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사랑일까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공경희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알랭 드 보통 책을 1+3 이벤트 할 때 구입했건만, 달랑 한 권 읽고 방치해 둔 상태다. 조금 어렵기도 했거니와 도통 책을 열어볼 기회가 닿지 않았다. 조금씩 보통 책을 모으면서도 <우리는 사랑일까>만 유독 구입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읽을 기회가 닿아 내심 반가웠다. 이 책으로 인해 보통과의 재회를 불태우길 어느정도 소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통 책은 '어렵다'라는 인식이 깔려 있어서인지 책을 펼치면서도 긴장 되었다. 읽다가 덮어버리면 어쩌나, 어렵다라는 인식이 더 강해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초반부터 나의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이 철철 넘치고 있었으므로.

 

  최근들어 읽은 연애소설은 좀 가벼워서 무게감 있는 책을 찾던 중에 읽게 된 <우리는 사랑일까>도 연애소설이지만, 타인의 사랑을 지켜보는 구경꾼에 머무르도록 독자를 놔두지 않는다. 사랑을 갈망하다, 사랑을 하고, 헤어지고 또 다시 사랑을 한다는 간단한 스토리지만, 그 안에 내제된 것은 무궁무진했다. 이를테면 연애를 하면서 갖게 되는 고뇌와 외로움, 상대에 대한 신뢰의 유무를 거침없이 끌어내고 있었다. 무언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을 적절한 비유와 독특한 예시로 이해를 돕고 있는 것은 물론, 그런 감정을 갖었다는 사실이 지극히 정상적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했다. 보통 특유의 철학 사상을 접목 시키며 사랑에 대해, 내면의 변화에 대해 설명해 주는 것도 유쾌했고, 소설 속에 거침 없이 그림과 도표를 인용하는 것도 신선했다. 전혀 색다른 방식으로 그만의 세계를 이뤄나갔기에 빠져들지 않는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가벼운 연애소설과 지지부진한 연애소설을 살짝 버무려 줄 수 있는 소설을 만나보고 싶다는 갈망. 그것을 '지적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알랭 드 보통의 소설을 통해서 어느정도 갈증 해소를 하게 되었다. 나 또한 여자이기에 주인공 앨리스의 시선에서 풀어 나가 더 많은 공감을 했을지는 몰라도, 빤한 스토리를 이렇게 승화시키는 저자의 역량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책을 읽는 도중 지인에게 알랭 드 보통의 소설이 '이러이러 하다'라고 말했더니, 소설가 김연수님의 말을 빌려 '알랭 드 보통은 틴 에이저(Teenager)의 우상이고, 수잔 손택이야 말로 경지에 오른 소설가'라고 말해 주었다. 정확히 기억하고 있지 않아 김연수님의 말을 제대로 옮겼는지 모르겠지만(곡해하지 않기를), 거침없이 그런 발언을 할 수 있는 김연수님 때문에 킥킥대고 말았다. 그 말을 한 지인에게 수잔 손택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자, 좀 어렵다는 말이 들리기에 그렇다면 틴에이저의 우상인 알랭 드 보통에 푹 빠져 보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런 일화에 부응하듯 보통의 소설은 나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었고, 틴에이저의 소설을 승격(?)시킨 보통씨의 매력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다.

 

  연애를 하지 않은 시기에 그런 착각에 빠지기 쉽다. 어느 날 문득, 나에게 꼭 맞는 사람이 나타나서 깊은 사랑에 빠질 것이다라는 환상. 환상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정도 기다림에 지쳐 있던 앨리스에게 그야말로 완벽한 애인이 나타난다. 우연히 파티에 갔다가 만난 에릭(에릭을 만나는 설정이 너무 빤하긴 했지만)과 하룻 밤을 같이 보내고, 그들은 연인이 된다. 런던에서 광고회사를 다니는 앨리스와 금융회사에서 어느 정도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물질적, 개인적 위치까지) 에릭의 만남은 시기적절했고, 잘 어울렸다. 앨리스의 매력이 소소할 정도로 에릭은 완벽했다. 외모, 물질, 직업까지 남들 앞에 내놓으면 저절로 목에 힘이 가는 애인이었다. 하지만 서로를 알아가면 갈수록, 무언가 부족한 것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눈에 띄었다라기 보다 내면적으로, 느낌으로 알아차렸다는 표현이 적절할지 모르겠다. 책의 시작에 '앨리스가 어떤 사람이냐고 물으면, 사람들의 입에서는 대뜸 '몽상가'란 말이 나왔다.'라고 했듯이 앨리스의 내면과 생각에 점점 어긋나는 사람이 에릭이었다.

 

  에릭을 사랑하면서도 점점 자신의 시선에서 엇나가는 그에 대한 표현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앨리스를 공감하기도 했다. 사랑일까 아닐까의 갈림길에서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문제였고 앨리스가 나아고자 하는 길을(대화의 길이든 미래의 길이든) 자꾸 차단시킨다는 것에서 혼란스러워 했다. 똑똑하고, 매너있고 겉보기엔 완벽해 보이는 에릭은 앨리스와의 만남이 거듭될수록 모호해져 갔다. 앨리스가 늘 자신이 '에릭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다'란 말을 자주 했듯이 에릭의 마음이 어떤지 알 수가 없었다. 큰 일에 대수롭지 않아 했고, 작은 일에 열을 내며 이기적으로 변해가는 에릭을 쳐다보는 것은 깜깜한 어둠 속을 헤메는 것과 같았다. 그와의 미래는 아무런 희망도 비추지 않았고, 길도 펼쳐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앨리스가 쉽게 결단할 수 없는 것은 에릭을 사랑한다는 사실이었다.

 

   그 부분에서 많은 연인들이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나의 발전을 자꾸 차단하고, 초라하게 만들어 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의 존재 자체로도 굉장한 것을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앨리스는 점점 에릭이 전자에 속한다고 생각했고, 후자에 속한 사람은 필립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간다. 결국 에릭과 헤어지고 필립을 향해 조금씩 다가가는 것으로 책은 끝이 나지만, '사랑일까'라는 물음에 정확한 답이 없다라는 사실에 반박할만한 무엇가를 발견했다고 말할 수 없다. 에릭과 앨리스의 만남은 흥미로웠지만, 금새 결말을 예고하게 만들었기에 장황하고 생뚱맞기도 한 저자의 사랑에 대한 해석과 고견 때문에 책을 읽는 재미가 생긴 것도 사실이다.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을 끌어 모으고 뱉어내느라 책이 길어졌다는 푸념이 나올 정도로 독특하고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세밀한 심리묘사와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있는 착각이 일 정도의 표현들은 특히 기억에 남는다. 진부하기도 하고, 설레기도 한 사랑. 알랭 드 보통의 독특한 시선으로 인해 그야말로 새로운 시각으로 사랑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진부보다는 시니컬하게, 열정보다는 담담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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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니시에인션 러브>를 리뷰해주세요.
이니시에이션 러브
이누이 구루미 지음, 서수지 옮김 / 북스피어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책의 띠지에는 '반드시 두 번 읽고 싶어지는 소설' 이라고 되어 있지만, 내게는 그런 기력이 남아 있지 않다. 독특한 구성에 매력을 느낀 것이 아니라, 책을 읽어나가는 동안에 내가 쌓아온 이미지가 한 순간 무너져 내려 허탈했다. '속였다' 라고 말하기도 뭣하고 '속았다'라고 말하기도 애매한 책의 반전은 어떻게 결론을 내려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책의 구성을 알고 읽는다면 재미없을 것 같고, 아예 모르자니 내가 느낀 허탈감이 전해질까 염려되는 것이 사실이다.

 

  Side A를 읽어나갈 때의 속도감을 기억한다. 첫사랑의 설레임이 그득한 추억을 더듬는 기분이 들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책장은 쉴새없이 넘어갔다. 우연히 미팅에서 알게 된 마유와 스즈키의 사랑이 조금씩 성장하며 하나가 되어 가는 애틋함이 전해져 왔다. 그 순수함에 빠져 한없이 환상을 품어보기도 하고, 현실적이면서 솔직담백한 그들의 모습이 예뻐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랑이 Side B에서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이야기의 흐름이 종종 이상하다라는 느낌을 받곤 했지만, 책의 마지막에서의 그 서늘함이란. 내가 지금껏 읽어온 이야기와 만들어온 인물들의 이미지, 책의 분위기가 잘못된 것인가 하는 멍함이 나를 지배했다. 해설을 읽고, 내가 느낀 혼란스러움을 가늠하긴 했지만 뒤죽박죽 엉망이 된 소설의 일부만이 남아있을 뿐, 많은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너무 혼란스러워 '완전판 해설'을 찾아 읽어보았다. 결코 짧지 않은 해설을 처음엔 궁금증이 풀려간다는 사실에 흥분해서 열심히 읽었다. 그러나 세세히 지적되고, 숨겨진 의문이 풀려 갈수록 소설이 조각조각 찢겨진 느낌이 들어 불쾌했다. 하나의 이야기에 반전도 모자라서, 이렇게 수 많은 조각을 드러내고 있다 생각하자 원래의 형태는 사라져 버렸다. 흩어지고 분리되어 내가 기억하는 이야기의 이미지의 세계에 둥둥 떠다닐 뿐이었다. 책을 읽는 동안 종종 느꼈던 '엇! 이상하다'라는 느낌을 설명해주는 것은 좋지만, 추리소설을 방불케하는 구성과 복선에 개끗이 속아 넘어간 기분은 유쾌하지 않았다. 간단한 해설이 뒤따랐을 때만 해도, 그럴 수도 있다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스토리가 해체되고 나자 내가 간직한 이야기는 이미 다른 이야기가 된 후였다.

 

   Side A와 Side B는 양면의 성격을 띈 것이 아니라, 동시진행형이었다. 이 책을 읽어가는게 가장 큰 포인트이기 때문에 처음엔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았다. 당연히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기에 Side B를 읽어나가면서 기분이 점차적으로 가라앉았다. Side A에서 그렇게 애틋하고 순수했던 스즈키와 마유는 스즈키의 발령으로 원거리 연애를 하게 된다. 새로운 환경에서 적응해야 하는 스즈키와 매주 마유를 보러 내려와야 하는 고충을 이해못한 바는 아니다. 조금씩 지쳐가고 순탄치 않게 흘러가는 마음이 비져나온 것은 어쩜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진다는 말을 실감하게 되는 경우처럼 잘 드러맞는 것이 원거리 연애만한 것이 있을까. 스즈키의 사무실에는 매력적인 미야코라는 여성이 있었고, 마유와 비교하면 할수록 조금씩 마유가 멀어지는 느낌을 어쩔 수 없었다. 미야코가 자신에게 고백을 하고, 마유가 임신을 하고 그런 일련의 사건들이 일어날 수록 스즈키는 점점 변해간다. Side A에서의 순수하고 다정다감했던 스즈키가 아니었다.

 

  거기서 눈치를 챘으면 좋았으련만. Side A에서의 스즈키가 아니라는 생각은 했지만, 정말 다른 인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사람은 환경에 따라 변할 수 있고, 사랑도 언제든 변할 수 있기 때문에 그저 안타까운 시선으로 스즈키를 바라볼 뿐이었다. 마유에게 한 없는 연민을 느꼈고, 변해가는 스즈키를 이해하면서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봤다. 아이를 떼고, 스즈키까지 잃어가는 상황을 마유는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지 상상만 해도 우울하기만 했다. 그들이 처음 만났던 미팅, 단체로 놀러갔던 눈부신 바다, 첫 경험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며 씁쓸함을 자아냈다. 그런데 조금씩 의심의 싹을 뿌려놓던 책의 결말에서 그 모든 것을 다 뒤집어 버렸다. 미야코가 스즈키를 '다쓰야'라고 부르며, 책에는 나와 있지 않던 마유와의 추억을 떠올린 스즈키의 회상. 스즈키는 스즈키였지만, Side A에서의 스즈키가 아니었고, 마유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가는 비련의 여주인공이 아니었다.

 

  Side B의 스즈키가 양다리를 걸쳤다면, 마유도 양다리를 걸쳤다. 성이 같은 스즈키라는 두 남자였기에 이 소설은 가능했다. 또한 중복되는 시기가 있었기에 독자들은 의심하지 않고, 한 사람의 스즈키라고 생각했으며 마유를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마유는 Side B의 스즈키와 먼저 사귀었고, 원거리 연애가 시작되고 우연히 미팅에서 또다른 스즈키를 만나게 된 것이다. 처음엔 단순히 순서가 뒤바뀐거라고 생각했지만, 해설을 보니 그제서야 곳곳에 뿌려졌던 의심의 씨앗들이 정상적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독특한 소설임을 인정하며, 철저히 계산된 복선과 구성에 저자의 노고를 인정한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처음 갖었던 마유와 한명의 스즈키에 대한 이미지는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기에 어떤 이야기로도 기억할 수 없다. 오히려 Side B의 스즈키가 지극히 정상적이었고, Side A의 스즈키가 순수하고 속았다는 느낌, 마유의 능수능란함의 기교를 모두 인정하고 싶지 않다. 한 편의 연애소설이 추리소설로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반전의 묘미보다 고통이었음을 고백한다.
 

 

•  서평 도서의 좋은(추천할 만한) 점 

- 독특한 소설이다. 


•  서평 도서와 맥락을 같이 하는 '한핏줄 도서' (옵션) 


•  서평 도서를 권하고 싶은 대상 

- 추리소설을 좋아하거나, 독특함의 묘미를 즐기기를 좋아하는 독자. 


•  마음에 남는 '책속에서' 한 구절 

- "......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다쓰야?" 2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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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말해줘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9년 1월
평점 :
품절


  조금씩 봄기운이 찾아오는 이때, 많은 솔로들의 갈망은 연인이 생기는 것이다. 겨우내 움츠렀던 몸과 마음이 흐물흐물 해지면 기분도 들뜨는 법. 따스한 햇볕을 나 아닌 다른 누군가와 쬐기만 해도 행복할 것 같은 포근함이 밀려드는 봄. 그러나 왜 이렇게 사랑이 힘든 것일까.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순수하지 못한 것일까. 사랑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결혼을 하려 하기 때문일까. 조건을 보고, 외향을 보기 때문에 쉽게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사랑타령을 하는 것은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 속에서는 너무 자연스럽고, 조금은 쉽게 사랑이 다가오는 것 같아 좀 허탈했다. 그의 소설에는 상황을 배제하더라도 오랫동안 연애 한 번 못해본 솔로들에게 염장을 지르기에 충분한 설정이 많았다.

 

  공원에서 자전거를 타고 나가다 우연히 만나게 된 그녀. 문을 닫는다는 방송이 아니었다면 지나쳤을지도 모르지만, 꼼짝도 안하는 그녀에게 말을 걸게 되는 슌페이. 그러나 그녀(교코)는 별 반응이 없었다. 멋쩍어서 그대로 공원을 나오지만 두 번째 만남도 그 공원에서 이루어진다. 그녀가 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글로 대화를 이어간다. 평범하면 평범하고 특별하면 특별하달 수 있는 그들의 첫 만남을 지켜보며 내가 살짝 분개했던 이유는, 우리집 근처에 자리한 제법 알려진 공원때문이었다. 자주 가지는 않지만 심심찮게 산책을 하기도 하는데, 왜 나는 그런 상황이 되어보지 못했냐며 말도 안되는 억지를 꾸역꾸역 뱉어내고 있었다. 거기다 순전히 느낌만으로 상대방과 사귀게 되는 상황이 부러웠다. 내가 슌페이라면 교코와 연인의 관계로 발전시킬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에 미치자 분개했던 마음은 순식간에 사그라 들었다. 상황에 너무 몰입한다 싶어 안정을 취하기로 하고 그들의 행보를 지켜보자며 스스로를 다독이기도 했다.

 

  슌페이는 다큐멘터리 제작자다.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그의 직업을 조금 눈여겨 본다면, 교코와 너무 다른 세계의 일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교코와 함께 하면 소리의 존재를 감지할 수 없는데, 정작 그는 소리가 난무하고 그 소리로 많은 것을 이뤄 나가는 세계에서 묻혀 살고 있다. 너무나 익숙했기에 교코에서 소리가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한 그는 사소한 일 하나도 교코가 감당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깨달아 간다. 교코가 자신의 집에서 머무르는 시간이 많아져 가고, 홀로 남겨진 교코는 보통 사람이 겪는 일상을 평범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비상벨 소리, 윗층에서 떠드는 소리, 관리인의 주의 등 교코에게는 다른 세상의 일이었다. 그런 일이 교코에게 어떤 상황인지 알지 못하던 슌페이는 조금씩 교코의 세상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세상의 소리를 좇으며 살면서도 교코와 지내는 시간을 통해 미개척지를 발견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슌페이가 하는 일은 사무실에 앉아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위험한 상황에 처하기도 하고, 해외로 취재를 갔으며, 일에 찌들려 살기가 일쑤였다. 그런 생활의 연속이다 보니 조금씩 교코의 세계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교코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일도 일어나고, 일은 바빠지고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자신의 일이 조금씩 두각을 나타내면 낼수록, 교코에게 지쳐가는 느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부모님께 교코도 소개 하고, 교코가 자신의 집에 늘 있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내면의 복잡미묘한 감정을 어떻게 드러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눈치를 챈 교코가 자신에게 그런 힘든 마음을 풀어 달라고 말한다. 그 말에 언뜻 위로를 받으면서도 자신이 하는 일이나 처지가 교코에게 별 영향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운을 잃어간다. 그런데 그런 교코가 말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연락이 닿지 않고, 그녀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슌페이의 어머니는 교코에게 편지를 썼다고 했다. 잘 부탁한다는 내용을 썼다고 했지만, 무언가 석연치 않다. 그 뒤로 교코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교코의 집을 찾으러 헤메기를 여러 날. 어머니로부터 또 전화가 걸려온다. 교코가 편지를 썼다고. 자신이 연락을 끊은 것은 어머니 편지 때문이 아님을 전해달라 했다고. 슌페이는 교코를 찾아 집으로 간다는 문자를 보내고, 그 동안 힘겹게 취재한 방송이 나가는 것을 지켜본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그토록 전하려고 했을 때, 자신의 연인에게는 아무것도 전하지 못했지만 방송이 나가기 전에 그녀로부터 연락이 닿았다. 우연처럼 보이는 묘한 상황이 교코가 자신에게 어떠한 존재인지 깨닫게 해주기엔 충분했다.

 

 슌페이의 심경 변화와 교코와 함께 하지 못한 시간이 늘어 갈수록 불안했다. 무언가 어긋나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초초해하며 책을 읽어 나갔다. 그러나 그렇게 연락이 끊겼던 교코와 연락이 닿고, 작은 에피소드로 마무리 되는 상황 앞에서 허탈할 수 밖에 없었다. 분명 말을 하지 못하는 교코의 처지를 생각할 때 그 일은 작은 에피소드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반쯤 내려 앉았던 가슴이 안도하는 것이 아니라 철렁 주저 앉아 버려 끓어 올릴 수가 없었다. 허탈하고, 허망하고, 특별한 사랑을 말하는 듯 하면서도 평범한 사랑으로 점철되어 가는 과정에서 진이 빠져 버렸다. 슌페이를 위험에 빠뜨리면서 사람을 긴장시키더니, 이렇게 마무리 지을 수 있냐는 핀잔이 절로 터져 나왔다. 순탄한 사랑, 평범하지 않은 교코와의 순수한 교류 같은 것을 원했는지는 몰라도, 요시다 슈이치식의 사랑에 조금 지쳐간다. 무언가를 말할듯 말듯 머뭇거리면서 얼버무어 버리는 그의 소설이 조금씩 당황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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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만경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4년 9월
평점 :
품절


  한동안 일본 소설을 안 읽어서인지, 조금씩 일본 소설이 그리워지고 있다. 그러다 요시다 슈이치의 책을 읽을 기회를 얻어, 가장 먼저 <동경만경>을 꺼내 들었다. 제목을 많이 들어봐서 가장 읽고 싶었던 책이었는데, 읽고 난 후의 허탈감을 어찌해야 할지 난감하다. 깊은 밤, 몰아치듯 읽어버린 소설의 뒤끝이 유쾌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사랑에 관한 명쾌한 답이 없었기 때문일까. 사랑에 대해 명쾌히 들려줄 이야기가 있을까 싶으면서도 기대를 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나보다. 대리만족적인 사랑이라고 해도, 무언가 가슴 벅찬 이야기가 펼쳐지기를 바라는 것은 내면의 허영일지도 모르겠다.

 

  연애 소설보다 로멘스 소설을 더 좋아하는 것은 과정의 차이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연애소설을 많이 읽거나 로멘스 소설을 많이 읽은 것도 아니지만, 연애소설은 결말에 더 관심이 쏠리고 로멘스 소설은 과정에서 대리만족을 하게 된다. 로멘스의 세세함이 연애소설에서는 듬성듬성 있거나, 훌쩍 뛰어넘어 버리기 일쑤다. 그래서인지 연애소설을 읽다보면 허탈할 때가 많다. 지극히 개인적인 편가름이라고 해도 차라리 과정을 즐기는 로멘스가 더 나은 것이 그런 연유이다. <동경만경>은 연애소설이다. 무언가 확 달아 올라 정점에서 끝나는 소설도 아니고, 스토리의 전개가 빠르거나 선명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만남이에도 익숙한 사랑, 권태기가 엿보이고 무덤덤한 사랑 얘기에 가까웠다.

 

  미팅 사이트로 알게 된 료스케와 료코. 둘의 첫만남은 너무 싱거웠다. 온라인 상으로 알게 되어 첫 만남임에도 차 한잔 마시고 모노레일을 타고 그걸로 끝이었다. 료스케는 료코에게 끌렸지만, 료코는 자신의 감정을 내비추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서 재회하게 된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더라도 도무지 마음을 읽을 수가 없었다. 서로에 대한 감정을 드러내는 것보다 시간의 흐름에 맡겨 버렸고, 타인의 끈질긴 물음에 의해서 조금씩 마음을 드러내는 정도였다. 극적인 상황일 때조차 자신의 마음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다. 서로의 직업, 과거의 사랑, 나이같은 것은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다만 그들은 마음을 굳게 닫고 두려워 하고 있었다. 사랑하면 떠나버릴 것 같은 불안감. 서로에게 '빠지'는게 아니라 '탐닉'의 대상만 되었던 연애기간동안 내내 그들의 마음에 멤돌던 그림자가 바로 그것이었다.

 

  마음을 더 열지 못한 인물은 료코였다. 미팅 사이트에서 알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사귀는 동안에도 본명과 직업을 말해주지 않았던 것에 고의가 있었던 건 아니다. 자신의 마음을 알지 못했기에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을 뿐. 료스케의 전 애인이 그 사실을 말해주기까지 그 사실을 몰랐던 료스케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그것 보다 더 미묘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갈피를 잡을 수 없어 갈팡질팡 했다. 서로의 육체를 탐닉하고, 사랑한다는 느낌조차 무미건조하게 다가오는 그들에게 감정을 터트리는 것은 두려움으로 치닫는 결과를 만들어 낼 것 같았다. 회자정리를 두려워 하는 마음이 그들 뿐이겠냐만은 서로에게 표현할 수 없었다. 말로 하게 되면 실재로 그렇게 되버릴까봐 두려워 했다.

 

  그들의 직장만 봐도 그랬다. 료스케는 도쿄만에 인접해 있는 화물선적 창고에서 일을 하고, 미오(료코의 본명)는 거기에서 1킬로 남짓 거리의 빌딩에서 일을 한다. 바다 때문에 우회 해야지만 닿을 수 있는 두 사람의 일터처럼, 그들의 사랑도 한참을 우회해서 돌아온 듯한 느낌이 든다. 두 사람의 거리를 좁혀주듯 두 곳의 거리가 새로운 노선의 개통으로 가까워지고, 조금씩 두 사람의 마음도 가까워 진다. 끓어오르는 사랑도, 무 자르듯 날선 이별도 없었지만 조금씩 긍정적으로 다가가는 그들의 마음이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지극히 현실적인 사랑을 말해 주었다는데서 오는 무력감에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들어온 듯한 기분이었다.

 

  책 속에는 두 사람만의 사랑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료스케의 첫사랑부터 좋아하지 않는 여자친구과의 교재, 친구 커플의 권태기가 가득한 사랑, 미오의 제대로 된 사랑이 없는 것부터 그 둘을 배경으로 씌여지는 또 다른 소설까지 사랑은 흔하고 넘쳐났다. 그러나 뚜렷히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일상이 늘 똑같이 흘러가는 착각이 드는 것처럼, 늘 내 곁에 자리한 익숙함이 내재된 사랑이었다. 깊은 열정이나 끌림은 없었지만, 누구나 한 번쯤 느끼는 사랑의 모호함을 사실적으로 드러낸 작품이었다. 그래서 더 허탈했는지도 모르겠다. 사랑도 지극한 현실임을 앎에도 환상을 품게 되는 마음에 날개를 달아주었으면 하는 기대가 여지없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사랑은 그렇게 지나가 버렸다. 하지만 또 다른 사랑이 다가오고 있기에 그것만으로도 사랑할 가치가 있다며 스스로를 다독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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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 없는 세상 - 제6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박현욱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서울행 기차를 타고 목적지를 한 시간 정도 남겨둔 상태에서 이 책을 꺼냈다. 기차를 타자마자 읽던 책이 진도가 팍팍 나가지 않기도 했고, 잠깐 훑어보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하고 말았다. 묘한 흡인력이 있어 지하철 안에서도 눈을 뗄 수가 없어 순식간에 읽어 버렸다. 중간중간 민망한 대사와 묘사가 나와서 조금 당황했을 뿐, 마치 내가 19살이 되어 세상을 향해 막 도약하려는 착각이 일 정도였다. 현재 29살인 내가 느끼기에 너무나 오래된 과거가 되어 버린 19살의 청춘. 그때에 나는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았고, 무엇을 갈망했는지 생각이 나질 않아 당황스럽기도 했다.

 

  요즘의 19살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별로 그려지는게 없다. 모든 것이 배제된 채 '고3 = 대학' 이라는 인식이 깊이 뿌리박혀 있는게 현실이다. 힘든 고3을 보내보지 않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주위에서 쏟아지는 압박감이 어느 정도일지는 어렴풋이 짐작이 간다. 그런 상황에서 자아를 찾고, 꿈을 찾고, 19이라는 청춘의 빛을 발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무리일게다. 하지만 그런 팍팍함과 살벌함을 말랑말랑하게 해주는 소설이 있었으니 바로 <동정 없는 세상>이다. '한 번 하자'로 시작해서 '한 번 하자'로 끝나는 동정童貞을 떼어버리고 싶은 준호의 갈망(?)으로 채워진 소설이라고 한다면 조금 무리일까. 한참 끓어오르는 성욕에 대한 호기심을 여러가지 방법으로 해결해 보려고 하지만, 직접 경험해 봐야 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한 친구들 사이에서 준호의 고민은 거듭되어 간다. 그 고민은 표면에 드러난 가장 민감하고 강렬한 것 같지만, 이면에 들어차 있는 현실은 훨씬 더 복잡하다.

 

  고3이기에 대학진학과 미래에 관한 걱정은 당연히 따라오는 걱정이다. 확실한 목표가 없고,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는 짐을 보탠 걱정은 나날이 늘어갈 뿐이지만. 비교적 공부에 대해 압박을 주지 않는 집안 분위기 때문에 큰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서울대를 나와서 10년째 백수인 명호씨(외삼촌)와, 그런 외삼촌과 자신을 먹여 살리는 숙경씨(엄마). 명문대를 나온 명호씨가 집에서 놀고 있는 현실을 매일 마주하며 살기에 그런 압박감이 덜할 수도 있다. 홀로 자신을 길러온 숙경씨는 지금껏 자신 곁에 있어준게 고맙다며 대학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고 하지만, 내심 걱정하는 눈치다. 박식하고 다정다감한 명호씨를 통해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희미하게 알아가지만, 여전히 철이 없는 19살 준호는 '그것'이 하고 싶었다.

 

  포르노라면 자신의 컴퓨터로 질리도록 보고, 동정을 떼었다는 친구들 얘기도 들어 보았지만 세세한 부분은 가르쳐 주지 않아 준호의 욕망은 날로 치솟고 있었다. 자신의 여자친구 서영과 어떻게든 한 번 해보고 싶은 마음에, 만날 때마다 '한 번 하자'고 하지만 늘 돌아오는 대답은 '싫어'였다. 도무지 사그라들 줄 모르는 욕망은 준호를 괴롭혔고, 친구들과 명호씨와도 얘기를 해보았지만 영 시원치 않았다. 직접 경험을 해봐야 그 느낌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서영과 늘 그 일로 투닥거리다 서영이 벌컥 화를 내는 바람에 준호는 매춘가를 향한다. 그곳까지 갔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경험이 아니라는 사실만 뼈저리게 경험하고 뛰쳐나온고 만다. 그러던 어느 날 매번 찔러대기로 의사를 묻던 준호는 서영에게 'OK' 사인을 듣는다. 그 길로 서영의 맘이 변할까봐 노심초사하며 여관으로 직행했지만, 결국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첫 경험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렇게 기다렸건만 너무 허무하게 끝나버려 준호를 허망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거기서 포기할 준호가 아니었다. 수능도 끝난 시점이긴 했지만 대학에 대한 걱정, 자신의 미래를 어떻게 설계해 나가야 할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준호의 관심은 한 번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준호의 끈질긴 노력 끝에 서영과의 첫 경험을 하고, 진정으로 서로가 준비되어 있을 때에 몸과 마음이 열린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동정同情없는 세상일지라도, 동정童貞을 떼어버린 준호는 그제서야 삶이 현실감 있게 다가온다. 대학을 가야 겠다는 마음, 어른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던 것은 서영과의 첫 경험 이후라고 해야 할 것이다. 명호씨는 백수 생활을 청산하고 만화가게를 열고, 서영은 서울대에 특차로 합격하고, 친구들의 노선이 갈리고 있는 상황에서 준호도 결정을 해야 했다. 명호씨가 어렴풋이 알려준 데로 따가가보기를 암시하는 것으로 소설은 마무리 된다.

 

  책 제목의 '동정'에 대해서 생각한 것은 당연히 동정同情이었다. 동음이의어의 다른 뜻이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책을 읽어서 헤갈리기도 했다. 성장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동정 없는 세상>은 조금 특별했다. 고3이라는 위치에 처한 상황을 동정떼기로 현혹(?)하면서 10대의 갈망과 고뇌를 유쾌하게 다뤘다고 할 수 있겠다. 머리속에 온통 '그것'으로 가득찬 준호를 보며 철딱서니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동정이 이는 것은, 색깔은 다를지라도 치열한 십대를 거쳐온 경험이 있다고 하면 좀 진부할려나. 하여튼 준호를 지켜보면서 그의 욕망이 충족되어 기쁘다든가, 생각을 하며 살기로 해서 기특하다는 마음보다 건강하게 자라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치열한 삶을 살고 있는 10대들이 내면의 고충을 좀더 건강하게 표출하면 좋겠다. 준호의 행동과 생각들의 옳고 그름을 떠나 내면의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이 좀더 솔직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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