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4
헤르만 헤세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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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시절, 아니 어쩜 초등학교 때부터 읽어봐야지 읽어봐야지 했던 작품이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그리고 앙드레 지드의 '좁은문'이였다.

고 2때 소위 명작을 읽겠노라고 학교 도서관을 뻔질나게 들랄거릴때도 이상하게 데미안과 좁은문은 피해갔었다. 그래서 데미안과 좁은문 얘기만 나오면 주눅이 들고 '읽을거야!' 라고 신경질적인 반응까지 나오게 되었다.

그렇게 고대하고 나의 잠재의식 속에서 너무나 오랫동안 간직되고 짓눌렀던 데미안을 읽었을 때는 그러나 그렇게 속시원한 반응만은 아니였다.

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닐때만 해도 데미안이 필독서였는데(지금은 어떨까...) 만약 내가 중, 고등학교때 데미안을 읽었더라면 헤르만 헤세도 모호한 작가라고 치부해 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 읽었더라면 분명 어렵다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푸념만 잔뜩 늘어 놓았을 지도 모른다. 실은 지금도 푸념을 하고 싶다.

 

지금 읽어도 고뇌에 찬 싱클레어와 데미안의 세계에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는데 중,고등학교때 읽었다면 어땠을까....

같은 고뇌의 길을 가고 있던 10대라는 동질감이 그때 읽었더라면 어떤 반응으로 나타났을지 궁금해지기도 하지만 싱클레어는 분명 고뇌가 깊은 소년이였다.

김나지움에서의 방탕한 생활을 가끔 정지시켜 준 것은 유년시절의 데미안과의 추억이였다. 희미한 연결 고리나마 싱클레어가 잊지 않고 데미안과의 대화며 그들 둘만의 혼의 교류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였다. 얼핏 보기엔 그 둘의 관계가 동떨어진 느낌도 없진 않지만 그만큼 그들의 만남은 강렬했고 특별했다.

그런 연유로 싱클레어는 극을 달리고 있을때면 데미안과 만날 수 있었다. 추억 단 하나만으로. 그 속을 자유 자재로 드나들면서.

그런 만남속에서 데미안 앞으로 보낸 그림 한점의 답장이 싱클레어 책 속에 꽂힌다. 압락삭스라는 신의 이름으로.

그래서 싱클레어는 알에서 나오려 투쟁하는 새가 된다.

 

음악가 피스토리우스와의 만남, 그리고 다시 데미안과의 재회.

그런 과정의 끝에는 싱클레어가 남아 있었다.

내 것이기보다는 데이만이 더 가득 차있던 혹은 나 아닌 다른 것의 채움이였던 속에 진정한 자아인 자신을 들여다 보게 된다.

자신을 만나기 위해 자아성찰을 하기 위해 싱클레어는 고통스런 성장을 거쳤다. 비단 싱클레어 뿐만이 아닌 나를 포함한 모든 젊은이들 그리고 젊은 시절이 꿈 같이 흘러가버린 이들 속에 말이다.

그래서 처음 데미안이란 작품이 모호하고 고뇌적이라 푸념을 늘어 놓을때의 나의 걱정이 사라져 버렸다.

따분한 과정이든 진지한 과정이였든 분명 그들은 데미안 그리고 싱클레어를 만났을 테니까. 그게 어떤 식이였든 나는 알지 못한다.

나 또한 이제 그들과의 만남을 시작했고 그들을 아직 찾고 있는 중이니까. 그들을 찾지 않게 될때 그때가 언제인지 나도 불 분명 하지만 그때가 되면 이러 이러한 만남이였노라고 말해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알에서 머무를지 새가 되기 위해 투쟁을 하게 될지 그리고 그것들과 마주친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들을 찾아갈지 이젠 두려워 하거나 망설이지 않게 된다.

나 자신이든 다른 사람이든 각각의 분량은 자신이 가장 잘 알것이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렴풋이 짐작을 하고 있을 테니까.

그 가운데 나는 어떻게 일어서야 하는지 알아가고, 찾아가고, 즐기는게 관건이다.

 

데미안을 알고난 후 한참만에 책 제목이 사람의 이름이란걸 알게 되었을때의 그 낯설음을 기억하고 있다.

이제는 그 곳에 낯선 데미안이 아닌 익숙한 내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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