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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의 이름 ㅣ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38
아모스 오즈 지음, 정회성 옮김 / 비룡소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서른을 눈앞에 두고 있는 나이임에도 한 편의 로맨스를 꿈꾸며 잠이 들곤 한다. 소설 속에서 멋진 인물을 발견했거나, 언뜻 TV에서 본 매력적인 사람이라든가, 순간적인 호감(말 그대로 길지 않은 호감)을 가진 사람을 끌어들여 말도 안 되는 판타지를 만들어 낸다. 그런 나를 보고 있으면 철딱서니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꿈에서라도 로맨스를 이뤄보고 싶은 욕망에 가엾어지곤 한다. 그런 일이 현실에서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허황된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어떨까? 어느 날 갑자기 내게 환상적인 사랑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집에 가서 하룻밤을 같이 보내게 되는 꿈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말이다.
어른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좋아하는 사람 집에서 하룻밤을 보낸다는 것에 대해 이상야릇한 상상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그 주인공은 바로 11살 소년 숌히였다. 말 그대로 숌히는 같은 반 소녀 에스티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는다(정확히 말하면 묵으려는 찰나 숌히의 아버지가 데려오긴 했지만). 그러나 이 책의 전체적인 내용이 숌히가 에스티네 집에서 묵는다는 것은 아니고, 숌히에게 주어진 기나긴 하루의 끝자락에 선물을 받는 듯, 숌히는 에스티와 잠시 꿈같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숌히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은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이스라엘은 영국군이 주둔해 있어 몹시 흉흉했고, 어린 아이들에게도 영국군과 말이라고 섞을라치면 첩자로 통했다. 그런 상황이었기에 숌히가 당면한 현실은 풍족하거나, 자유롭거나, 화목하다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 그에게 괴짜삼촌이 하나 있었는데, 그 삼촌에게 생일 선물로 자전거를 받는다. 귀한 선물을 받은 숌히는 여자용 자전거라는 사실에도 개의치 않고, 자전거를 타고 뽐내며 거리를 달린다.
그러나 숌히가 진정 하고 싶은 것은 그 자전거를 타고 아프리카 여행을 하는 것이었다. 자전거만 있다면 아프리카 대륙을 끝없이 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릴 적 누구나 꿈꿔볼 수 있는 평이한 꿈일지 몰라도, 숌히가 처해있는 상황에서는 절대 평범해 보이지 않는 꿈으로 비춰졌다. 부모님은 시간과 장소를 정해놓고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만들어 놓았고, 다른 아이들도 쉽게 자전거를 탈 수 없었다. 그랬기에 숌히는 자전거를 타고 꼭 아프리카 대륙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었고, 그 욕망을 채우기 위해 집을 떠나 부족한 것 없이 풍요롭게 사는 친구 알도에게 간다. 알도의 집은 부자였지만, 부모님이 자전거를 사주지 않았기에 알도의 흥미를 끌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알도네 집으로 몰래 자전거를 가져 간 숌히는 알도에게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는다. 그러나 알도는 여행보다 숌히의 자전거가 탐이 났는지, 숌히의 눈을 휘둥그렇게 만들 기차놀이 세트와 교환하자고 한다. 숌히는 얼떨결에 자전거와 기차세트를 교환해서 집으로 귀가하던 중 자신을 괴롭히는 고엘과 마주치고 만다.
고엘에게 순순히 기차세트가 들어온 경로를 설명해 주었지만, 고엘은 자신을 과시해 기차세트와 셰퍼드를 교환하게 만든다. 말도 듣지 않는 셰퍼드와 기차세트를 바꾸게 된 숌히는 결국 개마저 도망가 버리자, 망연자실해서 계단에서 울고 만다. 풀밭에서 연필깎이 하나를 주웠지만, 자신의 신세가 너무나 처량했다. 그 모습을 에스티의 아버지가 발견하게 되고, 숌히는 적당히 둘러대서 에스티의 집으로 향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에스티의 방에서 하룻밤을 묵을 수 있었고 연필깎이마저 에스티가 가져가 버렸지만, 에스티와 많은 대화를 통해 그들은 좋아하는 사이가 된다. 그러나 그 사랑이 오래가지 않았노라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모든 것은 변해갔다며 저자는 이야기를 마무리 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 책의 내용이 허무할 수도 있고, 당시의 이스라엘의 분위기를 상세히 묘사한 책 내용에 어떤 것이 중점인지 혼란스러울 수도 있는 내용이었다. 아마 아모스 오즈의 작품을 접해보지 않은 독자라면 그 낯섦과 혼란스러움은 더 가중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모스 오즈의 작품을 거의 다 읽어와서인지 이 작은 소설을 마주하는 것이 무척 기뻤다. 아모스 오즈는 세계적으로 유명하지만 국내에는 인지도가 낮다는 옮긴이의 말에 동감을 하면서도, 그의 작품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즐거웠다. 거기다 아모스 오즈의 작품을 처음 접하는 독자들에겐 이스라엘의 사람들의 기질과 그 당시의 배경에 이질감이 느껴질 수 있을지도 모르나,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의 거리, 아모스 오즈의 다른 소설에서 비춰졌던 요소의 언급을 발견하는 것이 내게는 흥미로웠다. 이를테면 고엘이 숌히에게 영국군의 첩자라고 놀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숌히는 던롭 하사와 언어를 배웠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 내용은 <지하실의 검은 표범>이란 작품에서 상세히 나왔기에, 그런 연결과 발견이 아모스 오즈의 작품을 즐기는데 재미를 가중시킨 것이다. 또한 어린나이임에도 이스라엘 민족의 고충을 실토하는 장면이나, 알도가 자신의 집에 걸린 그림과 높은 직위에 있는 친척을 자랑하자 '전능하신 우리 주 하나님만이 온 우주의 왕이셔'라고 생각하는 부분에서는 무척이나 귀여웠다.
신간이 나왔다는 것을 알자마자 바로 주문할 만큼 아모스 오즈는 내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작가다. 그의 번역본을 눈 빠지게 기다리는 것이 종종 지칠 때가 있는데(그 이외의 책들이 충분히 채워주고 있다 해도.), 이렇게 우연히 신간 소식을 알 때처럼 기분 좋은 것도 없다. 국내에서도 인지도가 높아져서 미처 번역되지 못한 책들이 번역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의 책이 출간될 때마다 바로 구입해서 읽고 싶고, 한권씩 쌓여서 책장 가득 채워놓고 뿌듯해하는 나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 설렌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기다리는 것은, 그것으로도 삶을 살아갈 가치가 있노라고 언급할 만큼 또 다른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