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적 <말괄량이 길들이기>를 어린이용 소설로 본 것 같은데, 이번에 희곡으로 읽어보니 '서막' 과 '본극' 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서막에서는 어떤 영주가 술취한 사람이 길바닥에 쓰러져 자고 있는 걸 보고 장난을 칠 생각을 하는 것으로 시작. 아니 왜 혼자 잘 있는 사람을 왜 건드리는지...
이 주정뱅이에게 장난 좀 쳐봐야겠다. ... 이 녀석을 침실로 떠메다가 좋은 옷으로 갈아입히고, 반지도 끼워주고, 머리맡엔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그럴듯한 시종들도 대기시켜 놓으면, 잠이 깨서 이 거지가 자기 신분을 감쪽같이 착각하지 않을까?
시종들은 영주의 말대로 주정뱅이를 영주의 방에 데려다놓고, 시동을 시켜 부인 행세까지 하게 만드는데, 마침 근처에 배우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이 가짜 영주 부부 앞에서 연극을 하게 하니, 그것이 바로 <말괄량이 길들이기> 이다. 학교다닐 적 '액자 소설' 이란 걸 들어본 것 같은데.. 그러니까 이것이 '액자 연극'?
서극의 설정은 이후 1막 1장과 2장 사이에 잠깐 이 주정뱅이가 졸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올 뿐, 이후에는 나오지 않아 아쉬웠다. 그래서 주정뱅이는 어떻게 되었는가... @_@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사실.. 이전의 다른 작품보다 좀 재미가 없었다. 줄거리를 굳이 얘기 안해도 될 것 같지만 간단하게 이야기하자면
구혼자가 줄을 선 비앙카 (동생)를 언니 (카타리나)보다 먼저 결혼시킬 수 없다는 자매의 아버지 (밥티스타) 를 설득하는데 실패한 비앙카의 구혼자들이 '언니에게 신랑을 구해준다' 는 묘안을 내고 그것에 성공한다
라는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카타리나가 '말괄량이' 인 것.
밥티스타: 이제 제발 그만 조르시오, 내가 단단히 결심한 것을 당신들도 알고 있잖소. 글쎄 큰딸의 신랑을 정하기 전에는 작은딸을 시집보낼 수 없습니다.
호르텐시오: 방법은 딱 한 가지, 언니에게 신랑을 구해주는 것이오.
그레미오: 신랑이라뇨? 악마 말인가요?
호르텐시오: 신랑 말이오.
그레미오: 악마겠죠. 글쎄, 생각 좀 해봐요. 아버지가 아무리 부자라고 해도 지옥으로 장가를 들 바보가 어디 있겠느냔 말이오?
페트루키오: 난 운명에 몸을 내던지고, 운 좋으면 아내도 얻고 돈도 벌어보자는 속셈일세. 지갑에는 돈을, 고향에는 재산을.
호르텐시오: 여보게 페트루키오, 그렇다면 솔직히 할 이야기가 있네. 심술 사나운 말괄량이를 아내로 맞아보지 않겠나? 이런 이야기가 그리 달갑지 않을는지 모르지만, 그녀가 부자라는 사실만은 말해 두겠네. 이만저만한 부자가 아니라네.
페트루키오: 이 페트루키오의 아내로서 부족하지 않을 만한 재산이 있다면 그녀가 저 플로렌티우스의 애인처럼 더럽게 생겼건, 시빌레 무당 같은 할망구건, 아니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만큼 심술궂고 악다구니를 부리는 사람이건 상관없네. 그녀가 저 아드리아 바다의 파도같이 사납게 굴더라고 난 꼼짝 않을테고, 내 감정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네. 돈 많은 아내를 얻으랴고 파도바를 찾아온 나일세. 돈만 생긴다면야, 이 파도바는 천국이지 뭔가.
... 그리하여 페트루키오는 카타리나에게 청혼을 하게 되고..
카타리나: 맛을 보여주지. (페트루키오의 뺨을 친다)
페트루키오: 한 대 더 때려주시오, 다음엔 내가 때려줄 테니.
...
카타리나: 이러시면 가만 안 있을 거예요! 썩 놔요. (빠져나오려고 페트루키오 손을 물고 할퀸다)
페트루키오: 아니, 못 놓겠소. 이제 보니 당신은 참 상냥하군요. 소문엔 억척스럽고 쌀쌀맞고 무뚝뚝하다던데,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이었소. 알고 보니 쾌활하고 명랑하며 예의도 바르고, 게다가 말은 느리지만 봄철의 꽃과 같이 예쁘잖아요.
(더 이상 괴로워서 못 옮기겠다)
카타리나: 절 딸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럼 말하지만, 참 아버지다운 애틋한 관심을 보이셨군요. 이런 반미치광이와 부부의 연을 맺어주려고 하시다니요. 무지한 깡패, 욕이면 단 줄 아는 그런 사내인 줄도 모르시고.
카타리나는 아버지에게 항의해보지만, 결국 결혼을 하게 된다.
읽다보니 카타리나도 카타리나지만, 페트루키오는... 정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미친놈 이었다 (...)
결혼 피로연에는 늦게 도착하고, 형편없는 옷차림을 하고, 결혼식을 주관하는 신부를 때리질 않나... 피로연이 끝나기도 전 아내를 자신의 집으로 끌고 가고... 그 외에도 여러 미친 짓 그리고 말장난으로 카타리나를 괴롭힌다. 나중에 페트루키오의 말도 안되는 말에 토를 달지 않는 카타리나를 보고 다른 사람들은 물론 아버지도 놀라게 된다.
카타리나: 저런, 저런! 그 험상궂은 이맛살은 좀 펴고 그렇게 멸시의 눈초리를 하지 마세요. 그건 자기 남편에게 상처 주는 짓이에요. 왕이며 지배자인 자기 남편을. 그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아름다움을 망치는 짓이에요, 서리가 목장을 망치듯이. 그리고 자기 이름을 더럽히는 짓이에요, 회오리바람이 아름다운 봉오리를 뒤흔들어 놓듯이. .... 남편은 그대의 주인이며 생명이고, 수호자이며, 머리, 군주예요. 아내를 걱정하고, 아내를 편히 해주려는 생각으로 바다에서나 육지에서나 뼈아프게 일을 하시잖아요. 태풍 부는 밤이나 추위에도 안 주무시잖아요. 그 덕에 여러분들이 안심하고 아늑하게 누워 있을 수 있는 거예요. 그러나 남편은 아내한테서 다른 대가는 바라지 않아요. 다만 사랑과 고운 얼굴과 진실한 순종밖에는..... 그렇게도 큰 빚에 비하면 참으로 하찮은 지출이죠. ....
(더 이상 괴로워서 못 옮기겠다)
처음에는 이게 뭔 헛소리 라고 생각했는데
그리고 카타리나는 그런 일을 당하고도 도대체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나 (가스라이팅?) 생각했는데...
이 이야기에 처음부터 끝까지 진실한 인물이 거의 없다는 점 - 서막에서 부랑자를 영주로 만드는 설정, 하인과 주인의 자리 바꿈, 언니가 결혼해야 여동생이 결혼할 수 있으므로 친구의 부탁을 받고 언니에게 구애하는 인물, 비앙카의 가정교사인 척 하고 들어가는 두 구애자, 현지에서 급조한 가짜 아버지 등 - 을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허위로 가득차 있는 이 이야기는 풍자라는 암시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딸을 얼른 보내버리려는 아버지나, 돈을 바라고 결혼하려는 남자, 여자에게 사랑과 고운 얼굴과 진실한(?) 순종만 바라는 남자.. 이런 것도 다 좀 비꼬는 것 같고.
그래도 21세기에 살고 있는 여성인 내가 읽기에는 여전히 불편한 작품이었다.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종이 시계> 의 작가 앤 타일러가 현대 배경으로 리메이크 해서 소설화 했다. 지난 번에 리뷰를 썼다. https://blog.aladin.co.kr/suha/14083527 저번엔 아주 맘에 들지는 않지만 <말괄량이 길들이기>를 이만큼 만들어놓았으니 4점 준다고 썼는데, <말괄량이 길들이기>를 다시 훑어보고 이게 반어 혹은 풍자라고 생각하고 나서 마지막으로 인용한 카타리나의 말이 <식초 아가씨>에서 어떻게 바뀌는지를 다시 보니...
어떤 방식이든 네가 원하는 대로 네 남편을 대하도록 해. 하지만 그가 누가 됐든 그 사람이 가엾구나. 남자로 사는 것은 힘들어. 그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니? 남자들은 뭐든 고민을 숨겨야 된다고 생각해. 관리해야 된다고, 통제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진솔한 감정을 못 드러내지. 아프거나 간절하거나 슬픔에 휩싸여도, 상심하거나 고향이 그립거나 큰 죄책감에 시달려도, 뭔가 대실패를 할 순간이어도—그들은 ‘아, 난 괜찮아요. 모든 게 좋아요’ 라고 말하지. 생각해 보면 남자들은 여자들보다 훨씬 자유롭지 못해. 여자들은 아장아장 걸을 때부터 사람들의 감정을 살피면서 살아. 레이더가—육감이나 공감, 대인 관계라나 뭐라나 하는 게—완벽해지지. 여자들은 상황이 이면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아는 반면, 남자들은 스포츠 경기와 전쟁, 명예와 성공에 몰두하지. 남자와 여자는 다른 두 나라에 있는 것과 비슷해! 난 네가 말하는 것처럼 ‘망가지지’ 않아. 난 그를 내 나라에 들어오게 하는 거야. 우리 둘이 본모습으로 지낼 수 있는 곳에서 그에게 자리를 주고 있는 거라고.
음. 이게 과연 현대적 리메이크인가. 남자로 사는 건 힘들다며 한껏 얘기하더니, 여자들은 사람들의 감정을 살피면서 산다면서 우린 달라. 이러고 끝낼 이야기냐고. 여자들이 왜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살피면서 사는지 이야기해야 되는 거 아니야?
오히려 셰익스피어의 <말괄량이 길들이기>에서 더 퇴보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저번엔 이만큼이나 만들어놨다며 4점 줬는데, 안되겠다 깎아야겠다. 3점? 2.5점? 역시 앤 타일러에게는 기대하는 게 아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