제 한 번, 오늘 두 번... 세 번이나... --;
좀 전에 알라딘측 답변으로는 재부팅하면 괜찮을 거라 하지만 오늘 아침에도 재부팅하고 글 쓴 거였거든요.. (이것도 날아가려나?)
집에 가서 다시 한 번 시도를... 일상으로 돌아오니 글쓰기도 쉽지 않습니다만.. 다시 게을러져서.. ^^;

잘 계시죠? ^^

해콩 2006-08-31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무사하군요. 그럼 다시 한 번 시도를? ... 집에 가서!! 건강하세요~

BRINY 2006-08-31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거기에 댓글 썼는데, 3번이나 도전했는데 다 날라갔어요. 그런데, 학교에서도 안되고 집에와서 해도 안되요.

BRINY 2006-08-31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는 댓글 달리는데 왜 거기만?

해콩 2006-08-31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명 이상한 거죠, 그쵸? @.,@
아직 학교랍니다. 아이들 수행평가 채점했어요. ^^; 능력없는 교사라 여지껏..
이제 집에 갈랍니다. 집에서 함 도전해봐야지. 안녕히 주무3

해콩 2006-09-01 0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 오늘 아침도 여전히 그 곳만 댓글이 달리지 않아요. OTL
 

몽둥이를 놓자 폭력이 보였다

국기에 대한 경례 거부로 징계를 앞둔 상동고 이용석 교사의 심경 고백…폭력을 휘두르는 교사가 된 자신을 돌아보며 전체주의에 반대하기로 결심

▣ 이용석 부천 상동고 교사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아침이다. 교문지도를 해야 하니까 서둘러야겠다. 아 참! 오늘은 학교 전체 운동장 조회가 있는 날이잖아.

아침 7시에 학교에 도착했다. 오늘의 수업 자료가 들어 있는 가방을 책상에 내려놓고 교문으로 나간다. 난 학생생활지도 담당 교사이다. 내 손에는 이미 나에게 잘 길들여진 단단한 몽둥이가 들려져 있다. 교문에서 학교 건물로 이어지는 진입로 가운데에 자리를 잡았다. 제대로 봐야 한다.


△ 지난 7월 징계위에 불참한 이용석 교사는 고민 끝에 출석하기로 결심했다. 8월4일 출석에 앞서 경기도 교육청 앞에서 연설하고 있는 이 교사의 모습.

등교하는 아이들의 머리 모양, 교복 상태, 운동화 종류, 왼쪽 가슴에 부착돼 있어야 하는 이름표, 남학생의 넥타이와 여학생의 리본 착용 여부 등 이 모든 걸 한눈에 보고 지나가는 아이들 개개인을 모두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등교하는 아이들이 왼쪽으로 일렬을 지으며 들어온다. “너, 머리!” “너, 운동화!” “너, 야! 너 말이야! 왜 못 들은 척하고 지나가! 엉?” 색출된 아이들은 진입로 오른쪽에 손 들고 서 있게 한다.

가장 싫어하는 인간과 닮아버린…

아침 7시50분. 등교 시간이 끝났다. 이제부터는 모두 지각생이다. 지각생들은 진입로 오른쪽에 일렬로 ‘엎드려뻗쳐’를 시킨다. “인문계 고등학생들이 제정신이냐?” “넌 또 지각이야?” 지각생들은 엉덩이를 맞는다. 잘 부러지지 않게 다듬어놓은 몽둥이로 초범과 재범 등을 가려내어 엉덩이를 때린다. 어쩔 수 없다. 이건 벌이니까. 지각했으니 정신을 차리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해서라도 아이들을 바로잡는 것이 결국 아이들을 위한 것이다. 아직 아이들은 성인이 아니기 때문에 때려서라도 가르쳐야 한다. 이건 교사의 역할이자 의무이다.

아침 9시. 학교 전체 운동장 조회가 시작된다. 국기에 대하여 경례! 저 뒤에서 시시덕거리는 아이들이 눈에 보인다. 아이들 사이를 가로질러 가서 정강이를 냅다 걷어찬다. “지금 국기에 대한 경례 하는 거 몰라?”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 중이다. 아이들의 줄이 흐트러지고 여기저기서 잡담이다. 아이들 사이사이를 돌아다니며 정강이 차기, 뒤통수 치기, 꿀밤 주기 등 온갖 잡기를 동원해서 ‘질서’를 잡는다. 수업이 시작되었다. “반장, 시작하자” “차렷! 선생님께 대하여 경례!”….

교사 1년차 때 나의 모습이다. 덕분에 나는 1년 내내 1교시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컵라면으로 아침을 때울 수밖에 없었다.


△ 지금의 학교는 ‘이 사회’를 ‘그대로’ 가르치는 곳이다. 국기 경례에 대한 다른 의견도 다양성으로 포용하지 못한다.

군대 시절에 많이 맞았다. 군기를 잡기 위해, 부대가 원활히 움직이게 하기 위해, 상명하복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 많이 맞았다. 그때 난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라고 느꼈다. 인간으로서 존중이 아니라 오로지 계급에 의해 명령과 복종만이 존재하는 그곳에서 사람이 사람에게 가하는 폭력을 보고 치를 떨었다. 난 결코 그렇게 하지 않으리라….

그러나 이미 나에게는 그 폭력이 내면화돼 있었다. 당연히, 혹은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 각인시키면서 아이들에게 똑같은 폭력을 사용하고 있었다. 교사가 된 뒤 1년을 보내며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인간의 모습을 내가 닮아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내 손에서 몽둥이를 놓은 것은 그로부터 1년 뒤, 상당한 시간이 더 흐른 뒤였다. 손에서 몽둥이를 놓은 뒤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단지 ‘내’가 ‘불안’했기 때문이다.

손에서 몽둥이를 놓은 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나에게 하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몽둥이를 들지 않은 손과 입과 마음에서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또 다른 형태의 폭력들이 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나에게 말이다.

‘하지 않는 것’으로 출발하다

여학생들에게 여자다움을, 남학생들에게 남자다움을 이야기하는 모습에서 남녀의 성역할을 고정시킴으로써 성적 차별을 당연하게 여기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많은 선생님들과 아이들이 있는 교무실에서, 꾸중을 듣고 있는 아이의 자존심이 무너져내리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잘못을 해서 교무실에 불려와 교사 앞에서 무릎을 꿇고 이야기를 듣는 아이의 수치심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프다는 아이에게 거짓말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되돌아가는 모습에서 신뢰가 무너지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똑같은 머리 모양과 똑같은 복장에서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 전체주의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교장 선생님께 대하여 경례!’라고 힘있게 말하는 마이크 소리에서 군대식 복종 문화가 자리잡은 학교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만들지도 않은 학생 두발 규정에 의해 머리카락이 잘려나가는 아이들의 인권이 무너져내리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국기에 대한 경례라는 구호에 모두가 국기만을 바라보는 모습에서 무조건적 충성을 요구하는 국가주의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러한 폭력은 학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학교는 ‘이 사회’를 ‘그대로’ 가르치는 곳이기 때문이다. 가진 자, 남성, 성인, 이성애자, 비장애인 중심의 획일화된 가치관과 그것이 반영된 제도가 ‘상식이고 정상’이라고 말하는, 단지 차이일 뿐인 것을 차별하는 이 사회를 그대로 가르치고 있다. 소외된 약자(없는 자, 여성, 청소년, 성적 소수자, 장애인)의 권리는 사회 전체를 위해 희생될 수 있다는, 전체를 위한 개인의 희생이 ‘미덕’이고 ‘우선’이라고 말하는 이 사회를 그대로 가르치고 있다. 그렇기에 말로는 다양성을 말하지만 사실은 ‘획일화된 상식’이 교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몽둥이만 들지 않았을 뿐, 획일화된 상식의 폭력이 이 사회에서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것이다.

모르는 게 약이라고 했던가. 아마 눈에 보이지 않았다면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학교장의 말 한마디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지금의 학교 구조 속에서 일개 교사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몇 명의 학생이 남았는지가 교사의 학생지도 능력으로 이해되는 입시지옥 학교 현실에서 일개 교사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아이들에게 인권은 사치가 되어버린 학교의 몰인권적 문화 속에서 일개 교사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스스로에 대한 좌절과 무기력함이 부끄러운 시간들이었다.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내가 ‘그렇게 하지 않는 것’에서 출발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나는 무엇으로 아이들과 함께할 것인가? 학교가 단순히 지식을 주입시키는 곳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하기에 나는 삶으로 아이들과 함께해야 한다고 믿는다. 나의 삶에서 차이를 차별하지 않고, 나의 삶이 획일적 상식이 아니라 다양성 그 자체를 인정하고, 나의 말과 행동이 어떤 대상에게도 폭력적이지 않도록 하는 것에서 말이다.

획일화된 상식을 거부한다

그래서 나는 하나만을 강요하는 모든 경향성을 반대한다. 그 경향성은 ‘전체주의’로 귀결될 것이다. 전체주의는 결국 모두에게 개인의 삶을 부정하는 억압과 폭력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 경향성은 ‘인간’을 존중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획일화된 문화와 규범에 반대한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개인과 존재의 다양성을 말살하기 때문이다. 학교장의 지시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되는 학교 구조에 반대한다. 그것은 일방적 복종만을 통해 이 사회를 그대로 재생산하기 때문이다. 또한 국기에 대한 경례(맹세)를 하지 않는다. 그것은 힘들 것 없는 동작과 몇 마디밖에 안 되는 문장이 무조건적 충성만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 이 교사의 행동은 수구보수 세력의 ‘전교조 죽이기’에 이용되고 있다. 8월4일 집회에 나온 민주노총 조합원들.

다르다는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람이 사람에게 폭력을 가할 수 있는 권리와 정당성은 과연 누구에게서 부여받은 것인가? 지금 이 획일화된 사회에서 내가 ‘인간’으로 존중받기 위해 나는 내 삶에서 작은 것이라도 ‘획일화된 상식’을 거부하고 싶다. 국기 경례(맹세)를 하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로 일부 학부모들은 나에 대해 경기도교육청에 민원을 접수시켰고, ‘학교를 사랑하는 학부모 모임’은 나를 교단에서 영구 퇴출할 것을 경기도교육청에 요구하고 있다. <조선일보>는 나를 ‘편향된 가치관 교육’의 문제 교사로 낙인찍었다. 그리하여 나는 경기도교육청으로부터 중징계 의결 예정을 통보받았다. ‘획일화된 상식’의 벽이 아직 매우 높다는 것에 마음이 우울하다. 앞으로 어찌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상황이 나 자신에 대한 시험장이 될 것 같다. 과연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차라리 헌법을 징계하라”

이 교사 사건은 수구 세력의 ‘전교조 죽이기’와 연결돼

▣ 수원=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이용석 교사의 징계위원회가 열린 8월4일 오후, 수원은 섭씨 35도까지 올랐다. 경기도교육청 앞에서는 40여 명의 동료 교사와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땡볕 속에서 장시간 집회를 벌였다. 이 교사는 고민 끝에 징계위 출석을 결심하고 나왔다. 그는 “위원회에 들어가 징계의 부당성을 말하겠다”며 집회 군중을 뒤로하고 건물로 들어갔다. 징계위는 오후 2시께 시작됐다.

국기 경례를 하지 않고 ‘편향 교육’을 했다는 이유로 징계위 회부까지 이어진 이용석 교사 사건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수구보수 세력의 일련의 ‘전교조 죽이기’ 속에서 돌출된 사건이라는 점이다. 도교육청의 ‘장학지도’로 해결되던 사안이 <조선일보>에 의해 대서특필돼 사회 문제화되고, 급기야 ‘학교를 사랑하는 모임’ 등 보수단체가 개입하기 시작한 점이 이를 보여준다. <조선일보> 등 수구보수 세력들은 전교조 부산지부의 통일교재 사건 등과 함께 이 교사를 지목하며 사상 공세에 ‘올인’하고 있다.

하지만 이 교사 사건은 근본적으로 사상과 양심의 자유에 관한 문제다. 우리는 국기 경례를 하지 않는 개인에게 과연 불이익을 줄 수 있느냐는 논쟁적 장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경기도교육청은 이 교사의 행위가 공무원의 품위 유지와 성실의 의무를 위반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평화인권연대 등 39개 단체가 모인 인권단체연석회의는 8월3일 성명을 내어 경기도교육청의 징계 시도를 “우리 사회의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검열하고 교사가 소신 있게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는 권리를 박탈하는 위험한 행동”이라고 비판했다.

징계위는 5시께 끝났다. 온도는 2도밖에 내려가지 않았다. 이 교사는 “가치관에 관한 문제는 징계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해 사실관계에 대해서만 답변을 했다”며 “이 때문에 징계하려면 차라리 헌법을 징계하라”고 말했다. 경기도교육청은 최종 징계 수위를 결정해 이 교사에게 통보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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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6-08-30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가공무원법을 정말 해쳤을까

이용석 교사의 징계 근거가 된 두 조항, 법적으로 타당성 없어 … 징계가 오히려 교권과 자유권에 대한 침해가 된다는 사실이 심각

▣ 김진 변호사

전화를 받고 처음에는 과장된 말인 줄 알았다. 국기에 대한 경례를 안 하겠다고 한 교사를 징계하겠다니, 그런 일이 있을 리 없지. 과장하기 좋아하는 기자가 부풀린 이야기겠거니 했다. 보나 마나 다른 징계 사유들이 잔뜩 있고 그중의 하나일 거라 짐작했다.


그런데 징계요구 사유서를 보고 깜짝 놀랐다. 정말 수업시간에 한 몇 마디 말 때문에 징계를 요구한다는 것이 전부다. 국기 경례를 하지 않는다고 한 말, 군대는 되도록 안 가는 게 좋다고 한 말, 이순신 장군을 존경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 이란다.

국기에 관한 ‘법령’ 어긴 적 없다

그래서 당연히 초등학교 교사인 줄 알았다. 초등학교 아이들이라면 이런 말에 나쁜 영향을 크게 받는다고 보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될 테니까. 그런데 그것도 아니다. 고등학교 3학년 교사라는 것이다. 그것도 다양한 사고와 가치관을 가르쳐줘야 하는 ‘독서’ 선생님이란다. 징계 결과가 경징계도 아니고 정직 3개월(겨우 3개월이라는 생각은 금물, 보직·연금이 제한되고 교원 징계 가운데 해임 다음으로 중한 징계이다)이라는 말에 다시 한 번 놀랐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문제된 언급이라는 것이 사실과 다르고, 그동안 금지된 모의고사를 진짜 못하게 하고 ‘튀는 언행’으로 학부모들과 긴장관계를 빚어왔다거나, 부장교사가 학부모 명의의 진정서를 대필했다든가 하는 주변 이야기는 일단 접어두고, 순전히 “18살 학생들 앞에서 수업시간에 이런(그들이 주장하는 그대로) 이야기를 한 것”만으로 본다면, 이것이 과연 징계 사유가 될 수 있을까.


△ “‘곰표 씽크빅’으로 머리를 키우면 뭐하겠는가. 논술교사조차 전체주의와 소수자 권리를 이야기했다가 징계를 받는 교실에서 12년을 갇혀 살아야 하는데”. 8월7일 고려대에서 수시 1학기 논술고사를 치르고 있는 학생들.(사진/ 한겨레 윤종규 인턴기자)

경기도교육청이 법률상 근거로 인용하는 국가공무원법 제56조는 “법령을 준수하며 성실히 직무를 수행하여야 한다”는 법령 준수 및 성실의무이고, 제63조는 “직무의 내외를 불문하고 그 품위를 손상하는 행위를 하여서는 아니된다”는 품위유지 의무이다.

먼저 법령 위반이라는 부분. 어떠한 법령인지 징계요구 사유서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일단 ‘국기’에 관한 법령을 생각해본다. 우리 헌법은 국기에 대해 특별한 규정을 두고 있지 않다. 다만 국기에 관한 규정으로 국기를 모욕할 목적으로 이를 손상시키거나 비방한 자를 처벌하는 형법 제105·106조가 있고, 법률상의 근거는 없지만 ‘제작·게양 및 관리 등에 관한 사항’을 정한 대통령령인 ‘대한민국 국기에 관한 규정’과 역시 법률상의 근거는 없이 국무총리가 훈령으로 정한 ‘태극기사랑운동 실천지침’ 정도를 생각해볼 수 있다. 뒤의 두 가지는 모두 법률에 근거가 없을 뿐 아니라 내용 역시 관리나 운동에 관한 지침 정도에 불과해 누군가를 징계하는 근거가 될 수 없고, 이 교사가 태극기를 모욕할 목적으로 손상하거나 비방한 일도 없으니 형법도 적용될 수 없다. 공무원법에도 청렴과 성실의무, 정치활동 금지 규정은 있지만 국기를 존중해야 한다거나 국기 경례를 해야 한다는 의무는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법령을 위반했다는 것인지.

두 번째 징계 사유는 품위유지 의무 위반이라는 것이다. ‘품위’라는 것이 보는 사람과 계층에 따라 다를 수 있기는 하지만, 교육공무원에게 요구되는 ‘품위’란 “국민에 대한 교육자로서의 직책을 맡아 수행해나가기에 손색이 없는 인품(대법원 2000년 6월9일 선고 98두16613판결 등)”을 말하지, 학교 관리자나 학부모들의 취향에 맞는 성격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수업시간에 국기 경례나 이순신 장군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고 해서 그것이 이 법에서 말하는 품위유지 의무에 위반했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교권의 핵심 ‘교육 내용 결정권’ 흔들어

그러나 이렇게 법률상 징계 사유가 없다는 것보다 더 심각한 것이 두 가지 더 있다. 그 하나는 이것이 교육 내용에 관한 제한으로 헌법과 교육기본법이 보장하는 “교육의 자주성·전문성 존중의 원칙”을 정면으로 위반하고 있다는 점이다. ‘교육 내용 결정권’은 교권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으로서, 이를 헌법에서 특별히 보장하는 이유는, 교육이 외부 세력의 부당한 간섭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교육자 내지 교육전문가에 의해 주도되고 관할돼야 할 필요가 있다는 데서 비롯되며, 인간의 내면적 가치 증진에 관련되는 교육문화 관련 분야에서는 개입이 가급적 억제되는 것이 온당하기 때문이라고 한다(헌법재판소 1992년 11월12일자 89헌마88 결정). 미성년자인 학생들을 지도하기 때문에 대학 교수와는 달리 교육의 ‘자유’를 가지지 않는다는 대법원이나 헌법재판소의 입장을 존중한다고 하더라도, 이는 교육 내용을 마음대로 정하는 ‘자유’의 문제가 아니라(대법원이나 헌법재판소가 문제 삼은 것은 교과서를 사용하지 않는다거나 교육과정을 따르지 않는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정해진 교육과정의 틀 내에서 한 구체적인 수업 내용을 문제 삼는 심각한 수준이다.


△ 7월31일 서울 영등포구 전교조 사무실에서 장혜옥 전교조 위원장(가운데)이 보수신문의 색깔 공세 중단을 촉구하고 있다.

독서를 지도하는 교사가, 전체주의와 소수자의 권리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언급한 것을 가지고 징계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바로 이런 식의 국가적 개입이 주입식·획일적 교육의 폐해를 낳는다는 것은 말해봐야 입만 아프다(아무리 ‘곰표 씽크빅’으로 머리를 키우면 뭐하겠는가. 이런 말도 자유롭게 할 수 없는 교실에서 12년을 갇혀 있어야 하는데).

또 하나의 문제는 교육 내용의 결정권 문제를 떠나 이 교사가 자연인으로서 가지는 표현과 사상의 자유도 침해하고 있다는 데 있다. 문제로 삼고 있는 발언은 이 교사가 행한 수업의 전체적인 흐름도 아니고 자신의 견해를 아이들에게 말한 ‘표현’ 부분이며, 사회적 이슈에 대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하나의 의견’이다. 교사 역시 한 시민으로서 시민이 가지는 모든 권리를 자유롭게 향유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교육 목적에 위반되거나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이상 온전히 보장돼야 한다.

“교원은 그의 수업 또는 교육활동에 있어서는 종속적 행정 집행자나 법규의 적용자가 아니며, 국가나 지방자치단체 또는 사립학교의 설립·경영자나 학생들의 부모 및 그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제3자들의 지시에 단순히 복종하는 사람도 아니다. 미래지향적, 가치창조적 입장에서 홍수같이 밀려드는 정보를 학생들이 정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학생들에게 사고방식을 길러주며 학생들로 하여금 이해력과 통찰력을 개발하도록 하여 지적인 흥미를 유발시킬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도록 하고, 학생들이 사물에 대한 자기 나름의 견해를 가질 수 있도록 가치적인 문제들에 대하여 학생을 지도하는 사람인 것이다.”

헌재의 91년 판결을 다시 보라

내가 하거나 어느 무정부주의자가 한 말이 아니다. 바로 15년 전 헌법재판소의 다수 의견이 “교사는 노동자가 아니므로 노동조합을 가질 수 없다”(헌법재판소 1991년 7월22일자 89헌가106 결정)고 하면서 근거로 단 말이다. 이제 이 말을 그대로, “전교조 교사의 편향 교육”이라는 일부 학부모 단체의 진정과 일간신문의 기사를 근거로 한 징계 앞에 되돌린다면 어떨까?


해콩 2006-08-30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안 합니다

▣ 이계삼 경남 밀양 밀성고 교사

이용석 선생님께

지난 8월4일 보충수업을 하기 위해 학교에 가 있던 중에 쉬는 시간마다 <연합뉴스> 사이트를 들락날락했습니다. 그날 선생님에 대한 경기도교육청의 징계 결과가 나올 것이라는 보도를 보았기에 기다리던 참이었습니다. 점심을 먹고 어느 포털 사이트에 접속했을 때 마침내 뉴스가 떴더군요. “국기경례 거부 교사 정직 3개월 중징계….” 혹시 파면이라도 당하면 어쩌나 싶어 걱정했던 터라 약간 안도가 되기도 했지만, 이내 다시 노여움이 밀려왔습니다. 그것은 선생님이 당한 일이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제 자신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경쟁과 배제야말로 편향 교육

선생님, 실은 저도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지 않습니다. 교직에 들어선 이후 한 번도 국기 경례를 하지 않았습니다. 제게 무슨 거창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저는 가슴에 손을 얹고 무언가를 바라는 행위 자체가 사무치게 싫습니다.


△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1년에 몇 번 전체 모임 자리에서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하겠노라’는 맹세의 주문 속에 고요히 가라앉은 아이들을 보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저는 사람들 눈에 띄기 싫어 대열 맨 뒤쪽으로 빠집니다. 얼마 전까지는 김선일, 전용철, 홍덕표씨가 생각났고, 이제는 마흔 살 나이에 장가도 못 가보고 경찰 방패에 머리가 짓이겨져 한 많은 ‘노가다’의 삶을 마감한 하중근씨가 떠올라 마음 아플 것 같습니다.

선생님, 알량한 게 양심입니다. 제가 처음 교직 생활을 시작한 곳은 경기도였습니다. 사립학교 공채에 합격해서 발령 통지를 받고 학교에 들렀을 때 교감 선생님이 대뜸 제게 “전교조에 들 거야, 안 들 거야?” 하며 재우쳐 묻더군요. 공교육과 저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그분이 우리 반 아이들을 불러서 제 수업 내용을 물어보는 일도 심심찮게 겪었습니다. 학교에 있다 보면 ‘이건 정말 아니다’ 싶어도 ‘어쩔 수 없이 따라가야’ 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저는 혼자서 지킬 수 있는 게 있다면 끝끝내 지키고 싶었고, 국기 경례를 하지 않는 것도 그 일부였습니다.

선생님, 저도 수업 시간에 아이들과 수많은 세상 이야기를 나눕니다. 국기 경례를 하지 않는 이유를 이야기한 적도 있습니다. 물론 아이들은 의아해합니다만, 선생님처럼 저도 그런 아이들에게 저처럼 하기를 바란다고 이야기한 적은 없습니다. 아이들은 바보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인생이란 얼마나 복잡한 여정입니까. 그 숱한 계기 속에서 길어올린 제 세계관을 제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직선으로 뒤쫓아오게 하는 것은 제 자신이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알아서 할 일입니다.

도둑질을 가르치고 폭력을 선동하는 것이 아니라면, 교사는 자신의 경험에 따라, 거짓 없이, 자기 생각을 드러낼 의무가 있습니다. 그것이 교단에 로봇을 세우지 않고 사람을 세운 이유입니다.

<조선일보>가 편향적 교육이라며 입에 거품을 물지만 12년의 학교 교육이야말로 곧 경쟁과 배제, 침묵과 타율을 내면화하는 세계적으로도 유례없는 편향적 교육이 아닙니까. 아이들끼리 쓰는 말로 ‘니 코나 닦을’ 일입니다. <조선일보>는 자신들이 지난 수십 년간 온 국민을 상대로 해온 ‘극우 편향 세뇌 교육’도 이 기회에 한번 생각해보기를 바랍니다.

그러니, 나도 고발하라

선생님, 얼마나 비열하고도 무서운 일입니까. 한국에서 가장 힘이 세다는 언론이 일개 고교 교사 한 사람을 지면에서 뭇매를 때리고, 결국 징계로까지 몰아가는 이 형국은…. 선생님, 기운 내시기 바랍니다. 저 또한 일개 교사에 불과하지만 저도 선생님과 연대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몇 년 전 <조선일보>가 최장집 교수의 사상을 검증하겠다고 소동을 피울 당시의 홍세화 선생 흉내를 좀 내야겠습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위에서 밝혔다시피 나 또한 이용석 교사와 별로 다르지 않다. 그러니, 나도 고발하라. 나 같은 교사가 제법 될 텐데, 다 찾으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다. 이런 것도 당신들 양심의 발로라면 할 말은 없는데, 당신 양심이 소중한 만큼 남의 양심도 소중하다는 것만은 좀 알아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제발 부탁인데, 당신들 나라 걱정하는 마음은 하늘도 감복하고 있으니 이제는 좀 자제해주기를 바란다.”


프레이야 2006-08-30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기사 담아갑니다.. 교련까지 받았던 그 시절이 생각나네요. 별로 나아진 것 없는 상황입니다. 고1때 싫은 걸 강요하시는 담임선생님과 붙었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교무실에서 설교를 들었죠. 싫어도 해야하는 게 있다고. 개인의 선택권은 주지도 않고 말이죠. 상대적 약자에게 가해지는 그 모든 폭력에 반대하며...
 



나루세 미키오 회고전
컬러 | 일본 | 영화등급 : 15세관람가 | Director 나루세 미키오

나루세 미키오 회고전을 개최하며...


나루세 미키오가 오즈 야스지로나 미조구치 겐지 만큼 
중요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 카이에 뒤 시네마

<부운>은 내가 절대 만들 수 없는 영화다.
- 오즈 야스지로

나루세는 나의 영화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감독이다.
- 허우 샤오시엔 

빛의 사용에 통달한 거장 중의 거장
- 장 피에르 리모쟁 
  


여성영화의 장인, 멜로드라마의 천재로 불린 나루세 미키오의 걸작 20편이 부산을 찾습니다. 개관 이후 구로사와 아키라, 미조구치 겐지, 오즈 야스지로와 같은 일본 거장 감독을 소개해 온 시네마테크 부산은 또 한 명의 거장 감독 나루세 미키오의 회고전을 개최합니다. 한눈에 확연한 스타일이 드러나지 않는 나루세는 그 때문에 가장 늦게 발견됐지만, 날이 갈수록 평가가 높아져 오늘에는 “빛의 사용에 통달한 거장 중의 거장”(장 피에르 리모쟁), “영화만이 가능한 한없이 풍요로운 단순함의 미학의 실천가”(하스미 시게히코)로 추앙되고 있습니다. 

나루세 감독은 1905년 도쿄 출생으로, 1930년 단편희극 <찬바라 부부>로 데뷔하여 유작 <흐트러진 구름>(1967)에 이르기까지 무성에서 유성, 흑백에서 컬러의 시대를 넘나들며 89편의 수준 높은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생전에 다른 감독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프랑스 영화전문지 <카이에 뒤 시네마>를 통해 일본의 4대 거장으로 불리웠고, 수잔 손탁, 장 두셰 같은 저명한 평론가들에게 칭송을 받았다. 또한 다니엘 슈미트와 허우 샤오시엔, 에드워드 양과 같은 거장들이 경의를 표했습니다. 

이번 회고전에선 그의 대표작뿐만 아니라 <아내여, 장미처럼>(1935)에서 시작하여 <소문난 처녀>(1935) <츠루하치 츠루지로>(1938), <진심>(1939)과 같은 그의 초기작 4편도 선보입니다. <소문난 처녀>와 <진심>은 반세기 이상 상영본이 없어 공개되지 않다가, 90년대 후반에 복원된 영화로 국내에서는 처음 소개됩니다. 또한, 다카미네 히데코가 나루세의 영화에 처음으로 출연한 <버스 안내양, 오코마>(1941)와 <오누이>(1953) <흐트러지다>(1964)도 국내에서 처음 상영됩니다. 

서민극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당시 프랑스에서 개봉된 유일한 작품인 <어머니>(1952)를 비롯하여 <번개>(1952) <부부>(1953) <아내>(1953)와 같이 2차 대전 후 야기된 사회 문제로 가족이 겪게 되는 고뇌를 담은 작품들도 상영됩니다. <만국>(1954)과 <흐르다>(1956)는 게이샤의 삶을 조명하는 데, 특히 <흐르다>는 나루세의 가장 비통한 작품 중의 하나로 퇴락한 게이샤들의 눈물 나도록 슬픈 세계를 매력적으로 그려냈습니다. 

익히 알려진 걸작 <부운>(1955)과 <흐트러진 구름> <산의 소리>(1954) 등은 나루세 영화의 최고 정점을 보여줍니다. 

이번에 소개되는 20편의 작품은 나루세 감독 특유의 빛과 등장인물들의 움직임, 그리고 시선을 섬세하게 다룬 탁월한 연출과 함께 야마다 이스즈, 다카미네 히데코, 다나카 기누요 등의 당대 여배우들이 펼치는 애환 가득한 이야기를 통해 거장의 위대함과 깊이를 발견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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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6-09-06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힘내라! 힘겨운 발걸음을 이고 가는 여인아
2006.08.14 14:03
8월17일부터 하이퍼텍 나다에서 나루세 미키오 특별전

오즈 야스지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나루세 미키오도 그럴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물론 그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런 식의 이야기는, 나루세에게 “우리에게 두명의 오즈는 필요없다네”라고 했다는 기도 시로 쇼치쿠 촬영소장의 유명한 발언과 아주 먼 곳에 있는 좌표를 차지하는 것 같지는 않다. 나루세를 대하는 호오의 차이는 존재하더라도 여전히 그는 오즈라는 대가와 비교해 그 주변이나 뒤에 놓이는 영화감독 정도로 평가되고 마는 것이다. 그럴 경우 나루세가 세운 세계의 고유한 색채는 아무래도 많이 탈색되게 마련이다. 나루세의 세계가 오즈의 그것과 겹치는 영역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과 영화를 구축하는 방식에서 확실히 나루세는 또 다른 오즈가 아님을 보여준 영화감독이었다. 단순화해 이야기하자면, 사람들이 근원적 질서 속으로 어쩔 수 없이 걸어들어가는 것이 오즈의 세계라면 나루세의 세계란 성원들이 어차피 벗어날 수 없으니 부대끼며 뚫고 나아가야 할 수밖에 없는 시공간이다. 나루세의 짓누르는 듯한 세상 속에서 사람들은 곤궁을 겪고 고독과 직면하며 배반을 당한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어떤 식의 것이든 ‘초월’이란 허용되지 않는다. 그저 살아간다는 이름을 가진 힘겨운 발걸음만이 계속될 뿐이다. 나루세는 그의 세계 속 인물들의 그런 행보를, 간소한 듯하면서도 (행위와 감정의) 정확성을 잃지 않는 숏들이 유연하게 결합된 흐름 속에다가 그려놓았다. 그렇게 ‘흘러가는 세계’ 자체를 스크린 위에 만들어내고 그것으로부터 삶의 씁쓰레함, 결국에는 비애의 어떤 고양감을 맛보게 했던 나루세는 분명 오즈와도, 또 미조구치 겐지와도 구분되는 그만의 영화 세계를 구축했던 시네아스트였다. 후자의 감독들보다 뒤늦게 진가를 인정받은 고전기 일본영화의 또 다른 대가가 지난 2002년에 이어 다시 한번 우리를 찾아온다. 서구의 많은 평자들이 아직도 그의 영화를 스크린으로 만날 날을 기다린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최소한 그와의 만남에 관해서라면 우리는 꽤 운이 좋은 편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8월17일(목)부터 25일(금)까지 하이퍼텍 나다에서 그 행운을 잡아보자. 자세한 상영일정은 동숭아트센터 홈페이지(www.dsartcenter.co.kr)를 참조하면 된다(문의: 02-766-3390).

<아내여, 장미처럼> 妻よ薔薇のやうに/Wife! Be Like a Rose!
출연 지바 사치코, 마루야마 사다오, 이토 도모코/ 1935년/ 흑백/ 74분

나루세 미키오는 쇼치쿠 영화사에서 영화 경력을 시작했으나 감독으로서는 오랜 기간 동안 활동하지 않았다. 1929년에 쇼치쿠에서 감독 데뷔한 그는 1934년 이래저래 불만을 가졌던 쇼치쿠를 떠나 도호의 전신인 PCL로 자리를 옮긴다. “쇼치쿠에서 나는 연출하는 것이 ‘허용’되었지만 PCL에서는 연출하는 것을 ‘부탁’받았다”라는 이야기는 나루세가 새 터전을 마음에 들어했음을 알게 해준다. 그곳에서 그는 그의 첫 번째 대성공작이라고 할 영화를 만들어내는데 그것이 <아내여, 장미처럼>이다. 영화는 그해 <키네마준보> 랭킹 1위를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토키영화로는 처음으로 미국에서 상업적으로 개봉한 영화로 기록됐다. 나카노 미노루의 신파극을 영화로 옮긴 <아내여, 장미처럼>은 <두명의 아내>라는 원작 제목처럼 두명의 아내를 가진 남자라는 설정에서 이야기를 전개해나간다. &#49804;사쿠에게는 두명의 아내가 있는데 하나는 그가 오래전에 떠난 법적인 아내 에츠코이고 다른 이는 현재 그가 함께 살고 있는 전직 게이샤 출신의 오유키이다. 에츠코와 단둘이 살고 있는 딸 기미코는 어머니에게 아버지를 되찾아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아버지가 살고 있는 시골 마을로 향한다(기미코 역을 연기한 배우는, 이 영화가 만들어진 지 얼마 뒤 나루세와 그리 길지 않은 결혼생활을 하게 될 지바 사치코이다). 그곳에서 그녀는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는 여인이 짐작했던 것과는 달리 미덕을 갖춘 여성, 정말이지 ‘장미’와 같은 사랑스러운 아내임을 알게 된다. 오유키는 아버지 &#49804;스케에게 대단히 소중한 존재일 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 역시 공경하는 인물인 것이다. <기미코>라는 제목으로 미국에 소개되었을 당시 영화에 대한 평가는 그리 높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뉴욕타임스>에 실린 리뷰는 “진심이 담겨 있지만 전반적으로 서투르면서 둔감한 영화, 그래서 작품의 질보다는 진기함이 돋보이는 영화”라고 적혀 있다. 하지만 좀더 주의 깊게 살펴보면 그만의 장점을 찾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예컨대 야마네 사다오가 지적했듯이 일본의 가옥 구조를 훌륭하게 활용함으로써 그에 대한 묘사로부터 드라마의 고조를 만들어내는 방식, 존 포드를 연상케 할 정도의 서정성, 관객을 정서적으로 설득시킬 줄 아는 정확한 연출력 등이 <아내여, 장미처럼>을 나루세의 초기 걸작으로 만들어주고 있다.


<긴자 화장품> 銀座化粧/Ginza Cosmetics
출연 다나카 기누요, 가가와 교코/ 1951년/ 흑백/ 87분

쇼치쿠 시절에 나루세 미키오가 만든 영화들 가운데 최고작으로 꼽히는 <당신과 헤어져>(1933)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게이샤가 된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였다. 가족이라는 압력에 눌려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세계로 들어가 힘겨운 삶을 이어가는 현세적인 여성들은 나루세의 영화 세계 초창기부터 후반기에 이르기까지 자주 볼 수 있다. <긴자 화장품>에는 나루세의 영화 세계에서 결코 낯설지 않은 인물을 또다시 만날 수 있다. 영화의 주인공인 유키코는 어린 아들이 하나 있는 중년 여성이다. 그녀는 ‘벨 아미’라는 긴자 바에서 일하는데, 오로지 아들을 키우기 위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그녀에게 애정을 줄 만한 대상이 나타나지만 그는 유키코보다 젊은 여성과 사랑에 빠진다. 결국 유키코에게 삶은 아들을 키우며 버둥거리는 것이다. <긴자 화장품>에서 나루세는 삶으로부터 실망감을 맛보면서도 그걸 포기하지 않기에 인간적 기품을 지닐 수 있는 여성의 초상을 세심하게 그려낸다. 아울러 당시 긴자의 풍속도도 묘사하면서 코믹한 상황들을 집어넣어 서정적인 신산함이 주를 이루는 영화에 미묘함을 더한다. 이후에 나올 유사한 소재의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와 비교해보면 흥미로울 영화다.


<밥> めし/Repast
출연 우에하라 겐, 하라 세쓰코/ 1951년/ 흑백/ 96분

하스미 시게히코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는 단순하게 ‘남과 여’로 환원될 수 있지만 그들의 관계란 언제나 불가능한 것으로 드러나고 만다. 그건 그들이 결혼이라는 공식적인 관계에 진입했을 때에도 마찬가지여서 남자와 여자는 가정 안에서 서로에게 지지대가 되어주는 사이가 아니라 알 듯 모를 듯 서로를 피곤하게 만들고 황폐하게 한다. 나루세의 세계에서 가정은 결코 안온함을 간직한 구원의 장소가 아닌 것이다. <밥>은 그 같은 나루세적 가정과 결혼 이야기를 다룬 최고의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하야시 후미코의 마지막 미완성 소설을 각색한(<설국>의 저명한 소설가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감수를 맡았다) <밥>은 오사카에 사는 하쓰노스케와 미치요 부부의 이야기를 차분한 톤으로 담아낸다. 결혼한 지 5년이 다 되도록 아이를 갖지 않은 부부는 점차 권태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어느 날 도쿄에 사는 조카 사토코가 이들을 찾아오면서 1년365일 같은 아침과 같은 저녁을 지겹도록 맞이하던 미치요의 마음에 파문이 일기 시작한다. 결국 그녀는 새로운 삶을 찾아 남편을 버려두고 혼자 도쿄로 발길을 옮긴다. 나루세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평가하자면, <밥>은 그의 ‘부흥’을 알린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전쟁 동안 슬럼프를 겪던 나루세의 영화 세계가 이 영화를 계기로 만개한다는 것은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로부터 자주 들을 수 있는, 거의 정설처럼 굳어진 이야기이다. 물론 이걸 무턱대고 믿을 필요는 없지만(예컨대 야마네 사다오는 전쟁 동안 나루세가 하락세에 있었다는 이야기를 논박한다), 여하튼 플롯보다는 심리적 뉘앙스에 집중하고 후자를 다채롭게 그려낼 줄 아는 영화가 뛰어난 심리관찰자로서의 나루세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은 틀림없다. 도널드 리치, 오디 복, 막스 테시에, 사토 다다오 같은 일본영화 전문가들이 <밥>을 나루세의 최고 영화 가운데 하나로 꼽는 것은 그래서이다. 나루세는 미치요가 남편의 행복 안에서 자신의 행복을 찾으려 한다는 생각을 갖고서 남편과 함께 오사카로 돌아가는 기차에 몸을 맡기는 쪽으로 이야기를 끌고 간다. 나루세는 미치요에게 밝은 날만이 남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는 미치요의 앞날에 드리운 모호한 그림자를 결코 거두지 않았다. 그것이 그녀에게 공감하는 나루세의 예민한 방식이다.


<부부> 夫婦/Husband and Wife
\ 출연 우에하라 겐, 스기 요코, 미쿠니 렌타로/ 1953년/ 흑백/ 87분

<부부>는 <밥>이 호평받자 후속편을 만들어보자는 도호쪽의 제안에 따라 만들어졌다(따라서 처음에는 <밥>에 이어 우에하라 겐과 하라 세쓰코를 부부로 기용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전작에서처럼 이번에도 박봉의 회사원인 남편과 아내가 소원해지는 이야기가 그려진다. 부부 사이인 나카하라와 기쿠코는 독립을 결심하고 부모 집을 떠나 다케무라 집에 세들어 살게 된다. 그런데 괴팍하고 뻔뻔스러운 집주인을 아내인 기쿠코가 좋아하는 듯한 행동을 보이자 나카하라는 질투심을 느낀다. <부부>는 나루세 미키오 영화들 가운데 자주 언급되지는 않지만 정밀한 미장센 안에 두 가지 다른 성격이 갈등을 빚는 코미디를 담았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을 두고 ‘찰리 채플린과 버스터 키튼이 한방 안에 갇혀서 메리 픽포드를 차지하려고 싸운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그린 영화라고 하는 지적이 흥미를 돋운다.


<아내> 妻/Wife
출연 우에하라 겐, 다카미네 히데코, 단아미 야쓰코/ 1953년/ 흑백/ 89분

<부부>에 이어 나루세 미키오는 곧바로 <아내>라는 영화를 만들어 젊은 부부 사이의 불만과 위기에 대한 3부작을 마무리지었다. 새롭게 아내 역을 맡은 다카미네 히데코가 남편 역을 맡은 우에하라 겐과 함께 출중한 연기를 선보인다. 결혼생활 10년을 넘긴 도이치와 미호코 부부에게 삶이란 무덤덤하게 보내는 나날의 반복이다. 두 사람은 서로 말도 잘하지 않을뿐더러 서로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그런 가운데 도이치는 회사의 상냥한 타이피스트 후사코에게서 마음의 위안을 찾게 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미호코는 남편을 잃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해하기 시작한다. 하야시 후미코의 소설을 각색한 또 한편의 영화이며 교착상태에 빠진 결혼상태라는 나루세적 주제를 다룬 영화인 <아내>에서 나루세는 인물들의 갈등을 외화하기보다는 주로 그들이 빠진 기분을 깊게 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해나간다. 그 점에서 <아내>는 나루세가 인간행동의 모든 면을 면밀하게 관찰하는 영화감독이며 자신이 다루는 주제를, 복합성을 고스란히 살려서 다루는 시네아스트임을 증명해주는 영화다.


<산의 소리> 山の音/Sound of the Mountain
출연 하라 세쓰코, 우에하라 겐, 야마무라 소/ 1954년/ 흑백/ 96분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본 이들은 부모 뜻에 따라 결혼한 하라 세쓰코 캐릭터가 행복으로 뻗은 길만을 걸을 수 없다는 것을 예상할지라도 그녀가 이렇게까지 고통스러워할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화목한 가정 출신인 그녀가 나루세 미키오의 세계 속으로 걸어들어와 결혼한 상태가 되었을 때 그녀는 남편에게 무시당하고 스스로 유산을 감행하며 결국엔 남편과 헤어질 마음을 먹기에 이른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을 각색한 <산의 소리>는 마치 오즈의 영화 <만춘>(1949) 그 이후의 이야기를 나루세적 관점으로 그리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는 영화이며, 그 점에서 오즈와 나루세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를 직감게 해준다. 일종의 ‘아내 이야기’(つまもの)라고 부를 수 있는 영화는 한 중산층 가정에 시집온 정숙한 며느리 기쿠코의 실패한 결혼 이야기를 그린다. 기쿠코는 남편 슈이치의 사랑을 전혀 받지 못하는 인물이다. 아내를 애취급하는 슈이치는 몰래 정부를 두고 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기쿠코의 시아버지는 며느리가 안쓰러워 그녀에게 더욱 살갑게 대한다. 그렇지만 그런 시아버지의 노력이 기쿠코에게 닥치는 아픔을 막을 수는 없다. 실패한 결혼 이야기와 가슴 아픈 플라토닉한 사랑 이야기를 맞물려놓은 <산의 소리>는 나루세의 정확한 연출력이 돋보이는 영화다. 여기서 그는 내러티브 정보를 감추고 드러내는 것을 적소에 행할 줄 아는 정연한 스토리 전개의 행보 안에다가 서정성과 비통함을 함께 끌어안는다. 그러면서 영화는 보는 이에게 미묘한 비애감을 쑥 찔러넣는다. 이 정밀한 영화는 기쿠코와 시아버지가 함께 있는 마지막 공원 시퀀스에 이르러 영화적 충격을 접하게 된다. 자유로운 공간과 무력한 인물들, 정적인 숏과 움직이는 숏, 아름다움과 비애가 만나는 시퀀스는 어째서 나루세가 대립하는 요소들을 어울리게 하는 방법(antagonism)의 대가인지를 알려줄 뿐 아니라 왜 그가 빛의 대가이며 시선과 몸짓 연출의 거장인지도 똑똑히 보여준다. 나루세 스스로 <산의 소리>를 자신이 만든 영화들 중 가장 좋아하는 영화에 꼽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부운> 浮雲/Floating Clouds
출연 다카미네 히데코, 모리 마사유키, 오카다 마리코/ 1955년/ 흑백/ 123분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들 가운데 가장 잘 알려져 있고 또 가장 많은 인기와 사랑을 누리는 것으로는 단연 <부운>을 꼽아야 할 것이다. 하야시 후미코의 소설에 토대를 둔 <부운>은 전쟁 동안 동남아시아에서 함께 근무했다가 사랑에 빠진 두 남녀가 종전 뒤 일본에서 재회해 힘들고도 질기게 관계를 지속해나가는 슬픈 사랑 이야기를 담았다. 유키코는 도미오카의 사랑을 얻기 위해 이런저런 굴욕을 견뎌내지만, 아내가 있는 우유부단하고 이기적인 도미오카는 과거의 연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줄 용기도, 의지도 없다. 둘은 계속해서 헤어짐과 만남을 거듭한다. 영화평론가 크리스 후지와라에 따르면, <부운>의 여주인공 유키코는 “불행을 택하는 나루세 캐릭터의 정수”라고 할 만한 인물이다. “우리의 로맨스는 종전과 함께 끝났어”라고 말하는 도미오카를, 유키코는 절대로 놓아주려 하지 않는다. 그녀의 이런 ‘사랑’은 욕망이라는 말로도, 집착이라는 말로도 쉽게 대체되지 않는 어떤 것이다. 게다가 그것은 타인의 눈으로 보면 치유나 충족이 아니라 어떤 부조화만을 낳는 것처럼 보이는, 그래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부박하게 말해, <부운>이 그리는 것은 고집스러운 의지의 투쟁, 그것으로서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유키코는 그것에서 지기가 싫어 도미오카를 놓치지 않으려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녀의 바람대로 유키코는 이기고 마는 자가 되고 만다. 그녀는 옛날 꿈을 꾸기를 그만두려는 도미오카에게 자신의 옛 환영을 기어이 새겨놓는가 하면, 영화를 보는 내내 그녀에게 공감할 수 없었던 우리의 태도를 바꿔놓는 데 성공한다. 그런 점에서 <부운>은 아마도 슬픈 ‘사랑의 조건’을 이야기하는 처연한 러브스토리라 부를 만하다.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 女が階段を上る時/When a Woman Ascends the Stairs
출연 다카미헤 히데코, 모리 마사유키, 나카다이 다쓰야/ 1960년/ 흑백/ 111분

쓰카사 요코(나루세 미키오의 마지막 작품인 <흩어진 구름>에 출연했던)가 여성의 심리를 완벽하게 이해한 영화감독이라고 불렀던 나루세 미키오는 확실히 여성들이 겪는 고통과 고난에 특히 민감한 영화감독이었다. 그 점에서 그는 미조구치 겐지와 중요한 관심사를 공유한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둘 사이에는 차이점이 존재했는데, 요컨대 나루세의 여인들은 미조구치의 여인들에게서 종종 구현되곤 하던 자기 억압과 희생을 일종의 미학적, 초월적 사치로 간주할 정도로 현세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세상에 무자비하게 짓밟히면서도 삶 속에 서 있는 현실적인 존재가 나루세의 여인이라면, <여자가 계단에 오를 때>는 그 실례를 보여주는 영화다. 영화는 사랑하는 남편을 여의고 긴자 바에서 마담으로 불리는 게이코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바에서 사람들에게 ‘마마’라 불리는 그녀는 서른살이 되어가자 결혼을 할 것인지, 아니면 자기 바를 오픈할 것인지 선택을 해야 할 시점에 이른다. 결혼을 하자니 죽은 남편과 한 자신의 약속을 깨버리기가 싫고 또 가게를 개업하자니 그럴 만한 돈은 없다. 제목에 나온 대로 게이코는 매일 밤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 존재이지만 그녀는 그것이 싫기만 하다. 그건 가족의 과중한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떠밀려 가듯 하는 행위이면서 또 결국에는 이런저런 실망감만 주는 남자들과 마주쳐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매일 이어지는 반복적인 일을 그만둘 수가 없다. 게이코가 적지 않은 사건들을 겪은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면 영화는 그녀가 계단에 오르는 행위가 단지 생활을 위한 일상적인 것이 아니라 끔찍한 삶에서 도피하지 않으려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격상시키기에 이른다. 그렇게 해서 영화는 억압적인 사회에서 살아가는 여성의 고난과 용기까지 그려낸다. 영화학자 조앤 멜렌은 <여자가 계단에 오를 때>가 <말괄량이>(1957)와 더불어 여성의 억압을 다룬 가장 뛰어난 나루세 영화로 꼽았다. 다른 한편으로 이 영화를 이야기할 때 와이드 스크린의 빼어난 활용에 대한 언급을 빼놓아서는 안 된다. 영화는 와이드 스크린이 실내와 그 안에 위치한 사람들과도 어울릴 수 있음을 증명한다.


<방랑자의 수첩> 放浪記/A Wanderer’s Notebook
출연 다카미네 히데코, 다나카 기누요/ 1962년/ 흑백/ 124분

나루세 미키오는 ‘서민의 애절한 신음’을 담았던 작가 하야시 후미코(1903∼51)의 세계가 자신과 소통하는 지점이 있다고 느꼈던 듯하다. 나루세가 자신과 동년배인 하야시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은 쇼치쿠에서 활동하던 1930년대 중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비록 프로젝트는 실현되지 못했지만, 나중에 나루세는 하야시가 세상을 뜬 해인 1951년에 그의 저서를 처음으로 스크린으로 옮겨냈고 이후 하야시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를 다섯편 더 만들었다. 그러고 나서 나루세가 “이제 영화로 만들 하야시 이야기는 더 없단 말인가?” 하고 탄식했다고 하는 일화는 유명하다. <방랑자의 수첩>은 하야시의 원작을 영화화한 나루세의 작품 가운데 마지막 것에 해당한다. 하야시의 자전적 소설 <방랑기>가 원작인 영화는 지독한 가난과 고통 속에서 살아야 했던 후미코가 방랑의 삶을 살다가 인정받는 작가가 되기까지의 ‘고독한 여정’을 담아냈다. 영화에서 우선 돋보이는 것으로는 주인공 하야시를 절대로 미화하지 않으려는 나루세의 정직한 시선을 꼽아야 할 것이다. 영화는 그녀가 삶 속에서 저질렀던 어리석음과 잘못된 선택, 성공을 위해 취해야 했던 비윤리적인 행위를 보여준다. 그리고는 그 고된 여정을 거쳐온 삶을 지켜보는 것으로부터 적잖은 인간적인 감동을 이끌어낸다.


<흩어진 구름> 亂れ雲/Scattered Clouds
출연 카야마 유조, 츠카사 요코/ 1967년/ 컬러/ 108분

나루세 미키오의 마지막 작품인 <흩어진 구름>은 관계의 불가능성을 다룬 또 한편의 처연하게 아름다운 러브스토리이다. 영화는 마치 더글러스 서크의 <마음의 등불>(Magnificent Obsession, 1954)을 연상케 하는 이야기를 나루세 특유의 담담하고 미묘한 그러면서도 세련된 방식으로 들려준다. 갓 결혼해 임신 3개월째인 유미코는 전근이 예정된 남편 히로시와 함께 미국에 갈 예정이다. 부부에게 다가올 듯한 행복감은, 그러나 히로시가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으면서 부서져버리고 만다. 실수라고 하지만 남편을 죽인 당사자인 미시마를 유미코는 절대로 용서할 수가 없다. 죄책감 속에서 고통스러워하는 미시마와 과거를 자신에게서 보내버리지 못하는 유미코는 몇번의 우연한 만남 끝에 조심스러운 사랑의 감정을 싹틔운다. 동일한 사건에 연루되어 다른 종류의 고통을 느끼는 남자와 여자가 서로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기까지의 과정을 서두르지 않은 발걸음으로 따라가는 <흩어진 구름>은 영화평론가 필립 로페이트에 따르면 나루세의 가장 이상하면서도 가장 강렬한 영화들 가운데 하나다. 나루세라는 고전기의 작가가 60년대라는 ‘새로운 시대’에 그 조류에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듯한 영화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은 기이하기까지 한 인상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나루세의 뛰어난 연출력은 <흩어진 구름>을 소외의 시대에 속하는 모던한 영화로 만들어냈다. 특히 대사없이 10분 정도 지속되는 영화의 후반부 시퀀스는 감탄할 경지의 연출력이 돋보인다. 여기서 나루세는 화면만으로 인물들이 느끼는 찰나의 행복한 초조감과 서로 사랑할 수 없다는 회한을 그 어떤 대사보다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능력을 과시한다. 감정이 보이는 걸작을 남긴 뒤에도 나루세는 “하얀 커튼의 배경만이 있고, 실제 세트는 없으며, 실외 공간도 없고, 뼛속까지 감정을 표현하는 인간 움직임의 뉘앙스에만 집중하는 영화”를 계획했다. 그러나 건강이 나빠진 그에게 실제로 현실화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해콩 2006-09-06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세계 [1]
2006.08.22 08:00

미조구치 겐지, 오즈 야스지로와 함께 일본영화 1세대의 대표 감독인 나루세 미키오는 다른 두 감독에 비해 늦게 조명받은 작가다. 강인한 여성의 삶을 물 흐르듯 담아내고, 인간의 역정을 수수한 화법으로 그려내는 간소함. 그의 영화엔 미동도 하지 않는 격렬한 침묵이 있다. 8월17일부터 9일간 서울 하이퍼텍 나다에서 나루세 미키오의 회고전이 열린다. 한국에선 4년 만의 회고전이다. <부운> <흩어진 구름> 등 10편의 작품이 상영되고, 그의 영화세계에 대한 강의도 진행된다. 그에 앞서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세계와 상영작 10편에 대한 소개를 싣는다.

나루세 미키오는 영화란 언제나 개봉 뒤 몇주가 지나면 사라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영화들이 우리의 머릿속에 새겨놓은 깊은 인상은 나루세의 그 이야기가 전적으로 옳지 않았음을 입증한다. 다만 그의 영화가 꽤 오랫동안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아 정당한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는 사실은 존재한다. 일례로 그는 그와 비교 대상이 되는 오즈 야스지로에게 거의 항상 밀려 있는 존재였다. 그는 오즈보다 먼저 쇼치쿠 영화사에 들어갔음에도 그보다 훨씬 늦게 감독의 자리에 올랐고(1920년에 쇼치쿠에 입사한 나루세는 그로부터 거의 10년이 지난 뒤에야 감독이 되었던 데 반해 오즈는 1926년에 같은 영화사에 들어가 다음해에 첫 영화를 만들었다), 쇼치쿠의 가마타 스튜디오 소장 기도 시로가 자기 영화사엔 두명의 오즈가 필요없다고 이야기했듯이 일찍부터 ‘또 하나의 오즈’ 같은 존재로 여겨지기도 했으며, 세계무대 입성에서도 (그 역시 비교적 뒤늦게 국제적 주목을 받은) 오즈에게 뒤졌다.

위기와 혼돈의 홈드라마

그래도 다행인 것은, 나루세의 영화들이 사라져버리기는커녕 우리의 시야에 들어올 기회를 점차 더 갖게 됨으로써 앞에서 열거한 사항들 가운데 두 번째 것에 대한 오해가 벗겨져가고 그래서 온전한 그의 자리가 마련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영화 전문가인 도널드 리치가 이미 나루세란 존재를 두고 “오즈의 대안”이라고 평가했듯이, 비록 나루세의 세계에 오즈의 그것과 공유하는 (듯한) 영역이 있다고 하더라도, 오즈의 것과는 그 시선과 미학에서 구별되는 독자적인 대륙이라고 봐야 한다. 나루세는 오즈의 주변에 놓이는 데 그치고 마는 또 다른 오즈가 아니라, 그만의 세계를 구축한, 고전기 일본영화의 또 다른 거장인 것이다.

<쓰루하치 쓰루지오>

나루세에 대해 여러 평자들이 이미 붙여놓은 호칭 가운데에는 물질주의자(materialist)라는 것이 있다. 그에 걸맞게도 나루세의 영화 속에서 우리는 돈을 세거나 건네는 손과 돈을 갚으라고 하거나 빌려 달라고 하는 대사를 자주 보고 들을 수 있다(세명의 중년 여주인공 가운데 하나가 사채업자로 나오는 <만국>(1954)은 이걸 특히 잘 보여주는 영화이다). 나루세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돈의 막중한 하중을 빠져나갈 수가 없다. 이 지점에서부터 나루세의 ‘홈드라마’는 오즈의 그것과 갈린다. 오즈는 대체로 나루세의 영화 속 그것보다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있고, 서로간의 예절과 조화도 좀더 잘 유지될 수 있는 가족을 자기 앞에 정중하게 초대해놓고는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궁극적으로 자연의 질서 속으로 융합되는 과정을 조용히 지켜본다. 반면에 나루세가 냉정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가족은 위기 상황 혹은 혼돈이란 표현에 더 가까운 공동체이다. 나루세의 가족은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1960)에서처럼 한 사람이 ‘착취’됨으로써 지탱되는 무자비한 것이거나 <번개>(1952)에서처럼 갑작스럽게 생긴 보험금이 갈등을 불러오는 취약한 것이 되곤 한다. 차가운 바깥 세계와 다를 바 없는 그런 곳에서 서로에 대한 배려와 공경이 근본적 미덕이 될 리는 만무하다.

고통과 희생의 삶을 포기하지 않는 여인들

나루세가 영화 속에서 보여주는 세계는 공간으로 말하자면 ‘조금만 움직이더라도 벽과 맞부딪칠 정도로’ 협소한 세계이고(좁은 실내를 주요 공간으로 삼는 그의 영화는 바깥으로 나간다 할지라도 역시 주로 좁다란 뒷골목만을 보여줄 뿐이다), 색깔로 비유하자면 뿌연 회색에 가까운 세계이며, 맛으로 치자면 씁쓰름한 맛을 안겨주는 세계이다. 막스 오퓔스, 미구조치 겐지, 잉마르 베리만, 칼 드레이어 등과 함께 영화사의 출중한 ‘여인들의 영화감독’ 대열에 낄 그는 그 세계 안에다가 그의 여주인공을 내던져놓는다. 한데 다시 한번 오즈를 불러오자면, <만춘>(1949) 같은 영화 속에서 항상 친절한 미소를 잃지 않던 하라 세쓰코와는 그 세계가 그리 잘 어울리지 않는다. 만일 그녀가 나루세의 세계로 들어온다면 <산의 소리>(1954)에서 보듯 이제 더한 고통과 수모를 견뎌낼 준비를 갖춰야 할 것이다. 고집스러운 표정의 다카미네 히데코로 대표되는 나루세의 여주인공들은, 때로는 영화를 보는 우리조차도 쉽게 공감을 하지 못할 정도로 완고한 성격과 강한 의지를 가져야만 한다. 그래야 고통과 배신과 실망으로 가득 찬 나루세의 황폐한 세계를 어떤 식으로든 통과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말할 때 우리는 고통과 희생으로서의 삶을 우아하게 살았던, 영화 속의 또 다른 눈에 띄는 여인들, 바로 미조구치의 여인들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된다. 나루세의 여인들은 분명 미조구치의 여인들과 닮은 데가 있긴 했지만 둘은 알고 보면 다른 영토를 점하는 존재들임이 드러난다. 요컨대, <오하루의 일생>(1952)의 여주인공은 거의 낭만적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의 희생을 겪으며 결국에는 초월을 거쳐 미학적인 세계로 진입한다. 하지만 미조구치의 여인보다 어떤 면에서든 현세적이라 부를 수 있는 나루세의 여인에게 그 같은 ‘초월’이란 존재론적 사치에 해당할 뿐이다. 그녀는 무엇보다도 생존을 우선시하는 현실적 존재이며, <밥>(1951)의 서두에서 자신의 감정적 공명을 찾았던 작가 하야시 후미코를 인용해 “무한히 광활한 우주 속에 놓인 인간이 꾸려가는 애절한 영위(營爲)가 나는 참을 수 없이 좋다”고 했던 나루세는 바로 그런 존재에게서 결국에는 인간적인 기품을 발견해내고야 만다. 이를테면,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의 마지막에서 게이코는 자신을 둘러싼 일들에서 계속 실망할 뿐이지만 그날도 자기가 그렇게도 싫어하는 일인 계단을 올라 웃는 얼굴로 손님들을 맞는다. 거기에서 나루세는 앞에 놓인 날들의 불투명함을 알고 있으면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감동적인 일인지 보여준다.

감정의 리듬을 따라 흐르는 짧은 숏들

나루세는 자신의 이 주인공들이 내딛는 삶의 행보를 따라가면서 흘러가듯 진행되는 영화를 만들었다. 다시 말해 그건 우리의 삶 자체와 유사하게 멈추지 않는 현재의 연속을 보여주는 영화였다. 그런데 미조구치나 오즈의 경우와 달리 미학적인 엄정함이나 압도감을 드러내 보이지 않으면서 단지 간소하면서 수수하게 짜여진 숏들을 막힘없이 이어놓기만 한 이런 식의 영화는 많은 이들에게 눈에 확 들지 않는 영화, 혹은 그것만의 어떤 비범함이나 특별함을 찾을 수 없는 영화로 여겨지기 십상이었다. 나루세 밑에서 조감독으로 참여했던 구로사와 아키라가 지적하듯 얼핏 조용하고 평범해 보이는 짧은 숏들의 흐름이 실은 “격렬한 조류가 조용한 수면 밑에 가려진 깊은 강”과도 같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구로사와의 이 이야기를 가져와서 말하자면, 나루세의 영화는 잔잔히 흘러가는 영화적 세계 그 아래에 어떤 저류의 활동을 내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저류의 다른 이름은 바로, 나루세 자신도, 그리고 영화평론가 야마네 사다오도 썼던 ‘감정의 리듬’이다.

<부운>

이에 대한 훌륭한 예를 우리는 나루세의 마지막 영화가 된 <흩어진 구름>(1967)의 대사가 거의 없이 진행되는 마지막 10분여의 시퀀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서로 사랑해서는 안 되는 두 남녀가 함께 보내는 짧은 여정 안에서 그 정서적 공기는 두려움과 초조감이 섞인 기대감에서 결코 지워지지 않고 떠오르는 과거에 의해 생겨나는 일종의 열패감으로, 그리고 결국에는 서로 사랑할 수 없다는 운명적 자책의 심경으로 이동한다. 그 흐름을 나루세는 두 사람 사이에서 행해지는 시선의 만남과 회피, 몸짓, 그들 앞에 펼쳐지는 사건의 단편적 광경들을 통해 천의무봉의 솜씨로 그려낸다. 여기서 우리는 나루세의 영화에는 고저의 움직임이 없다는 (기도 시로식의) 비판이 근거가 없는 것임을 알게 된다. 한편으로 이 시선과 몸짓 연출의 대가는 단 하나의 몸짓만으로도 우리에게 많은 걸 보고 느끼게 해준다. <만국>은 젊었을 적에 게이샤였다가 지금은 사채업을 하는 중년 여인 긴이 열차역에서 가방을 뒤지며 차표를 찾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바로 이 순간적인 몸짓 하나로 나루세는 이전까지 그토록 매정해 보이기만 했던 긴에게 인간의 숨결을 불어넣는가 하면 우리에게 삶의 지속됨의 한 증표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해서 언어적 표현을 넘어서는 삶과 인생의 미스터리가 존재함을 깨닫게 해준다. 그래서 그 단순한 장면은 어떤 영화의 어떤 장면과도 비교할 수 없는 미묘한 영화적 서스펜스와 묵직한 감동을 안겨준다. 아마도 이런 것이야말로 하스미 시게히코가 나루세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고 말한 ‘과묵한 웅변’의 한 실례가 아닌가 싶다.

언어적 표현을 넘어선 삶의 미스터리

나루세 영화가 보여주는 이 같은 미묘한 ‘풍요로움’의 예들은, 그가 죽기 전에 품고 있었던 프로젝트를 더욱 궁금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말년에 그는 병 때문에 비록 현실화하지는 못했지만 오로지 흰 커튼을 배경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인간 움직임의 뉘앙스, 그것의 풍성함에 집중한 영화를 만들 계획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정말 그것이 영화로 만들어졌다면 나루세는 과연 어느 지점까지 나아갈 수 있었을까? 이처럼 실제로 남겨놓은 세계만 해도 더욱 탐사할 것으로 가득한데도 불구하고 그 너머까지 공상에 이르게 하는 것도 역시 거장만이 우리에게 행사할 수 있는 힘일까?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세계 [2]
2006.08.22 08:00
나루세 미키오 특별전 상영작품

아내여, 장미처럼 妻よ薔薇のやうに Wife! Be Like a Rose!
1935년, 흑백, 74분, 출연 지바 사치코, 마루야마 사다오, 이토 도모코

미국에서 처음으로 상영된 일본 토키영화로 기록되어 있기도 한 <아내여, 장미처럼>은 나루세의 초창기 성공작이며 걸작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영화다. 원작이 되는 나카노 미노루의 신파극 제목이 <두명의 아내>이듯이, 영화는 두명의 아내를 가진 남자라는 설정에서 이야기를 전개해나간다. &#49804;사쿠는 에츠코라는 법적 아내를 떠나 시골 마을에서 전직 게이샤 출신인 오유키와 함께 살고 있다. 에츠코의 딸 기미코는 어머니에게 아버지를 되찾아줘야겠다는 생각으로 아버지를 찾아간다. 진정한 아내의 미덕, 혼인 생활의 어려움, 고독에의 공감을 서정성 짙은 터치로 그려낸 작품. 이 영화가 만들어진 지 2년 뒤에 나루세와 결혼하게 되는 여배우 지바 사치코가 기미코 역을 맡았다.

긴자 화장품 銀座化粧 Ginza Cosmetics
1951년, 흑백, 87분, 출연 다나카 기누요, 가가와 교코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와 마찬가지로 가족의 덫에 걸려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신세의 여인을 그린 또 한편의 나루세 영화. 아들을 키우기 위해 ‘벨 아미’라는 긴자의 바에서 일하며 기대와 실망감을 겪는 중년 여성 유키코의 초상을 세심한 필치로 그려냈다. 영화는 나루세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공간과 그곳 사람들에 대한 풍속도가 되기도 한다. 가끔씩 나오는 코믹한 상황들이 영화의 재미를 더한다.

めし Repast
1951년, 흑백, 96분, 출연 우에하라 겐, 하라 세쓰코

나루세의 여인들에게 가정은 편안한 안식처가 아니라 벗어날 수 없는 감옥 같은 곳이 되곤 한다. <밥>은 그런 여인이 느끼는 심리를 탁월하게 그려낸 나루세 영화들 가운데 하나다. 오사카에서 남편 하쓰노스케와 살고 있는 미치요는 결혼 5년째에 접어들면서 매일 같은 나날을 보내는 자신의 삶에 회의감을 갖는다. 그러던 어느 날 도쿄에 사는 다분히 자유분방한 조카 사토코가 이들 부부를 찾아오면서 미치요의 마음에 생기는 파문은 커진다. 결국 그녀는 새로운 삶을 찾아보겠다며 홀로 도쿄로 향한다. 영화에는 미치요를 중심에 두고 그녀가 삶에 대해 느끼는 실망감, 자유의지에의 투쟁, 정서적인 모호함 등이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작가 하야시 후미코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 여섯편의 나루세 영화 가운데 첫 번째에 속한다.

부부 夫婦 Husband and Wife
1953년, 흑백, 87분, 출연 우에하라 겐, 스기 요코, 미쿠니 렌타로

<밥>이 호응을 얻자 속편으로 기획된 영화로 이번에는 또다시 남편을 연기한 우에하라 겐의 아내 역으로 전편의 하라 세쓰코 대신 스기 요코가 나온다. 나카하라와 기쿠코 부부는 부모의 집을 떠나 다케무라의 집에 세들어 살게 된다. 그런데 부인 기쿠코가 집주인에게 호감을 갖는 듯한 낌새를 챈 나카하라는 질투심에 빠져들게 된다. 뻔뻔스럽다고 할 정도로 거리낄 것없이 행동하는 다케무라와 다소 내향적인 나카하라 사이의 대조를 중심으로 빚어지는 갈등 상황이 가벼운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영화다.

아내 妻 Wife
1953년, 흑백, 89분, 출연 우에하라 겐, 다카미네 히데코, 단아미 야쓰코

<밥> <부부>에 이어 활기 잃은 결혼생활을 다룬 3부작을 마무리하는 작품. 나루세의 페르소나인 다카미네 히데코가 우에하라 겐과 위기에 빠진 부부를 연기한다. 도이치와 미호코 부부는 지난 10년간의 결혼생활을 덤덤하게 보내온 사이이다. 그런데 남편이 회사의 동료에게 마음을 뺏기자 부부 사이에는 긴장감이 감돈다. 이제 그 수명이 다한 듯한 관계에 대한 사려 깊은 영화로 인간 행동에 대한 나루세의 예민한 관찰력이 돋보인다. 하야시 후미코의 작품이 원작인 영화들 가운데 하나이다.

산의 소리 山の音 Sound of the Mountain
1954년, 흑백, 96분, 출연 하라 세쓰코, 우에하라 겐, 야마무라 소

나루세적인 씁쓸함을 맛보게 하면서 결혼의 위기를 절묘하게 다룬 <산의 소리>는 나루세 스스로 가장 좋아하는 자신의 영화들 가운데 하나라고 말한 작품이다. 영화는 남편의 사랑을 전혀 받지 못하는 정숙한 여인 기쿠코, 그녀에겐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으며 다른 여자와 놀아나는 그녀의 남편 신고, 그리고 며느리가 안쓰럽다고 느낄수록 그녀를 더 살갑게 대하는 기쿠코의 시아버지간의 관계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이야기 정보를 감추고 드러낼 때를 정확히 아는 내러티브 전개, 인간 심리에 대한 깊이있는 이해, 감상적인 서정성 등이 절묘한 조화를 이뤄 보는 이를 애절한 미감에 젖게 만든다. 삶의 쓰린 현실과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마지막 시퀀스는 특히 깊은 인상을 남긴다.

부운 浮雲 Floating Clouds
1955년, 흑백, 123분, 출연 다카미네 히데코, 모리 마사유키, 오카다 마리코

하야시 후미코의 소설에 토대를 둔 <부운>은 나루세의 명실상부한 대표작 가운데 하나이며 일본 안에서 가장 사랑받는 나루세 영화로도 꼽힌다. 이 처연한 러브스토리는 전쟁 동안 동남아시아에서 함께 근무했다가 사랑에 빠진 두 남녀가 종전 뒤 일본에서 재회해 힘들게, 그리고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게 관계를 지속해나가는 이야기를 담았다. 나루세의 말대로 정말이지 끝까지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쫓아가는 이 영화는 사랑이 절대로 어떤 보상을 주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마치 ‘의지의 투쟁’을 벌이듯 사랑을 요구하는 여자주인공 유키코에게 쉬운 공감도 허용치 않는다. 영화는 그러면서도 끝내는 그 사랑에, 그리고 그 당사자인 유키코에 보는 이를 ‘굴복’시키는 기이한 힘을 보여준다. 한편 다양한 전개로를 통해 읽힐 수 있는 사랑 이야기라는 점에서 <부운>은 걸작의 또 다른 조건 하나를 갖춘 영화이다.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 女が階段を上る時 When a Woman Ascends the Stairs
1960년, 흑백, 111분, 출연 다카미네 히데코, 모리 마사유키, 나카다이 다쓰야

영화 속 대사처럼 져서는 안 되는 전투를 치르듯 삶을 살아가는 여성들을 다룬 나루세의 대표작. 사람들로부터 ‘마마’라 불리는 게이코는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뒤 긴자의 한 바에서 마담으로 일한다. 서른살이 다 된 그녀는 이제 그녀 삶에서 일종의 전환점이라고 할 시기를 맞았다. 그래서 결혼을 하든지 아니면 자기 바를 열든지 선택을 해야 할 때가 되었다. 하지만 그 어느 쪽의 선택도 그리 만만치가 않다. 가족에게 ‘착취’당하고 이런저런 남자들로부터 실망감만을 떠안고 말지만 고투로서의 삶을 이어가는 게이코의 이야기를 통해 영화는 낮은 지위에 있는 여성들의 고결한 삶을 찬양하고 그와 동시에 그녀들에게 억압을 가하는 사회의 포악함을 꼬집는다. 한편으로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는 스펙터클과 전혀 관계가 없으면서도 시네마스코프 화면을 출중하게 활용한 실례로 꼽히는 영화이기도 하다.

방랑자의 수첩 放浪記 A Wanderer's Notebook
1962년, 흑백, 124분, 출연 다카미네 히데코, 다나카 기누요

나루세가 자신의 ‘솔메이트’로 여겼던 하야시 후미코의 자전적 소설 <방랑기>를 영화화한 작품. 다른 한편으로 이것은 하야시에게서 재료를 구했던 여섯편의 나루세 영화 가운데 마지막에 해당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영화는 지독한 가난과 고통 속에서 살아야 했던 후미코가 방랑의 삶을 살다가 인정받는 작가가 되기까지의 힘든 여정을 담아냈다. 여기서 특히 눈여겨볼 것은 주인공 후미코를 무조건적으로 미화하지 않으려는 정직한 시선과 그러면서도 그녀의 힘든 삶의 여정을 결국에는 현실적으로 숭고한 것으로 만드는 힘이다. 다카미네 히데코의 연기가 가장 빛을 발한 작품들 가운데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흩어진 구름 亂れ雲 Scattered Clouds
1967년, 컬러, 108분, 출연 카야마 유조, 츠카사 요코

나루세의 마지막 작품으로 더글러스 서크의 영화 <마음의 등불>을 연상케 하는 설정으로부터 불가능한 관계의 사랑 이야기가 처연하면서도 아름답게 펼쳐진다. 갓 결혼해 임신 3개월째인 유미코는 통산성에 근무하는 남편 히로시와 함께 미국에 갈 생각에 들떠 있다. 하지만 히로시가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게 되면서 그들 부부를 맞이할 행복감은 산산이 부서진다. 유산까지 하게 된 유미코는 남편을 죽인 자동차 운전사 미시마를 용서할 수 없고 미시마는 그대로 죄책감에 빠져든다. 영화는 관계가 불가능할 것 같은 이 두 남녀가 서로에게 이끌리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전혀 서두르지 않는 정연한 발걸음으로 따라가면서 우리를 그들에게 동화하게 만든다. 대사가 거의 없이 진행되는 마지막 10분간의 시퀀스는 나루세의 연출력의 정점을 보게 하며 그 뒤에 이어지는 여관방에서의 이별 시퀀스는 보는 이의 가슴을 깊숙이 파고든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아닌 게 아니라 세상에는 속속 '땅 끝까지 전하라'의 성격을 띤 프로의 복음들이 출몰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이런 것들이고, 한결같이 방송인과 지식인, 광고인과 경영인들의 슬기를 모은 것들이었으며, 과연 줄기찬 것이었다.

1.  이젠 프로만이 살아남는다: 당시 가장 많이 회자되던 프로복음 1호 되겠다. 프로가 안 되면 아마 죽을 거라는, 최후의 통첩이 실린 무게 있는 복음이다.

2. 난, 프로라구요: 과거의 삶을 회개하고, 앞으로는 잔업이든 휴가 반납이든-아무튼 불꽃 같은 프로의 삶을 살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뚜렷이 공고한 프로복음 2호 되겠다. 한편 당돌해 뵈면서도 목숨의 부지를 위한 비장한 각오와 잔잔한 애수가 서려있는 복음. 과거 유신복음 중에는 같은 맥락의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가 있다.

3. 프로의 세계는 약육강식의 세계 아닙니까?: 주로 비열한 방법으로 목적을 이룬 자들이 내뱉던 프로복음 3호 되겠다. [동물의 왕국]을 인간의 삶에 적용시킨 친(親)환경주의, 동물애호주의의 복음. 이 복음을 토대로 어쨌든 이기면 된다, 어쨌든 돈만 벌면 된다는 새로운 세계관이 빠르게 형성될 수 있었다.

4. 하루빨리 프로가 되게: 주로 회사의 상사들이 신입사원들에게 쓰던 프로복음 4호 되겠다. 쉽게 말해, 할 일이 태산 같다는 말이다.

5. 허허, 이 친구 아마추어구먼: 미전향 아마추어들에게 전도의 목적으로 쓰이던 프로복음 5호 되겠다. 가벼운 멸시와 조롱을 담아서 그들의 전향을 유도했다.

6. 맛에도 프로가 있습니다: 요식업계를 통해, 민간에서 처음으로 창출된 프로복음 6호 되겠다. 거창한 문구로 위장해 있으나, 그 어원은 '옆집보다 우리 집이 더 맛있어요'라는 소박한 것이다.

7. 이러고도 프로라고 말할 수 있나?: 주로 실수를 범한 부하직원에게 상사가 내뱉던 프로복음 7호 되겠다. 쉽게 말해, 나가 죽으라는 말이다.

8. 프로의 정식 명칭은 '프로페셔널'이다: 아직 멀었다. 더 높은 경지의 프로 세계가 있으니 분발하라는 메시지를 담은 프로복음 8호 되겠다. 주로 대학교수나 무슨 연구소의 소장이란 사람들의 입을 통해 개발도상국의 최대 급소인 무식(無識)의 혈을 찌른 고급 복음이다.

9. 프로는 끝까지 책임을 진다: 아마추어 음해와 더불어 야근의 생활화 고착을 목표로 한 프로복음 9호 되겠다. 이후 아마추어는 책임감이 없다는 사회적 무의식과 야근은 당연한 거 아니냐는 기업 풍토가 널리 확산된다.

10. 그녀는 프로다, 프로는 아름답다: 한국 경제사에서 여성 고급 인력의 필요성이 대두될 때 나온, 그러나 여성 고급 인력의 필요성과는 아무 상관 없는 프로복음 10호 되겠다. 역시 거창한 문구로 위장해 있으나, 그 원래의 뜻은 '옷 사세요'라는 말이다.

11. 프로주부 9단: 자칫 느슨해지기 쉬운 주부들에게 그럴 틈을 주지 않기 위해 만든 포로복음 11호 되겠다. 주부가 앞장서서 살림도 프로로 하고, 애들도 프로로 키우라는 거시안적 포석이 깔린 복음. 승단 심사와 발표를 어디서 하는지는 알 수 없다.

박민규,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한겨레 신문사, 2003. 77~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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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6-08-25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from hook-choi]샘 덕분에 오랫만에 책읽으면서 크게 웃었어요. 나의 캐릭터와 어울리는 좋은 책을 읽게 해 줘서 너무 고마워^^ 나도 서재에 뭔가를 채우고 싶은데, 역시나 게을러서 실현하는건 어려울 것 같아... - 2006-07-13 1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