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 - 사랑이 내게 온 날 나는 다시 태어났습니다 ㅣ 장영희의 영미시산책
장영희 지음, 김점선 그림 / 비채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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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를 마감하고 잠들기 전, 책장을 보며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지 마음속으로 계획해본다. 그냥 읽고 싶은 책만 골라 읽으면 좋겠지만, 우선순위를 무시할 수 없는 책들이 있어서 나름대로 순서를 정해본다. 그러나 마음속의 계획은 늘 그렇듯 지켜지기 보단 어기기가 더 쉬운 법이다. 읽어야 할 책과 관심 있어 구입한 책들이 뒤엉켜서 책장을 어지럽히고 있기에, 늦은 밤임에도 불구하고 책장 정리를 했다. 먼저 읽어야 할 책들을 손이 잘 닿는 책장에 빼놓고, 최근에 구입한 책들도 따로 분류해 놓았다. 그렇게 정리를 해 놓으니 읽어야 할 책 순서가 한 눈에 보였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책들을 방치해 두었는지, 관심 있다고 구입한 책들마저도 신경 쓰지 못한 사실이 확연히 드러나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렇게 정리 된 책장을 보면서 문득 <생일>이란 책이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 고(故) 장영희 교수님의 에세이가 아니라 '영미시산책'이라는 이유로 주요 목록에서 배제해 두었었다. 어쩌면 같은 해에 암으로 돌아가신 장영희 교수님과 김점선 화백의 마음이 녹아있는 책이라서 선뜻 손을 뻗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두 분이 같이 작업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아름다운 책(김점선님의 말을 빌려)이 만들어졌는지 가늠할 수 있을 정도인데, 이제는 그런 결과물을 만날 수 없다는 사실과 두 분을 더 이상 뵐 수 없다는 사실이 마음 아프게 다가왔다. 그러다 한 밤중의 책 정리로 인해 다시 눈에 띄게 되었고, 아련한 마음을 품은 채 영미시가 주는 낯섦을 호기심으로 바꾼 다음에야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책 제목이 <생일>인 것을 보고 조금은 의아했다. 생일이라고 하면 '태어남'이란 의미가 뿌리박혀 있기에 더 이상 생각이 뻗어 나가지 못했다. 서문을 보고서야 '사랑이 내게 온 날 나는 다시 태어났습니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제목이 참 맛깔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을 할 때의 그 설렘과 기쁨, 달랠 길 없는 그리움조차도 다시 태어남으로 포장한다는 뜻이 내게도 가깝게 다가왔다. 그 때문에 잠시 우리의 시가 아닌 영미시라는 사실도 잊은 채, 어떠한 시들이 실려 있을지 무척 궁금해졌다. 거기다 상식으로 알아두어야 할 거장 시인들의 시가 실려 있다고 하니, 국외 시에 무지했던 내게 조금이나마 알은체 할 거리를 만들어 주는 계기가 될 거라 생각했다.

 

  영미 시라고 하더라도 책 제목에서 말했던 것처럼, 사랑에 관한 시이므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시가 많았다. 영어 원문과 함께 교수님의 번역이 실려 있는 시들을 보면서, 처음에는 욕심내어 원문까지 읽어 보았다. 한 줄 읽고 해석을 보며 내가 생각한 이미지와 해석이 들어맞는지를 따져 보았는데, 얼마 안가 단어들이 막히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시를 읽는 것인지 영어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인지 헷갈려서 원문 전체를 다 읽지 않고, 번역 시를 먼저 보며 '이런 표현은 영어로 어떻게 쓰였을까' 란 궁금증을 일으키는 문장만 원문을 보았다. 그렇게 읽는 것이 시의 의미를 더 느낄 수 있었고, 짤막하게 실린 시인의 생애와 함께 온전하게 시를 맛보게 해 주었다.

 

  이 책에 실린 시들은 모 일간지에 칼럼으로 실린 것들이라고 한다. 당시에 원고를 담당했던 기자분이 계절마다 제목을 붙여 주었다고 하는데, 그 제목과 함께 김전선 화백의 그림을 느끼고, 교수님의 시에 대한 칼럼을 맛보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조화였다. 시에 온전히 들어가지 못했을 때, 제목이나 그림, 칼럼을 통해서 이해를 도왔기에 각각의 존재만으로도 시를 돋보이게 하고 다채롭게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사랑의 절절함을 느낌과 동시에 이런 다양함을 맛보며, 거장들의 시를 음미한다는 것은 참 산뜻한 기분이었다. 시라는 장르가 어렵게 다가온 나 같은 독자에게 여기저기서 도움이 손길이 뻗어 있는 것 같아, 영미 시임에도 즐겁게 읽고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더라도, 사람의 감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이 시집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껏 많이 읽지 않은 국외 시집을 살펴보면, 번역의 매끄럽지 못한 부분으로 인해, 혹은 시의 함축적인 의미 때문에 온전히 느낄 수 없었다는 것이 떠오른다. 최대한 독자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노력이 엿보인 이 시집으로 인해 그런 어려움을 많이 해소시켰다. 교수님도 '시를 번역하는 사람은 시인이어야 한다는' 말을 언급하셨지만, 나 같은 독자들조차도 시라는 문학은 알려고 하면 할수록 오묘하면서도 감질거리는 매력을 던져 준다는 사실을 깨달아 간다. 영미 시의 매력을 느꼈음은 물론, 한 편의 시가 다양하게 표현 될 수 있다는 사실(특히나 김점선 화백의 그림을 통해)에 풍요로움을 맛보았다.

 

  마음의 절절함이 느껴졌던 시, 공감을 이끌어 냈던 시, 신선함을 던져 준 시, 잔잔함 파문을 일으킨 시들이 내게 다가와 주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여러 사람의 노력이 녹아 있는 시집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나도 모르게 순식간에 읽어 버린 것이 민망할 정도다. 책장에 자리하고 있는 또 다른 영미 시집이 남아 있어 다행이면서도, 이런 만남을 더 이상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이 여전히 허전하다. 시를 읽는 내내, 장영희 교수님과 김전선 화백의 흔적을 온 몸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마음이 절절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 분들의 평안함을 빌었다. 좋은 책을 남겨 주어서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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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 - 본죽 대표 김철호의 기본이 만들어낸 성공 레시피
김철호 지음 / 비전비엔피(비전코리아,애플북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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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만 줄기차게 읽다 보면 현실감각이 떨어질 때가 있다. 내가 속한 세계가 현실인지 허구인지, 내 머릿속을 왔다가는 생각의 시초가 소설 속의 이야기인지, 내가 경험한 것인지 헷갈리기도 한다. 그럴 때는 현실감을 일깨워 줄 수 있는 책들을 찾아서 읽곤 한다. 평전이나 인문서적, 미술에 관한 책들을 뒤척이며 현실감을 일깨우고 다시 문학 속으로 빠져든다. 문학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독서패턴을 이런 식으로라도 꿰어 맞춰 골고루 분포 시키고 싶은 의도가 숨어 있기도 하다. <정성>이란 책을 꺼낼 때도 그랬다. 문학 속에서만 헤매다 보니 인간미를 느끼고 싶었고, 묘하게 나의 마음을 끄는 책 제목에 감질 맛을 느껴 책장에 손을 뻗게 되었다.

 

  죽 전문점 본죽 대표가 쓴 책이라는 사실을 알고 인간미를 느끼는 데는 문제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의 성공담을 듣는 것은 말 그대로 삶의 체험을 간접 경험하는 것이기에, 문학의 허구의 후유증을 조금이라도 덜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문학을 통해서도 충분히 현재의 삶의 실재성을 끌어 낼 수 있지만, 현장의 소리를 듣는 것이 더 생생하게 다가올 때가 있다. 굳이 <정성>이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의 성공담을 듣고, 그 순간에는 내 자신을 반성하며 내 안에 끓는 열정이 있는지를 따져보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그러나 과연 그런 느낌을 얼마나 간직할 수 있으며, 행동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나의 대답은 늘 궁해진다. 현실감을 일깨우고 싶어 책을 꺼냈다고 말하면서도, 내 안에 얼마나 많은 것을 간직할 수 있을지 나조차도 알 수 없었다.

 

  책을 읽기 전부터 '현실감을 일깨우기 위해'란 목적으로부터 비어져 나온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채워갔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한 호흡에 책을 읽어버리고 최선을 다해 삶을 살아온 저자를 보자 나의 현실감은 더 떨어지고 말았다. 분명 가능한 일을 한 저자임에도, 내게는 불가능으로 보였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목적의식과 도전의식, 무엇보다 열정이 내게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처럼 절망의 순간의 끝에서 붙잡았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말도 안 되는 자기 합리화를 덧입혀 보아도, 도전보다는 포기가 더 쉽다는 유혹이 나를 따라왔다. 수많은 실패를 하고, '우리 가족이 행복하게 살게 되는 것'을 추구하면서 현재의 본죽을 이끌어 온 저자가 어느새 나에게서 더 멀어져 버린 느낌이었다.

 

  그 느낌은 타인의 성공에 대한 부러움과 시샘보다, 하고 싶을 일을 끄집어냈다는 사실에 대한 동기 그 자체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각각의 인간에게 각각의 달란트를 주셨다고 하셨는데, 그것을 갈고 닦지 않으면 발견할 수 없다는 말이 나를 괴롭혔다. 눈에 띄지 않는다는 이유로 나의 달란트가 무엇인지 찾기를 거부했고, 노력보다는 포기가 빠르다는 이유로 무언가에 모든 것을 던져보는 것을 거부해왔다. 저자처럼 절망의 끝에 내몰리더라도 열정적으로 나를 던질 용기가 내게도 있는지 의심만 갔다. 저자의 성공담을 소개하고, 대단하다는 사람이라고 칭송하며, 나를 전혀 대입시키지 않은 채 책을 덮어버릴 수 있다면 좋으련만. 저자의 삶 속에 나의 모습이 어지럽게 대입되는 것을 도무지 피할 수 없었다.

 

  <본죽>이라면, 우리 동네에도 자리하고 있기에 심심찮게 방문하는 음식점이다. 아플 때만 먹는 음식이라는 틀을 깬 저자처럼, 나 또한 한 번 맛보고는 그런 생각을 깨트리고 종종 이용하고 있다. 입맛이 없거나, 속이 안 좋거나, 병문안을 갈 때 더 자주 이용하긴 해도, 그냥 죽이 먹고 싶어서 들를 때도 허다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죽에 대한 생각(저자가 본죽을 열기 전에 여러 죽집을 통해서 얻은 생각)을 깨준 것처럼, 저자는 한 끼 식사로, 푸짐하게 내 줄 수 있는 죽집, 깔끔하고 푸근한 죽집이라는 이미지를 내세웠다. 그리고 현재의 본죽이 있기까지의 과정과 비빔밥과 국수에까지 도전하고, 해외까지 진출하는 과정을 보면서 저자의 첫 생각에서 무궁히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성공에만 중점을 두고 지점 늘이기, 이익을 위해 어느 정도 눈감아 준다는 원칙의 벗어남, 안정 궤도에 오르면 그대로 안주하고 싶은 심리를 이기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저자는 '우리 가족이 행복하게 살게 되는 것'을 어느 정도 이루어지자 그 꿈이 커져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 대가를 바라지 않기에 타인의 질책에도 수그러들지 않는 일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음에도, 저자가 지금까지 이룩하고 앞으로 이룩할 것들에 대한 기본 바탕에는 '선한 영향력'이 깔려 있었다. 그랬기에 저자 또한 지금까지 본죽을 이룩한 것에 대한 수많은 어려움과 환희에 대해서 담담히 말할 수 있었고, 앞으로의 행보에 대해서도 마음껏 말할 수 있었다. 그 결실이 한 권의 책으로까지 이어졌으니, 저자의 성공 레시피는 앞으로도 꾸준히 쌓여 갈 것이다.

 

  책 제목처럼 이 책의 키워드는 '정성'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서비스에 정성이 들어가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특히나 음식과 관련 된 일을 한다면 정성이 좀 더 색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음식을 팔기 위해서 쏟는 정성을 뛰어 넘어, 죽 한 그릇으로 타인의 마음까지 움직이고, 행복을 발하는 정성. 마음 하나로 세상을 따뜻하게 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은 정성을 보여 준 것이 저자의 성공담에 들어 있었다. 중심 주제가 번복된 감이 없지 않고 일관된 구성을 보이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쉽긴 했지만, 자신을 낮추며 담담하게 희망을 전하는 저자에게서 많은 것을 본 느낌이다. 자기에게 숨겨진 면을 끈기 있기 찾은 것, 앞이 보이지 않더라도 끝까지 노력해 보는 것, 그 결실을 혼자 갖는 것이 아닌 타인에게 나눠주려는 마음들이 나의 마음에도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그 마음을 어떻게 지키느냐가 내게는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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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주는 그림
크리스토프 앙드레 지음, 함정임.박형섭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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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을 좋아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그림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그다지 많지 않음을 늘 실감하게 된다. 전시회를 가도 그렇고, 미술에 관련된 책을 구입해서 읽을 때도 마찬가지다. 특히나 내가 아는 그림일수록 알은체를 하며, 더 이상 알기를 거부하는 것이 사실이다. 똑같은 그림이라도 해석에 따라,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달리 보임에도 불구하고 틀 안에 그림을 가둔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어떨 때는 그림이 아니라 그림을 그린 화가의 생애에 더 초점을 맞춰 진정성을 부인해 버릴 때도 있다. 화가의 생애가 그림에 미치는 영향을 무시할 수 없더라도, 그림에서 느껴지는 감정을 좀 더 소중히 다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래서인지 내게 익숙한 그림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고, 해석하게 되는 책들을 만나면 반갑다. 내가 갖지 못한 넓은 시각을 보길 원하고, 내가 알지 못했던 새로움을 알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일 것이다.

 

  <행복을 주는 그림>은 프랑스에서 유명한 심리학 관련 저자 중 한명이 쓴 책이라고 했다. 심리학에 관해서 무지하기 때문에 처음 듣는 저자임에도 거부감이 들지 않았던 것은 '그림'이라는 제목이 주는 이미지 때문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그림과 함께라면 낯선 저자의 글이라도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이런 편한 마음이 섣불렀는지, 책을 끝까지 읽는 동안 마음이 열리지 않았음을 실감했고 아쉬움으로 책장을 덮어 버렸다. 무엇이 나의 마음을 열어 주지 못하고, 그림과 함께 어우러지는 글을 감상하지 못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뚜렷한 해답은 떠오르지 않고, 다만 내가 저자의 글에 다가가려 하지 않았다는 노력과 그림에서 심리학을 끌어내려는 진부하면서도 익숙한 소재의 시도가 결실을 맺지 못했다는 사실만 수면위로 떠올랐다.

 

  이 책에 실린 스물다섯 편의 그림은 화가와 그림이 낯설더라도, 전혀 어색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 궁금증을 자아내는 평온함과 일상의 눈부심을 만끽할 수 있는 그림들로 채워져 있다. 일상의 눈부심이 조금 이질적인 해도 그림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친숙한 화가와 반가운 그림이 많음에 금세 마음이 편안해 질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단순히 독자에게 그림을 보여주기 위해, 독자도 그림을 쓱 둘러보기 위한 목적이 이 책에 내포되어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림을 통해 내면을 꿰뚫어 보고, 표면에 드러난 상처나 자신이 알지 못한 어두운 부분이 그림과 글을 통해서 위로받기를 원했을 것이다. 나 또한 은연중에 그런 마음을 갖고 있었지만 끝내 내 마음 속으로 어느 것도 파고들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책의 구성을 살펴보자면, 6개의 주제로 그림을 묶어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을 전달하고자 했다. 화가의 그림을 특정 부분을 확대시킨 첫 페이지와 그림과 어우러지는 저자의 간략한 느낌이 실려 있다. 그 다음에는 한 눈으로 살펴볼 수 있는 전체적인 그림이 실려 있고, 명언과 화가 소개, 저자 나름대로 이끌어 낼 수 있는 내면의 감정을 아우르는 글이 실려 있다. 이런 구성으로 25편의 그림을 보게 되는데, 여러 단락씩 나뉘는 구성 때문에 흐름이 끊긴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거기다 첫 페이지에 실린 그림에 대한 저자의 간략한 느낌 이외에 여러 가지 해석을 덧붙이려는 저자의 노력을 알 수 있었으나, 하나 되지 못하고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묵상하듯 글을 읽고, 그림을 바라보며 느릿느릿 책을 읽지 않고 너무나 순식간에 독파하려 했던 나의 시도가 무모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림을 통해서 내면을 보고, 인간이 느끼는 또 다른 감정을 살펴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못 미쳐서 무엇을 읽고 느낀 것인지 혼란스럽기만 하다.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일 수밖에 없으나, '행복'이라는 것을 타인의 눈으로만 보려 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읽는 이에 따라서, 보는 이의 심리 변화에 따라서 책이 달리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그림을 통해서, 아니면 그림에서 흘러나오는 미약한 이미지를 변화시켜 현존하는 세계에서 다양함을 느낄 수 있는 실마리라도 찾게 된다면, 그것이 이 책의 숨은 뜻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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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 - 조선의 마지막 황녀
권비영 지음 / 다산책방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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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 종일 침대에 갇혀 있는 기분, 그 비참함을 아주 조금 안다. 머리가 마비되면 마음도 마비되고, 일상의 자잘한 행동들이 제약을 받게 된다. 먹는 것도 일상을 파고들었던 자잘한 생각들도 모두 멈춰 버리고, 자신의 괴롭히는 문제가 지배해 버리고 만다. 최근 나를 괴롭힌 어떤 문제 때문에 며칠을 고민하고, 식음을 전폐하고 보니, 비참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경험으로 인해 일상의 마비를 알게 되었고, 그 순간에도 한 여인이 떠올랐다. 조선의 마지막 황녀라 불리는 덕혜 옹주. 그녀의 일생 중에서도 모두에게 잊힌 채, 일본의 한 정신병원에 갇혀 지낸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경험한 느낌과 감히 비교할 수 없지만, 글로 읽는 그녀의 고충을 조금이나마 피부로 느껴서인지 깊은 고뇌가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누군가에게 잊힌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사람이 모든 기억을 끌어안고 살아갈 수 없더라도, 잊어서는 안 될 사람까지 잊어버릴 때의 그 쓸쓸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그것이 인생의 단면이라고 어느 정도 털어 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너지는 한 나라의 왕이라면 어떠했을까. 모든 치욕과 아픔을 낱낱이 겪고, 지켜봐야 했던 가족이라면 어떠했을까. 한 권의 소설로 인해서 그녀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던 한 여인을 알게 되었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을지라도, 그 이후의 혈통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덕혜 옹주의 출현은 당황스러웠다. 그녀를 잊고 있었다는 사실보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언급이 된 적이 없다는 사실에 더욱 그러했다.

 

  <덕혜 옹주>를 읽고 나서 많은 사실에 씁쓸함과 충격을 받았지만, 무엇보다 그녀에 관한 책이 단 한 권밖에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저자는 이 책의 원고를 완성하고 났을 때, 덕혜 옹주의 일생을 쓴 일본인의 책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어 거의 책을 다시 쓰다시피 했다고 한다. 덕혜 옹주에 관한 책이 한 권도 없던 때에, 그 일본인은 우리나라의 여러 도서관에 책을 기증했다고 한다. 참으로 부끄러운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책이 번역된 것이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너무 오랫동안 그녀를 잊고 지낸 우리가 무심해서 부끄러웠다. 일본인이 쓴 덕혜 옹주의 생애, 국내 작가가 쓴 소설 한 권이 전부라고 하니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은 그녀의 존재가 아니라 자국민으로서의 존재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덕혜 옹주에 관해서 조금이나마 알고 나니, 나의 머릿속을 온통 지배하는 생각은 안타까움이었다. 조선의 마지막 황녀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일본에서 강제 결혼을 하지 않았더라면, 남편에게 버림받고 정신병원에 갇히지 않았더라면 하는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운명의 장난과도 같은 그녀의 일생은 어디서부터 꼬인 것인지 추적해 나갈 수 없을 정도였다. 단지 일본의 속국이 되어 버린 조선 땅을 바라보면 한탄하고, 일본인들과 친일파들의 놀음에 따를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직시하는 것뿐이었다. 고종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지만, 고종의 죽음을 지켜보고 도저히 회복될 수 없는, 망해가는 나라를 바라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그녀를 괴롭혔다.

 

  황녀로서의 위엄과 영민함, 대담함까지 모두 지녔지만 그 힘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백성을 위해서 펼칠 수도 없는 것이 그녀의 운명이었다. 미처 뜻을 세우기도 전에 유학을 가장한 볼모로 끌려갔을 때부터 이미 그녀의 희망은 거기서 끝나 버렸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복형제인 영친왕이 일본에 있었으나, 어느 것도 그녀를 위로할 수 없었다.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조선 땅에서 살고 싶었고, 지금 겪고 있는 치욕을 되갚아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운명은 짓궂게도 그녀의 의중을 모두 피해갔다. 일본에서의 강제 결혼이 그러했고, 평범하지 않은 자신과 결혼한 남편의 애정이 식어가는 모습, 하나뿐인 딸이 조선인이라는 자체를 거부하며 그녀를 벌레 보듯 하던 일, 그녀를 감당하지 못하고 결국 정신병원에 버린 남편, 그리고 모두에게 잊힌 일들이 그랬다.

 

  그렇게 그녀의 삶이 무너지는 사이에도 그녀의 존재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고마웠다. 덕혜 옹주를 따라 온 유모나 덕혜 옹주와 혼인을 맺을 뻔 했던 박무영, 조선의 독립을 꾀하는 구국청년단들이 있었다. 모두가 덕혜 옹주를 잊어가고, 조선의 흔적을 지워 갈 때까지 그들은 타국에서 조선을 기억하고, 운명의 장난에 꺾인 사람들을 구하고자 했다. 덕혜 옹주보다 영친왕의 구출에 초점이 더 맞춰진 상황에서도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안심이 되었다. 그녀가 다시 조선으로 돌아올 때까지 헌신을 다했던 이름 모를 사람들. 실화가 바탕이 된 소설이라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명확한 선을 그을 수 없지만 기본적인 밑바탕은 사실일거라 생각한다. 그렇게 마음먹으니 덕혜 옹주의 존재와 함께 조선을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의 울림이 들리는 듯 했다.

 

  조금 두툼한 책이어서 읽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한 호흡에 소설을 읽어 버린 것과 읽고 나서 다스려지지 않는 감정 때문에 당황스러웠다. 덕혜 옹주에 초점이 맞춰지다 보니, 소설의 구성이 넓게 펼쳐지지 못하고 촘촘히 짜인 느낌은 덜했다. 덕혜 옹주의 내면과 그 주변의 상황들이 좀 더 균형을 맞추지 못하고 쓰인 것이 아쉬움으로 남기도 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덕혜 옹주의 존재감이고, 그녀의 존재가 소설로 인해 되살아나고,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기억하게 된다면 이 소설은 출간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덕혜 옹주의 생애를 그린 책을 구입해서 읽어보고 싶을 정도로, 그동안 그녀의 존재를 알지 못한 것이 미안했다. 그녀가 조선의 마지막 황녀여서가 아니라, 조선의 국민으로 조선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을 엿보아서인지도 모르겠다. 이제라도 그녀의 재발견이 이루어져 그녀 이외에 묻혀버린 수많은 사람들을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함이 든다. 타국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을 우리의 국민을 우리가 기억하지 않으면 누가 기억하겠는가. 씁쓸함만이 공허한 가슴을 휩쓸고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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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바르트 뭉크 - 미술문고 208
장소현 / 열화당 / 199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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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쇠렌 키에르케고르의 <불안의 개념>이 도착했다. 저자의 이름은 몇 번 들어본 적이 있지만, 그의 작품이 어떤 것이 있는지 알지 못했던 내가 이 책을 주문한 이유는 뭉크 때문이었다. 불현듯 책장을 뒤적거리다 꺼내들었는데, 2년 전 한 온라인 서점에서 창고 대방출 할 때 말도 안 되는 가격에 구입한 책이었다. 먼지를 탈탈 털고 읽고 보니, 저렴하게 구입했다는 뿌듯함보다 내용의 충실함에 만족하게 된 책이었다. 같은 시리즈의 <툴루즈-로트렉>을 읽고 나서, 저자와 시리즈의 구성에 반했는데 더 많은 시리즈를 만날 수 없다는 것이 아쉬울 지경이다.

 

  뭉크에 관해서 별반 아는 것이 없으면서도,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화가여서 그런지 거부감은 없었다. 오히려 그의 유명한 몇몇 작품만 보고 암울할거라는 생각으로 더 알기를 거부했던 화가에 속했다. 겉표지의 <절규>는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유명하지만, 나 또한 이 그림의 분위기만 보고 '암울함'으로 그를 덧입혔다. 화풍을 보고 뭉크의 작품을 추측할 뿐, 더 이상 그의 작품도 그의 삶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없었다. 이 책으로 뭉크를 알기를 원했고, 그의 그림에 녹아든 삶의 이면을 알고 싶었다. 책이 작아 많은 내용이 들어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고, 가볍게 펼친 책이었는데 기대이상의 결과를 만났다.

 

  뭉크의 대표작을 살펴보더라도, 어둡고 음산하고 죽음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작품들이 많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뭉크의 그림속의 색감이 무조건 어둡다고는 할 수 없지만, 첫인상은 밝거나 쾌활한 이미지는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어두운 감정이 가득 들어찬 작품이라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저자는 '뭉크의 예술에 있어서 색채가 갖는 의미는 '색채의 서정시인' 이라고 불릴 정도로 막강하다.'고 했다. '그러나 내면세계의 핵심은 극명하게 표현하는 데에서는 색채가 오히려 방해가 될 수도 있다.'며, 색채가 있는 그대로의 현상세계이기 때문에 사물을 흑백으로 환원시키면 단숨에 사물의 의미에 도달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고 했다. 그런 예로 뭉크의 판화를 들었는데, 지금껏 색채로 인해 음산한 분위기를 풍긴다 생각했던 뭉크의 그림들이 '사물의 의미에 도달하는 경험'을 나 또한 하게 되었다.

 

  그의 작품들에 죽음과 슬픔, 고통이 들어찬 작품들이 많은 것은 어린 시절의 어머니와 누이의 죽음 때문이었다. 어린 나이에 가족의 죽음을 연달아 경험한 그에게는 죽음이 주된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삶에서나 예술 세계에서나 죽음은 그를 떠나지 않았고, '죽음을 통해 생을 이해하는 것, 이것이 바로 뭉크의 삶의 방식이요 예술의 원천이었다.' 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죽음이 주는 이미지가 무거운 것은 사실이나, 뭉크 안에 내재된 죽음의 무게와 의미를 이해하고 나니 그의 작품 속에 들어있는 이미지들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자신 안에 잠식해 있는 이미지를 그림으로 표현해 내는 것, 그것으로 인해 인생을 차지하고 있는 열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뭉크가 가진 사명이었다.

 

  지금은 뭉크의 작품이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고 있지만, 뭉크가 활동할 당시만 해도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개인전을 통해서 자신의 작품을 알렸으나, 그에 따른 결과는 극과 극이었다. 그의 작품에 찬사를 던지는 사람은 적고, 비판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그의 작품은 많은 궁금증을 자아냈다. 베를린을(베를린에서 보낸 기간 동안 그의 유명한 작품들이 많이 탄생했다.) 비롯해 유럽의 몇몇 도시에서 전시회를 갖으면서 그는 더 유명해졌으나, 유명세는 꼭 긍정적인 결과를 드러낸 것은 아니었다. 낯 뜨거운 비판이 늘 그를 따라다니며 괴롭혔지만, 뭉크는 꿋꿋하게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그려나가는 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가 남긴 일기와 편지로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어떠한 그림을 그리고자 했는지 내면과 함께 어우러지는 그림을 대조해서 볼 수 있어, 그를 좀 더 가까이에서 지켜본 느낌이다.

 

  <불안의 개념>을 구입하게 된 것은 뭉크가 키에르케고르의 작품 가운데서 여러 번 읽은 흔적이 역력하게 남아 있다고 해서였다. 그의 삶을 돌아볼 때, 죽음이 늘 그의 내면에 잠식해 있듯 불안도 어둠 속에서 늘 그를 따라다녔다. 그런 그가 키에르케고르의 저서를 통해서 많은 위로를 받고, 영감을 얻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 또한 그 내면에 동참하고자 구입하긴 했으나, 그 깊은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러나 한 권의 책을 통해서 뭉크를 알고, 그가 어떠한 삶을 살고, 작품들과 어떻게 어우러지는지 살펴본 시간은 무척 소중했다. 책을 덮는 순간 내가 새롭게 알았던 사실들이 산산이 흩어지더라도, 뭉크라는 화가는 더 이상 음산하며 암울한 화가가 아니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한 가치를 얻은 셈이다. 어느 작가가 뭉크의 그림을 보며 "평소에 집에 걸어 놓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지만, 일상을 떠나 내적으로 의식을 집중시키려 할 때 살며시 꺼내 음미하게 되는 그림" 이라고 했다. 뭉크의 삶과 작품세계에 대해서 알고 나니, 종종 그의 작품을 꺼내 음미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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