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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랑일까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공경희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알랭 드 보통 책을 1+3 이벤트 할 때 구입했건만, 달랑 한 권 읽고 방치해 둔 상태다. 조금 어렵기도 했거니와 도통 책을 열어볼 기회가 닿지 않았다. 조금씩 보통 책을 모으면서도 <우리는 사랑일까>만 유독 구입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읽을 기회가 닿아 내심 반가웠다. 이 책으로 인해 보통과의 재회를 불태우길 어느정도 소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통 책은 '어렵다'라는 인식이 깔려 있어서인지 책을 펼치면서도 긴장 되었다. 읽다가 덮어버리면 어쩌나, 어렵다라는 인식이 더 강해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초반부터 나의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이 철철 넘치고 있었으므로.
최근들어 읽은 연애소설은 좀 가벼워서 무게감 있는 책을 찾던 중에 읽게 된 <우리는 사랑일까>도 연애소설이지만, 타인의 사랑을 지켜보는 구경꾼에 머무르도록 독자를 놔두지 않는다. 사랑을 갈망하다, 사랑을 하고, 헤어지고 또 다시 사랑을 한다는 간단한 스토리지만, 그 안에 내제된 것은 무궁무진했다. 이를테면 연애를 하면서 갖게 되는 고뇌와 외로움, 상대에 대한 신뢰의 유무를 거침없이 끌어내고 있었다. 무언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을 적절한 비유와 독특한 예시로 이해를 돕고 있는 것은 물론, 그런 감정을 갖었다는 사실이 지극히 정상적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했다. 보통 특유의 철학 사상을 접목 시키며 사랑에 대해, 내면의 변화에 대해 설명해 주는 것도 유쾌했고, 소설 속에 거침 없이 그림과 도표를 인용하는 것도 신선했다. 전혀 색다른 방식으로 그만의 세계를 이뤄나갔기에 빠져들지 않는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가벼운 연애소설과 지지부진한 연애소설을 살짝 버무려 줄 수 있는 소설을 만나보고 싶다는 갈망. 그것을 '지적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알랭 드 보통의 소설을 통해서 어느정도 갈증 해소를 하게 되었다. 나 또한 여자이기에 주인공 앨리스의 시선에서 풀어 나가 더 많은 공감을 했을지는 몰라도, 빤한 스토리를 이렇게 승화시키는 저자의 역량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책을 읽는 도중 지인에게 알랭 드 보통의 소설이 '이러이러 하다'라고 말했더니, 소설가 김연수님의 말을 빌려 '알랭 드 보통은 틴 에이저(Teenager)의 우상이고, 수잔 손택이야 말로 경지에 오른 소설가'라고 말해 주었다. 정확히 기억하고 있지 않아 김연수님의 말을 제대로 옮겼는지 모르겠지만(곡해하지 않기를), 거침없이 그런 발언을 할 수 있는 김연수님 때문에 킥킥대고 말았다. 그 말을 한 지인에게 수잔 손택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자, 좀 어렵다는 말이 들리기에 그렇다면 틴에이저의 우상인 알랭 드 보통에 푹 빠져 보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런 일화에 부응하듯 보통의 소설은 나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었고, 틴에이저의 소설을 승격(?)시킨 보통씨의 매력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다.
연애를 하지 않은 시기에 그런 착각에 빠지기 쉽다. 어느 날 문득, 나에게 꼭 맞는 사람이 나타나서 깊은 사랑에 빠질 것이다라는 환상. 환상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정도 기다림에 지쳐 있던 앨리스에게 그야말로 완벽한 애인이 나타난다. 우연히 파티에 갔다가 만난 에릭(에릭을 만나는 설정이 너무 빤하긴 했지만)과 하룻 밤을 같이 보내고, 그들은 연인이 된다. 런던에서 광고회사를 다니는 앨리스와 금융회사에서 어느 정도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물질적, 개인적 위치까지) 에릭의 만남은 시기적절했고, 잘 어울렸다. 앨리스의 매력이 소소할 정도로 에릭은 완벽했다. 외모, 물질, 직업까지 남들 앞에 내놓으면 저절로 목에 힘이 가는 애인이었다. 하지만 서로를 알아가면 갈수록, 무언가 부족한 것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눈에 띄었다라기 보다 내면적으로, 느낌으로 알아차렸다는 표현이 적절할지 모르겠다. 책의 시작에 '앨리스가 어떤 사람이냐고 물으면, 사람들의 입에서는 대뜸 '몽상가'란 말이 나왔다.'라고 했듯이 앨리스의 내면과 생각에 점점 어긋나는 사람이 에릭이었다.
에릭을 사랑하면서도 점점 자신의 시선에서 엇나가는 그에 대한 표현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앨리스를 공감하기도 했다. 사랑일까 아닐까의 갈림길에서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문제였고 앨리스가 나아고자 하는 길을(대화의 길이든 미래의 길이든) 자꾸 차단시킨다는 것에서 혼란스러워 했다. 똑똑하고, 매너있고 겉보기엔 완벽해 보이는 에릭은 앨리스와의 만남이 거듭될수록 모호해져 갔다. 앨리스가 늘 자신이 '에릭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다'란 말을 자주 했듯이 에릭의 마음이 어떤지 알 수가 없었다. 큰 일에 대수롭지 않아 했고, 작은 일에 열을 내며 이기적으로 변해가는 에릭을 쳐다보는 것은 깜깜한 어둠 속을 헤메는 것과 같았다. 그와의 미래는 아무런 희망도 비추지 않았고, 길도 펼쳐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앨리스가 쉽게 결단할 수 없는 것은 에릭을 사랑한다는 사실이었다.
그 부분에서 많은 연인들이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나의 발전을 자꾸 차단하고, 초라하게 만들어 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의 존재 자체로도 굉장한 것을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앨리스는 점점 에릭이 전자에 속한다고 생각했고, 후자에 속한 사람은 필립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간다. 결국 에릭과 헤어지고 필립을 향해 조금씩 다가가는 것으로 책은 끝이 나지만, '사랑일까'라는 물음에 정확한 답이 없다라는 사실에 반박할만한 무엇가를 발견했다고 말할 수 없다. 에릭과 앨리스의 만남은 흥미로웠지만, 금새 결말을 예고하게 만들었기에 장황하고 생뚱맞기도 한 저자의 사랑에 대한 해석과 고견 때문에 책을 읽는 재미가 생긴 것도 사실이다.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을 끌어 모으고 뱉어내느라 책이 길어졌다는 푸념이 나올 정도로 독특하고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세밀한 심리묘사와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있는 착각이 일 정도의 표현들은 특히 기억에 남는다. 진부하기도 하고, 설레기도 한 사랑. 알랭 드 보통의 독특한 시선으로 인해 그야말로 새로운 시각으로 사랑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진부보다는 시니컬하게, 열정보다는 담담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