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더 테레사 평전 - 삶, 사랑, 열정 그리고 정신세계
마리안네 잠머 지음, 나혜심 옮김, 이석규 감수 / 자유로운상상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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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데레사 하면 그녀의 삶이 이러했다는 인식보다, 장례식의 한 장면이 떠오르곤 한다. 벌써 12년 전의 일인데도, TV에서 보았던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 발 디딜 틈 없이 빽빽한 관중 속에서 조심스레 마더 데레사가 누워 있는 투명 관을 옮기던 일. 특히나 인도 사람들에게 마더 데레사는 소중한 존재일 수밖에 없는데, 장례식을 거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무척 경건했었던 기억이 난다. 더군다나 그녀의 얼굴에 드러난 평온함 때문에, 그녀를 잃었다는 슬픔이 지배적인 것이 아니라 지켜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마더 데레사의 평온함이 그대로 전달되었을 거란 기분이 들기도 했다.
 

  내가 이 책을 마주하게 된 이유는 마더 데레사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혀 없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유명한 인물일수록 아는 것이 많지 않다는 아이러니를 깨뜨리고 싶었고, 그녀가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알고 싶었다. 그녀의 정신세계까지는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과 헌신을 베풀고 간 모습을 더듬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책을 처음 마주한 순간 평전 치고는 좀 얇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런 내용으로 채워져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해 조금 당황스러웠다.

 

  책의 서문에 보면 '이제까지의 관행과는 달리 좀 더 확실한 사료적 근거에 기초해서 마더 데레사의 인생과 정신세계 그리고 업적을 서술하게 될 것이다.' 라고 쓰여 있다. 마더 데레사를 신화화하고 성인전적으로 단순화시키는 것에서 배제시키겠다고 했는데, 그것이 어떠한 의미인지 처음에는 잘 알지 못했다. 정확한 정보들만을 싣겠다는 의미인 것은 알았으나, 책의 흐름이 어떻게 흘러갈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는 얘기다. 평전이라는 것이 아무리 객관화 시킨다고 해도 주관적인 생각이 들어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저자가 서문에서 밝힌 뜻에 얼마만큼의 신뢰를 가졌는지 나도 자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판단을 하기도 전에 마더 데레사란 인물이 초점이 맞춰지지 않아 책을 읽는 내내 애를 먹어야 했다.

 

  책의 시작은 그녀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됐다. 그녀가 생전에 세워놓은 업적이나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달리 그녀의 어린 시절에 대해 알려진 것이 거의 없었다. 당연히 그녀의 출생이 인도라고 알고 있던 나는, 마케도니아의 스코페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부끄러울 뿐이었다. 세간에는 그녀의 성장과정과 몇몇 일화들이 잘못 전해지고 있었는데, 그런 점을 뒷받침하기에 적합한 정보가 너무 없었다. 세간에 알려진 것에 비해 비교적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전해지는 마더 데레사는, 성당에서 진보적인 예수회 신부 잠브레코빅을 만나면서 자연스레 선교사의 소명을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그녀가 수녀가 되어 콜카타로 내려가서 그 힘든 과정을 모두 이겨냈던 것도, 평생을 약자를 위해 봉사했던 것도 12살 무렵에 가졌던 소명 때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사랑의 공동체를 세계 곳곳에 세워 병든 자들, 여성, 아이들 등을 위해 봉사한 것은 그녀의 크나큰 업적 가운데 하나다. 업적을 따지기 전에 한 사람의 힘으로(물론 많은 사람들의 도움과 기부금이 밑바탕이 되었지만) 어렵고 힘든 사람을 돕는 공간을 많이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거기다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해서 그녀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봉사하고 있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그런 연유로 마더 데레사란 인물이 가진 영향력은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거나, 약자들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까지 미쳤으므로 그녀 존재는 너무나 많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마더 데레사는 언론에 나오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는데, 노벨상을 이용해서라도 어떻게 하면 가난한 자들에게 도움이 될까 그런 생각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만큼 마더 데레사는 하나님의 뜻을 실천한 인물에 가까웠고, 자신의 몸이 부서지도록 사랑과 열정을 바쳤다. 그런 마더 데레사를 전 세계에서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당연했다. 봉사를 위해, 다른 이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가난한 자들의 실체를 알리기 위해, 늘 바쁘게 세계 곳곳을 돌아 다녔다. 한 사람의 업적이 이렇게 많을까 싶을 정도로 많은 상을 받고, 더 열심히 봉사하며 가난한 자들을 돕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 그녀였다.

 

  하지만 마더 데레사의 삶을 좇아가며, 그녀의 흔적을 보았음에도 마더 데레사란 인물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서술의 방식 때문인지, 아니면 종교적인 느낌이 강하게 들어가서인지, 마더 데레사의 삶이 겉도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녀의 삶이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고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을 남기고 간 것은 알겠는데, 내가 알고 있던 기존의 마더 데레사란 인물에 무엇이 덧붙여졌는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생각했던 마더 데레사의 평전은 그녀의 삶의 진행 방향에 따라 주변의 것들과 함께 맞물리는 것이었는데, 이 책에서의 마더 데레사는 중점에서 빗겨가 요소에 포함된 느낌이었다. 제대로 정독하지 못한 나의 잘못이 있더라도, 진정한 마더 데레사를 만나기를 갈망했던 터라 책의 구성에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마더 데레사가 생존에 이뤄놓은 업적과 실천은, 그녀의 삶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나에게도 귀감이 되기에 충분했다. 종교적인 신념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쉽지 않기에, 그녀 자체만으로 벅찰 뿐이다. 이 책을 읽고도 내가 기억하는 것이 TV에서 본 장례식의 단편적인 모습일지라도, 그녀를 알아가고자 하는 열망은 아직 내게 남아 있다. 그녀의 삶을 내가 판단한다는 것은 여전히 벅찬 일이므로, 짧게나마 이런 인물과 동시대를 살았던 것에 대해 감사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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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 노트 - 사진과 삶에 관한 단상
필립 퍼키스 지음, 박태희 옮김 / 눈빛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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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을 선택하는 결정권은 대부분이 나의 주관적인 견해로 이뤄진다. 그 이외는 다른 경로로 선택된 책들인데, 그 가운데 가장 실천하기 힘든 경로는 타인의 추천인 것 같다. 읽어본 사람에게 추천을 받는 것이 내가 그러모은 정보로 책을 고르는 수고를 줄이는 지름길임에도, 나의 취향과 그 외의 자잘한 상황들에 대부분 묻혀버리고 만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꼭 읽어보고 싶은 책들이 있기 마련이다. 필립 퍼키스의 책이 그랬다. 사진은 문외한이라는 말을 꺼낼 수 없을 정도로 나의 관심에서 벗어난 분야인데도 이 책을 구입하게 된 계기는 이 책과 비슷한 책의 리뷰에 달린 댓글 때문이었다.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이란 책을 읽고 리뷰를 올렸는데, 어떤 분이 이 책도 한 번 읽어보라고 추천해 주셨다. 그렇게 추천을 해주어도 잊어버리기 일쑤인데 존 버거의 책이 너무 마음에 들어 언젠가는 꼭 읽어 보고 싶었다.
 

  그랬음에도 이 책이 내게 오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거기다 책을 구입한 지 반 년이 지나서야 읽게 되었으니, 한 권의 책이 내게 읽는 과정은 결코 간단하지 않음에 조금은 신기함마저 든다. 침대에서 뒹굴 거리다 새로 정리한 책배치 때문에 눈에 띄어 읽게 되었는데, 내가 기억하고 싶을 정도로 독특한 매력을 발산 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관심을 두지 않은 분야임에도 글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은 책의 겉모습만으로도 판단할 수 있나 보다. '사진 강의 노트'란 제목을 달고 있지만 부제목은 '사진과 삶에 관한 단상'이다. 그렇기에 사진에 문외한이고, 사진 찍기를 즐겨하지 않는 나에게도 어느 정도 읽힐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 짐작과 함께 책을 펼쳤음에도 나의 예상과 어느 정도 맞아 떨어졌음은 물론 기대를 넘어 내 마음에 쏙 드는 글로 채워져 있었다.

 

  저자는 머리말에 '사진을 가르쳐 온 지 어느덧 40년이 흘렀'고, '어쩐 입장을 옹호하거나 사진 개념과 기술을 완벽하게 설명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보다는 생각과 논쟁을 불러오는 발판을 제공할 것이다.'란 뜻을 밝히고 있는데, 그래서 내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사진의 개념을 설명해도 어차피 이해할 수 없을 것이고, 사진 찍는 법을 알려준다 하더라도 책을 찍을 때만 쓰는 디지털 카메라밖에 가지고 있는 나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저자가 40년 간 가르쳐 온 사진에서 삶의 단상을 지켜볼 수 있다면 흥미로운 소재라고 생각했다. 그런 나의 생각을 관철한 듯 사진과 삶이 엉켜들어 간 글은 나에게 신선한 자극이 되어 주었다. 사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히기도 하고, 사물을 바라보는 개념이나, 사진을 현상하는 자잘한 것들까지 사진과는 떼어놓을 수 없는 분위기가 연신 흘러나왔다. 사진을 가르쳐 오고, 비평한 가운데의 글 들을 모았다고는 하지만 예술에 대한 시각이라든가 타인의 명언들이 종종 실려 있어 나의 생각을 많이 틔워주었다. 저자는 예술과 예술 간의 통로를 자유자재로 오가고 있었으며, 그 사이사이에서 얼굴을 내밀어 독자에게 자신의 경험과 사고를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려운 글이라고, 사진에 무지하므로 이해할 수 없을 거라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리면 자칫 시선을 분산시킬 위험도 있다. 자신의 취향과 맞아 떨어진다고 해도, 한 권의 책 속에 있는 모든 것을 흡수 할 수 없듯이 이 책에서도 각자가 이해할 수 있는 것과 자신이 소화해 낼 수 있는 것들만 받아들여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나 또한 그렇게 책을 읽어갔기에 기억하고 싶거나, 괜찮은 문장에 메모지를 붙였는데도 책을 다 읽고 보니 꽤 많은 메모지가 붙여 있는 것에 놀랐다. 대부분 예술에 대한 단상과 나의 처지에 걸맞은 말들에 공감이 많이 갔지만, 무엇보다 사진에서 이끌어내는 삶에 대한 연속성이 마음에 와 닿았다. 잔더 촬영 방식을 말하면서 저자는 '사회 속에서 맡고 있는 역할과 그 역할을 맡은 인간의 내면을 동시에 눈앞에 드러냈다.'고 했다. '타인의 인간성을 경험하면서 나 자신의 인간성을 느끼며, 그 순간 우리의 세계는 확장되기 시작한다.'는 설명의 이어짐을 듣고 있으면 눈에 보일 듯 말듯 뜬구름 잡는 말인 것 같으면서도 곰곰이 생각할 여지를 마련해 주었다. 이렇듯 한 장의 사진, 사진기의 부속품, 사진 찍는 방법에서 저자가 이끌어 내는 사고는 현재의 나를 돌아보며,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말해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저자도 이미 밝혔듯이 이 책을 읽고 사진에 관한 개념이라든지 기술에 대해서 터득하거나, 사진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킨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진에 대한 무지는 여전했고, 사진으로 인해 삶에 통찰력을 지닌 저자의 시선을 샅샅이 뒤지고 온 느낌이었다. 저자가 찍은 사진을 보면서 말로 터져 나오지 않는 간질거리는 느낌에 몸을 배배 꼬이기도 했다. 사진에 관련된 책임에도 사진을 바라보는 시선을 트기보다 사진으로 인한 삶의 시선을 재조명 한 느낌이기에 여전히 한 장의 사진을 보며 달라진 느낌을 발견할 수 없었다. 나에게 보이지 않는 특별한 시선이 사진을 찍는 뷰어에 의해 파인더를 통과해 내는 과정이 여전히 신기할 뿐이었다. 그들이 얘기하는 세계로 온전하게 들어가지 못했더라도 사진을 통해 세상을 보아온 한 사진가에 의해 나의 시선이 많이 트인 것은 사실이다. 저자는 자신의 작업 과정에 대한 이 모든 생각과 설명들은 사진을 찍은 지 30년이 지난 후에야 얻게 된 것임을 밝혔다. 그때까지 자신은 진흙탕물 속에서 무언가를 부여잡으려 안간힘을 쓰며 허우적대고 있었으며, 사진은 말보다 앞선다고 했다. 나는 무엇을 부여잡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걸까 생각해 보게 되는 반면, 이 과정 또한 충분히 즐길 여지가 있음에 용기를 얻고 나에게 찾아온 작은 책 한권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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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 달빛 - 타샤 할머니의 할로윈 이야기 타샤 튜더 클래식 9
타샤 튜더 글.그림, 엄혜숙 옮김 / 윌북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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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샤 할머니의 책을 구입할 때마다 늘 검색을 통해서 산다는 말을 언급하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타샤 튜더 클래식' 시리즈는 동화책이라서 거의 홍보가 되지 않는다. 정기적으로 온라인 서점에 들어가 검색을 통해 출간 소식을 알게 되는데, 얼마 전에는 한 온라인 서점 사이트에서 출간 알리미 서비스를 오픈 한 것을 보고 나를 위한 서비스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신간이 나오면 무조건 구입하는 작가가 10명이 넘다보니(거기다 신간이 잘 안 나오기도 하고) 검색이 귀찮기도 하고, 출간 소식을 몰라 적절한 때에 구입하지 못한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 서비스가 생겨 너무 신기해 내가 좋아하는 작가를 주르륵 등록하고 보니 괜히 뿌듯했다. 당연히 타샤 할머니도 등록시켜 놓았고, 이제 메일과 문자를 통해 출간 여부를 알 수 있다 생각하니 무척 든든했다.
 

  <호박 달빛>은 타샤 할머니의 책 소개란에서 많이 들어봤던 제목이었다. 할로윈 데이를 맞이해서 실비라는 소녀가 호박 달빛을 만드는 에피소드를 담고 있는 이 책은, 곧 돌아오는 할로윈 데이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략하게나마 책의 뒷면에 할로윈 데이의 유래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있어, 나도 잘 몰랐던 할로윈 데이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옛날 아일랜드 사람들은 10월 마지막 날에 나쁜 귀신들이 찾아와 나무나 꽃, 열매가 자라지 못하게 하거나 사람들을 병들게 만든다고 믿었다고 한다. 그래서 유령이나 마녀들과 비슷한 모습으로 분장해서 귀신들을 위로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내려오던 풍습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런 풍습은 하나의 축제로 자리 잡고 있기에, 할머니 집에 놀러온 실비는 호박 달빛을 만들어 할로윈 데이를 즐겁게 보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할머니 집에서 꽤 멀리 떨어진 옥수수 밭까지 개의치 않고 올라갔으며, 털북숭이 위기를 데리고 옥수수 밭에 도착한 실비는 밭 한가운데서 통통하고 근사한 호박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그 호박은 너무 무겁고 커서 굴려서 옮겼는데, 농장으로 이어지는 밭 가장자리까지 왔을 때 그만 호박이 떼구루루 굴러 가 버리고 말았다. 농장으로 들어간 호박은 염소, 암탉, 거위들을 놀래고 화나게 한데 이어, 양동이에 물을 가득 들고 가던 헴멜스캠프 아저씨와 부딪히고 만다. 실비와 위기가 호박을 따라 쫓아왔지만 너무 빨리 굴러가는 호박을 제어할 틈이 없었다.

 

  실비는 아저씨가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 드린 후 동물들에게 일일이 사과를 한다. 그리고 할아버지에게 가서 자조지종을 말하자, 듣고 있던 할아버지는 호박의 윗부분을 잘라내고 씨를 모두 파냈다. 그리고 호박에 구멍을 뚫어 눈과 코, 이빨을 내보이며 웃는 입까지 만들었다. 저녁이 되자 실비와 할아버지는 촛불을 켜서 호박 안에 넣었다. 무시무시한 호박 달빛을 한 호박을 보고 있자니 할로윈 데이 기분이 나는 것 같았다. 실비와 할아버지는 호박 달빛을 울타리에 올려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려 덤불 뒤에 숨었다. 그 일로 인해 실비와 할아버지는 아주 멋진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실비는 봄이 되자 호박씨를 심었다. 그 호박들은 잘 자라 수많은 호박이 달렸고, 맛있는 음식이 되기도 하고, 호박 달빛이 되기도 해 실비 같은 꼬마 아가씨를 기쁘게 할 거라며 책은 끝이 난다.

 

  <호박 달빛>은 최근에 읽은 타샤 할머니 동화책 가운데 비교적 이야기가 긴 편이었고, 함께 실린 그림들도 뚜렷하고 세세하기보다 수채화 분위기가 물씬 낫다. 책을 다시 검색해 보니 타샤 할머니가 1938년에 처음으로 발표한 동화책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타샤 할머니의 동화책에서 보아온 분위기와 조금 다른 기분이 들었나보다. 이후로도 꾸준히 동화책을 쓰고, 그림을 그린 타샤 할머니였기에 후에 나온 작품과 첫 작품을 비교해보는 것도 또 다른 재미가 될 것 같다. 타샤 할머니는 4살짜리 조카 실비의 이야기를 이 책에 그대로 실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더 사랑스럽고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이 책에 그대로 실릴 수 있었던 것 같다.

 

  내 책장에 가장 희박한 책 가운데 하나가 바로 동화책이 아닐까 싶은데, 타샤 할머니 덕분에 어느새 10권을 향해 가고 있다. 타샤 할머니의 동화책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을 보면, 내 책장이 아닌 것 같아 피식 웃음이 나면서도 현재진행형 전작주의를 하고 있어서 기분이 좋다. 이번에 새로 나온 <호박 달빛> 덕분에 한 권이 더 늘어난 것을 보며 벌써 다음 동화책을 기다리게 된다. 사랑스러운 타샤 할머니의 동화책을 만날 수 있어서 어찌나 좋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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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유 코로 재원 아트북 31
재원 편집부 엮음 / 재원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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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여름, 예술의 전당에서 '밀레와 바르비종파 거장전'이 열렸었다. 마침 서울에 갈 일이 있어 전시회를 보고 왔는데, 무척 기억에 남았던 전시회였다. 전시회를 보기 직전에 서점에서 <자연을 사랑한 화가들 - 밀레와 바르비종파 거장들> 책을 보고는 살까말까 고민하다가, 전시회가 너무 좋아 바로 구입할 정도였다. 미술 전시회를 좋아하긴 해도, 많은 관람객들로 인해 느긋하게 보고 오지 못하는 터라 다녀와도 거의 기억이 없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밀레와 바르비종파 거장들'은 자연을 배경으로 한 그림들이 대부분이라 무척 마음에 와 닿았고, 특히나 좋았던 몇몇 화가들은 이름을 기억하고 올 정도였다. 그 가운데 단연 1순위는 카미유 코로였다. 밀레를 비롯한 다른 화가들의 평판은 어느 정도 듣고 있었지만, 카미유 코로는 내게 생소한 화가였는데 그림이 너무 인상 깊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작품 중 하나인 <모르트퐁텐의 추억>을 직접 보고 나니, 그의 화집이라도 소장하고 싶었다. 그러나 괜찮은 책들이 보이질 않았고, 그렇게 시간은 어느새 4년이 흘러 버렸다.
 

  그 사이에 여러 전시회를 보고 미술에 관련된 책을 봤지만, 늘 그런 경험을 할 때마다 코로가 떠올랐다. 워낙 많은 화가들이 있어 어떠한 책을 봐야할지 고민스러운 상황에서 내가 아는 화가라는 점도 있었지만, 전시회에서 봤던 그림을 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최근에 미술에 관련된 책을 몇 권 읽다보니, 또 다시 코로의 그림을 보고 싶다는 열망이 일었다. 그래서 온라인 서점을 검색을 해봤는데, 달랑 한 권 밖에 검색되지 않았다. 글보다는 코로의 그림위주로 실려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코로의 그림을 보고 싶은 열망이 커서 지인에게 책을 사달라고 졸랐다. 얇은 책이어서 그런지 글은 코로의 생애만 다루고 있었고, 나머지는 그림으로 채워져 있었다. 코로의 생(生)만이라도 제대로 알고 싶어 꼼꼼히 읽어 나갔는데, 그것으로 코로의 삶과 그림세계를 알기에는 무리였다.

 

  코로의 생애와 책에 실린 그림을 보고 나서, 약간이나마 그에 대해서 알아갔다고는 하지만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아쉬움을 털어 버리지 못하다, '밀레와 바르비종파 화가들' 전시회를 보고 나서 구입한 책이 생각이 났다. 책장에서 바로 <자연을 사랑한 화가들>을 꺼내서 코로의 그림과 글이 실려 있는 부분을 찾아서 읽어보았다. 그러나 이 책은 바르비종파의 여러 화가들을 다루고 있어서, 내가 알고 싶었던 코로의 삶에 대해 많은 궁금증을 해소시켰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코로에 관한 글을 조금 읽고, 그의 그림을 비교해보니(미술책마다 색감에 따라 그림이 달리 보이는 경우가 많은데, <자연을 사랑한 화가들>의 그림이 훨씬 선명하고 자연스러운 색감이었다.), 아쉬움이 조금 달래지긴 했다. 잠시 새로 구입한 책에서 남긴 아쉬움을 다른 책에서 약간이나마 보충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갑자기 내 책장의 책들이 사랑스러워지기도 했다.

 

  코로의 삶에 따라 펼쳐진 그의 그림과 화풍을 보면, 말년에 은빛 물결치듯 그려낸 그림들이 가장 돋보였다. 내가 전시회에서 감탄하며 보았던 그림도 말년에 그린 그림이었고, 책에 실린 그림들을 보면서 그림의 변화를 느껴볼 수 있었다. 말년에 들어서면서 더 빛을 발하는 그의 그림을 보면서, 화가에게 그림이란 내면을 작용시키는 힘이 부여하기 마련이기에 각자에게 처한 배경이 무척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코로는 상점을 운영하는 부모님 밑에서 자란 터라 어릴 적부터 물질에 대한 어려움을 모르고 지냈다. 부모님의 희망대로 포목상에서 일을 하기도 했지만,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열망이 커 부모를 설득해 26살의 나이에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고 한다.

 

  비교적 평탄한 삶을 살아온 코로여서 그런지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어떠한 격정이 느껴진 다기 보다 평안함과 몽롱함이 지배하고 있다. 여러 곳을 여행하고 퐁텐블로 숲에 머물면서 바르비종파 화가들과 함께 자연을 그렸고, 다른 화가들과는 달리 종교화에도 심취했던 그였기에 그림만으로도 그의 내면을 짐작해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살롱전에서도 그의 그림은 비교적 많이 당선된 편이었는데, 그만큼 서정적인 그의 그림은 누가 봐도 부담 없을 편안함이 내제해 있었다. 아무도 눈 여겨 볼 것 같지 않은 숲의 풍경, 세세하면서도 시선을 잡아끄는 인물화, 삶의 한 단면 같은 종교화까지 무척 사실적인 그림들이었다. 은빛 물결이 치듯, 안개가 낀 듯, 몽롱한 작품들도 있었지만, 오히려 꿈속을 헤매는 분위기로 인해 현실감이 더 드러날 정도였다.

 

  코로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싶고, 많은 작품들을 구경하고 싶던 나에게는 아쉬움이 남는 책이었다. 정보가 너무 협소해 그의 삶과 작품이 어떻게 얽혀 들어갔는지 자세히 알 수 없어 짧은 식견으로 그의 그림을 얘기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렇게나마 그의 작품을 볼 수 있어 좋았지만, 좀 더 큰 관심으로 코로의 작품과 삶에 대한 책들이 발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내가 전시회에서 느꼈던 강렬함을 많은 독자들이 누릴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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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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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감이 몰려왔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임에도 불구하고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침대에 벌러덩 누워 버렸다. 아침에 미처 정리하지 못한 널브러진 옷가지와 침대 여기저기에 굴러다니는 책을 보고 있자니 한숨만 나왔다. 어쩌자고 이렇게 지저분하게 해놓고 방을 나선건지, 퇴근해서 돌아오면 늘 자책이 깃든 후회를 하게 된다. 그렇게 누워서 천장만 바라보고 있을 때, 지인에게 문자가 왔다. 김연수의 <세계의 끝 여자친구>가 오늘 도착한 것을 알고 있는 지인이었는데, 단편집이니 책 제목부터 읽어보라는 문자였다. 내가 현재 어떠한 상태로 있는지도 모르고 문자를 보낸 지인 때문에 설핏 웃음이 나면서도, 내 손은 김연수의 책으로 뻗어갔다. 그리고 책 제목이 실린 단편부터 펼쳐서 읽어 나갔다. 시력이 나빠 안경을 벗으면 책을 코앞까지 끌어당겨야 겨우 겨우 보임에도 불구하고, 피로가 눈으로 뭉쳐 안경을 쓸 수가 없었다. 그렇게 불편한 자세로 책을 읽었는데, 안경을 벗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안경을 벗고 글을 읽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지는 낯섦은 글자의 확대로 인한 이야기의 다가섬이다. 안경을 끼고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책을 읽어나갈 때는, 시각이 뻗어나가는 범위 안에 들어온 주변의 자질구레함까지 모두 포함시키며 읽어야 한다. 그 안에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딴 생각도 포함되는데, 책을 바로 코앞으로 끌어당겨 읽을 때면 오로지 글자를 읽어야 한다는 생각에 잡생각이 들어올 틈이 없다. 그래서 불편한 자세임에도 불구하고, 김연수의 책을 꺼냈던 것이고 지인이 먼저 읽어보라는 통에 책 제목의 단편을 먼저 읽어본 것이다. 그렇기에 <세계의 끝 여자친구> 단편은 평상시에 내가 하는 독서의 세계와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작가가 펼쳐놓은 세계에 성큼 다가간 느낌이었고(코앞에서 읽었다는 이유만으로), 자질구레함을 포함시킬 여력이 없었으므로(안경을 쓰지 않아) 내게 펼쳐진 세계는 단 하나였다. 단편을 읽고 난 뒤 문자를 보낸 지인에게 바로 답장을 했다. 왜 이 단편을 읽어보라 했냐는 질문에 이야기가 이야기를 엮어가는 구성이 돋보였다는 대답이 들려왔다.

 

  나는 지인에게 무슨 답변을 원했던 것일까. 그 단편이 나와 어느 정도 연관이 있어서 읽어보라 했을 거라 지레짐작한 나는 지인의 답변에 조금은 어이가 없었다. 정말 그것을 발견하라고, 단편집이라 해도 순차적으로 읽는 나에게 그런 모험을 하게 만들었단 말인가. 그러나 지인의 답변을 듣고 보니 내가 금방 읽은 단편을 축약 적으로 말해주는 것 같아 반박할 여지도 없었다. 우연히 자신이 좋아하는 시를 도서관 게시판에 붙임으로써,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만남과 이야기의 파생은 김연수 특유의 연결고리를 만들고 있었다. 이 단편의 시작에서 저자는 '어쨌든 인생은 서로 물고 물리는 톱니바퀴 장치와 같으니까. 모든 일에는 흔적이 남게 마련이고, 그러므로 우리는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야 최초의 톱니바퀴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고 말했다. 이 소설집 속의 거의 모든 이야기가 이 말에 밑바탕을 깔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물고 물리는 인생의 톱니바퀴를 거리낌 없이 펼쳐놓고 있었다.

 

  특히나 이 소설집에서 돋보였던 것 중의 하나는 과거로 잠식해 들어가 현재의 '나'와 연결해주는 인생의 단면이었다. '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에서 '나'는 17살 연하의 유학생이었던 연인의 흔적을 찾아 그가 죽은 지 13년이 지난 뒤 한국을 방문한다. <내겐 휴가가 필요해>에서는 소도시 도서관에 십년 째 드나들며 책을 읽어 온 한 노인의 과거는 한 사서를 통해 훑고 지나간다. 해설에서는 노인의 세계가 '붕괴했다'고 말하고 있었는데, 붕괴로 인해 노인이 과거의 행위를 떨쳐버리지 못하고 참회하는 마음으로 자살을 선택했던 모습이 과거를 떼어버리지 못한 모습으로 비춰졌다. <달로 간 코미디언> 역시 미국의 사막에서 실종되어 버린 아버지의 흔적을 통해 삶을 이해하고자 하는 딸의 행보로 비춰졌다. 이렇듯 현재의 내가 존재한다 해도, 내가 이 세상에 나오기 전부터 흘러온 세계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도 판이하게 다를 수밖에 없는 인생의 단면을, 이토록 매끄럽게 이끌어 내는 저자에 역량에 감탄할 뿐이었다.

 

  종종 주변 사람들에게 국내 현대문학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유인즉슨 현실도피성 독서를 하는 나에게 현대문학은 피하고 싶은 세계를 맞닥트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우리 언어로 쓰인 작품들은 현실에 대한 비유가 너무나 적나라해서 나의 감정이 쉽게 휩쓸리고 말아 의도적으로 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럴 때에 내게 나타난 작가가 김연수다. 국내문학에 시선을 돌리게 만들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국내 문학에 대한 편견을 조금씩 깨트려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첫 작품으로 산문을 읽은 탓에 소설을 여태껏 만나보지 못했었는데, <세계의 끝 여자친구>를 통해 김연수의 소설에 입문한 셈이다. 그래서인지 김연수의 소설에 내포된 메시지를 단박에 찾아내는 것도, 그것을 정리하는 것도 내게는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가 그려낸 세계는 내가 피하고만 싶었던 우울함이 가득한 현실이 아니라, 삶이 이렇게 흘러간다고 말하고 싶은 듯 평이하지만 남다른 삶의 단면을 보여주었기에 내 마음의 문이 열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거기다 김연수가 그려내는 삶의 무대는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세계를 향해 뻗어나간다는 뜻이 아니라, 외국의 무대(?)를 서슴지 않게 이용하는 그를 보면서 인생의 연결고리가 한 곳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는 시각의 넓힘을 경험했다. 소설 속의 '나'의 시선으로 바라봐야 하기에 세밀한 무대를 경험하지 못했더라도, 국내에서의 삶만 바라보다 다른 나라로 무대를 옮겨 이어지는 삶의 단상이 달리 보일 수밖에 없었다. 똑같은 인생의 단면일지라도, 다른 나라의 다른 사람들도 이런 고충을 나눌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다는 소설과는 조금 동떨어진 생각까지 들었다. 소설 같은 이야기, 소설이지만 있을 법한 이야기, 이렇게 수많은 연결고리로 얽혀 있을 거라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들은 김연수의 소설로 인해 존재의 이유를 드러냈다.

 

  같은 장르더라도 수많은 갈래에 의해 나뉘는 문학을 탐독하다 보면, 저자가 몸담고 있는 장르에 의해 표현이 달라짐을 느낄 수 있다. 시인은 시인의 언어로, 수필가는 단아한 문장으로 일상을 돋보이게 만들며, 소설가는 이야기를 통해서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것들을 전한다. 김연수의 소설을 읽다보면 이야기를 통한 전달의 묘함에 놀라곤 한다. 기억을 더듬어가듯 펼쳐놓는 이야기들을 읽고 있노라면, 꼬임 없이 차분하게 써 내려가는 것이 마냥 신기할 뿐이다. 어릴 적 추억 하나를 끄집어내어 말로 하기는 쉽지만, 막상 글로 옮겨보려 하면 얼마나 힘든지를 경험한 적이 있기에, 글 속의 질서를 지켜내는 저자의 교통정리를 통해 요리조리 잘 빠져나온 기분이다. 그의 산문을 읽고 단박에 빠져버렸지만, 그의 소설은 처음이라 뭐라 단정 지을 수 없는 여운이 내 안을 맴돌고 있다. 쉽게 스쳐지나버릴 수도 없는 작가지만, 쉽게 다가가기도 조심스러운 그의 작품들은 다시 한 번 구석구석 살펴보게끔 만드는 매력이 있다. 책장에 즐비한 그의 소설을 꺼내 읽으면 되지만, 어떠한 세계가 펼쳐질지 기대되면서도 무언가를 각오해야 한다는 생각에 가볍게 손이 뻗치는 작가가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그렇지만 이러한 작가를 만날 때마다 드는 생각은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어 감사하고, 그들의 글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격스럽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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