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1년에 딱 한번 있는 특별한 날이다.
바로 1년 중 낮의 길이가 가장 긴 '하지'.
1년의 24절기 중에서 내가 그 날짜를 확실히 기억하면서 제대로 챙기는 절기는 하지뿐이다. 해마다 이날을 기점으로 세상에 대한 내 태도가 확 바뀌기 때문이다.

겁이 많은 나는 어렸을 때부터 밤을 굉장히 무서워했다.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면 아름다운 노을을 보는 황홀함에 기쁘기도 했지만 그 순간 등 뒤에서 스멀스멀 다가오고 있는 어둠이 너무 두려웠다. 밤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세상 모든 무서운 일 나쁜 일은 다 밤에 일어난다고 생각했기 떄문이다. 그래서 마음 놓고 잠들 수도 없었다. 내가 자는 동안에 나나 내 가족의 신상에 끔찍한 일이 닥쳐올까봐, 아니면 초자연적인 존재들이 내 잠자리 주변을 어슬렁거릴까봐, 그것도 아니면 자는 동안에 지구가 멸망하기라도 할까봐..

밤에는 가급적 잠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어떻게든지 밤을 밝히면서 그 어둡고 무서운 시간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을 내 눈으로 확인한 후, 태양빛이 비쳐들기 시작할 무렵에야 겨우 이 끔찍했던 시간이 다시 한번 무사히 지나갔음에 안도하며 잠들곤 했다. 하지만 어린 내가 이런 생활습관을 유지하는 데는 장애가 많았다. 아침이면 학교도 가야 했고 엄마아빠는 얘가 자나 안 자나 감시하기 위해 시도때도 없이 내 방문을 열었고.. 그래서 나는 내 비뚤어진 생활 사이클에 정당성을 부여해야 했다.

우선 방과 후 집에 돌아오면 무조건 침대로 직행했다. 그때 시간이 4시건 5시건 7시건 상관없이, 밥도 안 먹고 그냥 해 떠 있는 동안 잠들어 버리는 거다. 맘 같아선 그대로 아침까지 내처 자고 싶었지만 하루이틀도 아니고 어떻게 매일매일 15시간 이상을 잘 수 있겠는가. 보통 잠에서 깨면 11~12시 정도. 그때쯤 느지막이 저녁을 먹고 밤을 샐 준비를 한다. 시험 기간에는 이런 방법이 아주 잘 통했다. 밤에 조용한 시간에 공부할 거란 말이야~ 라고 하면 엄마야 당연 껌뻑 넘어간다. 어이구 내 새끼~ 하면서 밤참도 챙겨주고.. 시험 기간이 아닌 평소에는 약간 무리수가 있긴 했지만 어쨌든 평소에도 공부를 미리미리 해둬야 한다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내 생각에)를 지껄이며 그 방법을 고수했다.

물론 1년 365일 이렇게 살지는 못했다. 여러 변수도 작용했고, 제발 좀 정상적으로 살라는 엄마의 강력한 권고도 있었고 해서.. 하여튼 그렇게 밤을 밝히는 시간 동안에도 마음 편하게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건 절대 아니고, 계속해서 몰려오는 공포와 싸워야만 했다. 사방이 어둡고 조용하니 온갖 끔찍한 상상들은 다 떠오르고, 아주 조그만 소리에도 신경이 바짝 곤두선다. 눈길 닿는 곳마다 불을 환히 켜놓아도 어딘가에서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 같기도 하고, 화장실 가는 것도 무섭고.. 해서 믿지도 않는 온갖 신들의 이름을 불러대며 빨리 날이 밝게 해달라고 해를 달음질치게 해서 어서 떠오르게 해달라고 간절히 빌었다. 

그렇게 1년 내내 밤의 공포에 떨던 내게 하지가 다가온다는 것은 신의 축복이었다. 무서운 밤은 짧아지고 낮은 길어지는데다 해도 더 빨리 떠서 두려움을 떨치고 평온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으니까.. 덕분에 하지를 기점으로 앞뒤 2달 정도씩은 마음이 편해지고 만사가 긍정적으로 보이지만 날짜가 점점 동지로 다가갈수록 인생이 우울해진다. 이런 버릇은 밤에 잠 못 드는 경향이 예전보다 조금 나아진 요새도 비슷하다. 사실 하지가 지나면 다시 낮이 짧아지고 밤이 길어지므로 마냥 좋아할 일은 아니다. 기쁘면서도 우울하달까.. 오히려 낮이 길어지기 시작하는 동지를 더 좋아해야겠지만 동지 자체가 방미 가장 긴, 끔찍한 날이기 때문에 그날은 도저히 기뻐할 맘이 들지 않는다.

하루 24시간 낮만 있는 나라에서 살았으면 좋겠다. 물론 별을 좋아하니까 그 나라의 어느 곳에선가는 별들을 맘껏 볼 수 있어야 한다. 단, 내가 원하는 시간 동안만 별을 보다가 다시 문을 열고 나서면 눈부신 햇살이 나를 반기며 내 마음을 안도케 하는, 그런 곳이라야 한다.

* 이 글에서 알 수 있듯이 나는 완벽한 '저녁형' 인간이다. 덕분에 올 상반기에 온나라를 뒤흔든 '아침형' 인간 붐이 심히 껄쩍지근했다. 아무리 음모론을 주장해도 귀기울여주지 않고 내 주변의 믿었던 올빼미들마저 하나둘 배신을 때렸다. -_- 그러나 최근에, 저녁형 인간이 억지로 아침형으로 살려다가는 죽을 수도 있다는(쬐끔 과장) 기사를 읽었다. 덕분에 맘이 아주 편해졌다. 움하하~


댓글(15)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반딧불,, 2004-06-21 0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대단하십니다.
하긴 저도 저녁형에 가깝긴 하옵니다만...
원체 잠이 많은 인종인지라^^;;;

ㅎㅎㅎ
좋은 날 축하하옵니다^^
맥주에 부침개라도 쨍!!!

지금 밖은 천둥에 번개에 난리가 아니군요...잠도 안오고...
열어둔 창틈으로 들리는 빗소리가 참 좋군요...

starrysky 2004-06-21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잠은 디게 많아요. 그러니 괴롭지요.. ㅠㅠ
하지만 오늘은 기쁜 날 좋은 날. 비록 날이 우중충해서 해 뜨는 건 안 보이겠지만 구름 뒤로도 해는 일찍 떠오르겠지요. 저희집은 내일 부침개가 아니라 만두를 해먹는대요. 만두 귀신인 제가 요새 한동안 만두 결핍증에 시달렸더니 두고 보다 못한 엄마님이 자비를 베푸셔서.. ^-^
근데 반딧불님은 저랑 많이 먼 곳에 사시나 봐요. 여기는 사위가 조용하고, 바람만 약간씩 부는데.. 천둥은 무섭지만 번개 좋아하는데, 그리로 구경 갈까요? ^^

반딧불,, 2004-06-21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쓩 날아오세요~~
윗쪽은 비 그쳤다더니 맞나보군요.

여긴 그곳에선 서너시간 걸리는 곳이지요.
그나저나...간만의 빗소리 좋네요.

반딧불,, 2004-06-21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유머감각 없음이 싫네요.
꼬리가 이리 재미가 없을까요^^;;

starrysky 2004-06-21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쓴 말씀이세요~ 전 반딧불님의 코멘트, 늘 재미있게 즐겁게 따뜻하게 읽고 있는데요.. 님의 불빛이 반짝이지 않는 글은 너무 외롭고 쓸쓸해 보여요. ㅠㅠ (앗, 이런 식으로 코멘트 압박을.. 크크)
근데 대략 서너시간이 걸린다면 날아서는 얼마나 걸리려나요.. 음, 근데 비 때문에 고생하시는 분들 많으신데 번개 구경하러 간다고 하니까 너무 찔리네요. 반성할게요. ㅠㅠ

mannerist 2004-06-21 0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행 중 정말 적응하기 힘들었던게 10시 넘어서야 해가 지고, 다섯시만 되도 밝아지는 거였지요. 대신 겨울에는 네시면 어둑어둑해진다더군요. 나중에 넉넉해지신 다음에, 하지 즈음에는 북유럽쪽에서 보내시고, 동지 즈음에는 남반구 케이프타운 즈음에서 보내시면 어떨까요? =)

불량 2004-06-21 0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헷..밤 샜습니다. 날이 밝아오네요..^^ 창문이 밤새 덜컹거렸습니다.
스타리님의 밤에 대한 공포 부분을 읽다가 엉뚱하게도 알퐁스 도데의 '별'을 떠올려버렸습니다. 중학교 책에 나왔던가.. 양치기가 주인집 아가씨와 함께 여름 밤을 새우게 되잖아요. 그 때 나왔던 묘사가.. "밤은 낮은 생물들의 세상이다.' 뭐 그런 거였어요..낮에는 그 흔적조차, 존재 조차 알 수 없었던 힘없고 작은 생물들이.. 움직이고 빛을 발하고 소리를 내고 그 생명력 하나하나를 인간도 고요히 느낄 수 있는 시간이 새벽 직전의 밤이잖아요..
전 그래서..그 시간을 좋아해요.. 무생물조차도 살아있을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요..
알고보면 같은 현상을 두고 스타리님은 무서워하고..저는 기뻐하고 있는 것이군요..^^;;
밤을 즐기세요~~~라고 권하고 싶지만.최근엔..그 낮은 생물들이란 것들이 모기와
바퀴벌레의 움직임이 대부분이라.. ㅋㅋㅋㅋ (뭣하자는겨..)

starrysky 2004-06-21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너님. 유럽 쪽은 '백야'라는 훈늉한 현상이 시작되는 시기로군요. 세상에 있지도 않은 상상의 나라를 갈망하느니, 말씀대로 해가 길어지는 나라를 따라다니면서 살아보는 것도 멋지겠군요. (돈 마니마니 벌면요.. ㅠ_ㅠ)
불량유전자님. 오늘은 날이 흐려서 해가 안 떴지요? 그래서 별로 하지 기분이 안 나서 슬펐어요. '무생물조차도 살아 있을 것만 같은 그런 느낌' 바로 그 느낌 때문에 제가 밤에 잠을 못 이루지요. 크흐흑. ㅠㅠ 그래도 무슨 이유로건 불량유전자님이 저와 같은 시간에 깨어서 알라딘 어딘가에 계신다고 생각하면 무서움이 한결 덜하답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계속 저와 함께해주십사 하는 프로포즈인 거죠. 아잉~ 부끄러워라~ ^///^ (이 글을 읽으신 후, 오늘밤부터 불량유전자님의 자취를 알라딘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가 되는 게 아닐지..;;)

Laika 2004-06-21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 이제부터는 starry님의 전성기 인가요? 겨울이 다가오면 제가 등불 들고 starry님의 뒤를 따르지요.걱정말고 지내세요.....^^

panda78 2004-06-22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타리님께는 분명히 심각한 일일 텐데, 왜 저는 슬며시 웃음이 나올까요.. ㅋㅋ
저도 저녁형, 혹은 밤형 인간인데, 스타리님과는 반대 이유로 그런 것 같아요.
밤이 좋고 낮이 싫어서, 낮에는 주로 자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 버리고
밤에는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노는 거죠..
(하루키가 비슷한 말을 한 걸 읽은 기억이 나는데)스타리님이랑 저랑 둘이서 편의점이라도 하면 좋을지도... ^^

starrysky 2004-06-22 0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이카님. 제 전성기는 보통 3월부터 10월까지죠. 11월이 다가올수록 속이 더부룩하고 소화도 안 되면서 잠은 더 안 오고.. 심신이 피폐해진답니다. ㅠㅠ 하지만 요새는 아쭈 즐거워요 ^^ 그래도 이번 겨울에는 라이카님이 저를 위해 등불을 켜주신다니, 이렇게 좋을 수가요~ ^-^ 이제 겨울 따위 두렵지 않아요!!!
새벽별님. 음, 저는 그럼 좀 낙관적인 편인가요? 후후, 사실 저처럼 단순한 사람은 비관적이 되기도 쉽지 않답니다. 겁은 좀 많지만, 나쁜 일 따위 금방 까먹고 '뭔 일 있었냐?'가 되어 버리거든요. ^^
판다님! 웃지 마셔욧! 저는 심각한데.. -_-;; 후후, 농담이예요. 심각하긴요.. 저도 이렇게 밤을 낮 삼아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까 밤의 매력에 점점 푸욱 빠지게 되더군요. 조용하고 별도 많이 보이고 불빛들도 아름답고 집중도 더 잘 되고.. 놀기에 아주 좋아요. ^^ 진짜 우리 둘이 심야영업이 가능한 뭔가를 하나 하면 참 좋을 텐데요.

로렌초의시종 2004-06-22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많은 생각을 하는 글이네요. 저는 작년부터야 낮과 밤의 길이가 달라지는 순간순간을 민감하게 느꼈더랬지요. 그 순간의 복잡한 감정이란......

starrysky 2004-06-22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부터라면 고3 때부터? 음.. 밤새 공부를 하시다가 동터오는 하늘을 보셨나 봐요.. 맞죠? ^^
저희 집은 약간 남서향이라 베란다 오른편으로 해지는 게 보이는데, 해가 길어질수록 해지는 위치가 점점 더 오른쪽으로 음직여 간답니다. 그런 걸 보면서도 계절의 변화와 낮과 밤의 길이 변화를 느낄 수 있지요. 노을은 너무 좋아요~ ^-^

마태우스 2004-06-26 0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낮의 황제시군요^^ 전 밤이 좋은데... 응큼한사람은 밤을 좋아하고, 떳떳한 사람은 낮을 좋아하는 법입니다.

starrysky 2004-06-26 0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햇살 환한 낮이 좋지만, 정작 활동량이 많은 시간은 밤이랍니다. 세상을 어지럽히는 요괴와 악의 기운을 물리쳐야 하는 막중한 사명이 있거든요. 음하하하~ (누가 보면 미친 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