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중에 별명이 '선물대마왕'이란 애가 있다. (참고로 나는 '변태대마왕'에 '소심대마왕'에 기타등등이고, 주변에도 무수한 대마왕들이 포진하고 있다;;)
얘는 취미도 특기도 선물 해주기다.
나같은 보통 사람은 생일이나 되어야 선물을 챙겨주는 법인데, 얘는 1년 365일이 선물을 위한 날이다. 크리스마스, 추석, 설, 발렌타인데이, 화이트데이, 로즈데이 등등 무슨 데이들은 물론이요, 남의 이런저런 기념일들을 일일이 기억해뒀다가 남편도 까먹은 결혼기념일에 그 부인에게 선물 주기, 별 의미도 두지 않는 입사 기념일 챙겨주기, 양력으로 생일 지내는 사람 음력생일까지 챙겨주기 등등 레퍼토리가 무궁무진하다.
그것도 모자라 햇빛이 너무 좋아서, 꽃이 정말 예뻐서, 멋진 책(음반)이 우연히 눈에 띄어서, 피곤해 보여서, 고민 있는 것 같아서 기분 풀어주려고 등등등 선물을 해주기 위한 핑계가 그야말로 끝도 없다. 주변인들 중 얘가 특히! 싫어하는 사람을 제외한다면 거의 모든 사람이 얘의 선물공세를 받아본 적이 있는데, 특히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선물세례는 그야말로 기가 질릴 정도로 어마어마하다.
물론 그 선물이 부담될 정도로 비싼 것은 아니고 꽃이며 책, 음반, 옷, 화장품 등등이지만 그래도 그렇지. 한두 번도 아니고 날이면 날마다(는 쫌 과장이지만) 그 선물들이 자꾸자꾸 모이고 쌓이면 그게 한두 푼이곘는가.. 그리고 결정적으로, 당시 그 애의 가장 주된 선물 공세 대상이 바로 나였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내가 마음에 들었다고 말한 그애였기에 그때의 선물은 그냥 내 마음을 끌기 위한 일시적인 것인 줄로만 알았다, (아, 참고로 얘는 물론(왜 물론인가;;) 여자다) 그러나 한 해 두 해 만남이 길어지면서도 그 애의 애정은 식지 않아, 계속 이모저모로 나를 돌봐주고 어뤄주고 감싸줬다. 그리고 그 애정의 표현방법은 주로 갖가지 선물로 나타났고..
한동안은 얘가 사준 옷들만으로도 한 계절을 날 수 있을 정도였고, 새로 나온 책이랑 음반은 얘가 다 사줬고, 그 누구에게서도 받아보지 못한 화려하고 아름다운 꽃다발들을 시시때때로 받았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그 마음에 보답할 수 있을 만큼 다정하고 선물 받을 때마다 바로바로 그에 적절한 대응을 할 만큼 마음 넉넉한 사람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불행히도 그렇지가 못했다는 거다. 받을 땐 물론 기쁘고 즐거웠지만 조금은 부담스럽기도 했고, 그 아이의 취향도 나와는 사뭇 달랐기에 도대체 뭘 선물해줘야 기뻐할는지 감을 잘 잡을 수가 없었다.
보통 선물은 자기가 받고 싶어하는 걸 해주게 마련이라고들 하니까, 아마 그 애가 내게 선물해준 아이템들이 그 애가 좋아하는 거였을 거다. 그렇다고 책 받으면 책 사주고 화장품 받으면 화장품 사주고 꽃 받으면 꽃 사주고.. 이거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물물교환도 아니고.. 아니, 물물교환이라면 당근 다른 물건을 주는 게 맞겠지..
하여튼 그렇게 고민만 하면서 쌓여가는 선물 속에 제대로 보답도 못하고 있다가, 너무나 보통 인간스러운 나는 걔의 무슨 기념일이 다가올 때마다 그냥 한번에 큰(액수 면에서) 선물을 해주면서 때우곤 했다. 근데 사실 내가 너무너무 잘못한 거다. 걔가 바라는 건 빚 갚듯이 그렇게 사주는 비싼 선물이 아니라 자기가 애정을 보여줄 때마다 그에 답하는 나의 애정이었을 텐데.. 읽던 책이라도 듣던 CD라도 고민하지 말고 '이거 너 가져' 하고 줬으면 기뻐하며 웃었을 텐데, 난 이상하게 그게 잘 안됐다.
하여튼 결론적으로 너무너무 미안한 마음만 한가득이고, 지금도 그 마음에는 다 보답을 못하면서 살고 있다. 다행히(?) 요즘에는 옛날만큼 자주 안 만나서 선물 받는 횟수도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나도 걔처럼 무한정 주면서 살고 싶고, 그렇게 남을 소중히 챙기는 마음을 닮고 싶다는 생각은 늘 한다.
사실 걔가 주는 선물의 정점은 예쁜 포장지 속의 물건이 아니라, 그에 곁들여진 카드 한 장이었다. 귀여운 글씨로 눌러쓴 장문의 편지. 때로는 특별한 내용이 없을지라도 마음만은 담뿍 담겨진 그 카드 한 장. 그리고 내게 결정적으로 모자란 것도 바로 그거였다. 비싼 선물만 사줬지 제대로 된 카드 한 장 써서 넣어주지 못한 바부멍텅구리. 아, 너무너무 미안하다, 친구야..
오늘 이 얘기를 하는 건 P모님에게 또 어마어마한 선물을 받아버렸기 때문이다.
그걸 받고 그 친구가 떠올랐다.
늘 내가 준 것의 몇 배 몇십 배를 받고 사는 나. 아아, 이런 생활에서 탈피해야 하는데 이넘의 인생 여전하군.. ㅠㅠ
오늘의 이 아름다운 공습에 어떤 백어택을 가할지 고민중이다. (이러다 또 고민만 하다 끝날라..;;)
결론은 무지무지 고맙다구요.. 글 내용이 별로 안 고마워하는, 배은망덕한 느낌이 쫌 들지만 마음은 그런 게 아니라구요.. 내가 표현을 잘 못해서.. 하여간에... (또 변명만 길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