굶어 죽지 않으면 다행인 - 이후북스 책방일기
황부농 지음, 서귤 그림 / 알마 / 2018년 5월
평점 :
품절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책방을 한 번 열어보고 싶다는 바람이 있다. 크진 않더라도 동네를 꿋꿋이 지키는 나름 아기자기한 책방을 꿈꿨다. 까짓것 책이 없으면 우리 집에 있는 내 책들을 갖다 놓기만 해도 분위기가 형성될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내 내 책들을 불특정 다수가 읽고 뒤적이는 걸 견딜 수 있을지, 또한 책을 좋아하는 사람만 온다는 보장이 없는데 그 사람들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 쓰잘머리 없는 걱정들이 가득 채워졌다. 그러면서도 근처에 만화방이라도 생기면 괜히 질투심이 일었다. 나도 저렇게 책방 열고 싶은데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좀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나와는 달리 독립책방을 운영하고 있는 이 책을 읽고 나니 마음이 더 복잡해졌다. 나는 절대 책방 같은 건 못 열겠구나란 생각과 부럽다는 생각이 쉴 새 없이 교차해 그냥 나만의 책방 같은 건 생각하지 말자는 결론을 내렸다.


책은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 읽어주는 이들이 있어야 비로소 책은 책으로서 빛난다. 11쪽

내가 읽음으로써 빛난 책들을 많이 경험했다. 그리고 내 책장에는 아직 빛을 못 내는 책과, 빛을 내고 있는 책, 그리고 빛을 내었지만 빛을 잃어가는 책, 그리고 오래도록 빛날 책들이 존재하고 있다. 그 책들을 보면서 수많은 생각이 들지만 언젠가는 모두 빛나게 해주겠다는 다짐을(스스로도 불가능 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곤 한다. 그래서 여전히 그게 빛인지 아닌지 존재조차 모르는 책들이 더 많을 것 같은 책방을 운영하고 있는 저자의 글을 읽으면서 적어도 이 순간에는 <굵어 죽지 않으면 다행인> 이 책을 빛나게 해주었다고 믿었다. 책방을 운영하면서 겪었던 일들과 그 안에 담긴 고민과 기쁨, 그리고 번뇌까지 무겁지 않고 솔직하고 때론 웃기게 담아 놓았다. 서슴없이 책방에 와 달라고 질척대고, 책을 사줘야 굶어 죽지 않는다고 징징대고, 책방의 다양한 프로그램까지 소화하는 모습을 보며 크기는 작을지 몰라도 스펙터클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음이 느껴졌다.

매일매일 같은 공간에 나와 자리를 지키고 책과 음료를 판매하는 일이 쉽지 않음을 알고 있다. 책방에 있으면 한가롭게 책을 많이 볼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소개하는 책들을 사람들이 막 사가지 않을까란 착각을 보란 듯이 일깨워 주는 글을 읽고 있으면 역시 독자와 사업자는 확실히 다름을 느꼈다. 어떨 때는 둘의 경계가 없다가도 음료 판매와 책 판매 매출을 고민하고 다행히도(?) 책 판매비용이 더 많다는 얘기를 듣고 나도 모르게 안심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행보가 계속 이어지길 진심으로 바랐다. 책을 사가는 사람이 꾸준하기를, 지금처럼 매력적인 책방이 계속 유지되기를 말이다.

책방이라는 매력에 끌려 읽게 되었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을 다른 사람도 좋아하게 만든다는 게 쉽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책을 읽은 ‘이후’에 달라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후책방’이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때론 추천한 책이 독자에게 어떻게 닿았을지 고민하는 부분에서는 책임의 영역을 능가한 다른 것을 보았다. 성심성의껏 추천했지만 한 권의 책이 각각의 독자에게 닿는 방법과 이유는 모두 다르기에 같을 수 없음을 나 또한 오래전에 깨달았다. 그래서 있는 자리에서 그저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는 것밖에 없다는 사실도 말이다. 꼭 책에서만 그럴까. 모든 순간을 그런 마음가짐으로 대한다면 좀 피곤할지 몰라도 적어도 삶의 생기는 잃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고 난 뒤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서점 위치를 찾아봤다. 작년까지 매달 다녔던 치과 근처인 것을 알고는 나도 모르게 안타까운 탄성이 나왔다. 좀 더 일찍 알았다면 분명 치과 가는 길에 들렀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직접적인 도움은 되지 않더라도 꿋꿋이 내 자리에서 책을 좋아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 것. 그것도 나만의 응원 방식이라 여기면서 아쉬움을 덜어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음이 급해졌어, 아름다운 것을 모두 보고 싶어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18년 7월
평점 :
절판


내가 아직도 미혼이었다면 하고 싶은 걸 맘껏 하면서 살고 있을까? 결혼한 뒤로 그런 상상을 정말 쉴 새 없이 해봤지만 늘 답은 똑 부러지게 나오지 않는다. 그건 어디까지나 가정 하에 할 수 있는 상상의 한계였기에 그야 말로 ‘만약에’로 끝나버린다. 여행도 좋아하지 않고, 혼자서는 멀리 가본적도 없으면서 저자가 패키지 투어로 다녀온 곳들을 보면서 놀랐다. 41살부터 48살까지 북유럽 오로라 여행(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크리스마스 마켓 여행(독일), 몽생미셸 여행(프랑스), 리우 카니발 여행(브라질), 핑시 풍등제(타이완) 여행을 다녀 온 기록을 읽으면서 글로 표현되지 못한 더 아름답고 멋진 것들을 보고 왔다는 사실이 느껴졌다.


 

저자의 여행 동선을 따라가면서 나름대로 나만의 경로를 짜보기도 했다. 오로라 여행은 그대로 따라가고, 프랑스는 남부로, 브라질 대신 파타고니아로 가겠다며 혼자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저자가 브라질 여행을 하면서 패키지 투어 덕에 여자 혼자서도 이렇게 다닐 수 있다며 안심하는 모습에서, 어쩌면 여행을 하기도 전에 걱정이 더 많아 시도조차 해보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무엇이든 처음 한 번이 어렵지, 그 다음에는 좀 더 용기고 자신감이 생기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아무리 경험해도 그렇게 되지 않은 것들이 있기 마련이지만 여행은 쌓이면 쌓일수록 더 즐겁고 느긋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선언을 했기에(그렇다고 여행을 아예 안 가겠단 뜻은 아니지만), 저자의 기록을 읽으면서 간접체험하고 상상해보고 느껴보는 것이 좋았다. 여행지가 어디쯤인지 지도를 보고, 그곳에서 본 풍경과 맛있는 음식들, 기념품들을 꼼꼼히 보다 보면 마치 내가 과거에 그곳을 여행한 착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러다 타이완의 지우펀 사진을 보고 낯이 익어 기억을 더듬어 보니 올 초에 타이완에서 교환학생을 마치고 온 조카가 준 엽서가 생각났다. 내가 지브리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고 사다주었는데 정작 나는 받아놓고도 잊어 먹고 있었다. 그러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무대가 되었다고 하자 그제야 생각이 났다(지브리 스튜디오 홈페이지에는 지우펀이 무대가 되었다고 확실히 언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책장 앞에 세워져 있는 엽서와 책에 실린 사진을 나란히 비교해보니 기분이 묘해져서 웃음이 나고 말았다.

 

아무래도 저자가 2011년~2017년 사이에 여행한 기록이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 기간에 난 무얼 하고 있었는지를 떠올려 보니 더 그런 기분이 들었나보다. 결혼을 하고 육아만 하던 시기라 나에 대한 기억이 없는 시기에 여행한 저자의 글이라 훌쩍 떠나고 싶기도 했다. 가족과 나의 자잘한 걱정과 근심은 덜어놓고 훌쩍 다녀올 수 있는 여행. 상상만 해도 마음이 편하지 않아서 출발도 못할 것 같지만 만약 미혼이었다면 한번쯤 미친 척 하고 실행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패키지 투어라는 안전하고 편리한 장치가 있으니 혼자라는 두려움을 떨치고 말이다. 저자 또한 혼자 여행하면서 전혀 주눅 들지 않고 ‘나는 나의 한 번뿐인 인생에서 아름다운 것을 만나러 온 것이다.(85쪽)’라고 했으니 못할 것도 없다 싶었다.

 

세계 곳곳의 아름다운 것을 보고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는 것. 많은 사람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소망이기도하고 나 역시 그런 바람이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당장 그럴 수 없기에 그런 소망은 더 소중하고, 타인의 여행을 질투로 바라보지 않고 언젠가 떠날 나의 여행으로 대입해보는 것. 그것이 여행을 행복하게 기다리는 방법이 아닐까? 거기다 내 주변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시야를 가진다면 더할 나위 없는 일상의 여행이 될 것이다. 오래전부터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세트 - 전3권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희숙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도스토옙스키를 사랑한다. 하지만 사랑하는 이유를 그럴싸하게 표현할 재간은 없다. 고등학교 때 읽은『죄와 벌』이 너무 어려워 치를 떨었음에도 20대에 우연히 다시 읽고는 반하고 말았다. 이렇게 내가 좋아하는 작가임에도 주변에 그의 작품들을 선뜻 추천할 수 없었다. 작품 속에 녹아 있는 장황스럽고 세세한 묘사들이 좋으면서도 때론 고리타분하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저자의 매력을 알게 되면 계속 읽게 되지만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 이런 고리타분한 분위기를 견딜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그러다 문학동네의『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고 기존의 번역과 너무 달라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이 책을 읽기 전 하퍼 리의『앵무새 죽이기』를 21년 만에 읽었다. 출판사가 바뀌면서 같은 책을 다시 번역한 김욱동 님은 "평소 모든 번역은 줄잡아 10년 단위로 새롭게 번역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고 했다. 더불어 "이 작품을 거의 새로 번역하다시피 했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새로 벽지를 바르고 장판을 간 것이 아니라 서까래를 갈고 벽을 허무는 등 집 자체를 새롭게 뜯어고쳤다."라고 했다. 나는『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원문을 살펴볼 정도의 능력도 없고, 비교해도 정확한 분석을 할 재량도 없다. 하지만 독자의 입장에서 분명 새로운 번역이 달랐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19세기 러시아 소설임에도 현대소설로 읽힌다는 점이었다. 아무래도 현재 우리가 쓰는 용어와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니 더 그렇게 느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고리타분함이 사라진, 요즘 소설로 읽히는 듯한 착각이 드는 것이 굉장히 신선했다.

그럼에도 이 방대한 소설은 내 안에 얽히고설켜 붕붕 떠 있기도 하고, 내면 깊숙이 들어와 있기도 했다. 여전히 내면을 통과해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한, 소설의 수많은 장면이 수시로 불쑥 올라와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당황하게 만들 때도 있다. 굵은 줄거리는 가장인 표도르 카라마조프의 죽음, 즉 친부살해로 이어지지만 그전에 카라마조프가의 아들들( 드미트리, 이반, 알렉세이 그리고 한 번도 아들로 인정받지 못한 스메르쟈코프까지)에 대한 섬세한 내면 묘사와 변화의 소용돌이에서 가장의 죽음이 잊힐 때도 있었다. 누가 아버지를 죽였는가에 초점이 맞춰 있지만 결국 진실은 만인에게 드러나지 못한 채 죄가 없는 큰 아들 드미트리가 20년의 형을 선고받고 시베리아로 떠난다. 이송 중에 그를 탈출시키자는 계획을 세우기도 하지만 과연 그렇게 탈출을 시킨다고 해서 그의 억울함이 풀릴는지, 진정한 갱생과 구원이 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그의 무죄를 증명할 수 없는 이반의 혼수상태가, 호소 짙은 담당 변호사의 변호가, 사랑했고 사랑하는 여인들과 오해가 풀리는 과정들이 그저 모두 안타깝고 힘만 빠졌다.

표도르 카라마조프는 결코 아버지다운 모습을 보여주지도, 오히려 인간의 추악한 면을 거침없이 드러낸 인물로 구제할 길이 없어 보이지만 그것이 살해의 정당함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가 죽음에 이르고 드미트리가 형을 선고받는 순간까지 쉴 새 없이 올라오는 의문들에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과연 아버지를 누가 죽였는가, 행위는 스메르쟈코프가 했지만 아버지를 죽인 살인죄를 그에게만 물릴 수 있는가, 드미트리의 억울함은 누구라도 될 수 있지 않는가 하는 물음들이 끝없이 이어져, 모든 진실을 알고 있음에도 독자인 나도 아버지의 죽음에 가담한 것 같은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한 번도 아들로 인정받지 못한 스메르쟈코프를 살인자로 설정한 것에 이미 우리는 가해자에서 벗어날 수 없는지도 모른다. 각기 다른 성정을 타고난 세 아들들은 아버지의 면모에 괴로워하지만 결국은 그들의 몸에 아버지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각기 다른 형태로 아버지의 닮고 싶지 않은 면모가 갈등으로 드러나고 있음을 뼈저리게 알게 되기도 한다.

저자는 신앙, 사랑, 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등 한 가지 주제도 섣불리 다룰 수 없는 방대함을 세 아들에게 투영시킨다. 그들의 생각을 듣고 있으면 모두 맞는 말 같아 때론 마음이 동하기도 한다. 알료사의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순수함과 신을 향한 믿음, 드미트리의 예측할 수 없는 열정과 삶의 추구가 만들어내는 때론 삐뚤어진 내적 갈등, 이반의 선善과 신에 대한 부정과 불합리함이 드러날 때가 그랬다. 특히 이반을 그런 내면을 잘 드러내는 5편의 「반역」「대심문관」부분은 이 소설이 소小우주를 담고 있다고 느낄 정도로 심오하고 심오하다. 세 형제(혹은 네 형제)가 아버지의 죽음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동시에 삶을 탐미하고, 욕망과 충동, 양심에 각기 다른 형태로 드러나는 모습은 결코 독자를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 시간, 공간적 배경은 다르지만 그들의 삶의 모습에서 현재 우리가 안고 있는 고민과 갈등은 농밀하게 닮아있다. 때론 인물들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과 사상, 삶의 편린들이 이렇게 다른가란 벽에 맞닥트리기도 하지만 그것이 인간군상임을 통절하게 느끼는 순간이 되기도 한다.

좋은 어떤 추억만큼, 특히 아직 어린 시절 부모님 슬하에 살면서 갖게 된 추억만큼, 앞으로의 생활을 위해 숭고하고 강하고 유익한 것은 없다는 걸 꼭 알아두십시오. (…) 그런 추억을 많이 가지고 삶 속으로 들어선다면, 그 사람은 평생토록 구원받은 셈이랍니다. 3권 520~521쪽


드미트리의 유형 확정으로 소설이 끝나버렸다면 허무함과 쓸쓸함, 답답함이 가득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일류샤의 장례식에 참석한 그의 친구들과 알료샤, 추억이 남아 있는 그의 집 근처 바위 옆에서의 조사가 딱딱하게 굳어 버린 마음을 풀어주었다.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 마음 속 깊이 추억하고 간직한다는 것은 위대한 일이라 여겨진다. 처음엔 악연으로 만났던 아이들이지만 모두 하나 되어 일류사를 추억하고, 알료샤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모습에서 그 아이들이 진정으로 ‘추억을 많이 가지고’ ‘평생토록 구원’ 받기를 바랐다. ‘구원’의 의미는 각자 다를 것이고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조건이 붙기보다 구원의 요소가 풍부한 사회가 뒷받침 되어 주었으면 싶었다. 스스로 구원할 수 없다면 도움을 받는 것도 방법이라 생각한다. 알료샤가 조시마 장로에게 그러했듯, 이 아이들이 알료사에게 그러했듯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도움의 손길도, 도움을 줄 방법도 많을지도 모른다. 이 소설로 인해 우리가 현재 추구하고 있는 ‘구원’은 무엇인지, ‘구원’이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가 되고 있는지, 어쩌면 평생 찾아야 하고 찾아야 할 질문에 조금 다가간 기분이 든다면 너무 억지일까? 부디 그들의 앞날에, 또한 우리의 미래에 평안한 ‘구원’이 있길 진심으로 바래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피그보이 미래인 청소년 걸작선 28
비키 그랜트 지음, 이도영 그림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1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학교 다닐 때 이름은 평범해서 놀림감이 되진 않았지만 외모로 붙여진 별명은 꽤 있었다. 지금은 절대 이마를 까고 다니지 않지만 중학교 때는 왜 그랬는지 앞머리를 내릴 생각을 못했다. 내 이마는 꽤 넓은 편이었는데 그래서 친구들이 붙여준 이름이 황비홍이었다. 한참 황비홍이 유행하던 시기이기도 했고, 나도 그 시리즈를 모두 봤지만 사춘기 여자아이에게 붙여준 별명치고는 고약했다. 처음에는 놀리는 아이를 응징하고 다니다, 나중에는 포기하고 될 대로 되란 식이었다.

이 책 속의 주인공 댄 호그는 나보다 좀, 아니 많이 심하게 놀림을 받았다. 돼지(hog)를 뜻하는 이름이 들어갔으니 얼마나 친구들의 놀림감이 되었을까? 거기다 몸도 비쩍 말랐고, 머리모양도 튀고, 두꺼운 안경까지 썼으니, 안타깝게도 ‘왕따’를 당할 요소가 너무 많았다. 특히 등치가 큰 셰인은 지독하게 댄을 놀려댔는데, 툭하면 아이들 앞에서 망신을 줘서 학교에서 돼지가 있는 농장으로 견학을 간다고 했을 때도 오히려 댄 호그가 더 주인공이 될 정도였다.

담임선생님이 아파서 일일 선생님이 아이들을 인솔하고 농장으로 견학을 가는 날. 버스 안에서부터 댄은 셰인에게 또 괴롭힘을 당하고 코피까지 흘린다. 크리저 선생님은 일일 선생님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을 자신에게 집중시키는 능력을 보이면서 댄 호그를 보호해주지만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선생님의 보호를 받기란 불가능했다. 그렇게 농장체험을 하면서 어떻게 하면 셰인을 피해 괴롭힘을 덜 당할지 고민하는 사이 아이들을 안내하기로 한 농부아저씨를 만나긴 하는데 점점 이상한 분위기를 뿜어내기 시작한다.

조금만 관심을 기울였다면 농장을 소개해주는 아저씨가 이상하다는 낌새를 알아챘을 것이다. 문신이 가득하고, 상스런 말을 내 뱉고, 눈빛도 험악한 아저씨를 크리저 선생님이 이상하게 여겨 밖에서 이야기하자고 나갔지만 선생님이 아프다는 말만 들려오고 아이들은 꼼짝없이 그 아저씨의 인솔 아래 움직이게 된다. 만약 댄 호그가 알러지 때문에 재채기를 하지 않았더라면, 휴지를 가지러 밖으로 나갈 수 없었더라면 모두 끔찍한 사고를 당했을지도 모른다. 휴지를 가지러 간다고 허락을 받았지만 알러지 약을 먹어야 멈춘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버스로 몰래 간다. 그리고 거기서 손이 묶인 채로 피습을 당한 버스기사 아저씨와 크리저 선생님을 발견하다. 그리고 댄 호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다시 견학장소로 돌아간다.

급기야 아이들이 모두 갇히게 되고 혼자 몰래 빠져나온 댄 호그는 그 남자가 끔찍한 일을 저지를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댄 호그는 모두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이 자신뿐이라는 것과 이런 상황에 멘붕이 온다. 늘 왕따를 당하고, 아이들에게 놀림감이 되었던 댄 호그가 그런 위기를 해쳐 나가는 건 영특해서라기보다는 본능적으로, 눈앞에 놓인 문제를 하나씩 해쳐 나간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절대 침착하지 못했지만 되돌아보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고, 자신이 할 수 일을 해나갔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절대 도움을 청하고 싶지 않았던 셰인에게 말을 걸면서 문제를 해결하고, 결국 나중에는 둘(댄 호그, 셰인) 다 ‘댄 호그’를 싫어하지 않게 된다.


최악의 농장 체험이 될 뻔 했던 상황에서 영웅이 되어버린 댄 호그를 보면서 때론 자신의 약점이 장점이 될 수도 있고, 위기가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러기까지 많은 인내와 용기, 긍정적인 사고가 뒤따라야 하지만 그렇게 버티고 버텨 준 댄 호그가 대견해 보였다. 자신이 쓸모없다고,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사춘기 때 나도 그런 생각에 꽤 오랫동안 묻혀 있기도 했는데, 그때는 정말 몰랐다. 내 존재가 꼭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어야만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냥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다. 그래서 지금의 나도 하루하루 존재하며 살아가고 있다. 언젠가 댄 호그처럼 위기가 기회가 되는 순간이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꼭 이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살아간다는 것은 그 자체로 위대한 일이라고 여기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련님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2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이 책을 킥킥대며 읽을 줄 몰랐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땐 주인공의 삐딱함이 눈에 거슬려 조금 읽다 덮어버렸다. 책 제목을 보며 나름대로 고상한『도련님』을 상상했다가 내면에 온통 불만과 삐딱함으로 채워진 주인공의 이야기를 굳이 들어야하나 싶었다. 그렇게 책이 묻히나 싶었는데『강상중과 함께 읽는 나쓰메 소세키』를 읽고 완전히 시선이 바뀌어 버렸다. 그 시선이 유지되나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에 이 책을 꺼내 들었는데 정말 단숨에, 그것도 너무 재미있게 읽어버려 스스로에게 놀랄 정도다.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형과 둘이 남겨진 주인공은 형이 재산을 처분하고 남겨준 약간의 돈으로 딱히 할 게 없어 공부를 한다. 그리고 중학교 선생님이 되어 도쿄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첫 부임을 하게 되고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그린 내용이다. 어렸을 때부터 자신을 키우다시피 한 기요라는 하녀만이 유일한 자기편이었지만 멀리 부임한 까닭에 그런 기요와도 떨어져 지내게 된다. 단지 그거 하나만 아쉬울 뿐, 도쿄를 떠나는 것도 먼 타지에서 아이들을 가르쳐야 하는 것도 주인공에겐 그냥 될 대로 되란 식이었다. 앞 뒤 가리지 않는 성격 때문에 늘 손해만 보고 살아왔다 생각하고 있기에 그곳에서의 생활이 평탄하지 않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그야말로 다사다난함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용으로만 보자면 유머가 숨어 있을 곳이 없었다. 그럼에도 킥킥댈 수밖에 없었던 부분들은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고 속으로만 품고 있는 불평불만과 삐딱함과 생뚱맞은 진지함이었다. 보이고 느끼는 대로 사람에게 무조건 별명을 지어주고 곧 모든 걸 때려치울 정도로 내면에서는 무덤덤함이 묻어나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은 소심하게 여겨질 정도로 빈약할 때도 있었다. 무모하게 저지르고 보는 성향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외소한 자신의 체격과 이러저러한 상황들을 보며 덤비는 걸로 보아 전혀 생각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단지 내면에 들끓는 힘을 주체하지 못하는 젊은 혈기로 보이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 나이와 다르게 느껴지겠지만 23살에 자신보다 덩치 큰 중학생들을 가르쳐야 했던 주인공의 내면의 갈등과 지난함이 어느 정도 이해되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도 교육에 대한 진중한 고민보다는 태어날 때부터 가진 기질과 그곳에서 만난 선생님들 때문에 더 혼란스러워했다. 멋대로 별명을 붙여서 부르는 선생님들은 모두 그의 시선에선 비정상이었고, 그들의 이중성을 알게 되면서 경악하기도 하고 측은하게 생각하기도 하면서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철저하게 혼자만의 생활을 하려해도 이런저런 모함에 휩쓸리기도 하고 자신과 다른 선생을 괴롭히며 얍삽하게 구는 교감의 뒤를 캐기도 한다. 나름대로 복수를 했다 생각하고 미련 없이 사직서를 던지고 도쿄로 향하는 그를 보면서 마치 타인의 꿈속을 헤맨 것 같았다.

처음부터 정착해야겠단 생각으로 간 것도 아니고 늘 여의치 않으면 도쿄로, 기요에게 가기로 마음속에 정해놓아서인지 그곳의 이야기가 더욱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주인공 자신이 생각하는 스스로의 모습과 타인의 시선이 대조적이라(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양면성으로 주인공에만 해당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모습이 진짜 자신의 모습인지 혼란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도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고 부정할 수 없듯이 그의 시선에 보인 타인도, 타인의 시선에서 보인 그의 모습도 다 그를 그답게 만들어주는 요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곳을 떠났을 땐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가는 시작이라 생각했기에 나 역시 주인공처럼 아쉬움이 남진 않았다. 오히려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갇힌 느낌이 들 정도로 주인공도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돌아오기 위해 여행한다는 어느 작가의 말처럼 주인공은 좀 특이한 여행은 한 건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