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의 이름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38
아모스 오즈 지음, 정회성 옮김 / 비룡소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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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서른을 눈앞에 두고 있는 나이임에도 한 편의 로맨스를 꿈꾸며 잠이 들곤 한다. 소설 속에서 멋진 인물을 발견했거나, 언뜻 TV에서 본 매력적인 사람이라든가, 순간적인 호감(말 그대로 길지 않은 호감)을 가진 사람을 끌어들여 말도 안 되는 판타지를 만들어 낸다. 그런 나를 보고 있으면 철딱서니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꿈에서라도 로맨스를 이뤄보고 싶은 욕망에 가엾어지곤 한다. 그런 일이 현실에서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허황된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어떨까? 어느 날 갑자기 내게 환상적인 사랑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집에 가서 하룻밤을 같이 보내게 되는 꿈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말이다.
 

  어른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좋아하는 사람 집에서 하룻밤을 보낸다는 것에 대해 이상야릇한 상상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그 주인공은 바로 11살 소년 숌히였다. 말 그대로 숌히는 같은 반 소녀 에스티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는다(정확히 말하면 묵으려는 찰나 숌히의 아버지가 데려오긴 했지만). 그러나 이 책의 전체적인 내용이 숌히가 에스티네 집에서 묵는다는 것은 아니고, 숌히에게 주어진 기나긴 하루의 끝자락에 선물을 받는 듯, 숌히는 에스티와 잠시 꿈같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숌히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은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이스라엘은 영국군이 주둔해 있어 몹시 흉흉했고, 어린 아이들에게도 영국군과 말이라고 섞을라치면 첩자로 통했다. 그런 상황이었기에 숌히가 당면한 현실은 풍족하거나, 자유롭거나, 화목하다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 그에게 괴짜삼촌이 하나 있었는데, 그 삼촌에게 생일 선물로 자전거를 받는다. 귀한 선물을 받은 숌히는 여자용 자전거라는 사실에도 개의치 않고, 자전거를 타고 뽐내며 거리를 달린다.

 

  그러나 숌히가 진정 하고 싶은 것은 그 자전거를 타고 아프리카 여행을 하는 것이었다. 자전거만 있다면 아프리카 대륙을 끝없이 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릴 적 누구나 꿈꿔볼 수 있는 평이한 꿈일지 몰라도, 숌히가 처해있는 상황에서는 절대 평범해 보이지 않는 꿈으로 비춰졌다. 부모님은 시간과 장소를 정해놓고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만들어 놓았고, 다른 아이들도 쉽게 자전거를 탈 수 없었다. 그랬기에 숌히는 자전거를 타고 꼭 아프리카 대륙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었고, 그 욕망을 채우기 위해 집을 떠나 부족한 것 없이 풍요롭게 사는 친구 알도에게 간다. 알도의 집은 부자였지만, 부모님이 자전거를 사주지 않았기에 알도의 흥미를 끌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알도네 집으로 몰래 자전거를 가져 간 숌히는 알도에게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는다. 그러나 알도는 여행보다 숌히의 자전거가 탐이 났는지, 숌히의 눈을 휘둥그렇게 만들 기차놀이 세트와 교환하자고 한다. 숌히는 얼떨결에 자전거와 기차세트를 교환해서 집으로 귀가하던 중 자신을 괴롭히는 고엘과 마주치고 만다.

 

  고엘에게 순순히 기차세트가 들어온 경로를 설명해 주었지만, 고엘은 자신을 과시해 기차세트와 셰퍼드를 교환하게 만든다. 말도 듣지 않는 셰퍼드와 기차세트를 바꾸게 된 숌히는 결국 개마저 도망가 버리자, 망연자실해서 계단에서 울고 만다. 풀밭에서 연필깎이 하나를 주웠지만, 자신의 신세가 너무나 처량했다. 그 모습을 에스티의 아버지가 발견하게 되고, 숌히는 적당히 둘러대서 에스티의 집으로 향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에스티의 방에서 하룻밤을 묵을 수 있었고 연필깎이마저 에스티가 가져가 버렸지만, 에스티와 많은 대화를 통해 그들은 좋아하는 사이가 된다. 그러나 그 사랑이 오래가지 않았노라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모든 것은 변해갔다며 저자는 이야기를 마무리 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 책의 내용이 허무할 수도 있고, 당시의 이스라엘의 분위기를 상세히 묘사한 책 내용에 어떤 것이 중점인지 혼란스러울 수도 있는 내용이었다. 아마 아모스 오즈의 작품을 접해보지 않은 독자라면 그 낯섦과 혼란스러움은 더 가중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모스 오즈의 작품을 거의 다 읽어와서인지 이 작은 소설을 마주하는 것이 무척 기뻤다. 아모스 오즈는 세계적으로 유명하지만 국내에는 인지도가 낮다는 옮긴이의 말에 동감을 하면서도, 그의 작품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즐거웠다. 거기다 아모스 오즈의 작품을 처음 접하는 독자들에겐 이스라엘의 사람들의 기질과 그 당시의 배경에 이질감이 느껴질 수 있을지도 모르나,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의 거리, 아모스 오즈의 다른 소설에서 비춰졌던 요소의 언급을 발견하는 것이 내게는 흥미로웠다. 이를테면 고엘이 숌히에게 영국군의 첩자라고 놀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숌히는 던롭 하사와 언어를 배웠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 내용은 <지하실의 검은 표범>이란 작품에서 상세히 나왔기에, 그런 연결과 발견이 아모스 오즈의 작품을 즐기는데 재미를 가중시킨 것이다. 또한 어린나이임에도 이스라엘 민족의 고충을 실토하는 장면이나, 알도가 자신의 집에 걸린 그림과 높은 직위에 있는 친척을 자랑하자 '전능하신 우리 주 하나님만이 온 우주의 왕이셔'라고 생각하는 부분에서는 무척이나 귀여웠다.

 

  신간이 나왔다는 것을 알자마자 바로 주문할 만큼 아모스 오즈는 내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작가다. 그의 번역본을 눈 빠지게 기다리는 것이 종종 지칠 때가 있는데(그 이외의 책들이 충분히 채워주고 있다 해도.), 이렇게 우연히 신간 소식을 알 때처럼 기분 좋은 것도 없다. 국내에서도 인지도가 높아져서 미처 번역되지 못한 책들이 번역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의 책이 출간될 때마다 바로 구입해서 읽고 싶고, 한권씩 쌓여서 책장 가득 채워놓고 뿌듯해하는 나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 설렌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기다리는 것은, 그것으로도 삶을 살아갈 가치가 있노라고 언급할 만큼 또 다른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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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아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3
기 드 모파상 지음, 송덕호 옮김 / 민음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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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파상의 명성은 익히 들어왔으며, 그의 작품을 읽지 않았음에도 마치 읽은 것 같은 착각이 일 정도로 친숙하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 대해서 내가 아는 것은 없었고, 언젠가는 읽고 싶다는 기약 없는 다짐만 하고 있었다. 어떠한 작품을 첫 작품으로 읽게 될 것인가에 고민할 틈도 없이, 내게 먼저 안긴 작품은 <벨아미>이었다. 민음사 세계문학 시리즈로 나와서 먼저 마주하게 되었는데, 두툼한 두께에도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왠지 금방 읽힐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고, 그 예상은 빗겨가지 않았고 거리낌 없이 책장이 넘어갔다. 하지만 중간 중간 책 읽기를 멈출 수밖에 없었는데, 편협하게 흘러가는 주인공 벨아미의 행보 때문이었다.
 

  아름다운 남자, 벨아미로 불리는 뒤루아의 첫 등장은 몹시 궁색했다. 하사관으로 지내다 퇴역한 그는 철도회사에 다니며 돈에 쪼들리는 생활을 하면서 파리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런 그를 보고 있자니 이 두툼한 책에서 어떻게 활개를 칠지 기대가 되면서도 몹시 안쓰러웠다. 남자라면 성공하고 싶은 욕망, 부에 대한 욕망이 불타오르는 법인데, 그가 거리에서 보는 사람들은 모두 자신보다 잘나 보이고 풍요로워 보였다. 어떻게 하면 돈을 거머쥐고, 신분 상승을 꿈꿔볼까 그런 생각만 하고 있던 찰나 신문사에 다니는 옛 전우 포레스티에를 우연히 길거리에서 만난다. 그의 도움으로 신문사에 취직하게 된 그는 서투른 출발자의 모습을 보이지만, 이내 신문사의 생리와 귀족사회의 병폐를 속속들이 알아가게 된다. 정부(情婦)를 취해 부와 권력을 거머쥐려는 뒤루아는 포레스티에를 통해 알게 된 드 마렐 부인과 불륜을 저지르고, 육체의 쾌락과 물질에 대한 욕구를 조금씩 해소시켜 간다.

 

  뒤루아가 마렐 부인과 쾌락을 추구하고, 신분 상승을 꿈꾸려 할 때만 해도 그를 부정한 남자라고 탓하지 않았다. 아마도 당시의 무르익은 잘못된 사회 분위기 탓인지도 모르겠다. 모두들 도덕심은 팽개쳐 둔 채 정부(情婦)를 두고, 부와 권력을 쥐려는 사람들로 들끓는 파리에서, 뒤루아 자신도 그러지 말란 법이 어디 있냐는 듯이 태연스럽게 다른 이들을 닮아가고 있었다. 분명 잘못된 모습임에도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따질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흡수되어 갔다. 그러나 뒤루아는 마렐 부인을 차지하고 나자 어떻게 해야만 성공할 수 있는지를 알게 된다. 저명한 귀족부인들의 눈에 들어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 가야 한다 생각한 뒤루아는, 마렐 부인에게 만족하지 않고 또 다른 부인들을 탐색하기 시작한다.

 

  마렐 부인과의 밀회를 통해서 자신이 무척 매력적이고 많은 부인들에게 호감을 줄 수 있는 외모를 가졌다는 사실을 안 뒤루아는 그것을 한껏 이용한다. 마렐 부인과 관계를 맺으면서 자신을 취직시켜 준 포레스티에의 아내 마들렌에게까지 서슴없이 접근한다. 포레스티에가 지병으로 숨을 거두자 뒤루아는 열렬한 사랑고백을 통해 마들렌의 마음을 사로잡고 둘은 결혼하게 된다. 마들렌을 순수하게 사랑했다는 마음보다 그녀로 인해서 신분상승을 꿈 꾼 그는 마렐 부인을 쉽게 져버리고, 포에스티에의 자리(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를 차지하고 새로운 삶을 출발한다. 뒤루아가 이런 모습을 보였을 때에도 그에 대한 비판의 강도가 그다지 심해지지 않았다. 한 번의 분륜, 한 번의 결혼은 어느 정도 눈 감아 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지켜보면서 참을 수 없었던 것은 그의 내면에 자리한 인간의 그릇된 본성이 적나라함이었다. 자신이 밟아온 행보를 되돌아보기는커녕, 순간적인 욕구와 미래의 자신만 생각하며 발을 내딛는 그를 보고 있노라면 울화가 치밀었다. 이런 인간이 계속해서 여자들을 꿰어 낼 수 있는 것, 직장에서도 승진하는 것, 그리고 부와 권력을 계속해서 거머쥐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뒤루아가 어떠한 삶을 살아가고 어떠한 결말을 맞이할 것인가가 궁금해 책을 읽어 나갔지만, 중간쯤부터는 '이 남자에게 장애물이란 없다.'란 확신이 들어 독서열은 이내 시들고 말았다. 하지만 뒤루아의 행보를 끝까지 지켜보지 않는 것도 내키지 않아 끝까지 읽어나갔는데, 그의 뒤틀린 내면과 비약적인 성공에는 내리막길이 없었다. 어느 것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돈과 여자 권력에 물들어가는 뒤루아는 마들렌 부인에게서도 만족을 얻어내지 못한다. 자신의 외모와 언변으로 모든 여자를 꿰어낼 수 있다 생각한 그는 신문사 사장인 왈테르 부인까지 정복해 나간다. 이내 사장 부인에게 질려 하면서도 마들렌과의 결혼 생활, 마렐 부인과의 계속적인 불륜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그는 새로운 여자에게 손길을 뻗친다. 바로 왈테르 부인의 딸인 쉬잔이었으며, 쉬잔과 결혼하기 위해 마들렌의 불륜 현장을 증거삼아 이혼까지 한다. 마들렌의 유산 50만 불까지 챙긴 뒤루아는 갑자기 갑부가 된 왈테르 사장의 배경이 무척이나 탐이 났던 것이다.

 

  이쯤 되면 선악구조에 익숙한 독자들은 뒤루아가 분명 파멸할 것이라고, 언젠가는 자신이 한 행동에 후회를 하며, 아니면 자신이 관계 맺어온 여자들에게 뒤통수라도 맞을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뒤루아는 실패를 모르는 성공을 이어갔고, 아름다운 여성, 돈, 권력 모두를 쟁취해갔다. 그런 그에게 자기반성을 기대하기란 힘들었고, 타인의 비판을 새겨들을 거라 생각할 수 없었다. 그의 내면엔 온통 세상의 방탕함만이 차지하고 있어 그가 버린 여자들에 대한 애증은 눈곱만큼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 뒤루아를 보면서 불편함을 느낀 것은 당연했고, 저자가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는지 캐내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저자의 생생한 묘사로 인해 마치 당시의 파리에서 생활하고 있는 듯 했고, 객관적인 서술에 독자인 내가 어디까지 도덕적 잣대를 그어야 하는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인간이 어느 정도까지 타락할 수 있는지, 그 당시의 분위기가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를 가늠하기 전에 뒤루아의 모습이 낯설지 않아 씁쓸한 탄식만 읊조릴 뿐이었다.

 

   자칫 잘못하다간 뒤루아의 행동이 당시의 사회분위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노라고 자기 기만적인 동조를 이끌어 낼까봐 걱정이 되기도 했다. 분명 뒤루아의 행동과 내면은 그릇된 것으로 가득 찼으며, 그를 심판할 수 없대도 비난 할 여지는 충분했다. 뒤루아를 통해 알게 된 당시의 사회 구조는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의 차지였고, 그 속에서 많은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닮아가고 있었다. 그것을 바로잡기보다 오히려 용기를 북돋아 주는 모습에 어이가 없으면서도, 현재의 모습에서 그런 모습이 사라졌다고 말할 수 없으므로 그 또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자아를 잃어버리고, 자신의 목소리를 잃어버린 뒤루아를 보면서 이 세상에서 나의 존재란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정체성을 잃어버린다면 뒤루아처럼 행동하고 사고한 듯 어떠한 보람을 느낄 것인가. 그렇게 타락하고 메마른 본성을 가진 인간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뒤루아를 통해 자신의 내면들 들여다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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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냇물에 책이 있다 - 사물, 여행, 예술의 경계를 거니는 산문
안치운 지음 / 마음산책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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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섦'이라는 단어는 긍정적인 의미보다 부정적인 의미가 더 많은 것 같다. 낯선 사람, 낯선 장소, 낯선 환경 등을 떠올려 볼 때, 먼저 드는 감정이 두려움여서인지(적어도 내게는) 이왕이면 익숙한 것에 안주하고 싶어질 때가 많다. '낯섦'이라는 것이 새로운 도전거리를 주고, 용기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을 동시에 닮고 있으면서도 현재의 나는 '낯섦'에 대해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 독서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 내게 낯선 작가나 낯선 장르, 심지어 낯선 출판사까지 나의 관심을 끌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나 과감히 낯섦을 뚫고 새로운 세계로 발돋움을 해보면 의외로 괜찮은 책을 만날 때가 많다. 내가 관심 있는 분야의 독서도 충분히 매력을 발산하고 있지만, 종종 곁길로 들어가 새로움을 맛볼 때의 그 짜릿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안치운'이란 저자는 낯설 수밖에 없었다. 가을에는 수필이 제격이라 용기를 내어 집어든 책이었으나, 글을 읽기 전에 잘 알지 못하는 저자의 글이라는 것 때문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수필이라 큰 부담이 없었다 해도 연극계에 몸을 담고 있는 분의 글을 잘 받아들일 수 있을지 걱정부터 앞섰다. 그러나 그런 걱정은 곁길로 들어가는 새로움과 가을이여서 수필이 제격이 아닌, 인간의 내면이 드러나 있는 글은 어느 때 읽어도 진솔하다는 느낌에 순식간에 가려졌다. 그래서인지 낯선 작가와 장르에 도전해 볼 용기를 얻었고, 꼭 새로움을 맛보지 못하더라도 도전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잘 몰랐던 타인에 의해 도리어 내가 마음을 열게 된 글들을 만나는 것만큼 행복한 독서가 있을까?

 

  가을 들어 더욱 쓸쓸해진 마음 때문인지 저자가 머리말에 쓴 글귀부터 마음에 와 닿았다. '기억의 불안과 부재 속에서 산다는 것은 언제나 쓸쓸하고 외롭다.' 라는 말이 꼭 나에게 하는 것 같아 잠시 멈칫 하면서도, 그 뒤를 이어 '현실이 남루할 때 생은 과거에 지배된다는 것을 절로 깨닫는다.' 까지 내 마음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의 나는 기억의 불안함에 외로워하고, 과거의 나를 떨치지 못해 앞으로 나가고 있지 못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인정하기가 늘 껄끄러웠는데, 저자는 아무 거리낌 없이 머리말에서부터 독백 같은 내면을 흘려, 독자에게 마음의 세워진 벽을 허물어 주었다.

 

  [살며], [여행하며], [공부하고] 세 단락으로 이루어진 저자의 글은 한 사람의 내면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살아가고 있는 삶을(각자의 방향은 다르겠지만) 일상과 예술, 문화와 얽어 한쪽으로 기울어진 단편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저자가 몸담고 있는 곳이 연극계인지라 연극에 대한 소견과 자신의 경험담을 다루었지만, 어느 곳 하나 젠체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면 객관성이 부족해 독자를 불편하게 했던 글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나 저자는 담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인지 자랑할 만한 것인 것 같은데도 눈치 채지 못하고 넘어갈 때가 종종 있었다. 거기다 오랫동안 연극 공부를 해오고 현재도 연극인으로 불리면서도, 현실의 연극을 개탄하고 자신이 몸담아온 '연극'에 후회 깃든 혼란스러움을 드러내 보이고 있어, 여전히 자신의 위치를 찾아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사람으로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수필을 읽고 느낌을 남길 때 가장 난감한 것은 어떤 글이 담겨 있냐를 내비치는 것이다. 단락이 나누어 있어 간략한 설명을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글에 담긴 무게를 드러내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그의 글을 읽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이 글을 읽고 있지 않다는(신간이기에) 색다른 기분과 안타까움이 교차할 정도로 깊이 있고 평정을 유지한 글이었음을 고백하게 된다. 거기다 책 속에 글이 갇힌 것이 아니라 저자와 글, 그 글을 읽는 독자, 글을 통해서 다른 것과 이어지는 연결고리의 폭 넓은 관계를 보았다. 저자의 글을 읽는 동안 책 속에 언급된 다양한 책들을 만나고 싶어 검색을 해 본 것이 내게는 또 다른 즐거움으로 다가왔다. 파리에 유학 가서 만난 책들, 공부를 위해 읽은 책들, 자신이 만난 책들 중에서 좋았던 책들을 많이 언급하며 자신의 생각을 함께 드러내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 책을 읽고 싶다는 욕망이 솟구쳤고, 저자가 그 책을 통해 얻은 것들이 내게도 스며드는 착각이 일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저자가 언급한 책들은 대부분 절판된 책들이어서(다행히도 그 가운데 움베르토 에코의 책이 개정판으로 나와서 반가웠다.). 그 책들을 만날 수 없다는 생각에 아쉬움이 컸다. 

 

  저자의 글이 평정을 유지했다고 하지만, 마지막에 드러난 저자의 개탄을 살펴보면 이 책에 실린 글들이 그렇게 밝은 사유(思惟)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저자에게 익숙한 연극을 통해서 삶을 비유하고, 자신이 사랑했던 작품을 통해 현실을 드러내 보이는 것에 발랄함을 갖추기란 힘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을 통해 우울하거나, 삶의 희망을 느끼지 못했다는 푸념은 번지지 않았다. 오히려 진솔한 글로 인하여 내가 당면해 있는 현실을 또 다른 시각을 바라볼 수 있어 위로가 되었다. 나만이 그런 삶을 살고 있지 않다는 위로, 내게 펼쳐진 길이 무엇인지 모르기에 답답하면서도 설렌다는 희망, 인생의 끄트머리에 가서도 후회라는 것을 과감히 할 수 있다는 거칠지 않은 절망의 가능성 모두가 내게는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되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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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 1 - 4月-6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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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쌀쌀해진 날씨에 어깨가 움츠러들면서, 동시에 마음도 더 휑해진다. 날씨가 차가워지면 늘 그렇듯, 내 곁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낯설게 다가오기 때문인가 보다. 거리를 걸으면서,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면서도 드는 생각은 온통 쓸쓸함뿐이다. 꿈속에서조차 쓸쓸함을 이기지 못한 나를 보면서 나는 현재 어디로 향하며,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가란 자괴감에 빠지게 된다. 아마도 한 여인이 10살 때 사랑했다던 사람을 29살이 되도록(아이러니하게도 현재 내 나이다.)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 앞에 신세한탄이 더 늘어져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아오마메란 독특한 이름을 가진 여인은, 상대방(덴고)이 자신의 존재를 모르는 것에 개의치 않고, 언젠간 만나게 될 날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해 하는 것인지, 나에겐 그런 사람이 없다는 것에 한탄하는 것인지 헷갈리긴 하지만, 아오마메 덕분에 '사랑'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또 다른 여지를 마련하게 된 것은 사실이다.
 

  아오마메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5년 만에 내 놓은 소설의 주인공이었고, 나는 그의 작품을 읽는 내내 긴장하고 있었다. 너무나 유명한 작가라 그의 작품에 대한 개인적인 나름대로의 평가가 있을 법도 하지만, 내가 읽은 작품은 7년 전에 만난 <상실의 시대>가 전부다. 무척 흡인력 있었으나 일본문학이 지금처럼 국내에 번성하지 않은 때라 이질적인 낯섦이 지배적이었다는 기억밖에 없다. 그래서 그의 신작을 마주하고도 편견 없이 읽어 낼 자신이 없었다. 책을 읽으면서 느낀 그대로 드러내면 되지 않겠냐고 물을지 모르지만, 하나의 기억으로 인한 편견은 시간이 흘러도 남아 있기 마련이라 깨트리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되도록 평정을 유지하면서 하루키의 작품을 읽어나가려고 했고, 막상 <1Q84> 1권을 읽고 나니 긴장의 터널을 차분하게 지나온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5년 만의 신작이라곤 하지만, 내게는 7년 만의 해후이기 때문에 소설 속의 모든 것이 나를 곤두서게 만들었다. 소설의 구성은 물론이고, 묘사와 어휘 하나에도 하루키란 작가의 내면을 느끼려 애를 썼다. 그러나 굳이 애를 쓰지 않아도 그의 문체, 소설 속의 인물과 흐름은 자연스레 내게 덧입혀 졌다. 꼼꼼히 읽다 보니, 신선한 어휘에 빙그레 웃음을 짓기도 하고(어떻게 번역체에 이런 어휘를 썼을까 싶을 정도로 상큼했다.), 쉼 없이 빨려 들어가는 분위기에 녹아들고 있었다. 단락을 나눠 처음부터 끝까지 아오마메와 덴고의 시선을 따라가는 구성도 무척 독특했다. 아오마메의 이야기에 푹 빠져 있다 단락이 끝나면 아쉬워했고, 덴고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아오마메를 잊은 채 그를 따라가기 바빴다. 아오마메의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 덴고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아오마메에 관한 아쉬움을 덴고가 채워주는 식이었다.

 

  또한 둘의 시선으로 쓰인 이야기라고 하지만, 그 안에는 무수한 이야기가 내포되어 있었다. 아오마메와 덴고가 소설의 중점에 있었으므로, 그들이 언젠가는 만나고 사랑을 할 것이라는 짐작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절반 이상을 읽어나가도 그들이 만날 가능성은 희박해져만 갔고, 아오마메는 시간의 터널을 지나온 듯 조금씩 현실에서 비켜가고 있었다. 1984년을 살아가고 있는 그녀는 점차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사회의 흐름을 알게 되고, 자신의 또 다른 일(살인 청부)로 인해 이중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그렇게 서로의 길을 가는 것 같아 보이던 두 사람의 삶은 덴고의 기억의 펼쳐짐으로 인해 연관성을 발견하게 된다. 지하철에서 한 소녀를 보고 10살 때의 기억을 떠올리고, 그 기억속의 소녀가 아오마메였다는 것을 후에 그녀의 회상으로 알게 된다. 그들이 만나게 될 사건이 일어나게 될 것을 알아차리지만 그 만남은 여전히 더뎠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루하지 않았으며(그럴 틈이 없었다고 하는 것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만나게 될 것인가에 대해 아오마메 못지않은 기대와 궁금증을 가지게 되었다.

 

  두 사람이 만나게 될 가능성을 미리 엿보지 못했던 것은 너무나 판이하게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들의 방향 때문이었다. 입시학원 수학교사로 일하면서 틈틈이 소설을 쓰고 있는 덴고와, 스포츠클럽에서 일하면서 은밀한 살인 청부업자이기도 한 그녀에게서 공통점을 찾아내기란 처음부터 무리였다. 공통점은 차치하더라도 그들의 닮은 점이나 그들 사이의 간격이 좁아지는 암시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그들의 내면은 낱낱이 공개되어도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 두 개의 이야기를 읽는 듯 한 착각이 일 정도였다. 그러나 그들은 꼭 만나야 할 사람이여서인지(이유는 아직 모르지만 그런 분위기가 강하게 느껴진다.), 이야기가 깊어질수록 조금씩 간격이 좁아지고 있음을 감지하게 되었다.

 

   덴고는 자신이 쓴 소설로 신인상 응모를 하다 알게 된 편집자 고마쓰에게 위험한 제안을 받게 된다. 신인상을 주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하지만, 강렬한 끌림을 갖는 17세 소녀 후카에리가 쓴 <공기 번데기>란 작품을 고쳐 쓰라는 제안이었다. 덴고는 큰 위험을 안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소설을 고쳐 쓰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고 만다. 결국 덴고가 고쳐 쓴 소설은 신인상을 받고, 베스트셀러가 되고, 후카에리도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된다. 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후카에리의 삶과 그의 부모, 부모가 속한 코뮌 형태의 공동생활을 알아갈수록 후에 어떠한 파문을 불러일으킬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반면 스포츠클럽에서 만난 노부인의 부탁으로 인간쓰레기 같은 남자들을 제거하던 아오마메는 처참한 몰골을 한 10살 소녀를 알게 된다. 노부인은 그 소녀를 그렇게 만든 사람을 없애 달라는 부탁을 하는데 그가 바로 후카에리의 부모가 중심이 된, 지금은 교단으로 탈바꿈을 '선구'의 리더였다. 그러나 덴고가 알아가는 '선구'와 아오마메가 알아가는 '선구'의 실체는 거의 드러난 것이 없었다(리더가 여전히 후카에리의 아버지인지도 조차). 단지 <공기 번데기>로 인해 그들이 만나게 되고, 무언가를 해결하지 않을까 하는 나름대로의 짐작만 있을 뿐이다. <공기 번데기>에서 나오는 기이한 현상들이(이를테면 리틀 피플이 공기 번데기를 만들 때 달이 두개 떠오르는 장면. 그게 사실일까 싶지만 소설 속에 리틀 피플이 몸을 키우는 장면이 묘사된다.) 아오마메 눈에 보였다는 것이 바탕이 되어 주었다.

 

  줄거리를 간추린다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는, 책의 배경이 된 1984년에서 현재와의 간격을 잊게 만들 정도였다. 하지만 이 소설에는 너무나 많은 요소가 얽혀 있었다. 비현실적이고, 어딘가 모르게 어두운 냄새를 풍기는 종교와 과거의 정치적 혼란, 두 사람의 암울한 어린 시절은 결코 밝은 빛으로 인도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어둠의 나락으로도 데려가지 않으면서도 수긍할 수도 없고, 구경꾼의 위치에서 바라볼 뿐 존재의 이입이 되지 않는 소설이었다. 거기다 덴고와 아오마메의 이야기라고 단정 지을 수 없는, 수많은 이야기의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연결고리로 '나'란 존재는 물론 현실 세계를 하찮게 만들기도 했다. 덴고가 연상 녀와 섹스를 즐기는 것, 아오마메가 종종 섹스 상대를 물색해 쾌락을 즐기는 것과 노골적인 묘사들이 언짢으면서도, 이야기의 전체적인 틀의 견고함에 깊은 푸념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2권에서 그들의 행보가 어떻게 펼쳐질지, 또한 내년 여름으로 출간이 예정된 3권에 대한 기다림이 벌써부터 기대되고 걱정된다.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이슈를 낳고, 인기를 끄는 작가와 작품이 아닌, 단 한 사람의 독자인 '나'에게 어떻게 뿌리를 내리는가에 더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하루키란 작가를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될 것인가에 대해 스스로의 판단이 고대되고, 책 속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생각하면서 이야기의 매력에 빠져들고 있다. 거기다 편집자(고마쓰)와 작가 지망생(덴고)을 통해 일러주는 글에 대한 나름대로의 신념과 노하우가 내게 흡수되기를 바라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아무리 이 책에 대한 느낌을 쏟아내고 쏟아내도, 그가 펼쳐놓은 세계의 발치에도 못 닿는 느낌을 어찌해야 하는지 나는 감당조차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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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다락방 Special edition - 내일의 성공은 꿈꾸는 자의 몫이다
이지성 지음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독서를 할 때 편독하지 않으려 애쓰지만, 구미에 안 당기는 장르가 있기 마련이다. 문학에 비중을 두고 다른 장르에 조금씩 접근하는 터라 자기계발서는 내게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자기계발 서적을 처음 읽었을 때의 충격을 제대로 끄집어 내지 못한 내 탓도 있을 것이다. 그 후에 읽은 자기계발 서에서 비슷한 방법 제시와 반복되는 말들은 나의 흥미를 여전히 끌어내지 못했고, 자기계발서가 베스트셀러가 되어 인기를 끌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종종 만나게 되는 책들이 있게 마련인데, <꿈꾸는 다락방 스페셜 에디션>이 그랬다.
 

  책을 펴자마자 꼼짝 않고 읽어 버렸지만, 이 책을 꼼꼼히 보았다고 자신 있게 말하진 못하겠다.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책장은 쉼 없이 넘어갔고, 다 읽고 난 후에는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여러 가지 질문들이 나의 내면을 어지럽혔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 느낌을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 책에서 말하는 꿈을 그려보고 그것을 위해 꿈꾸며 노력하면 이뤄진다는 자기 최면적인 발상에 대한 의심보다, 과연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란 생각이 나를 더 괴롭혔다. 노트를 꺼내 내가 하고 싶은 것, 그리고 그것들이 현실화 되려면 어떠한 마음과 생각을 가져야 하는지를 써보아도 뚜렷한 한 가지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멍하니 고민을 하다 무엇에 홀린 듯 공부를 하고, 벌떡거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책을 읽다 보니 어느새 시간은 새벽 3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날이 밝은 후 어젯밤에 품었던 마음들을 떠올렸지만 생경한 기분만 들 뿐이었다. 나는 과연 무엇을 잡으려 했던 것일까. 나의 꿈을 시각화하고(vivid) 생생하게 꿈꾸면(dream), 현실(realization)이 된다는 것이 이 책의 메시지였음에도 현재의 내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나를 좌절케 했다. 저자는 자기가 이루고 싶은 것을 늘 시각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는데, 도대체 그것만으로 어떠한 변화가 찾아오는지 알 길이 없었다. 물론 꿈에 이르는 그 치열한 과정은 개개인이 이겨내야 할 자신과의 싸움이 뒤따른다. 그것을 모르는 바 아니기에, 늘 누구나 아는 사실과 실천하기 쉬운 것을 들이대는 자기계발 서를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연 그 쉬운 실천을 직접 해 본 적이 얼마나 될까. 나 또한 실천하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해 본적이 없었고, 평소 같았으면 이 책의 메시지를 대수롭게 흘려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혼란스러운 시기에 이 책을 만나서인지, 그 메시지는 나의 내면을 계속 맴돌았다.

 

  <꿈꾸는 다락방 스페셜 에디션>에서는 VD를 이끌어 내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와 VD를 이끌어 내려는 동기가 가득한 책이었다. 자기계발 서에서 가장 중점 적인 것은 독자들이 동기유발을 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고, 그 다음은 독자들이 행동할 수 있는 실천의 힘을 실어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자칫 잘못하다간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만 듣고, 자기 최면에 걸려 착각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이 책에서도 그런 면이 전혀 없었다고 말할 수 없는 부분이 종종 보이기도 했다. '자기계발은 대가지불 없는 성공을 다루지 않는다.'라고 했는데, 성공한 사람들의 노력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고 결과만 드러낸다면 많은 사람들이 머릿속에 나의 꿈을 시각화 시키고 꿈꾸며 된다는 식으로 잘못 이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책의 초반에 VD=R의 제대로 된 의미를 알려 주지 않아, 이 책을 처음 접하는 나는 답답함을 느끼기도 했다.

 

  거기다 수많은 성공사례들을 나열해서 내가 저 사람들 틈바구니에 있지 못한 것이 나의 노력의 부족과, 꿈 꿀 열정을 갖고 있지 않는 것에 문제제기를 하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해 지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자극을 시키고자, 안타까운 마음에 '당신도 할 수 있다'는 용기를 북돋워 주려는 저자의 의도는 충분히 안다. 하지만 자신의 꿈이 뭔지 몰라 방황하는 사람들에게는 되레 용기를 꺾는 것은 아닌지 노파심 깃든 걱정도 되었다. 눈앞에 VD를 통한 성공사례가 충분함에도 의심부터 하고, 난 꿈이 없다고 좌절하며, 노력하기를 귀찮아하는 나의 마인드가 잘못 된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저자의 생각을 듣고, 다른 사람들의 사례를 보면서 한 가지 생각이 계속 떠올랐다. 자기 자신에게 먼저 뜻을 관철시킨 뒤, 주변 사람들에게 품은 생각을 말하며, 그것을 향해 노력 하는 것. 그것은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기도로 신(神)과 대화하는 방법과 왠지 모르게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았던 듯, 저자는 책의 끄트머리에 '성경에서 예수가 말씀하시는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 즉 성령' 이라고 했다. 자기계발이나 성공이 아니며, 진리를 그르치는 일이 될 것이므로 이런 이야기가 매우 조심스럽다고 했다. 그것으로 내가 생각한 VD와 기도의 차이점을 이해했고, 두 가지가 나의 삶에 어떻게 자리 잡을 것인가에 조금이나마 중점을 둘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침대에 누워 몸을 뒤틀며 자가당착에 빠지고 말았다. 책의 내용을 알겠는데, 그것이 나의 현실과 접목되지 못한 것과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누가 콕 찍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내가 이룬 VD는 하나도 없다며 한숨을 쉬고 있는 찰나, 나의 눈에 들어온 것은 지난여름에 새롭게 정리한 책장이었다. 그 책장을 바라보면서 순간 당황하고 말았다. 20대 초반부터 책으로 둘러싸인 방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늘 머릿속에 상상한 것이 현재 내 방이었다. 내가 이룬 VD가 이렇게 떡 하니 있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다른 것만 생각했다는 것이 어이가 없었다. 그러면서 이 책장을 만들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을 투자하고, 현실이 될 때까지 늘 시각화하며 꿈꾸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 권씩 책을 그러모을 때마다 나의 기분이 어땠는지, 책들이 늘어감에 따라 책장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그 모든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제야 내가 할 수 있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하며 낮은 가능성 하나를 내 안에 집어넣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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