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혜옹주 - 조선의 마지막 황녀
권비영 지음 / 다산책방 / 200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하루 종일 침대에 갇혀 있는 기분, 그 비참함을 아주 조금 안다. 머리가 마비되면 마음도 마비되고, 일상의 자잘한 행동들이 제약을 받게 된다. 먹는 것도 일상을 파고들었던 자잘한 생각들도 모두 멈춰 버리고, 자신의 괴롭히는 문제가 지배해 버리고 만다. 최근 나를 괴롭힌 어떤 문제 때문에 며칠을 고민하고, 식음을 전폐하고 보니, 비참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경험으로 인해 일상의 마비를 알게 되었고, 그 순간에도 한 여인이 떠올랐다. 조선의 마지막 황녀라 불리는 덕혜 옹주. 그녀의 일생 중에서도 모두에게 잊힌 채, 일본의 한 정신병원에 갇혀 지낸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경험한 느낌과 감히 비교할 수 없지만, 글로 읽는 그녀의 고충을 조금이나마 피부로 느껴서인지 깊은 고뇌가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누군가에게 잊힌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사람이 모든 기억을 끌어안고 살아갈 수 없더라도, 잊어서는 안 될 사람까지 잊어버릴 때의 그 쓸쓸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그것이 인생의 단면이라고 어느 정도 털어 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너지는 한 나라의 왕이라면 어떠했을까. 모든 치욕과 아픔을 낱낱이 겪고, 지켜봐야 했던 가족이라면 어떠했을까. 한 권의 소설로 인해서 그녀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던 한 여인을 알게 되었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을지라도, 그 이후의 혈통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덕혜 옹주의 출현은 당황스러웠다. 그녀를 잊고 있었다는 사실보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언급이 된 적이 없다는 사실에 더욱 그러했다.

 

  <덕혜 옹주>를 읽고 나서 많은 사실에 씁쓸함과 충격을 받았지만, 무엇보다 그녀에 관한 책이 단 한 권밖에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저자는 이 책의 원고를 완성하고 났을 때, 덕혜 옹주의 일생을 쓴 일본인의 책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어 거의 책을 다시 쓰다시피 했다고 한다. 덕혜 옹주에 관한 책이 한 권도 없던 때에, 그 일본인은 우리나라의 여러 도서관에 책을 기증했다고 한다. 참으로 부끄러운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책이 번역된 것이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너무 오랫동안 그녀를 잊고 지낸 우리가 무심해서 부끄러웠다. 일본인이 쓴 덕혜 옹주의 생애, 국내 작가가 쓴 소설 한 권이 전부라고 하니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은 그녀의 존재가 아니라 자국민으로서의 존재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덕혜 옹주에 관해서 조금이나마 알고 나니, 나의 머릿속을 온통 지배하는 생각은 안타까움이었다. 조선의 마지막 황녀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일본에서 강제 결혼을 하지 않았더라면, 남편에게 버림받고 정신병원에 갇히지 않았더라면 하는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운명의 장난과도 같은 그녀의 일생은 어디서부터 꼬인 것인지 추적해 나갈 수 없을 정도였다. 단지 일본의 속국이 되어 버린 조선 땅을 바라보면 한탄하고, 일본인들과 친일파들의 놀음에 따를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직시하는 것뿐이었다. 고종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지만, 고종의 죽음을 지켜보고 도저히 회복될 수 없는, 망해가는 나라를 바라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그녀를 괴롭혔다.

 

  황녀로서의 위엄과 영민함, 대담함까지 모두 지녔지만 그 힘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백성을 위해서 펼칠 수도 없는 것이 그녀의 운명이었다. 미처 뜻을 세우기도 전에 유학을 가장한 볼모로 끌려갔을 때부터 이미 그녀의 희망은 거기서 끝나 버렸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복형제인 영친왕이 일본에 있었으나, 어느 것도 그녀를 위로할 수 없었다.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조선 땅에서 살고 싶었고, 지금 겪고 있는 치욕을 되갚아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운명은 짓궂게도 그녀의 의중을 모두 피해갔다. 일본에서의 강제 결혼이 그러했고, 평범하지 않은 자신과 결혼한 남편의 애정이 식어가는 모습, 하나뿐인 딸이 조선인이라는 자체를 거부하며 그녀를 벌레 보듯 하던 일, 그녀를 감당하지 못하고 결국 정신병원에 버린 남편, 그리고 모두에게 잊힌 일들이 그랬다.

 

  그렇게 그녀의 삶이 무너지는 사이에도 그녀의 존재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고마웠다. 덕혜 옹주를 따라 온 유모나 덕혜 옹주와 혼인을 맺을 뻔 했던 박무영, 조선의 독립을 꾀하는 구국청년단들이 있었다. 모두가 덕혜 옹주를 잊어가고, 조선의 흔적을 지워 갈 때까지 그들은 타국에서 조선을 기억하고, 운명의 장난에 꺾인 사람들을 구하고자 했다. 덕혜 옹주보다 영친왕의 구출에 초점이 더 맞춰진 상황에서도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안심이 되었다. 그녀가 다시 조선으로 돌아올 때까지 헌신을 다했던 이름 모를 사람들. 실화가 바탕이 된 소설이라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명확한 선을 그을 수 없지만 기본적인 밑바탕은 사실일거라 생각한다. 그렇게 마음먹으니 덕혜 옹주의 존재와 함께 조선을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의 울림이 들리는 듯 했다.

 

  조금 두툼한 책이어서 읽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한 호흡에 소설을 읽어 버린 것과 읽고 나서 다스려지지 않는 감정 때문에 당황스러웠다. 덕혜 옹주에 초점이 맞춰지다 보니, 소설의 구성이 넓게 펼쳐지지 못하고 촘촘히 짜인 느낌은 덜했다. 덕혜 옹주의 내면과 그 주변의 상황들이 좀 더 균형을 맞추지 못하고 쓰인 것이 아쉬움으로 남기도 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덕혜 옹주의 존재감이고, 그녀의 존재가 소설로 인해 되살아나고,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기억하게 된다면 이 소설은 출간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덕혜 옹주의 생애를 그린 책을 구입해서 읽어보고 싶을 정도로, 그동안 그녀의 존재를 알지 못한 것이 미안했다. 그녀가 조선의 마지막 황녀여서가 아니라, 조선의 국민으로 조선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을 엿보아서인지도 모르겠다. 이제라도 그녀의 재발견이 이루어져 그녀 이외에 묻혀버린 수많은 사람들을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함이 든다. 타국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을 우리의 국민을 우리가 기억하지 않으면 누가 기억하겠는가. 씁쓸함만이 공허한 가슴을 휩쓸고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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