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버블랫의 <달, 해, 그리고 마녀들>과 파리네토의 <마녀와 권력>에 의하면
신세계 (아메리카)에서 마녀사냥은 공포를 풀어넣고 집단적인 저항을 파괴하며,
공동체 전체를 침묵시키고 구성원들이 서로를 적대시하게 만들기 위해
행정당국이 사용했던 고의적인 전략
312쪽
이었다. 마녀사냥은 토지 혹은 신체, 사회적 관계를 박탈한 일종의 인클로저였다고 할 수 있다.
마녀사냥이 피식민자들의 저항을 말살시키지 못했고, 주로 여성의 투쟁 덕분에 땅, 지역종교,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유대는 박해를 견디고 살아남았다고 한다. 이후 5백여년 간 반식민 저항과 반자본주의 저항의 근원이 되었다고?
5백여년이라고 하면 1500년대에 시작해서 지금도? 지금도 그들의 땅과 지역종교,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유대가 남아있나?
그러고보면 남아메리카에 대해서도 잘 모르지만, 그들의 지배층 그리고 지배층의 종교에 대해서만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남아메리카의 큰 나라들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 ...) 의 대통령은 백인이지만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그들의 땅과 종교, 유대를 지켜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식민지에 도착한 백인들은 나체상태, 동성애, 식인, 일부다처제 등의 풍습을 이유로 들어 이들을 인간이 아닌 야만으로 규정하고 이들에게 가한 각종 폭력을 정당화했다. 하다 못해 이들이 '별 가치 없는 것에 대한 것에 대한 보답으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주고 공유하는' 것 조차 야만성의 징표로 강조했다고 한다 (314쪽, Hulme, 1994 인용). 자신들과 다른 것을 받아들이기는 사실이 힘들었는지, 아니면 그것이 식민화에 대한 좋은 핑계가 되었는지는 확인하기가 힘들지만 애초에 관용을 보일 생각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금과 은, 그리고 땅을 빼앗는데 있어 '악마적인 존재'로 원주민들을 생각하는 이데올로기는 유용했다. 이미 남아메리카에 존재하던 제국주의 국가 아스텍과 잉카의 영향도 받았다.
1550년대 이후 은광이나 수은광의 채굴, 그리고 공작소에 필요한 노동력을 충분히 확보하기 위해 원주민의 노동력 착취는 더욱 강화되었고 이에 대한 반발의 하나로 1560년대 원주민들의 천년왕국 운동인 타키 온코이 운동이 촉발되었다. 이 운동은 유럽인들과의 협력을 비판하고 식민화 종식을 위해 범안데스 지역의 지방신 (후아까스) 동맹을 형성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기독교와 스페인에서 들어온 이름, 식품, 의복을 거부할 것을 독려했다. 이 운동을 통해 안데스인들은 처음으로 '원주민'으로서 한민족이라는 의식을 갖기 시작했으며 이 운동이 널리 확산되어 남으로는 리마, 동으로는 쿠츠코, 안데스 고원지역을 넘어 오늘날의 볼리비아까지 번져갔다. (322쪽) 스페인 정부는 지역족장들이 공급해야 하는 노동력 할당량을 늘렸고 불응할 경우 체포와 처벌을 집행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으며, 농민들의 통제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지정된 마을로 이동시키는 재정착프로그램을 도입했다. 이 재정착 프로그램은 후아까스의 파괴와 선조들의 종교에 대한 박해를 통해 지역성지를 악마화 시킴으로써 힘을 얻었다. 이에 굴하지 않고 예전의 경작지로 돌아가고 원래의 신을 숭배하자 1619-1660년 사이에 지방신에 대한 공격이 절정에 달하였고 마녀사냥이 시작되었다.
이들의 목적은 사람들을 위협하고 '죽음의 공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잠재적인 반란자들이 공포에 마비되어
공개적으로 구타당하고 모욕당한 사람들이 겪었던 것과 같은 시련에 맞서려하기보다는
무엇이든 수용하겠다는 태도를 보이도록 만들고자 한 것이다.
327쪽
남아메리카의 종교에 중요한 여성신들이 많이 있듯, 콜럼버스 이전 사회에서 여성들은 강력한 지위를 유지했다. 그러나 스페인인들이 여성 혐오적 신념을 주입하여 남성들에게 우호적인 방식으로 경제 및 정치권력을 재조직하고 일부다처제를 불법화함으로써 여성들의 지위는 하락했다. 스페인인들은 여성들을 마녀로 박해함으로써 원주민 여성들이 참여할 수 있는 활동영역을 재규정하는 동시에 토속종교 수행자들과 반식민지 반란의 선동자들을 한꺼번에 노렸다. 그러나 안데스의 마녀들은 공동체에서 버림받지 않았고, 여사제들은 공동체와 문화를 방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파리네토의 주장에 의하면 유럽의 마녀사냥이 16세기 후반 대중적으로 행해졌던 것은 아메리카의 경험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식인풍습, 아이들을 악마에게 봉헌하는 것, 성수와 마약에 대한 언급, 동성애를 악마주의와 동일시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신세계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유럽과 신세계의 지배계급은 비슷한 이데올로기를 공유하고 있었을 것이므로, 자본주의가 전지구적으로 발달하면서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형성 역시 유사하게 진행되었을 수 있다.
(아시아의 경우에도 서구에 문호를 개방하며 기독교가 전파되었는데, 이후 많은 지역종교와 관습들이 비이성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힘을 잃었을 것 같다. 이 경우에도 여성의 지위 하락이 동반되었는지 궁금하다)
마녀사냥은 아프리카에서도 위세를 떨쳤고 오늘날에도 많은 나라, 특히 나이지리아와 남아프리카처럼 노예무역에 한때 연루되었던 나라에서 분열의 핵심수단으로 지속되고 있다 (341쪽)1980년대와 90년대 케냐, 나이지리아, 카메룬에서도 마녀사냥이 보고되었다고 한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세계 곳곳에서 마녀사냥이 재등장했던 것은 신자유주의의 등장과 더불어 나타난 새로운 '시초축적' 과정과 관계가 있다. (한국의 경우에도 IMF가 관여한 구조조정이 있었다. 이 시기 많은 남성 외에도 많은 여성이 일자리를 잃었는데.. 이후 한국 사회의 여성혐오와 관계가 있을까?)
우리는 이것이 우리 문제가 아니라고 착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밀러가 이미 세일럼의 재판에 대한 독해 속에서 확인했던 것처럼,
마녀박해에서 형이상학적인 요소들만 벗겨내고 나면
이것이 우리에게 아주 근접한 현상이라는 것을 수긍하게 될 것이다.
344쪽
1. 페데리치는 자본주의 이전 사회에서의 공동체, 그를 통한 유대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현대 사회에서 회복해야 할 것으로 보는 것 같다. 이것은 그가 참여했던 북이탈리아에서 있었던 공동체 운동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과거 사회에 있었던 공동체의 상실, 성 역할의 분담, 분업을 통한 효율 지향적 사회.. 이런 것은 현대 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하는데 큰 도움이 될까? 모든 공동체는 바람직한 연대로 이루어져있으며 공동체적 삶의 단점은 없을까? 공동체의 연대는 생계-경제 문제를 공유해야만 진정해질 수 있을까? 또 여성이 중심이 되어야만 가능할까?
2. 마지막 페데리치의 문장은 의미심장하다. 21세기 세계 여러 곳에서 일어나는 마녀사냥과 유사한 일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생각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