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국가대표 한 장면
"무슨 벼룩시장 기자가 인터뷰를 한 시간이나 해?"
요즘 <해운대>에 이은 '한국영화 대표작'으로 끗발 날리고 있는 <국가대표>. 이 영화에서 스키점프 국가대표 차헌태(하정우 분)를 인터뷰하는 유일한 언론이 바로 '생활정보신문'으로 유명한 <벼룩시장>이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실화 여부를 떠나 성 코치(성동일 분)의 윗 대사에서도 알 수 있듯, 여기서 '벼룩시장'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당시 스키점프 대표팀의 초라한 현실을 상징하는 소품일 뿐이다. 국가대표 됐다고 잔뜩 폼 잡고 인터뷰하나 했더니 '고작' 생활정보지였다는 얘기다. 첫 올림픽 출전 뒤 공항 인터뷰 장면 역시 마찬가지.
다른 관객들이야 한번 풋 웃고 넘어갈 장면이었지만, 적어도 내겐 '남 일'이 아니었다. 10년 전 신문기자를 꿈꾸다 대학 졸업한 뒤 받은 내 첫 명함이 바로 '생활정보신문 기자'였기 때문이다.
영화 자체는 감독의 전작인 <미녀는 괴로워>처럼, 코미디와 신파를 적절히 버무려 의도된 감동을 연출하는 먹기 좋은 대중영화였다. 정작 내가 꽂힌 것은 감초처럼 등장한 '벼룩시장 기자' 모습이었다.
관객들은 심지어 이런 의문을 던졌음직도 하다. "벼룩시장에도 기자가 있긴 해?"
적어도 스키점프 국가대표팀이 급조된 90년대 후반엔 분명 생활정보신문 기자가 있었다.
내가 졸업한 98년은 IMF 직후여서 아끼고 나누고 바꿔쓰고 다시 쓴다는 '아나바다 운동'과 더불어 생활정보신문도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었다. 내가 일한 회사 역시 벼룩시장, 교차로와 함께 이 바닥 '3대 메이저'로 꼽히던 곳. 구나 시 단위로 매일 나오는 두툼한 타블로이드판 지면은 온통 부동산, 중고차 광고로 가득 차 있었지만 각종 생활정보나 미담성 기사들도 한 자리 차지하고 있었다.
인터뷰 때는 사진기자를 늘 대동하긴 했지만 '초짜 기자'인 내 모습도 영화 속 벼룩시장 기자처럼 어리버리하긴 마찬가지였다. 주로 다른 언론 매체에 소개된 미담 주인공이나 아나바다 현장을 누볐지만 자체 발굴한 인물이나 '국가대표급' 유명 연예인들을 인터뷰하기도 했다.
수습을 뗀 뒤 얼마되지 않아 이 '업계'에 큰 지각 변동이 일어났다. 중소기업 터전인 생활정보신문 시장에서 한겨레, 중앙일보 같은 '중앙 언론'들이 앞다퉈 뛰어든 것이다. 딱 요즘 동네슈퍼 앞에 롯데나 이마트, 홈플러스 같은 대기업들이 뛰어든 꼴이었다.
지역별 가맹 체제였던 기존 생활정보지로선 상상할 수 없는 자본력과 일간지 제작 노하우를 앞세운 이들은 광고면보다 기사면이 더 많은 '일간 지역신문'을 탄생시켰다. 당시 한겨레리빙이나 중앙타운의 노련한 기자들이 지역 취재 현장을 누비는 모습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덩달아 기존 생활정보지들도 기사면을 강화하면서 모처럼 '언론'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비록 '굴러온 돌'이 '박힌 돌'에 밀리면서 이들의 시도는 '일장춘몽'으로 끝났지만, 수도권과 지방에선 여전히 수익 기반이 취약한 지역언론과 생활정보지들이 공생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벼룩시장 기자 역시 따지고 보면 당당한 지역언론 일꾼인 것이다.
영화 속에서 하정우를 비롯한 스키점프 국가대표들은 처음부터 철저히 마이너 취급을 받는다. 하지만 이들을 가장 먼저 알아본 언론 역시 방송3사나 조중동이 아닌 벼룩시장 같은 '마이너'였다. <국가대표>란 영화에 뜬금없어 보이는 벼룩시장의 등장이 결코 어색하지 않은 이유다.
스키점프와 벼룩시장, 그리고 이 세상 모든 마이너들에게 박수를!
*별빛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