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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식초 아가씨 ㅣ 호가스 셰익스피어 3
앤 타일러 지음, 공경희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12월
평점 :
셰익스피어 희곡 낭독 모임에서 <말괄량이 길들이기>를 읽었다. <오셀로>나 <맥베스> 때도 그랬지만, 희곡을 읽을 때는 왜 갑자기 그런 사건이 일어나는지 이해가 잘 안될 때가 많다. 공연을 위한 대본이기에 많은 것이 생략되어 있는게 아닐까 생각한다. '개연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나는 그래서 셰익스피어 작품을 다시 쓴 소설을 읽는게 좋았다. 소설은 개연성이 촘촘하니까.
<말괄량이 길들이기>를 읽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진실한 인물이 거의 없다는 점 - 본격 극이 시작되기 전의 서극(?)에서 부랑자(?)를 영주로 만드는 설정, 하인과 주인의 자리 바꿈, 언니가 결혼해야 여동생이 결혼할 수 있으므로 친구의 부탁을 받고 언니에게 구애하는 인물, 비앙카의 가정교사인 척 하고 들어가는 두 구애자, 현지에서 급조한 가짜 아버지 등 - 이 조금 위안이 되기는 했으나 (그러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허위로 가득차 있는 이 이야기는 풍자라는 암시 아닐까 생각했다) 도대체 이건 무슨 얘기를 하려는 작품인가, 도대체 카타리나는 저런 남자에게 왜 넘어가는가 (가스라이팅 당해서 혹은 살아남기 위해서?) 이런 생각만 들고 상당히 불편했다.
<식초 아가씨>의 작가가 앤 타일러이기에 많은 기대를 하진 않았다, 그저 뭐라도 개연성을 만들어주었으면 했다. 인물 설정은 나쁘지 않았다. 내가 잘 아는 인물상인 괴짜 과학자(...모든 과학자가 그렇지 않다는 점을 밝혀두고 싶지만) 두 명과 약간 괴팍한 아가씨 한 명. 그리고 유산 대신 비자를 얻기 위한 결혼이라는 것도 뭐 괜찮았다. 가족이 없는 외로운 외국인, 그 남자가 영어는 잘 못해도 진심으로 다가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버지와 동생 뒤치다꺼리를 하던 아가씨가 삶에 변화를 줄 수 있는 기회라는 것까지도 괜찮았다.
그런데 그가 결혼하자마자 갑자기 좀 다르다. 물론 그가 패닉에 빠질만한 사건이 하나 있긴 했다. 그렇지만 결혼하고 나서부터 고용주이자 장인에게도 막 대하는 것 같고 운전도 막 난폭하게 하고 (그의 국적이 러시아라서 약간의 개연성이 추가되는 것 같다?) 결혼 전 인사왔을 때는 엄청 살갑게 지내는 것 같았던 사람 (그가 사는 집 주인의 고용인)도 알고보니 그와 원수인 것 같다. 문제의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폭력도 행사했다. 이대로 계속 가도 괜찮은건가? 그동안 비자를 위해 본모습을 속인 건 아닐까 살짝 걱정이 된다. 이 세상은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으니까.
그런데 괴팍했던 아가씨는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거다.
남자로 사는 것은 힘들어. 그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니?
남자들은 뭐든 고민을 숨겨야 된다고 생각해. 관리해야 된다고, 통제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진솔한 감정을 못 드러내지.
...
생각해보면 남자들은 여자들보다 훨씬 자유롭지 못해.
여자들은 아장아장 걸을 때부터 사람들의 감정을 살피면서 살아.
레이더가-육감이나 공감, 대인 관계라나 뭐라나 하는 게 - 완벽해지지.
여자들은 상황이 이면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아는 반면, 남자들은 스포츠 경기와 전쟁, 명예와 성공에 몰두하지.
남자와 여자는 다른 두 나라에 있는 것과 비슷해! 난 네가 말하는 것처럼 '망가지지' 않아.
난 그를 내 나라에 들어오게 하는 거야. 우리 둘이 본모습으로 지낼 수 있는 곳에서 그에게 자리를 주고 있는 거라고.
맨 뒤의 네 문장은 뭐... 괜찮다. 다른 두 사람이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여지를 주는 건 괜찮다.
그리고 그 남자가 그동안 속였는지 아닌지는 글로만 본 나는 잘 모르고 경험해본 본인이 더 잘 알겠지. 자신의 판단에 확신이 들어서일 수도 있는데.
여자들이 아장아장 걸을 때부터 사람들의 감정을 살피면서 살아서 레이더가 완벽하다고?
(사실 너는 별로 그렇지 않잖아. 그래서 어린이집에서 힘들었잖아.)
그리고 혹시 완벽하다고 해서 그게 쉬운 일은 아니지.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를 생각해보면 그건 더 쉬운 일이 아니다.
왜 여자들이 어릴 때부터 사람의 감정을 살폈다고 생각하니?
그런데 남자로 사는 것만 자유롭지 않고, 힘들다고 얘기하는 것 같아서 당황스러웠다. 이걸 쓴 작가가 여성이라는 것도. 남자가 그런 건 원래 그런 거고 자연스러운 거고, 여자는 그런 남자를 이해해줘야 한다, 기회를 줘야 한다- 라고 하는 것 같아서.
<말괄량이 길들이기>에 비하면야 백 배 나아졌지만, 이것이 앤 타일러 소설의 한계인 것 같다. 세상을 아름답게 봐야 하는 것.
(올해 내가 아이한테 어쩔 수 없이 권유했던 일인데) 뭐 다같이 사이좋게 지내는 거 좋지. 그렇지만 왜 한쪽만 이해심을 발휘해야 하냐는 거다.
앤 타일러라서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딱 기대한 만큼의 소설이었다. 그래도 <말괄량이 길들이기>를 이만큼씩이나 만들어놓다니 그게 어딘가. 그래서 별 네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