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 - 사랑이 내게 온 날 나는 다시 태어났습니다 장영희의 영미시산책
장영희 지음, 김점선 그림 / 비채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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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를 마감하고 잠들기 전, 책장을 보며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지 마음속으로 계획해본다. 그냥 읽고 싶은 책만 골라 읽으면 좋겠지만, 우선순위를 무시할 수 없는 책들이 있어서 나름대로 순서를 정해본다. 그러나 마음속의 계획은 늘 그렇듯 지켜지기 보단 어기기가 더 쉬운 법이다. 읽어야 할 책과 관심 있어 구입한 책들이 뒤엉켜서 책장을 어지럽히고 있기에, 늦은 밤임에도 불구하고 책장 정리를 했다. 먼저 읽어야 할 책들을 손이 잘 닿는 책장에 빼놓고, 최근에 구입한 책들도 따로 분류해 놓았다. 그렇게 정리를 해 놓으니 읽어야 할 책 순서가 한 눈에 보였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책들을 방치해 두었는지, 관심 있다고 구입한 책들마저도 신경 쓰지 못한 사실이 확연히 드러나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렇게 정리 된 책장을 보면서 문득 <생일>이란 책이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 고(故) 장영희 교수님의 에세이가 아니라 '영미시산책'이라는 이유로 주요 목록에서 배제해 두었었다. 어쩌면 같은 해에 암으로 돌아가신 장영희 교수님과 김점선 화백의 마음이 녹아있는 책이라서 선뜻 손을 뻗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두 분이 같이 작업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아름다운 책(김점선님의 말을 빌려)이 만들어졌는지 가늠할 수 있을 정도인데, 이제는 그런 결과물을 만날 수 없다는 사실과 두 분을 더 이상 뵐 수 없다는 사실이 마음 아프게 다가왔다. 그러다 한 밤중의 책 정리로 인해 다시 눈에 띄게 되었고, 아련한 마음을 품은 채 영미시가 주는 낯섦을 호기심으로 바꾼 다음에야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책 제목이 <생일>인 것을 보고 조금은 의아했다. 생일이라고 하면 '태어남'이란 의미가 뿌리박혀 있기에 더 이상 생각이 뻗어 나가지 못했다. 서문을 보고서야 '사랑이 내게 온 날 나는 다시 태어났습니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제목이 참 맛깔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을 할 때의 그 설렘과 기쁨, 달랠 길 없는 그리움조차도 다시 태어남으로 포장한다는 뜻이 내게도 가깝게 다가왔다. 그 때문에 잠시 우리의 시가 아닌 영미시라는 사실도 잊은 채, 어떠한 시들이 실려 있을지 무척 궁금해졌다. 거기다 상식으로 알아두어야 할 거장 시인들의 시가 실려 있다고 하니, 국외 시에 무지했던 내게 조금이나마 알은체 할 거리를 만들어 주는 계기가 될 거라 생각했다.

 

  영미 시라고 하더라도 책 제목에서 말했던 것처럼, 사랑에 관한 시이므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시가 많았다. 영어 원문과 함께 교수님의 번역이 실려 있는 시들을 보면서, 처음에는 욕심내어 원문까지 읽어 보았다. 한 줄 읽고 해석을 보며 내가 생각한 이미지와 해석이 들어맞는지를 따져 보았는데, 얼마 안가 단어들이 막히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시를 읽는 것인지 영어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인지 헷갈려서 원문 전체를 다 읽지 않고, 번역 시를 먼저 보며 '이런 표현은 영어로 어떻게 쓰였을까' 란 궁금증을 일으키는 문장만 원문을 보았다. 그렇게 읽는 것이 시의 의미를 더 느낄 수 있었고, 짤막하게 실린 시인의 생애와 함께 온전하게 시를 맛보게 해 주었다.

 

  이 책에 실린 시들은 모 일간지에 칼럼으로 실린 것들이라고 한다. 당시에 원고를 담당했던 기자분이 계절마다 제목을 붙여 주었다고 하는데, 그 제목과 함께 김전선 화백의 그림을 느끼고, 교수님의 시에 대한 칼럼을 맛보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조화였다. 시에 온전히 들어가지 못했을 때, 제목이나 그림, 칼럼을 통해서 이해를 도왔기에 각각의 존재만으로도 시를 돋보이게 하고 다채롭게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사랑의 절절함을 느낌과 동시에 이런 다양함을 맛보며, 거장들의 시를 음미한다는 것은 참 산뜻한 기분이었다. 시라는 장르가 어렵게 다가온 나 같은 독자에게 여기저기서 도움이 손길이 뻗어 있는 것 같아, 영미 시임에도 즐겁게 읽고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더라도, 사람의 감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이 시집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껏 많이 읽지 않은 국외 시집을 살펴보면, 번역의 매끄럽지 못한 부분으로 인해, 혹은 시의 함축적인 의미 때문에 온전히 느낄 수 없었다는 것이 떠오른다. 최대한 독자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노력이 엿보인 이 시집으로 인해 그런 어려움을 많이 해소시켰다. 교수님도 '시를 번역하는 사람은 시인이어야 한다는' 말을 언급하셨지만, 나 같은 독자들조차도 시라는 문학은 알려고 하면 할수록 오묘하면서도 감질거리는 매력을 던져 준다는 사실을 깨달아 간다. 영미 시의 매력을 느꼈음은 물론, 한 편의 시가 다양하게 표현 될 수 있다는 사실(특히나 김점선 화백의 그림을 통해)에 풍요로움을 맛보았다.

 

  마음의 절절함이 느껴졌던 시, 공감을 이끌어 냈던 시, 신선함을 던져 준 시, 잔잔함 파문을 일으킨 시들이 내게 다가와 주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여러 사람의 노력이 녹아 있는 시집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나도 모르게 순식간에 읽어 버린 것이 민망할 정도다. 책장에 자리하고 있는 또 다른 영미 시집이 남아 있어 다행이면서도, 이런 만남을 더 이상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이 여전히 허전하다. 시를 읽는 내내, 장영희 교수님과 김전선 화백의 흔적을 온 몸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마음이 절절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 분들의 평안함을 빌었다. 좋은 책을 남겨 주어서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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