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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아미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3
기 드 모파상 지음, 송덕호 옮김 / 민음사 / 2009년 9월
평점 :
모파상의 명성은 익히 들어왔으며, 그의 작품을 읽지 않았음에도 마치 읽은 것 같은 착각이 일 정도로 친숙하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 대해서 내가 아는 것은 없었고, 언젠가는 읽고 싶다는 기약 없는 다짐만 하고 있었다. 어떠한 작품을 첫 작품으로 읽게 될 것인가에 고민할 틈도 없이, 내게 먼저 안긴 작품은 <벨아미>이었다. 민음사 세계문학 시리즈로 나와서 먼저 마주하게 되었는데, 두툼한 두께에도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왠지 금방 읽힐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고, 그 예상은 빗겨가지 않았고 거리낌 없이 책장이 넘어갔다. 하지만 중간 중간 책 읽기를 멈출 수밖에 없었는데, 편협하게 흘러가는 주인공 벨아미의 행보 때문이었다.
아름다운 남자, 벨아미로 불리는 뒤루아의 첫 등장은 몹시 궁색했다. 하사관으로 지내다 퇴역한 그는 철도회사에 다니며 돈에 쪼들리는 생활을 하면서 파리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런 그를 보고 있자니 이 두툼한 책에서 어떻게 활개를 칠지 기대가 되면서도 몹시 안쓰러웠다. 남자라면 성공하고 싶은 욕망, 부에 대한 욕망이 불타오르는 법인데, 그가 거리에서 보는 사람들은 모두 자신보다 잘나 보이고 풍요로워 보였다. 어떻게 하면 돈을 거머쥐고, 신분 상승을 꿈꿔볼까 그런 생각만 하고 있던 찰나 신문사에 다니는 옛 전우 포레스티에를 우연히 길거리에서 만난다. 그의 도움으로 신문사에 취직하게 된 그는 서투른 출발자의 모습을 보이지만, 이내 신문사의 생리와 귀족사회의 병폐를 속속들이 알아가게 된다. 정부(情婦)를 취해 부와 권력을 거머쥐려는 뒤루아는 포레스티에를 통해 알게 된 드 마렐 부인과 불륜을 저지르고, 육체의 쾌락과 물질에 대한 욕구를 조금씩 해소시켜 간다.
뒤루아가 마렐 부인과 쾌락을 추구하고, 신분 상승을 꿈꾸려 할 때만 해도 그를 부정한 남자라고 탓하지 않았다. 아마도 당시의 무르익은 잘못된 사회 분위기 탓인지도 모르겠다. 모두들 도덕심은 팽개쳐 둔 채 정부(情婦)를 두고, 부와 권력을 쥐려는 사람들로 들끓는 파리에서, 뒤루아 자신도 그러지 말란 법이 어디 있냐는 듯이 태연스럽게 다른 이들을 닮아가고 있었다. 분명 잘못된 모습임에도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따질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흡수되어 갔다. 그러나 뒤루아는 마렐 부인을 차지하고 나자 어떻게 해야만 성공할 수 있는지를 알게 된다. 저명한 귀족부인들의 눈에 들어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 가야 한다 생각한 뒤루아는, 마렐 부인에게 만족하지 않고 또 다른 부인들을 탐색하기 시작한다.
마렐 부인과의 밀회를 통해서 자신이 무척 매력적이고 많은 부인들에게 호감을 줄 수 있는 외모를 가졌다는 사실을 안 뒤루아는 그것을 한껏 이용한다. 마렐 부인과 관계를 맺으면서 자신을 취직시켜 준 포레스티에의 아내 마들렌에게까지 서슴없이 접근한다. 포레스티에가 지병으로 숨을 거두자 뒤루아는 열렬한 사랑고백을 통해 마들렌의 마음을 사로잡고 둘은 결혼하게 된다. 마들렌을 순수하게 사랑했다는 마음보다 그녀로 인해서 신분상승을 꿈 꾼 그는 마렐 부인을 쉽게 져버리고, 포에스티에의 자리(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를 차지하고 새로운 삶을 출발한다. 뒤루아가 이런 모습을 보였을 때에도 그에 대한 비판의 강도가 그다지 심해지지 않았다. 한 번의 분륜, 한 번의 결혼은 어느 정도 눈 감아 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지켜보면서 참을 수 없었던 것은 그의 내면에 자리한 인간의 그릇된 본성이 적나라함이었다. 자신이 밟아온 행보를 되돌아보기는커녕, 순간적인 욕구와 미래의 자신만 생각하며 발을 내딛는 그를 보고 있노라면 울화가 치밀었다. 이런 인간이 계속해서 여자들을 꿰어 낼 수 있는 것, 직장에서도 승진하는 것, 그리고 부와 권력을 계속해서 거머쥐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뒤루아가 어떠한 삶을 살아가고 어떠한 결말을 맞이할 것인가가 궁금해 책을 읽어 나갔지만, 중간쯤부터는 '이 남자에게 장애물이란 없다.'란 확신이 들어 독서열은 이내 시들고 말았다. 하지만 뒤루아의 행보를 끝까지 지켜보지 않는 것도 내키지 않아 끝까지 읽어나갔는데, 그의 뒤틀린 내면과 비약적인 성공에는 내리막길이 없었다. 어느 것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돈과 여자 권력에 물들어가는 뒤루아는 마들렌 부인에게서도 만족을 얻어내지 못한다. 자신의 외모와 언변으로 모든 여자를 꿰어낼 수 있다 생각한 그는 신문사 사장인 왈테르 부인까지 정복해 나간다. 이내 사장 부인에게 질려 하면서도 마들렌과의 결혼 생활, 마렐 부인과의 계속적인 불륜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그는 새로운 여자에게 손길을 뻗친다. 바로 왈테르 부인의 딸인 쉬잔이었으며, 쉬잔과 결혼하기 위해 마들렌의 불륜 현장을 증거삼아 이혼까지 한다. 마들렌의 유산 50만 불까지 챙긴 뒤루아는 갑자기 갑부가 된 왈테르 사장의 배경이 무척이나 탐이 났던 것이다.
이쯤 되면 선악구조에 익숙한 독자들은 뒤루아가 분명 파멸할 것이라고, 언젠가는 자신이 한 행동에 후회를 하며, 아니면 자신이 관계 맺어온 여자들에게 뒤통수라도 맞을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뒤루아는 실패를 모르는 성공을 이어갔고, 아름다운 여성, 돈, 권력 모두를 쟁취해갔다. 그런 그에게 자기반성을 기대하기란 힘들었고, 타인의 비판을 새겨들을 거라 생각할 수 없었다. 그의 내면엔 온통 세상의 방탕함만이 차지하고 있어 그가 버린 여자들에 대한 애증은 눈곱만큼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 뒤루아를 보면서 불편함을 느낀 것은 당연했고, 저자가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는지 캐내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저자의 생생한 묘사로 인해 마치 당시의 파리에서 생활하고 있는 듯 했고, 객관적인 서술에 독자인 내가 어디까지 도덕적 잣대를 그어야 하는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인간이 어느 정도까지 타락할 수 있는지, 그 당시의 분위기가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를 가늠하기 전에 뒤루아의 모습이 낯설지 않아 씁쓸한 탄식만 읊조릴 뿐이었다.
자칫 잘못하다간 뒤루아의 행동이 당시의 사회분위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노라고 자기 기만적인 동조를 이끌어 낼까봐 걱정이 되기도 했다. 분명 뒤루아의 행동과 내면은 그릇된 것으로 가득 찼으며, 그를 심판할 수 없대도 비난 할 여지는 충분했다. 뒤루아를 통해 알게 된 당시의 사회 구조는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의 차지였고, 그 속에서 많은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닮아가고 있었다. 그것을 바로잡기보다 오히려 용기를 북돋아 주는 모습에 어이가 없으면서도, 현재의 모습에서 그런 모습이 사라졌다고 말할 수 없으므로 그 또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자아를 잃어버리고, 자신의 목소리를 잃어버린 뒤루아를 보면서 이 세상에서 나의 존재란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정체성을 잃어버린다면 뒤루아처럼 행동하고 사고한 듯 어떠한 보람을 느낄 것인가. 그렇게 타락하고 메마른 본성을 가진 인간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뒤루아를 통해 자신의 내면들 들여다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