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콘서트 1 - 노자의 <도덕경>에서 마르크스의 <자본론>까지 위대한 사상가 10인과 함께하는 철학의 대향연 철학 콘서트 1
황광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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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르는 문학이다.

정말 국내 문학 뿐만 아니라 세계의 문학은 차고도 넘쳐서 읽어도 읽어도 끝이 없고 읽고 싶은 책은 어느새 한가득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요즘 고전에 관심을 두면서 자연스레 고전문학을 많이 접하게 되었는데 고전을 접하면서 자연스레 만나게 되는 장르가 철학이 아닌가 싶다.

반면 문학만 주류가 되다 보니 확실히 한계가 느껴졌다.

한곳에서만 머물러 있다라는 생각....

문학속에서 안주하고 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문외한인 인문학과 철학에 관심이 갔는데(가네시로 가즈키의 작품속 인물 박순신으로 인해 철학에는 더더욱 흥미가 생겼다.)책은 몇권 구입했지만 언어의 유희에 빠져 도저히 읽을 엄두가 안났다. 읽고 싶다라는 욕구만 강하다고 해서 읽어지는게 책이 아닌 이상 어쩔줄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철학 콘서트를 만났다. 정말 이 책이 한줄기의 빛이 되어 다가오는 것 같았다. 책장 속에서 잠자고 있는 철학책들을 들춰 볼 수 있을 것 같다라는 막연한 희망이 생겼다.

 

평소에는 깊이 파고들, 아니 겉핥기도 안될 쟁쟁한 사상가 10인들이 책의 주역이였다. 저자는 고전여행의 안내자 그리고 철학을 이해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라는 말과 함께 친절하게 읽을 순서까지 알려준다.

어려울거라는 강박관념속에 겁을 먹긴 먹었나 보다. 책의 순서가 뒤죽 박죽이 될 것을 알면서도 저자가 알려준 순서대로 읽었다.

10인의 사상가를 한 번에 이해할 수도 없는데 저자는 위로까지 던져주며 소크라테스와 예수, 모어와 스미스 그리고 여력이 있으면 석가와 공자, 퇴계와 노자를 읽으라고 한다. 플라톤과 마르크스는 어려울 것이라며....(걱정마시라. 10인중에서 이름만 들어도 짓눌리는게 플라톤과 마르크스니...)

출발은 좋았다. 소크라테스와 예수님은 저자의 언어의 농락에 빠져 정말 나조차 놀랄 정도로 재미나게 읽었다.

그러나 문제는 서서히 드러났다.

모어와 스미스도 그럭 저럭 읽어지면서 알쏭 달쏭 해지더니 석가와 공자는 완전 무의식의 세계였고 퇴계와 노자에 이르러서는 조금씩 망각이 짙어져 갔고 플라톤과 마르크스는 저자의 염려처럼 압권이였다.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내가 지금 무얼 읽고 있나 라는  생각과 함께 마르크스를?

'오호~~ 역시 내게 어울리지 않아' 라는 잡념들과 함께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런 나와는 다르게 저자는 10인의 사상속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유희를 만끽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이런 사람에 이런 사상을 지니고 설파했었다라는 초반의 묘미와는 다르게 읽으면 읽을수록 저자의 유희 속에서 나는 분리되고 있었다. 분명 한사람에게 할애되는 페이지는 많은 양이 아님에도 한번의 읽힘으로 그들이 평생 지켜온 뜻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건 역시 무리다.

그러면서 '그들의 원작을 읽으면 어떨까' 하는 까마득한 생각이 들다가도 뿌듯한 마음이 드는 건 사실이였다.

너무나 멀게 느껴졌던 철학을 이렇게 나마 길을 열었다는 생각과 끝까지 나름대로 성의를 다해 읽었다라는 그 사실하나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그들처럼 깊은 사색에 빠질수는 없었지만 기억 저편에 존재하던 것들을 조금은 끌어당긴 느낌이였다. 이보다는 더 쉽게 이들을 알릴 수 없었을 거라는 생각과 함께 저자의 편안함에 기댄채 나름 즐거운 시간이였다.

속시원하게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이 그득하지만 길을 터준듯한 느낌, 자꾸 벽을 두드리게 해주었던 느낌들은 선명하다.

이런 겉핥기 밖에 얘기할 순 없지만 그들에게 그리고 고전, 철학이라는 장르에 조금은 마음을 열고 다가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가슴 벅차는 시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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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4
헤르만 헤세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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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시절, 아니 어쩜 초등학교 때부터 읽어봐야지 읽어봐야지 했던 작품이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그리고 앙드레 지드의 '좁은문'이였다.

고 2때 소위 명작을 읽겠노라고 학교 도서관을 뻔질나게 들랄거릴때도 이상하게 데미안과 좁은문은 피해갔었다. 그래서 데미안과 좁은문 얘기만 나오면 주눅이 들고 '읽을거야!' 라고 신경질적인 반응까지 나오게 되었다.

그렇게 고대하고 나의 잠재의식 속에서 너무나 오랫동안 간직되고 짓눌렀던 데미안을 읽었을 때는 그러나 그렇게 속시원한 반응만은 아니였다.

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닐때만 해도 데미안이 필독서였는데(지금은 어떨까...) 만약 내가 중, 고등학교때 데미안을 읽었더라면 헤르만 헤세도 모호한 작가라고 치부해 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 읽었더라면 분명 어렵다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푸념만 잔뜩 늘어 놓았을 지도 모른다. 실은 지금도 푸념을 하고 싶다.

 

지금 읽어도 고뇌에 찬 싱클레어와 데미안의 세계에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는데 중,고등학교때 읽었다면 어땠을까....

같은 고뇌의 길을 가고 있던 10대라는 동질감이 그때 읽었더라면 어떤 반응으로 나타났을지 궁금해지기도 하지만 싱클레어는 분명 고뇌가 깊은 소년이였다.

김나지움에서의 방탕한 생활을 가끔 정지시켜 준 것은 유년시절의 데미안과의 추억이였다. 희미한 연결 고리나마 싱클레어가 잊지 않고 데미안과의 대화며 그들 둘만의 혼의 교류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였다. 얼핏 보기엔 그 둘의 관계가 동떨어진 느낌도 없진 않지만 그만큼 그들의 만남은 강렬했고 특별했다.

그런 연유로 싱클레어는 극을 달리고 있을때면 데미안과 만날 수 있었다. 추억 단 하나만으로. 그 속을 자유 자재로 드나들면서.

그런 만남속에서 데미안 앞으로 보낸 그림 한점의 답장이 싱클레어 책 속에 꽂힌다. 압락삭스라는 신의 이름으로.

그래서 싱클레어는 알에서 나오려 투쟁하는 새가 된다.

 

음악가 피스토리우스와의 만남, 그리고 다시 데미안과의 재회.

그런 과정의 끝에는 싱클레어가 남아 있었다.

내 것이기보다는 데이만이 더 가득 차있던 혹은 나 아닌 다른 것의 채움이였던 속에 진정한 자아인 자신을 들여다 보게 된다.

자신을 만나기 위해 자아성찰을 하기 위해 싱클레어는 고통스런 성장을 거쳤다. 비단 싱클레어 뿐만이 아닌 나를 포함한 모든 젊은이들 그리고 젊은 시절이 꿈 같이 흘러가버린 이들 속에 말이다.

그래서 처음 데미안이란 작품이 모호하고 고뇌적이라 푸념을 늘어 놓을때의 나의 걱정이 사라져 버렸다.

따분한 과정이든 진지한 과정이였든 분명 그들은 데미안 그리고 싱클레어를 만났을 테니까. 그게 어떤 식이였든 나는 알지 못한다.

나 또한 이제 그들과의 만남을 시작했고 그들을 아직 찾고 있는 중이니까. 그들을 찾지 않게 될때 그때가 언제인지 나도 불 분명 하지만 그때가 되면 이러 이러한 만남이였노라고 말해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알에서 머무를지 새가 되기 위해 투쟁을 하게 될지 그리고 그것들과 마주친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들을 찾아갈지 이젠 두려워 하거나 망설이지 않게 된다.

나 자신이든 다른 사람이든 각각의 분량은 자신이 가장 잘 알것이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렴풋이 짐작을 하고 있을 테니까.

그 가운데 나는 어떻게 일어서야 하는지 알아가고, 찾아가고, 즐기는게 관건이다.

 

데미안을 알고난 후 한참만에 책 제목이 사람의 이름이란걸 알게 되었을때의 그 낯설음을 기억하고 있다.

이제는 그 곳에 낯선 데미안이 아닌 익숙한 내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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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5 - 양장본 조정래 대하소설
조정래 지음 / 해냄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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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럽다. 그리고 억울하다.

그러나 그것들을 둘 곳이라곤 갇혀버린 내 마음 속 뿐이다.

이제 5권인데 12권까지 읽을 자신이 없다.

내가 알아야 하는 역사라고 해도 나는 그들처럼 마음속에 품고 살아갈 자신이 없다. 아니다. 이건 자만이다.

살아갈 자신이란 말은 내게 너무 거창하다.

나는 그들의 삶을 지켜 볼 인내조자 없다.

처음은 읽힘이였지만 단순한 읽힘이 아님을 알기에. 지금 내가 혼란스러워 하며 내 마음에 갇혀버린 분노를 꺼내지 못함을 인지하기에.

 

수많은 것들이 떠오르지만 나의 뇌리에 가장 강렬하게 박힌 이미지는 땅을 뺏기고 만주로 떠나는 농부들이다. 떠나는 그들이나 그들을 위로하는 이들이나 찐득 찐득한 서러움이 배어있기 때문이다.

농민들에게 땅이 얼마나 소중하던가.

땅을 소유하든 소작을 붙이든 그들의 가장 큰 갈망은 땅의 지속이다. 단순히 땅을 갖는다, 꾸린다는 자체가 아닌 땅은 그들의 삶이고 목숨이였다. 단순히 물질이 아닌 땅에 배속된 수많은 것들을 나는 뱉어낼 자신이 없다.

그런 땅을, 그리고 힘겹게나마 소작을 붙여오던 땅을 빼앗겨버렸다. 너무나 허망하게. 그리고 너무나 억울하게.

도저히 살아갈 구멍이라곤 한 뼘도 보이지 않는 고향을 등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상상하면 가슴에 불길이 솟구친다.

가지 말라고 잡을 수도 잘가라고 담담히 보내줄 수도 없는 또 다른 그들의 처지를 나는 견뎌낼 재간이 없다.

켜켜히 억울함이 쌓인다.

그러면서 그들의 미래를 조금이나마 형식적으로 알고 있는 내가 못 견디게 밉다. 어쩌자고 그들은 끈질기게 대항하는 것일까.

도대체 어쩌자고...

그러나 '어쩌자고' 라는 말 밖에 할 수 없는 나의 심정을 오히려 그들이 위로한다. 당연한 것일 뿐이라고....

나 하나 하나가 하나의 조선이니 조선은 결코 없어질 수 없다는 큰 포부를 남긴채 그들은 끊임없이 우리의 땅, 조선을 갈망한다.

 

외국에 대한 동경만 짙어지는 나 자신이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었다. 그렇게 조선을 지켜 주었는데... 그렇게 지킨 조선이 결국 미,쏘의 나눠 먹기에 일본으로부터 해방되었는데 나는 그들의 땅에 대한 한을 가지고 있지 않다.

조선이라는 땅에 대한 사랑이 그들이 농사 짓던 땅의 애정과 과연 비교가 될까. 같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더 한스러웠을 것이다.

그들의 피가 조선을 붉게 만들었다.

그들이 그렇게 조선을, 대한민국을 지켜 주었다.

그러나 온전히 이런 사람들만 있었다면 나의 분노는 끈끈한 동질감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이들과 정반대였던 사람들이 있었기에 수렁의 늪은 깊고도 질척했다.

가지고 싶기에 무조건 가져야 했던 그들의 욕망을 그들은 무작정 채웠다. 그런 시간이 영원할 줄 알았기에. 영원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허황된 말인지 자신들이 가장 잘 알았으면서도.....

 

늘 이렇듯 상반된 느낌은 책을 읽어감에 따라 더욱 뚜렷해진다.

그래서 책의 상세한 내용이 아닌, 흐름이 아닌, 나의 느낌들을 두서없이 서두 없이 펼쳐 놓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두리뭉실한 느낌들 속에서도 그들의 삶이 더욱 뚜렷하게 각인되는 건 왜일까. 그들이 그렇게 갈망하던 땅에서 나는 그다지 갈망하며 살지 않는대도 말이다.

그런 땅을 넘어서 그들의 혼을 물려 받아서가 아닐까....

뼛속에 사무쳐 있던 그들의 한이 피를 통해 내게 온 느낌이다.

그 잠재력이 깨어난 듯한 느낌.....

허황되든, 깊은 상상이든, 허상이든 믿고 싶어지는 전율의 편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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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과 그 형제들 4 - 이집트에서의 요셉 (하)
토마스 만 지음, 장지연 옮김 / 살림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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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달째 아니, 몇년째 읽고 있는 책인지 모르겠다.

작가의 집필기간에 나도 부응하기라도 하는 걸까.

6권짜리의 이 책을 나는 현재 횟수로 4년째 읽고 있다.

1년에 한권꼴.... 참으로 더딘 읽힘이 아닐 수 없다.

토마스 만은 준비기간까지 16년에 걸쳐서 완성을 했는데 나의 읽힘은 그 기간보다 짧길 바랄 뿐이다.

 

한권 한권 읽어 나가면서 토마스 만의 저력에 감탄을 하면서도 나의 더딘 읽힘, 그리고 책이 잘 읽혀지지 않을때의 멈춤은 참으로 난감하지 않을 수 없다.

몇달간 잡아오던 책을 1/3을 퇴근 후 집에 돌아와서 모두 읽어 버렸으니 나의 난감이 가끔은 이렇듯 당혹스럽다. 그러나 그런 당혹이 분명 책의 매력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예이기도 하다.

 

요셉과 그 형제들 4권은 노예로 팔려간 요셉이 포티파르의 집에서 여주인 무트-엠-에네트의 유혹을 이겨 내지만 그녀의 음모로 인해 또 다른 고난으로 빠진다는 내용이다.

줄거리는 무척 간단하다. 그러나 장황한 수다스러움(도스또예프스끼와 견줄 만 하다.)이 대단하다. 한 페이지라도 읽어 본다면 나의 발언이 과장되지 않음을 알 것이다. 어떤 독자는 ' 이 처럼 지루한 책은 처음이다' 라는 발언을 서슴치 않았는데 읽을날이 까마득할때 나 또한 동의할만한 솔직한 답변이다.

그러나 4권째에 이르다 보니 우리의 요셉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그의 언행의 특징이나 성격 그리고 책을 넘어 저자의 심중까지 고려한다면 충분히 매력에 빠질 수 있는 극과 극을 동시에 담고 있는 책이라는걸 서서히 깨달아 가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다음 이야기가 흥미로워 읽고 싶음에도 극적인 늪속에서 이번에는 얼마나 헤멜지 걱정도 되고 또 기나긴 여행이 끝나간다고 생각하니 시원섭섭 해서 다음권을 대하기가 여러모로 망설여진다.

이게 장편의 단점이다.

늘 익숙치 않다고 푸념을 하면서도 어느새 그 분위기에 적응하여 여행의 아쉬움이 다가오면 더욱더 더디어 지는 것.... 그래서 아껴 읽는다는 일념으로 언제고 질질끌다 혼자 허망해 하는 것!

그게 가장 큰 단점이 아닌가 싶다.

읽어 버렸다는 해방감이 더 클법도 한데 장편을 대하면 대할수록 이런 느낌은 더욱 더 짙어져 가니 단점으로 몰아가는 수 밖에 없다.

 

이제 남은 2권의 이야기는 요셉이 고난을 뚫고 이집트에 지대한 공로를 세운 뒤 가족들과의 재회를 다루고 있다. 부제목이 '먹여 살리는 자 요셉'이니 딱 어울리는 제목이 아닐 수 없다.

길고 긴 여행을 마칠날이 언제인지 나도 장담할 수 없다.

4권을 읽어 버렸다는 홀가분함도 금새 사라져 버리고 벌써부터 아쉬움이 달려 드는데 참으로 난감하다.

그래서 남은 책은 압박에 시달리지 않고 편안히 읽으려고 노력하되 만끽을 더 늘릴 심산이다.

벌써부터 아쉬움이 들어 아주 청승맞기 그지 없다.

남은 여행이 부디 즐겁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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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기담 - 근대 조선을 뒤흔든 살인 사건과 스캔들
전봉관 지음 / 살림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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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요즘 일본문학과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 책이 대세다.

일본문학은 비교적 많이 접했지만 요즘 쏟아져 나오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책은 조선선비 살해 사건 이후 이 책이 두번째다.

조선왕조 500년 답게 조선선비 살해 사건은 조선의 초반을 다룬 역사서라고 한다면 겨성기담은 일제시대의 조선 즉, 근대 조선의 일반적인 사건들과 스캔들을 다른 책이였다.

다소 대중적인 소재라서 편안히 읽을 수 있었지만 일제시대라는 억압과 고통의 산물들이 아닌 깨어나려는 조선, 깨어나지 않는 조선 사이의 혼란의 냄새가 짙었다. 그 중에서도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는 살인 사건과 스캔들을 다루다 보니 시시콜콜하게 난잡하다는 느낌도 동했던건 사실이이다.

 

특히 스캔들을 다룬 사건 속에서 그런 느낌을 더 강하게 받았는데 그 진위를 다루는 과정을 보니 돈과 사랑, 권력 등에 대한 갈망의 산물들이라 그다지 유쾌하지 못했다.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분명 차이가 났지만 과정 속의 진부함은 현재와 다를 바 없어 큰 흥미를 유발시켰던 것은 아니였다.

자극적인 것들로 넘쳐나는 현대에 살다보니 책에서 다룬 사건 사고들이 미미하게 느껴지고 자극에 단련이 되어 왠만한 것에는 끄덕도 않는다는 자만 아니 자만으로 여겨질지 모르나 자극성을 떠나 책의 전체적인 맥락을 볼때 겉핥기 식이라는 느낌도 지울 수 없었다.

근대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보자면 분명 놀랄만한 것들이였으나 현재 아리랑을 읽고 있어서인지(아리랑과 시대적 차이가 나지만..) 또 다른 이면을 보여 준다는 사실보다 너무나 상반된 삶의 양상에 적응이 안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건 사고들 속에서 발견 되는건 깊은 사생활이였기 때문이다. 역사의 흐름이라는 거창함까지는 아니더라도 사생활을 통해 그 안에서 드러나는 시대의 인식과 뻗어가느 변화를 엿볼 수 있었다. 또한 다양함을 담고 있어서인지 난잡하다는 느낌도 받았다. 그때의 분위기를 조금은 느낄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그로 인해서 일제 시대라는 숨막히는 상황속에서도 이러한 생경한 이야기들이 압박감을 덜어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책에서 그런 억압을 많이 다루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경성이라는 시대적 배경 보다 사건의 진위 속으로 더 열중했던 것 같다.

 

TV에서나 다룰법한 타임머신 속으로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다.

책으로 읽게 되어 진부함이 조금 아쉬웠긴 했으나 저자는 사건과 스캔들마다 조언을 남겼다. 분명 내게 와 닿아야 하는 조언이 있었음에도 스쳐버린건 왜일까... 너무나 뻔한 잔소리 같기도 했고 그들의 낱낱한 사생활에 걸려 조언을 들을 여유가 없었나 보다.

그리고 내게 아쉬운건 철저히 시대 속으로 들어가지 못한 것이였다.

책과 나는 따로 따로 겉돌았음으로 헛점만 보였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처음 출판계의 대세라는 말을 언급했을 때는 꼼꼼한 독자의 판단을 염려하는 부분도 없지 않다.

그런 꼼꼼함을 내세워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나에게 많은 것을 남겨주는 책들을 선택해 읽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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