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세트 - 전3권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희숙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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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도스토옙스키를 사랑한다. 하지만 사랑하는 이유를 그럴싸하게 표현할 재간은 없다. 고등학교 때 읽은『죄와 벌』이 너무 어려워 치를 떨었음에도 20대에 우연히 다시 읽고는 반하고 말았다. 이렇게 내가 좋아하는 작가임에도 주변에 그의 작품들을 선뜻 추천할 수 없었다. 작품 속에 녹아 있는 장황스럽고 세세한 묘사들이 좋으면서도 때론 고리타분하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저자의 매력을 알게 되면 계속 읽게 되지만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 이런 고리타분한 분위기를 견딜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그러다 문학동네의『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고 기존의 번역과 너무 달라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이 책을 읽기 전 하퍼 리의『앵무새 죽이기』를 21년 만에 읽었다. 출판사가 바뀌면서 같은 책을 다시 번역한 김욱동 님은 "평소 모든 번역은 줄잡아 10년 단위로 새롭게 번역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고 했다. 더불어 "이 작품을 거의 새로 번역하다시피 했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새로 벽지를 바르고 장판을 간 것이 아니라 서까래를 갈고 벽을 허무는 등 집 자체를 새롭게 뜯어고쳤다."라고 했다. 나는『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원문을 살펴볼 정도의 능력도 없고, 비교해도 정확한 분석을 할 재량도 없다. 하지만 독자의 입장에서 분명 새로운 번역이 달랐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19세기 러시아 소설임에도 현대소설로 읽힌다는 점이었다. 아무래도 현재 우리가 쓰는 용어와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니 더 그렇게 느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고리타분함이 사라진, 요즘 소설로 읽히는 듯한 착각이 드는 것이 굉장히 신선했다.

그럼에도 이 방대한 소설은 내 안에 얽히고설켜 붕붕 떠 있기도 하고, 내면 깊숙이 들어와 있기도 했다. 여전히 내면을 통과해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한, 소설의 수많은 장면이 수시로 불쑥 올라와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당황하게 만들 때도 있다. 굵은 줄거리는 가장인 표도르 카라마조프의 죽음, 즉 친부살해로 이어지지만 그전에 카라마조프가의 아들들( 드미트리, 이반, 알렉세이 그리고 한 번도 아들로 인정받지 못한 스메르쟈코프까지)에 대한 섬세한 내면 묘사와 변화의 소용돌이에서 가장의 죽음이 잊힐 때도 있었다. 누가 아버지를 죽였는가에 초점이 맞춰 있지만 결국 진실은 만인에게 드러나지 못한 채 죄가 없는 큰 아들 드미트리가 20년의 형을 선고받고 시베리아로 떠난다. 이송 중에 그를 탈출시키자는 계획을 세우기도 하지만 과연 그렇게 탈출을 시킨다고 해서 그의 억울함이 풀릴는지, 진정한 갱생과 구원이 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그의 무죄를 증명할 수 없는 이반의 혼수상태가, 호소 짙은 담당 변호사의 변호가, 사랑했고 사랑하는 여인들과 오해가 풀리는 과정들이 그저 모두 안타깝고 힘만 빠졌다.

표도르 카라마조프는 결코 아버지다운 모습을 보여주지도, 오히려 인간의 추악한 면을 거침없이 드러낸 인물로 구제할 길이 없어 보이지만 그것이 살해의 정당함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가 죽음에 이르고 드미트리가 형을 선고받는 순간까지 쉴 새 없이 올라오는 의문들에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과연 아버지를 누가 죽였는가, 행위는 스메르쟈코프가 했지만 아버지를 죽인 살인죄를 그에게만 물릴 수 있는가, 드미트리의 억울함은 누구라도 될 수 있지 않는가 하는 물음들이 끝없이 이어져, 모든 진실을 알고 있음에도 독자인 나도 아버지의 죽음에 가담한 것 같은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한 번도 아들로 인정받지 못한 스메르쟈코프를 살인자로 설정한 것에 이미 우리는 가해자에서 벗어날 수 없는지도 모른다. 각기 다른 성정을 타고난 세 아들들은 아버지의 면모에 괴로워하지만 결국은 그들의 몸에 아버지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각기 다른 형태로 아버지의 닮고 싶지 않은 면모가 갈등으로 드러나고 있음을 뼈저리게 알게 되기도 한다.

저자는 신앙, 사랑, 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등 한 가지 주제도 섣불리 다룰 수 없는 방대함을 세 아들에게 투영시킨다. 그들의 생각을 듣고 있으면 모두 맞는 말 같아 때론 마음이 동하기도 한다. 알료사의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순수함과 신을 향한 믿음, 드미트리의 예측할 수 없는 열정과 삶의 추구가 만들어내는 때론 삐뚤어진 내적 갈등, 이반의 선善과 신에 대한 부정과 불합리함이 드러날 때가 그랬다. 특히 이반을 그런 내면을 잘 드러내는 5편의 「반역」「대심문관」부분은 이 소설이 소小우주를 담고 있다고 느낄 정도로 심오하고 심오하다. 세 형제(혹은 네 형제)가 아버지의 죽음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동시에 삶을 탐미하고, 욕망과 충동, 양심에 각기 다른 형태로 드러나는 모습은 결코 독자를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 시간, 공간적 배경은 다르지만 그들의 삶의 모습에서 현재 우리가 안고 있는 고민과 갈등은 농밀하게 닮아있다. 때론 인물들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과 사상, 삶의 편린들이 이렇게 다른가란 벽에 맞닥트리기도 하지만 그것이 인간군상임을 통절하게 느끼는 순간이 되기도 한다.

좋은 어떤 추억만큼, 특히 아직 어린 시절 부모님 슬하에 살면서 갖게 된 추억만큼, 앞으로의 생활을 위해 숭고하고 강하고 유익한 것은 없다는 걸 꼭 알아두십시오. (…) 그런 추억을 많이 가지고 삶 속으로 들어선다면, 그 사람은 평생토록 구원받은 셈이랍니다. 3권 520~521쪽


드미트리의 유형 확정으로 소설이 끝나버렸다면 허무함과 쓸쓸함, 답답함이 가득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일류샤의 장례식에 참석한 그의 친구들과 알료샤, 추억이 남아 있는 그의 집 근처 바위 옆에서의 조사가 딱딱하게 굳어 버린 마음을 풀어주었다.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 마음 속 깊이 추억하고 간직한다는 것은 위대한 일이라 여겨진다. 처음엔 악연으로 만났던 아이들이지만 모두 하나 되어 일류사를 추억하고, 알료샤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모습에서 그 아이들이 진정으로 ‘추억을 많이 가지고’ ‘평생토록 구원’ 받기를 바랐다. ‘구원’의 의미는 각자 다를 것이고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조건이 붙기보다 구원의 요소가 풍부한 사회가 뒷받침 되어 주었으면 싶었다. 스스로 구원할 수 없다면 도움을 받는 것도 방법이라 생각한다. 알료샤가 조시마 장로에게 그러했듯, 이 아이들이 알료사에게 그러했듯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도움의 손길도, 도움을 줄 방법도 많을지도 모른다. 이 소설로 인해 우리가 현재 추구하고 있는 ‘구원’은 무엇인지, ‘구원’이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가 되고 있는지, 어쩌면 평생 찾아야 하고 찾아야 할 질문에 조금 다가간 기분이 든다면 너무 억지일까? 부디 그들의 앞날에, 또한 우리의 미래에 평안한 ‘구원’이 있길 진심으로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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