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관리 계급에 대한 비판>을 읽고, 궁금했던 자녀 교육 부분이 좀 미흡하여 예전에 (아마 <특권>이 나온 2019-20년에) 아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서 능력주의(meritocracy)와 관련하여 언급하여 보관함에 담아두었었던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자녀 교육 부분이 왜 궁금한지는 사실 잘 모르겠는데.. 자녀를 그렇게 교육시키려고 하는 것은 분명 아니고 (할 수도 없고) 막연한 불만과 좀 알아는 둬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섞인 것 같다. 자녀가 있으면 관심이 있는 건 당연한 걸까?


이 책의 저자는 이민자의 자녀이지만 부유한 부모님 덕분에 세인트폴이라는 미국의 기숙사립학교에 다녔다. 그리고 졸업한지 9년만에 이 학교에서 추구하는 엘리트 교육에 대해 연구하려고 교사로 돌아와서 자신의 과거 경험과 교사로서의 경험을 합쳐서 이 책을 썼다. 


저자는 부유한 백인 학생이 다수인 학교에서 소수 집단으로 지내면서 학교가 다양성과 능력주의를 중시하는 듯 하지만 부유한 백인 남학생들이 우세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그들의 자신감은 정말 개인의 능력 자체에서 비롯될 수도 있고 그들이 가진 자원에서 비롯된 것도 있을텐데, 저자가 학교에서 교사로서 관찰하고 학생들과 대화하며 연구한 결과 학생들은 처음에는 서로의 차이를 의식하지만 세인트폴 학교의 독특한 교육 방식을 통해 대개 모두 같은 선상에서 시작하고 학교 교육 이후 거두는 성과는 그들의 노력과 성취에 의한 결과라고 여기게 되었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들이 누리고 있는 행운보다는 그들 자신이 갖고있던 재능과 노력이 그들을 엘리트로 만들어줬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


이 부분을 보고 상속세, 종부세, 재산세 등 세금 관련 이슈가 나오면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모은 건데 왜 많이 내라고 하냐' 는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사람을 직접 대면한 적은 없는데 온라인에서 그런 댓글 종종 봤었는데 정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또 하나 이 학교에서 추구하는 것은 어떤 특정 지식을 독점하기보다는 세상 속에서 처신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고전과 대중문화 (<베오울프>와 영화 <죠스>)를 섞어서 가르치고 비교하는 등 대중문화에 익숙해지게 하고, 나머지 (비사립학교 학생들)와의 구분을 사라지게 만드는 법을 배운다고 하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또 한번 그들의 특권이 '인간 됨됨이' 에 의한 것으로 보이게 된다고 한다. 요즘 한국의 재벌 2세 - 3세가 SNS를 이용하며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게 이런 맥락인가 싶었다.



너희들이 그런 위치에 있는 건 바로 네 자신의 편협함,

이 개방된 새 세상을 이용하지 않기로 한 네 자신의 선택,

네 자신의 관심 부족 때문이지,

지속적인 불평등 때문이 아니라고.


283쪽


이들 중 상당수가 아이비 리그를 비롯한 우수한 대학에 진학할 수 있게 되는데, 그들이 우수해서이기도 하겠지만, 다양한 능력을 중시하는 미국의 대학입시제도 때문에 (한국의 대학입시도 예전에 비해 미국 방식에 조금 가까워진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나는 자세히는 모른다), 학생 당 예산이 충분한 세인트폴에서는 다수의 학생을 최상위권으로 만들 수가 있고 (어떤 학생은 수학을, 어떤 학생은 음악을 잘하고 어떤 학생은 철학을 잘하고 스포츠 예술 등등... 이렇게 다양한 활동의 최상위권 학생이 많다는 것이다) 대학과의 딜을 통해 많은 학생을 좋은 대학에 입학시킨다고 한다. 


최근 아는 분과 얘기하다가 한국의 어떤 고등학교 (전국단위 자사고)의 1년 학비와, 그 학교의 장점에 대해 들었다. 그 학교의 1년 학비는 내가 아는 웬만한 대학의 1년치 학비보다 비싼 것 같았다 (대학 학비를 잘못 알고 있을 수도 있는데). 그 학교의 장점은, 다양한 활동을 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학생이 다른 독특한 생기부를 쓸 수 있다는 것이었는데 이 부분을 읽으며 그 학교 생각이 나더라. 물론 대학입시결과도 좋으니 그러니 그런 비싼 학비를 내겠지...? 그런데 그 학교를 졸업한 상당수의 학생이 더 좋은 대학에 가려고 재수를 한다는 얘길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럼 그 학교는 뭐하러 가는건데.. 그러니까, 돈이 있는 사람은 만족할 때까지 계속 학력을 높인다는 뜻이 되겠다.



작가가 학교를 다닌 10년 전 (정확히 언제인지 모르겠지만 작가가 이 책으로 2011년 상을 받았다고 하니 90년대이지 않을까 싶다)에는 지식의 독점과 그로 인한 차이가 아직 중요한 시기였던 것 같은데, 다시 학교로 돌아간 시기에는 이처럼 어떤 삶의 '방식' 이 엘리트를 규정짓는 차이가 된 것 같다- 라는게 이 책의 주요 내용이었다. 작가는 특권의식(entitlement)이 특권(privilege) 이 되었다라고 표현한다.


이 책 맨 앞에 알렉시스 토크빌 (프랑스 귀족인데 미국에 와서 보고 <미국의 민주주의> 라는 책을 쓴) 의 말이 인용되어 있다.


장벽은 없어졌다기보다는 그 모양이 바뀌었다



한국 사회는 어떠한가... 한국 사회도 내가 20대일 때와 많이 달라진 것 같다. 일단 입시제도가 많이 바뀌었는데, 입시제도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한때 부모의 특권을 보다 적극적으로 이용했던 폐해가 지금은 조금 줄어들었을 것 같기는 하다. 그렇지만 내신, 수능, 논술, 자소서 등을 다 준비하는 게 어떻게 가능한지- 성인인 내가 봐도 어려워 보이는 지문과 논제들만 봐도- 놀랍다. 고등학교 가면 사교육비가 늘어난다는 것에 이런 입시제도도 한몫 할 것 같다. 초등학교 때 시험이 없던 것은 좋았는데 왜 고등학교를 생각하면 암담해지는 건지.. 이런 심한 온도차는 학생과 학부모가 온전히 감당해야 하는 몫이 된 것 같고. 요즘 초등학교에서는 확실히 내가 다닐 때보다 다양한 활동을 하는 것 같지만, 그게 각자의 자질을 살려주고 대학 입시까지 이어지는 것에 부모의 자원이 많이 투입되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이 이야기는 다른 나라의 이야기이고, 마지막에 엄기호님의 해제가 길게 붙어있는데... 음 좀 스스로 생각을 해보고 읽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 대체로 그 분의 이야기는 한국의 엘리트는 미국의 엘리트보다 무능하다- 라는 이야기였다. 미국의 엘리트는 특권을 누릴지언정 지도를 하는데 한국의 엘리트는 그렇지도 않다... 특정 집단을 비하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엘리트 중의 엘리트인 검찰의 요즘을 생각해보면. 음음. 좀 그렇긴 하다.


이제는 한국의 능력주의에 대해 읽어봐야 할 것 같다. 읽기 너무 괴로울 것 같지만..

적절한 책 아시는 분은 추천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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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5-09-25 11: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국의 능력주의>라는 책이 딱 있어요. ㅋㅋㅋㅋㅋㅋ 저도 아직 사두고 읽지는 않았는데, 21세기 최고의 책으로도 꼽혔더라고요...?

건수하 2025-09-25 13:36   좋아요 1 | URL
아, 저도 그 책 제목이 떠올랐는데 전 그걸 엄기호님이 쓰신 줄 알고 검색하니까 안 나오더라고요.
21세기 최고의 책에도 있었군요!
갖고 계신김에 잠자냥님이 얼른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은데 .... 그쵸?

잠자냥 2025-09-25 13:44   좋아요 1 | URL
😸네

건수하 2025-09-25 13:45   좋아요 0 | URL
기다리겠습니다 ㅎㅎㅎ

단발머리 2025-09-26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이 있었군요 ㅎㅎ 저도 이쪽으로 관심이 많은데 제 아이들이 그 나이(즉 미친듯 달려야할 나이ㅋㅋㅋ)에 도달해보니 다른 대안이 만들어져도 일단 얘네들하고는 좀 먼 일이라 저도 모르게 소극적으로 변하게 되더라구요. 얘들아, 알아서. 각자… 열심히 하자! 응?

전 이 문제는 반드시 노동의 문제와 같이 가야한다고 생각하는데… 요점만 이야기하자면ㅋㅋㅋ대학에 가지 않아도 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대학은 진짜진짜 완전 공부가 좋은 사람들이 가는 곳으로 바뀌는게 좋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나 이건 또 주택 문제랑 연금 문제랑 연결될 수 밖에 없어서요.
얌전히 보관함에 이 책을 넣어둡니다^^

건수하 2025-09-26 14:48   좋아요 1 | URL
저도 요즘 육아휴직이나 육아시간 확장 이런 걸 보면 그래 좋구나 싶지만... 아무래도 길 건너 불구경 하는 느낌이더라고요.

맞아요. 아이가 어릴 때는 곧 모두가 대학을 안 가도 되는 사회가 될거라 기대를 했었는데, 그동안 전혀 바뀌지 않아서- 결국 소득 불평등이 심해서- 더욱 각자도생의 문제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게 사회 전체적으로 보면 엄청난 시간낭비 돈낭비인데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