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정 없는 세상 - 제6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박현욱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서울행 기차를 타고 목적지를 한 시간 정도 남겨둔 상태에서 이 책을 꺼냈다. 기차를 타자마자 읽던 책이 진도가 팍팍 나가지 않기도 했고, 잠깐 훑어보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하고 말았다. 묘한 흡인력이 있어 지하철 안에서도 눈을 뗄 수가 없어 순식간에 읽어 버렸다. 중간중간 민망한 대사와 묘사가 나와서 조금 당황했을 뿐, 마치 내가 19살이 되어 세상을 향해 막 도약하려는 착각이 일 정도였다. 현재 29살인 내가 느끼기에 너무나 오래된 과거가 되어 버린 19살의 청춘. 그때에 나는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았고, 무엇을 갈망했는지 생각이 나질 않아 당황스럽기도 했다.

 

  요즘의 19살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별로 그려지는게 없다. 모든 것이 배제된 채 '고3 = 대학' 이라는 인식이 깊이 뿌리박혀 있는게 현실이다. 힘든 고3을 보내보지 않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주위에서 쏟아지는 압박감이 어느 정도일지는 어렴풋이 짐작이 간다. 그런 상황에서 자아를 찾고, 꿈을 찾고, 19이라는 청춘의 빛을 발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무리일게다. 하지만 그런 팍팍함과 살벌함을 말랑말랑하게 해주는 소설이 있었으니 바로 <동정 없는 세상>이다. '한 번 하자'로 시작해서 '한 번 하자'로 끝나는 동정童貞을 떼어버리고 싶은 준호의 갈망(?)으로 채워진 소설이라고 한다면 조금 무리일까. 한참 끓어오르는 성욕에 대한 호기심을 여러가지 방법으로 해결해 보려고 하지만, 직접 경험해 봐야 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한 친구들 사이에서 준호의 고민은 거듭되어 간다. 그 고민은 표면에 드러난 가장 민감하고 강렬한 것 같지만, 이면에 들어차 있는 현실은 훨씬 더 복잡하다.

 

  고3이기에 대학진학과 미래에 관한 걱정은 당연히 따라오는 걱정이다. 확실한 목표가 없고,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는 짐을 보탠 걱정은 나날이 늘어갈 뿐이지만. 비교적 공부에 대해 압박을 주지 않는 집안 분위기 때문에 큰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서울대를 나와서 10년째 백수인 명호씨(외삼촌)와, 그런 외삼촌과 자신을 먹여 살리는 숙경씨(엄마). 명문대를 나온 명호씨가 집에서 놀고 있는 현실을 매일 마주하며 살기에 그런 압박감이 덜할 수도 있다. 홀로 자신을 길러온 숙경씨는 지금껏 자신 곁에 있어준게 고맙다며 대학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고 하지만, 내심 걱정하는 눈치다. 박식하고 다정다감한 명호씨를 통해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희미하게 알아가지만, 여전히 철이 없는 19살 준호는 '그것'이 하고 싶었다.

 

  포르노라면 자신의 컴퓨터로 질리도록 보고, 동정을 떼었다는 친구들 얘기도 들어 보았지만 세세한 부분은 가르쳐 주지 않아 준호의 욕망은 날로 치솟고 있었다. 자신의 여자친구 서영과 어떻게든 한 번 해보고 싶은 마음에, 만날 때마다 '한 번 하자'고 하지만 늘 돌아오는 대답은 '싫어'였다. 도무지 사그라들 줄 모르는 욕망은 준호를 괴롭혔고, 친구들과 명호씨와도 얘기를 해보았지만 영 시원치 않았다. 직접 경험을 해봐야 그 느낌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서영과 늘 그 일로 투닥거리다 서영이 벌컥 화를 내는 바람에 준호는 매춘가를 향한다. 그곳까지 갔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경험이 아니라는 사실만 뼈저리게 경험하고 뛰쳐나온고 만다. 그러던 어느 날 매번 찔러대기로 의사를 묻던 준호는 서영에게 'OK' 사인을 듣는다. 그 길로 서영의 맘이 변할까봐 노심초사하며 여관으로 직행했지만, 결국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첫 경험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렇게 기다렸건만 너무 허무하게 끝나버려 준호를 허망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거기서 포기할 준호가 아니었다. 수능도 끝난 시점이긴 했지만 대학에 대한 걱정, 자신의 미래를 어떻게 설계해 나가야 할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준호의 관심은 한 번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준호의 끈질긴 노력 끝에 서영과의 첫 경험을 하고, 진정으로 서로가 준비되어 있을 때에 몸과 마음이 열린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동정同情없는 세상일지라도, 동정童貞을 떼어버린 준호는 그제서야 삶이 현실감 있게 다가온다. 대학을 가야 겠다는 마음, 어른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던 것은 서영과의 첫 경험 이후라고 해야 할 것이다. 명호씨는 백수 생활을 청산하고 만화가게를 열고, 서영은 서울대에 특차로 합격하고, 친구들의 노선이 갈리고 있는 상황에서 준호도 결정을 해야 했다. 명호씨가 어렴풋이 알려준 데로 따가가보기를 암시하는 것으로 소설은 마무리 된다.

 

  책 제목의 '동정'에 대해서 생각한 것은 당연히 동정同情이었다. 동음이의어의 다른 뜻이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책을 읽어서 헤갈리기도 했다. 성장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동정 없는 세상>은 조금 특별했다. 고3이라는 위치에 처한 상황을 동정떼기로 현혹(?)하면서 10대의 갈망과 고뇌를 유쾌하게 다뤘다고 할 수 있겠다. 머리속에 온통 '그것'으로 가득찬 준호를 보며 철딱서니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동정이 이는 것은, 색깔은 다를지라도 치열한 십대를 거쳐온 경험이 있다고 하면 좀 진부할려나. 하여튼 준호를 지켜보면서 그의 욕망이 충족되어 기쁘다든가, 생각을 하며 살기로 해서 기특하다는 마음보다 건강하게 자라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치열한 삶을 살고 있는 10대들이 내면의 고충을 좀더 건강하게 표출하면 좋겠다. 준호의 행동과 생각들의 옳고 그름을 떠나 내면의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이 좀더 솔직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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