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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말해줘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9년 1월
평점 :
품절
조금씩 봄기운이 찾아오는 이때, 많은 솔로들의 갈망은 연인이 생기는 것이다. 겨우내 움츠렀던 몸과 마음이 흐물흐물 해지면 기분도 들뜨는 법. 따스한 햇볕을 나 아닌 다른 누군가와 쬐기만 해도 행복할 것 같은 포근함이 밀려드는 봄. 그러나 왜 이렇게 사랑이 힘든 것일까.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순수하지 못한 것일까. 사랑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결혼을 하려 하기 때문일까. 조건을 보고, 외향을 보기 때문에 쉽게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사랑타령을 하는 것은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 속에서는 너무 자연스럽고, 조금은 쉽게 사랑이 다가오는 것 같아 좀 허탈했다. 그의 소설에는 상황을 배제하더라도 오랫동안 연애 한 번 못해본 솔로들에게 염장을 지르기에 충분한 설정이 많았다.
공원에서 자전거를 타고 나가다 우연히 만나게 된 그녀. 문을 닫는다는 방송이 아니었다면 지나쳤을지도 모르지만, 꼼짝도 안하는 그녀에게 말을 걸게 되는 슌페이. 그러나 그녀(교코)는 별 반응이 없었다. 멋쩍어서 그대로 공원을 나오지만 두 번째 만남도 그 공원에서 이루어진다. 그녀가 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글로 대화를 이어간다. 평범하면 평범하고 특별하면 특별하달 수 있는 그들의 첫 만남을 지켜보며 내가 살짝 분개했던 이유는, 우리집 근처에 자리한 제법 알려진 공원때문이었다. 자주 가지는 않지만 심심찮게 산책을 하기도 하는데, 왜 나는 그런 상황이 되어보지 못했냐며 말도 안되는 억지를 꾸역꾸역 뱉어내고 있었다. 거기다 순전히 느낌만으로 상대방과 사귀게 되는 상황이 부러웠다. 내가 슌페이라면 교코와 연인의 관계로 발전시킬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에 미치자 분개했던 마음은 순식간에 사그라 들었다. 상황에 너무 몰입한다 싶어 안정을 취하기로 하고 그들의 행보를 지켜보자며 스스로를 다독이기도 했다.
슌페이는 다큐멘터리 제작자다.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그의 직업을 조금 눈여겨 본다면, 교코와 너무 다른 세계의 일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교코와 함께 하면 소리의 존재를 감지할 수 없는데, 정작 그는 소리가 난무하고 그 소리로 많은 것을 이뤄 나가는 세계에서 묻혀 살고 있다. 너무나 익숙했기에 교코에서 소리가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한 그는 사소한 일 하나도 교코가 감당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깨달아 간다. 교코가 자신의 집에서 머무르는 시간이 많아져 가고, 홀로 남겨진 교코는 보통 사람이 겪는 일상을 평범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비상벨 소리, 윗층에서 떠드는 소리, 관리인의 주의 등 교코에게는 다른 세상의 일이었다. 그런 일이 교코에게 어떤 상황인지 알지 못하던 슌페이는 조금씩 교코의 세상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세상의 소리를 좇으며 살면서도 교코와 지내는 시간을 통해 미개척지를 발견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슌페이가 하는 일은 사무실에 앉아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위험한 상황에 처하기도 하고, 해외로 취재를 갔으며, 일에 찌들려 살기가 일쑤였다. 그런 생활의 연속이다 보니 조금씩 교코의 세계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교코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일도 일어나고, 일은 바빠지고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자신의 일이 조금씩 두각을 나타내면 낼수록, 교코에게 지쳐가는 느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부모님께 교코도 소개 하고, 교코가 자신의 집에 늘 있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내면의 복잡미묘한 감정을 어떻게 드러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눈치를 챈 교코가 자신에게 그런 힘든 마음을 풀어 달라고 말한다. 그 말에 언뜻 위로를 받으면서도 자신이 하는 일이나 처지가 교코에게 별 영향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운을 잃어간다. 그런데 그런 교코가 말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연락이 닿지 않고, 그녀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슌페이의 어머니는 교코에게 편지를 썼다고 했다. 잘 부탁한다는 내용을 썼다고 했지만, 무언가 석연치 않다. 그 뒤로 교코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교코의 집을 찾으러 헤메기를 여러 날. 어머니로부터 또 전화가 걸려온다. 교코가 편지를 썼다고. 자신이 연락을 끊은 것은 어머니 편지 때문이 아님을 전해달라 했다고. 슌페이는 교코를 찾아 집으로 간다는 문자를 보내고, 그 동안 힘겹게 취재한 방송이 나가는 것을 지켜본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그토록 전하려고 했을 때, 자신의 연인에게는 아무것도 전하지 못했지만 방송이 나가기 전에 그녀로부터 연락이 닿았다. 우연처럼 보이는 묘한 상황이 교코가 자신에게 어떠한 존재인지 깨닫게 해주기엔 충분했다.
슌페이의 심경 변화와 교코와 함께 하지 못한 시간이 늘어 갈수록 불안했다. 무언가 어긋나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초초해하며 책을 읽어 나갔다. 그러나 그렇게 연락이 끊겼던 교코와 연락이 닿고, 작은 에피소드로 마무리 되는 상황 앞에서 허탈할 수 밖에 없었다. 분명 말을 하지 못하는 교코의 처지를 생각할 때 그 일은 작은 에피소드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반쯤 내려 앉았던 가슴이 안도하는 것이 아니라 철렁 주저 앉아 버려 끓어 올릴 수가 없었다. 허탈하고, 허망하고, 특별한 사랑을 말하는 듯 하면서도 평범한 사랑으로 점철되어 가는 과정에서 진이 빠져 버렸다. 슌페이를 위험에 빠뜨리면서 사람을 긴장시키더니, 이렇게 마무리 지을 수 있냐는 핀잔이 절로 터져 나왔다. 순탄한 사랑, 평범하지 않은 교코와의 순수한 교류 같은 것을 원했는지는 몰라도, 요시다 슈이치식의 사랑에 조금 지쳐간다. 무언가를 말할듯 말듯 머뭇거리면서 얼버무어 버리는 그의 소설이 조금씩 당황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