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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 노트 - 사진과 삶에 관한 단상
필립 퍼키스 지음, 박태희 옮김 / 눈빛 / 2005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한 권의 책을 선택하는 결정권은 대부분이 나의 주관적인 견해로 이뤄진다. 그 이외는 다른 경로로 선택된 책들인데, 그 가운데 가장 실천하기 힘든 경로는 타인의 추천인 것 같다. 읽어본 사람에게 추천을 받는 것이 내가 그러모은 정보로 책을 고르는 수고를 줄이는 지름길임에도, 나의 취향과 그 외의 자잘한 상황들에 대부분 묻혀버리고 만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꼭 읽어보고 싶은 책들이 있기 마련이다. 필립 퍼키스의 책이 그랬다. 사진은 문외한이라는 말을 꺼낼 수 없을 정도로 나의 관심에서 벗어난 분야인데도 이 책을 구입하게 된 계기는 이 책과 비슷한 책의 리뷰에 달린 댓글 때문이었다.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이란 책을 읽고 리뷰를 올렸는데, 어떤 분이 이 책도 한 번 읽어보라고 추천해 주셨다. 그렇게 추천을 해주어도 잊어버리기 일쑤인데 존 버거의 책이 너무 마음에 들어 언젠가는 꼭 읽어 보고 싶었다.
그랬음에도 이 책이 내게 오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거기다 책을 구입한 지 반 년이 지나서야 읽게 되었으니, 한 권의 책이 내게 읽는 과정은 결코 간단하지 않음에 조금은 신기함마저 든다. 침대에서 뒹굴 거리다 새로 정리한 책배치 때문에 눈에 띄어 읽게 되었는데, 내가 기억하고 싶을 정도로 독특한 매력을 발산 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관심을 두지 않은 분야임에도 글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은 책의 겉모습만으로도 판단할 수 있나 보다. '사진 강의 노트'란 제목을 달고 있지만 부제목은 '사진과 삶에 관한 단상'이다. 그렇기에 사진에 문외한이고, 사진 찍기를 즐겨하지 않는 나에게도 어느 정도 읽힐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 짐작과 함께 책을 펼쳤음에도 나의 예상과 어느 정도 맞아 떨어졌음은 물론 기대를 넘어 내 마음에 쏙 드는 글로 채워져 있었다.
저자는 머리말에 '사진을 가르쳐 온 지 어느덧 40년이 흘렀'고, '어쩐 입장을 옹호하거나 사진 개념과 기술을 완벽하게 설명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보다는 생각과 논쟁을 불러오는 발판을 제공할 것이다.'란 뜻을 밝히고 있는데, 그래서 내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사진의 개념을 설명해도 어차피 이해할 수 없을 것이고, 사진 찍는 법을 알려준다 하더라도 책을 찍을 때만 쓰는 디지털 카메라밖에 가지고 있는 나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저자가 40년 간 가르쳐 온 사진에서 삶의 단상을 지켜볼 수 있다면 흥미로운 소재라고 생각했다. 그런 나의 생각을 관철한 듯 사진과 삶이 엉켜들어 간 글은 나에게 신선한 자극이 되어 주었다. 사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히기도 하고, 사물을 바라보는 개념이나, 사진을 현상하는 자잘한 것들까지 사진과는 떼어놓을 수 없는 분위기가 연신 흘러나왔다. 사진을 가르쳐 오고, 비평한 가운데의 글 들을 모았다고는 하지만 예술에 대한 시각이라든가 타인의 명언들이 종종 실려 있어 나의 생각을 많이 틔워주었다. 저자는 예술과 예술 간의 통로를 자유자재로 오가고 있었으며, 그 사이사이에서 얼굴을 내밀어 독자에게 자신의 경험과 사고를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려운 글이라고, 사진에 무지하므로 이해할 수 없을 거라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리면 자칫 시선을 분산시킬 위험도 있다. 자신의 취향과 맞아 떨어진다고 해도, 한 권의 책 속에 있는 모든 것을 흡수 할 수 없듯이 이 책에서도 각자가 이해할 수 있는 것과 자신이 소화해 낼 수 있는 것들만 받아들여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나 또한 그렇게 책을 읽어갔기에 기억하고 싶거나, 괜찮은 문장에 메모지를 붙였는데도 책을 다 읽고 보니 꽤 많은 메모지가 붙여 있는 것에 놀랐다. 대부분 예술에 대한 단상과 나의 처지에 걸맞은 말들에 공감이 많이 갔지만, 무엇보다 사진에서 이끌어내는 삶에 대한 연속성이 마음에 와 닿았다. 잔더 촬영 방식을 말하면서 저자는 '사회 속에서 맡고 있는 역할과 그 역할을 맡은 인간의 내면을 동시에 눈앞에 드러냈다.'고 했다. '타인의 인간성을 경험하면서 나 자신의 인간성을 느끼며, 그 순간 우리의 세계는 확장되기 시작한다.'는 설명의 이어짐을 듣고 있으면 눈에 보일 듯 말듯 뜬구름 잡는 말인 것 같으면서도 곰곰이 생각할 여지를 마련해 주었다. 이렇듯 한 장의 사진, 사진기의 부속품, 사진 찍는 방법에서 저자가 이끌어 내는 사고는 현재의 나를 돌아보며,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말해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저자도 이미 밝혔듯이 이 책을 읽고 사진에 관한 개념이라든지 기술에 대해서 터득하거나, 사진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킨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진에 대한 무지는 여전했고, 사진으로 인해 삶에 통찰력을 지닌 저자의 시선을 샅샅이 뒤지고 온 느낌이었다. 저자가 찍은 사진을 보면서 말로 터져 나오지 않는 간질거리는 느낌에 몸을 배배 꼬이기도 했다. 사진에 관련된 책임에도 사진을 바라보는 시선을 트기보다 사진으로 인한 삶의 시선을 재조명 한 느낌이기에 여전히 한 장의 사진을 보며 달라진 느낌을 발견할 수 없었다. 나에게 보이지 않는 특별한 시선이 사진을 찍는 뷰어에 의해 파인더를 통과해 내는 과정이 여전히 신기할 뿐이었다. 그들이 얘기하는 세계로 온전하게 들어가지 못했더라도 사진을 통해 세상을 보아온 한 사진가에 의해 나의 시선이 많이 트인 것은 사실이다. 저자는 자신의 작업 과정에 대한 이 모든 생각과 설명들은 사진을 찍은 지 30년이 지난 후에야 얻게 된 것임을 밝혔다. 그때까지 자신은 진흙탕물 속에서 무언가를 부여잡으려 안간힘을 쓰며 허우적대고 있었으며, 사진은 말보다 앞선다고 했다. 나는 무엇을 부여잡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걸까 생각해 보게 되는 반면, 이 과정 또한 충분히 즐길 여지가 있음에 용기를 얻고 나에게 찾아온 작은 책 한권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