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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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감이 몰려왔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임에도 불구하고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침대에 벌러덩 누워 버렸다. 아침에 미처 정리하지 못한 널브러진 옷가지와 침대 여기저기에 굴러다니는 책을 보고 있자니 한숨만 나왔다. 어쩌자고 이렇게 지저분하게 해놓고 방을 나선건지, 퇴근해서 돌아오면 늘 자책이 깃든 후회를 하게 된다. 그렇게 누워서 천장만 바라보고 있을 때, 지인에게 문자가 왔다. 김연수의 <세계의 끝 여자친구>가 오늘 도착한 것을 알고 있는 지인이었는데, 단편집이니 책 제목부터 읽어보라는 문자였다. 내가 현재 어떠한 상태로 있는지도 모르고 문자를 보낸 지인 때문에 설핏 웃음이 나면서도, 내 손은 김연수의 책으로 뻗어갔다. 그리고 책 제목이 실린 단편부터 펼쳐서 읽어 나갔다. 시력이 나빠 안경을 벗으면 책을 코앞까지 끌어당겨야 겨우 겨우 보임에도 불구하고, 피로가 눈으로 뭉쳐 안경을 쓸 수가 없었다. 그렇게 불편한 자세로 책을 읽었는데, 안경을 벗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안경을 벗고 글을 읽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지는 낯섦은 글자의 확대로 인한 이야기의 다가섬이다. 안경을 끼고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책을 읽어나갈 때는, 시각이 뻗어나가는 범위 안에 들어온 주변의 자질구레함까지 모두 포함시키며 읽어야 한다. 그 안에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딴 생각도 포함되는데, 책을 바로 코앞으로 끌어당겨 읽을 때면 오로지 글자를 읽어야 한다는 생각에 잡생각이 들어올 틈이 없다. 그래서 불편한 자세임에도 불구하고, 김연수의 책을 꺼냈던 것이고 지인이 먼저 읽어보라는 통에 책 제목의 단편을 먼저 읽어본 것이다. 그렇기에 <세계의 끝 여자친구> 단편은 평상시에 내가 하는 독서의 세계와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작가가 펼쳐놓은 세계에 성큼 다가간 느낌이었고(코앞에서 읽었다는 이유만으로), 자질구레함을 포함시킬 여력이 없었으므로(안경을 쓰지 않아) 내게 펼쳐진 세계는 단 하나였다. 단편을 읽고 난 뒤 문자를 보낸 지인에게 바로 답장을 했다. 왜 이 단편을 읽어보라 했냐는 질문에 이야기가 이야기를 엮어가는 구성이 돋보였다는 대답이 들려왔다.

 

  나는 지인에게 무슨 답변을 원했던 것일까. 그 단편이 나와 어느 정도 연관이 있어서 읽어보라 했을 거라 지레짐작한 나는 지인의 답변에 조금은 어이가 없었다. 정말 그것을 발견하라고, 단편집이라 해도 순차적으로 읽는 나에게 그런 모험을 하게 만들었단 말인가. 그러나 지인의 답변을 듣고 보니 내가 금방 읽은 단편을 축약 적으로 말해주는 것 같아 반박할 여지도 없었다. 우연히 자신이 좋아하는 시를 도서관 게시판에 붙임으로써,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만남과 이야기의 파생은 김연수 특유의 연결고리를 만들고 있었다. 이 단편의 시작에서 저자는 '어쨌든 인생은 서로 물고 물리는 톱니바퀴 장치와 같으니까. 모든 일에는 흔적이 남게 마련이고, 그러므로 우리는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야 최초의 톱니바퀴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고 말했다. 이 소설집 속의 거의 모든 이야기가 이 말에 밑바탕을 깔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물고 물리는 인생의 톱니바퀴를 거리낌 없이 펼쳐놓고 있었다.

 

  특히나 이 소설집에서 돋보였던 것 중의 하나는 과거로 잠식해 들어가 현재의 '나'와 연결해주는 인생의 단면이었다. '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에서 '나'는 17살 연하의 유학생이었던 연인의 흔적을 찾아 그가 죽은 지 13년이 지난 뒤 한국을 방문한다. <내겐 휴가가 필요해>에서는 소도시 도서관에 십년 째 드나들며 책을 읽어 온 한 노인의 과거는 한 사서를 통해 훑고 지나간다. 해설에서는 노인의 세계가 '붕괴했다'고 말하고 있었는데, 붕괴로 인해 노인이 과거의 행위를 떨쳐버리지 못하고 참회하는 마음으로 자살을 선택했던 모습이 과거를 떼어버리지 못한 모습으로 비춰졌다. <달로 간 코미디언> 역시 미국의 사막에서 실종되어 버린 아버지의 흔적을 통해 삶을 이해하고자 하는 딸의 행보로 비춰졌다. 이렇듯 현재의 내가 존재한다 해도, 내가 이 세상에 나오기 전부터 흘러온 세계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도 판이하게 다를 수밖에 없는 인생의 단면을, 이토록 매끄럽게 이끌어 내는 저자에 역량에 감탄할 뿐이었다.

 

  종종 주변 사람들에게 국내 현대문학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유인즉슨 현실도피성 독서를 하는 나에게 현대문학은 피하고 싶은 세계를 맞닥트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우리 언어로 쓰인 작품들은 현실에 대한 비유가 너무나 적나라해서 나의 감정이 쉽게 휩쓸리고 말아 의도적으로 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럴 때에 내게 나타난 작가가 김연수다. 국내문학에 시선을 돌리게 만들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국내 문학에 대한 편견을 조금씩 깨트려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첫 작품으로 산문을 읽은 탓에 소설을 여태껏 만나보지 못했었는데, <세계의 끝 여자친구>를 통해 김연수의 소설에 입문한 셈이다. 그래서인지 김연수의 소설에 내포된 메시지를 단박에 찾아내는 것도, 그것을 정리하는 것도 내게는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가 그려낸 세계는 내가 피하고만 싶었던 우울함이 가득한 현실이 아니라, 삶이 이렇게 흘러간다고 말하고 싶은 듯 평이하지만 남다른 삶의 단면을 보여주었기에 내 마음의 문이 열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거기다 김연수가 그려내는 삶의 무대는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세계를 향해 뻗어나간다는 뜻이 아니라, 외국의 무대(?)를 서슴지 않게 이용하는 그를 보면서 인생의 연결고리가 한 곳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는 시각의 넓힘을 경험했다. 소설 속의 '나'의 시선으로 바라봐야 하기에 세밀한 무대를 경험하지 못했더라도, 국내에서의 삶만 바라보다 다른 나라로 무대를 옮겨 이어지는 삶의 단상이 달리 보일 수밖에 없었다. 똑같은 인생의 단면일지라도, 다른 나라의 다른 사람들도 이런 고충을 나눌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다는 소설과는 조금 동떨어진 생각까지 들었다. 소설 같은 이야기, 소설이지만 있을 법한 이야기, 이렇게 수많은 연결고리로 얽혀 있을 거라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들은 김연수의 소설로 인해 존재의 이유를 드러냈다.

 

  같은 장르더라도 수많은 갈래에 의해 나뉘는 문학을 탐독하다 보면, 저자가 몸담고 있는 장르에 의해 표현이 달라짐을 느낄 수 있다. 시인은 시인의 언어로, 수필가는 단아한 문장으로 일상을 돋보이게 만들며, 소설가는 이야기를 통해서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것들을 전한다. 김연수의 소설을 읽다보면 이야기를 통한 전달의 묘함에 놀라곤 한다. 기억을 더듬어가듯 펼쳐놓는 이야기들을 읽고 있노라면, 꼬임 없이 차분하게 써 내려가는 것이 마냥 신기할 뿐이다. 어릴 적 추억 하나를 끄집어내어 말로 하기는 쉽지만, 막상 글로 옮겨보려 하면 얼마나 힘든지를 경험한 적이 있기에, 글 속의 질서를 지켜내는 저자의 교통정리를 통해 요리조리 잘 빠져나온 기분이다. 그의 산문을 읽고 단박에 빠져버렸지만, 그의 소설은 처음이라 뭐라 단정 지을 수 없는 여운이 내 안을 맴돌고 있다. 쉽게 스쳐지나버릴 수도 없는 작가지만, 쉽게 다가가기도 조심스러운 그의 작품들은 다시 한 번 구석구석 살펴보게끔 만드는 매력이 있다. 책장에 즐비한 그의 소설을 꺼내 읽으면 되지만, 어떠한 세계가 펼쳐질지 기대되면서도 무언가를 각오해야 한다는 생각에 가볍게 손이 뻗치는 작가가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그렇지만 이러한 작가를 만날 때마다 드는 생각은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어 감사하고, 그들의 글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격스럽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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