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도서관 기행 - 오래된 서가에 기대 앉아 시대의 지성과 호흡하다
유종필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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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운 도서관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면 할 말이 많아진다. 도서관을 이용하려면 거의 등산과 다름없는 오르막길을 올라가야 하는 불편함 때문이다. 도대체 도서관을 이용하라는 건지, 올 테면 와보라는 심산인지 한 번 오를 때마다 다리에 힘이 풀리곤 한다. 최근 들어 도서관 옆에 18층 아파트가 들어섰는데도 3층인 도서관이 더 높은 것을 보고, 또한번 도서관의 위치에 대해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지리적인 위치와 접근성에 있어서는 많은 점수를 줄 수 없는 게 내가 이용하는 도서관에 대한 평가다. 지방 소도시의 도서관이기에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세워질 도서관에 대해서는 도서관과 시민이 친해지게 만들어주는 노력이 깃들었으면 하는 바람이 늘 간절하게 일곤 한다.

 

  도서관의 지리적인 위치와 내 방에 소장된 책들 때문에 도서관을 자주 이용하지는 않지만, 새삼스레 다시 도서관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 것은 <세계 도서관 기행>이란 책 때문이었다. 책을 펼쳐들기 전까지 세계의 멋진 도서관의 경관을 중점으로 다룬 책이라 생각했었다. 각 나라의 도서관의 독특한 풍경들을 한 권의 책에 담을 수 있을 거라 생각지 못한 오산이었다. 현재 국회도서관 관장직을 맡고 있는 저자는 세계의 도서관을 여행하면서 느낀 것들을 최선을 다해 전해주었다. 세계의 도서관을 한 권의 책으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이토록 감명 깊게 다가온 적이 없을 정도로, 각 나라의 역사가 들어있는 도서관을 둘러보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처음 마주한 도서관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었다. 이 도서관의 탄생은 아리스토텔레스로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역사가 깊었다. 건물부터 보관하고 있는 장서의 양까지 방대하기 그지없는 이 도서관은 역사의 한 토막을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성경을 통해 배웠던 인물들의 등장과 에피소드를 도서관을 통해 만날 수 있어서인지 첫 만남이 무척 기억에 남는다. 저자가 여행한 도서관의 순서는 책의 순서와 좀 다르지만, 이집트를 거쳐 유럽의 도서관을 향해 아메리카와 아시아를 거치는 여정이었다. 대륙별로 구분을 해 놓아서인지 동선이 머릿속에 쉽게 그려졌고, 각 나라별의 도서관의 특징을 비교해 볼 수 있어 좋았다.

 

  이집트, 영국, 독일, 프랑스, 미국, 중국 등 대표적인 도서관을 보면서 느낀 점은 크기부터가 상상을 초월한다는 점이었다. 열람실 위주의 국내의 도서관과는 달리, 희귀본부터 각 나라의 중요 문헌까지 훑어볼 수 있는 자료의 양은 숫자로 표기 해줘도 피부에 와 닿지 않았다. 그만큼 도서관이라는 장소는 단순하게 지식을 탐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거기다 그곳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책을 빌리고, 공부하러 간다는 개념을 떠나 일상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혀 있는 도서관이라는 위치가 생각보다 큰 것에 놀랐다. 각 나라의 유명 인사를 비롯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도서관에서 인생을 배우고, 현재의 위치를 만들어 준 곳이 도서관이었다는 자랑을 서슴지 않을 정도로, 도서관이 단순히 책이 소장 되어 있는 곳의 의미로만 생각되어 지지 않았다.

 

  또 다른 특징은 나라의 고위 지도자들이 도서관에 지대한 관심을 쏟으면 도서관의 질이 달라진다는 점이었다. 과연 저런 곳에서 공부를 하고, 책을 읽어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답고 포근한 분위기의 건축물들이 많았다. 물론 그 나라의 도서관이 다 그렇게 생겼다는 것도 아니고, 대표적인 도서관을 소개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도서관에 대해 그런 애정을 쏟는다는 것이 무척 부러웠다. 수많은 정보를 공개하고, 시민들에게 알 권리를 제공하며, 세계에 펼쳐진 지식을 탐구할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겉과 속이 모두 꽉 찬 도서관들을 보면서 직접 가서 구경하고 싶어 괜히 몸부림이 쳐졌다.

 

  저자는 서문에 국내 최초로 러시아 도서관을 조명했다는 것에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했다. 그동안 러시아 도서관에 관한 소개가 없다는 사실을 몰랐지만, 내가 좋아하는 러시아의 도서관을 구경할 수 있다는 사실에 무척 설다. 이 책에서 상당부분을 할애해서 소개하고 있는 러시아 도서관은 넓은 땅덩어리만큼이나 위용을 자랑하는 도서관이 여럿 되었다. 19세기 세계 문학을 이끌었던 쟁쟁한 작가들이 대거 배출된 나라인 만큼 책을 사랑하고, 도서관에 관한 애정이 남달랐다. 예술도서관이 있는 것이 독특했고, 모스크바 대학과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이 도서관을 비롯해 유명인사 배출과 대학의 우수함을 자랑하며 경쟁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좋아해서인지 러시아 도서관에 관한 소개가 가장 흥미로웠던 것 같다. 도스또예프스끼의 흔적을 엿볼 수 있었고, 톨스토이의 문학이 나와 잘 맞지 않는 이유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예술적인 면모와 정치사를 모두 내포하고 있는 도서관은 그 자체만으로도 이야깃거리가 넘쳐났다. 도서관 기행이라고 해서 단순하게 건물을 둘러보고, 장서를 파악하며, 어떤 희귀본이 있는지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 역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곳이기에 도서관은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오기 충분했다. 많은 사람들이 상주하고, 애정을 쏟고, 지식을 채워가는 도서관을 둘러보면서 마치 세계사를 엿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 작업을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듯, 도서관에서는 지나온 역사가 저장되어 있었고, 앞으로 다가올 역사에 대해서도 차곡차곡 정보를 쌓아가고 있었다.

 

  이렇듯 도서관을 둘러보는 것은 무척 흥미로웠고, 국내에는 어떤 도서관이 있으며 어떠한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비교할 수 있어 유익한 시간이었다. 국내에도 조금씩 움트고 있는 도서관에 관한 관심이 미래를 희망적으로 보게 했고, 소외된 자들에게도 지식을 나눌 수 있는 도서관이 많아지길 진정으로 바랐다. 그러나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여러 나라에 퍼져 있는 우리의 귀중한 고서들이었다. 약탈과 빼돌림 등 여러 경유로 흩어진 귀중한 서적들은 세계 각국에 퍼져 있었고, 그것들을 다시 되찾아 오기란 무척 힘들다는 것이 느껴졌다. 일본과 프랑스에 흘러들어간 서적들이 가장 안타까웠고, 국보급의 책들이 그런 과정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이 씁쓸했다. 비단 우리나라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은 나라가 없듯이, 어느 나라나 그런 고충은 잠재해 있었다. 다른 나라를 침략할 때 그 나라의 책들과 문자와 언어를 가장 먼저 없애려는 것처럼, 그런 노력까지도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는 곳이 도서관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나라에는 저런 도서관이 없다는 것과 내 주변에 훌륭한 도서관이 없다는 사실이 참으로 개탄스러웠다. 하지만 도서관 구경에서 끝나지 않고 그 나라의 흔적을 둘러보는 일은 생각보다 무척 흥미롭고 뿌듯한 경험이었다. 도서관에서 이렇게 많은 이야기가 흘러나올 거라 생각하지 못했고,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책을 사랑하고 지식을 갈구한다는 사실에 왠지 모를 동질감을 느꼈다. 우리나라 국민 1인당 장서 수는 1.18권이라고 한다. 내 방에 쌓여 있는 책들이 1인당 장서수를 늘려주길 바랐고, 읽어야 할 책이 산더미라고 더 이상 한숨짓지 않게 되었다. 우리가 책을 읽고 지식을 탐하는 순간에도 역사의 한 페이지가 쓰이고 있다. 작은 행위로 인해 보이지 않는 지식이 형성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많은 사람들이 동참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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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친구 - 박수현 교육소설
박수현 지음 / 다산에듀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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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장소설을 좋아하는 터라 <세 친구>가 도착하자 책장에 꽂을 겨를도 없이 바로 펼쳐 들었다. 성장소설 냄새가 물씬 풍기는 겉표지와 제목을 보고 있자니, 괜히 흐뭇하면서도 '교육소설'이라는 문구에 경계태세를 갖췄다. 내 맘대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소설의 매력이라면 매력인데, 거기다 교육적인 의미를 찾아야 한다니 살짝 걱정이 되기도 했다. 재미는 재미대로 못 느끼고, 교훈은 교훈대로 못 찾으면 어쩌나 하는 앞선 걱정이었다. 그래도 소설이 주는 매력을 거부할 수 없어 '교육소설'이라는 문구를 배제하고 책을 펼쳐 들었고, 한 호흡에 책을 읽어 버렸다.

 

  책을 읽고 나서 주인공인 인서, 창희, 정우와 같은 학년인 조카에게 책을 줘야겠다고 다짐했다. 올해 중 2가 된 조카에게 거창한 말을 건네며 책을 주기보다 책을 읽고 스스로 느껴가도록 유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성장 중인 조카에게 분명 유익한 소설이 될 거라는 생각과 함께 홀가분한 마음으로 책을 건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세 친구>를 읽고 내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고, 책을 덮은 후에도 책의 이미지가 사라지지 않았다. 자잘한 사건들, 그 안에서 오고간 대화, 조금씩 느껴가고 실천해 가는 아이들을 보면서 나는 아직도 애 어른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어른이나 아이나 갑작스런 시련이 닥치면 누구나 마음의 방어벽을 치게 마련이고 방황하고 된다. 특히나 성장 중인 아이들에게 어른조차 감당하기 힘든 시련이 닥치면 평생 마음의 상처를 갖게 된다는 것을 주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렇기에 중학교 2학년인 인서에게 갑작스런 아빠의 죽음과 엄마와의 헤어짐, 이모와 함께 살게 된 환경들이 기꺼울 리 없었다. 이 상처가 풀리지 않는다면, 인서의 성장에도 큰 영향을 미칠 거란 걱정이 앞섰다. 너무나 사랑했던 아빠를 잃었다는 슬픔을 느낄 새도 없이 엄마는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버렸고, 친하지도 않은 이모와 함께 살게 되었다. 모든 것이 낯설고 혼란스러웠고, 자신에게 닥친 변화가 너무나 버거웠다.

 

  이모 집으로 옮기던 날, 이모는 인서에게 자잘한 규칙들을 알려주면서 아무리 곤란한 이야기라도 털어놓으면 도와주겠다는 말을 했다. 이모에게 손만 뻗으면 인서의 마음을 풀어 놓지 못할 것도 없었지만, 인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마음을 더 감추고 움츠러들고 싶었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엄마조차 그렇게 허망하게 외국으로 떠나 버린 것이 원망스러웠다. 그런 인서의 곁에는 모범생인 정우와 뚱뚱하고 잠만 자는 창희가 있었다. 그 친구들에게 조금 기대면 좋으련만. 인서의 틀어져 버린 마음은 그 친구들에게 상처를 주기 급급했다. 답답한 마음을 풀고자 정우에게 오토바이를 훔쳐서 타자는 제안을 하고, 인서를 생각해서 정우는 실행에 옮긴다. 그러다 오토바이로 인해 궁지에 몰리게 되자 정우는 자신이 책임지겠다며 가출을 해 버린다.

 

  잠만 자고 먹을 것만 밝히는 창희는 상대방을 편하게 해주는 매력이 있음에도, 인서는 그런 창희를 자신의 짜증으로 상처를 준다. 모든 것이 복잡하게 꼬이고 얽혀 들어갈 때, 도저히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협박 문자를 보내 자신을 찾아온 정우를 데리고 이모에게 자초지종을 말한다. 이모는 인서와 정우가 일주일동안 고민한 일을 몇 시간 만에 해결해줬고, 그때부터 조금씩 인서의 마음에는 무언가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발을 내미는 것은 고통스럽다는 것, 현재가 생각만큼 불행하지 않다는 것,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며 알아가려는 기미가 보였다.

 

  인서에게 이모의 존재는 그때부터 새롭게 두각을 드러낸다. 인서가 삶에 대해, 고통에 대해 질문을 할 때도 차분하게 모든 것을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인서가 도움의 손길을 뻗치면 언제든지 도움을 주었다. 인서는 그동안 이모가 자신을 방치해 왔다고 생각했지만, 이모는 인서가 스스로 느끼고 깨달을 때까지 기다려 준 것이었다. 엉망인 자신의 방을 이모와 함께 치우며 새로운 마음을 갖게 된 것도, 인도에 있는 아빠가 후원했다는 아이에 대해 알게 된 것도, 습관에 대해 중요한 이치를 깨달은 것도, 엄마에 대한 상처를 극복하고 이해하게 된 것도 이모 덕분이었다. 정우와 창희를 통해서 사회의 따뜻함과 팍팍함도 경험하게 된다. 창희한테 할 줄 아는 게 뭐냐고 상처를 주고 제대로 사과조차 못했는데도, 창희는 스스로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다 어려운 환경에 처한 할머니와 손자를 돕게 된다.

 

  그 일에 동참하게 하게 되면서 알바도 해보고, 자신보다 더 힘든 사람을 돕고, 꼭 돈이 아니더라도 도울 수 있다는 방법을 알게 되며, 사이가 나빴던 창희와 정우도 사이가 좋아진다. 세 아이는 사건을 통해 경험하게 되고, 경험을 통한 깨달음으로 서로에게 부족한 것들을 메워가기 시작한다. 모범생인 정우는 즐겁게 공부하는 방법을 인서에게 배우고, 창희는 정우를 통해 공부하는 습관을 갖게 된다. 인서는 두 친구들과 이모를 통해 삶의 활력을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고통에 찬 현실을 극복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이모가 정말 힘들었을 때, 자신을 사랑하기로 한 다음에 다시 일어섰다고 했던 것처럼, 인서도 자신을 사랑하고 자존감을 높여 가면서 서서히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가게 된 것이다.

 

  이 책은 <습관>이라는 제목으로 먼저 출간 되었다고 한다. <습관>도 중요한 교훈이 되어 주었지만, 한정된 제목으로 가두기에는 너무 많은 교훈이 들어 있어 <세 친구>라는 제목이 더 마음에 든다. 아이들이 깨달은 것을 실천하며, 자신의 꿈을 찾아 스스로 내딛는 모습을 보며 어른이면서도 많이 부끄러웠다. 하나의 습관을 들이지도 못하고,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며, 현실에 안주해 버리는 모습이 현재의 내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책 속의 주인공이 청소년이라는 것도, 교육소설이라는 타이틀도 나를 들여다보는데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세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신의 꿈을 찾아 나아가는 것처럼, 내가 가진 꿈이 있다면 그것을 이루기 위해 작은 노력이라도 시작해야겠다는 용기를 안겨준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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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스러운 세 도시
J.M.G. 르 클레지오 지음, 홍상희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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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르 클레지오는 200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알게 된 작가다. 개인적으로 노벨문학상에 큰 의의를 두지 않은 편이지만, 이목이 집중되는 터라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관심을 스스로 채우기도 전에 지인으로부터 르 클레지오의 책을 선물 받았다. 그 가운데 <성스러운 세 도시>를 먼저 접하게 되었는데, 무척 얇은 책이라고 얕보았다가 고역을 치르고 말았다. 100페이지가 안 되는 책이었기에 순식간에 읽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오만이었다. 무수히 흩어져 버린 언어를 부여잡을 길이 없어 책을 다 읽고도, 도무지 읽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다 다음에 다시 읽어보겠노라 다짐하며 책꽂이에 도로 꽂아 버렸다.

 

  책장에 묵혀 놓고 시간이 흐른 후에 다시 펼쳐들었을 때, 오히려 득이 되는 책을 만나게 된다. <성스러운 세 도시>와의 첫 만남이 실패로 끝났기 때문에 시간에 흐름에 어느 정도 기대를 품고 책을 묵혀 두었다. 이미 한 번 읽은 뒤라 다시 도전해 볼 양으로 6개월 쯤 지난 후에 책을 다시 펼쳐 들었지만 절반 정도 읽다가 다시 덮어 버렸다. 그렇게 책이 내게 온지 1년 쯤 되어 다시 펼쳤을 때는 세 번째로 만나는 셈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세 번째 만남에서도 이 작품과의 조우는 실패로 끝났다. 줄거리를 가늠한다는 것도 무리였고, 한 문장에서도 의미는 수십 개로 갈렸다. 그런 문장이 이어져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지고, 한 권의 책으로 묶인다는 것은 도무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무게가 아니었다.

 

  총 세 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 <성스러운 세 도시>는 지명도 낯선 샨카, 딕스카칼, 슌폼을 향해가는 여정을 담고 있었다. 작품 속에서 언급된 지명과 묘사를 통해서 문명과 닿지 않는 곳이라는 것과 남미 쪽을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을 했다. 역자 후기를 보고 추측이 어느 정도 맞아 떨어짐을 알았지만, 그 이상을 얻어내기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신성의 언어를 아름답게 흩뿌려놓는 작가'라는 찬사도 내게는 낯설 정도로 언어의 흩어짐만 경험한 셈이었다. 마치 한 그루의 나무에서 무수히 뻗어 있는 가지들이 저마다의 목소리를 한꺼번에 드러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혼란스러움에서 저자가 작품 속에 녹여놓은 의미를 찾는다는 것도 꼭 그 의미와 일치하지 않더라도 독자가 무언가를 찾아낸다는 것도 여전히 무리였다.

 

  차라리 그의 문장을 이어가려고 애쓰지 말고, 문장 자체에 의의를 두고 읽어간다면 언어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실제로도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문장을 읽어보면 묘사의 뛰어남을 느낄 수 있다. 조금씩 마음을 뺏겨 몇 문장을 더 읽어나가다 보면 평소에 문학을 읽으며 만날 수 없었던 독특한 이미지를 그려주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문장과 문장이 만나 이야기를 엮어 가는 것이 소설의 매력인데 그 이야기들이 어디를 향하는 지 알 수 없었고, 문명을 멀리한 그들과 나는 더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그 숭고함과 신성함을 세상에 찌든 내가 알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며, 어떠한 생각으로 읽어야 이 소설이 온전히 들어올 수 있을까? 책을 읽는 내내 나를 사로잡는 생각이었고, 세 번째의 만남에서도 큰 수확을 얻지 못해 여전히 남아 있는 아쉬움이었다. 어쩌면 이 책을 읽는 방법은 문장을 느끼고 줄거리를 이해하며 따라가기보다, 순간순간 느껴지는 것들로 자신을 채우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어디로 향하는지, 무슨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에 중점을 두다보면 언어의 아름다움을 느끼기도 전에 지쳐버릴 것이다. 때로는 내용을 파악하는 것보다 만남 그 자체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독서의 한 방법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언어의 흩어짐으로 온전한 만남을 이루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언어의 흩어짐이 수려한 흩뿌려짐이었다는 것을 느낄 날이 있음에 희망을 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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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어를 금하노라 - 자유로운 가족을 꿈꾸는 이들에게 외치다
임혜지 지음 / 푸른숲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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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특한 제목에 마음이 끌렸으면서도 몇 장 떠들러 보고는 책을 도로 덮어 버렸다. 도무지 저자의 문체에 적응할 수가 없어서였다. 쉰을 넘긴 저자는 고등학교 때 독일로 이주한 건축가로 대전 엑스포 때 스위스관 설계 및 기획에 참여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이외에도 가정주부로써 독특한 생활방식을 고수하고 있다는 소개가 독일에서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는지 궁금증을 불러 일으켰다. 저자는 독일인 남편과 아들과 딸을 간략한 소개와 함께 책의 포문을 열었는데, 평범하지만 비범한 무언가가 엿보였다. 그런 엿보임에 응하듯 가족의 생활방식을 풀어냈는데, 순수한 의도를 파악하기 전에 문체가 낯설어 책을 덮어 버린 것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 책을 방치하다 이 책에 관심을 보인 지인을 만나면서 다시 책을 펼치게 되었다. 내가 문체가 낯설고 젠체한다는 느낌이 강하다고 했더니, 교포라서 그런 것 같다고 적응하면 괜찮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독일로 건너간 지 30년이 넘었는데, 내 입맛에 맞는 문체를 기대했던 것이 욕심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한 번 읽어보기로 하고 지인이 충고를 받아들여 문체에 대한 곤두섬을 자제시켰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책이 술술 잘 익혔고, 문체에 감춰졌던 글의 본질들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가족에 관한 이야기로 채워진 첫 단락을 읽으면서, 이 책의 내용이 끝까지 그런 형식으로 이어질 거라는 섣부른 판단이 본질을 흐리게 한 것이 아닌가 싶다. 독특한 가족의 이야기를 차분하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젠체한다고, 너무 드러낸다고 괜히 트집을 잡았다. 책의 끝까지 그 문체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사소한 것을 무시하니 책의 진가가 드러났다. 저자는 평범하다면 평범할 수 있고, 독특한 시선으로 보자면 정말 독특한 생활을 영위해 나가는 사람으로 보였다. 그 기준이 모호하기에 각자가 느끼는 느낌대로 판단해 나가면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면 될 것 같았다.

 

  첫 단락에서는 저자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들 각각의 삶과 한데 어우어지는 모습이 어떠한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 부분을 읽으면서도 '이렇게 살기도 하는구나!'란 감탄이 아닌, 트집을 잡다 책을 덮어 버린 것이다. 다시 읽어보니 객관적인 입장에서 한 가족을 바라보면 이해 못할 부분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성격은 달라도 이상(理想)이 같은 남자와 결혼해서 사는 것이 어떠한 지를 보여주고, 그 안에서 아이들이 어떻게 자라나는지를 보여주었다. 최대한 자원을 아끼기 위해 집 안에서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며 궁상을 떤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딱히 나빠 보이지도 않고 스스로가 만족해하는 일상을 보며 관찰자의 입장을 지키기로 했다.

 

  두 번째 단락에서는 아이의 교육에 대한 글들이 나온다. 어떻게 교육을 시키고, 어떤 사례가 있었으며, 어떠한 결과를 나았는지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독일에서 살고 있으니 독일의 교육과 우리나라의 교육을 비교하면서 차이점을 밝히고, 한계를 극복해 나갈 수 있는 부분에서는 어느 정도 공감을 느끼기도 했다. 자식자랑 하면 팔불출이라고 하는데, 저자 또한 자랑을 안 하는 척 하면서 은근히 자랑을 하는 것을 보며 또 트집을 잡고 싶었다. 자기가 격은 것을 드러내려면 아이들의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고, 자랑 이면에는 부모의 노력이 들어 있다는 것을 감안할 때 내가 참견할 부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오히려 다양한 사례를 보면서 다음에 내게 아이가 생기면 참고하고 싶은 교육법이 많다는 것을 염두에 둘 정도였다.

 

  세 번째 단락을 읽고서야 이 책을 끝까지 읽기를 잘했노라고(더 이상 문체에 거슬려하지 않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독일이라고 하면 히틀러의 집권당시의 나치 시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아직도 독일 내에서는 '나치'라는 단어가 민감하게 작용하고 있는 시점에서, 독일에 상주하는 외국인의 입장에서 나치의 역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개인의 의견일 수밖에 없고, 외국인의 입장에서는 독일인들의 많은 공감대를 끌어내지 못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태인 학살에 대한 늘어뜨림보다 그 이후에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이 어떠했는지, 아직도 숙제로 남아있는 역사의 과오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비교적 객관적인 입장을 들을 수 있었다. 학살에 대한 기억만으로 독일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과오를 딛고 일어서려는 독일을 지켜볼 수 있어 약간의 편견을 벗을 수 있었다. 저자가 독일에 살고 있어 좀 더 의식이 편중된 것이 아니라, 가까이에서 국민들의 의식을 지켜볼 수 있었기에 자기의 생각을 전달할 수 있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독일의 역사에 대한 부분이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이기도 하거니와 거기에서 사유를 그치는 것이 아닌, 일본과 우리의 관계를 되짚어보는 부분도 경각심을 깨쳐 주었다. 독일과 비교하면서 일본은 역사 청산을 하지 않는다고 늘 목소리를 높이지만, 독일에서 만난 일본기자와의 에피소드로 인해 한 역사에 대해 갖고 있는 시각이 얼마나 다른지를 느끼고 충격을 받기도 했다. 저자는 비교적 차분하게 독일의 일례를 들어가며 일본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하면 우호적인 해결책을 낼 수 있는지에 대한 의견을 내 놓기도 했다. 많은 부분 공감을 하면서 그동안 시사에 너무 무관심 했다는 생각과 함께 저자에 대한 생각도 많이 바뀌어 있었다. 다양한 시선을 가진 한 인간의 모습으로, 너무 솔직한 그녀의 생각을 듣는 것이 결코 나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어쩌면 오래도록 책장에서 빛을 보지 못했을 한 권의 책은 지인의 관심으로 인해 깨어나게 되었고, 첫 이미지와는 다른 우호적인 만남으로 마무리 되었다. 그 사실이 무엇보다 다행이며, 첫 느낌으로 한 권의 책을 판단하는 실수를 저지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의 삶을 무척이나 사랑하며, 가족의 안위와 행복 또한 끔찍히 여기는 저자를 통해 너무나 다양한 인생을 맛본 기분이다. 가족의 이야기가 많이 들어가 있는 만큼, 아이를 기르고 있는 부모들이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그 안에도 주제가 많이 갈리기에 가족 안에서만 의의를 두며 틀에 가두지 않으려 한다. 한 권의 책을 통해 나의 시각이 한껏 넓어진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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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짜사회학
수디르 벤카테시 지음, 김영선 옮김 / 김영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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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라는 조직이 광범위한 의미를 담고 있대도, '사회학'이라는 학문의 의미로 다가오면 괜히 멀게 느껴진다. 처음 <괴짜 사회학>의 책 제목을 들었을 때도 그랬다. 괴짜라는 단어 때문에 어느 정도의 긴장을 늦출 수 있었지만, 사회학의 전체적인 느낌은 여전히 낯설기만 했다. 아마 사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자연스럽게 마주한다는 생각이 부족해서였을 것이다. 겨우 책 소개를 보고 나서 긴장감을 풀 수 있었고, 저자의 독특한 연구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사회학이라고 해서 연구실에서 행해지고 그 안에서 발견 된 것들을 읊어 댈 거라 생각했는데, 저자는 그 모든 것을 과감히 떨친 후 최악의 빈민가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시작된 인연은 이후로 10년 동안 계속 된다.

 

  저자는 대학원 공부를 하면서 사회학자의 길을 걷기로 다짐한 만큼, 사회의 현상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며 고전적인 질문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이를테면 '한 개인의 선택은 어떻게 발전되는가?','인간 행동을 예측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었다. 그 과정에서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살아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데는 별 관심이 없다는 점에서' 저자는 호기심이 꿈틀거렸다고 한다. 실제로도 사회학 분야는 '양적·통계학적 기법을 이용하는 입장과 흔히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직접적인 관찰을 통해 삶을 연구하는 입장'으로 나뉘어 있는데, 저자는 후자를 선택하고 연구에 임했다. 대학원 1년 차에 도시 빈곤에 대한 조사를 하기 위해 평소에 관심 있었던 대학부근의, 시카고에 있는 미국 최악의 빈민가인 로버트 테일러 홈스로 들어간다.

 

  거기서 저자는 대학원생 초보티를 팍팍 내는 질문을 쏟아내 비웃음을 샀고, 농축 코카인을 파는 블랙 킹스 보스인 제이티를 만나게 된다. 그들의 만남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듯이 서로에게 깊은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대학에서 공부까지 했지만 흑인이라는 이유로 사회활동의 한계에 맛본 후 빈민가에서 마약을 파는 제이티와 사회학을 공부하는 저자의 만남은 운명적이었다. 그 만남으로 인해 저자가 연구하는 학문과 제이티가 속한 조직이 무언가를 새롭게 이룩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저자가 10년 동안의 경험을 기록한 이 책을 읽어가면서 무엇을 정의하려 하거나 결론을 내리기보다, 중립적인 입장에서 말 그대로 '기록'에 중점을 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딱딱한 용어들의 나열과 사람들을 관찰하며 발견된 것들을 지지부진하게 드러내는 것이 아닌, 한 편의 소설처럼 모험담처럼 펼쳐지는 기록은 걸러지지 않은 채 독자에게 있는 그대로를 느끼게 해주었다.

 

  저자가 처음 과제를 위해 조사를 나갔을 당시에 그렇게 오랫동안 로버트 테일러 홈스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라고, 그 안에서 만난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갈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제이티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서의 생활이 지속될 수 있었다는 것도 지나칠 수 없었을 것이다. 제이티가 자신에게 호감을 품고 있고, 저자 또한 제이티의 삶과 그곳의 일상이 궁금했기에 일련의 묵인 하에 만남이 지속될 수 있었다. 제이티는 저자가 사회학도의 입장에서 자신의 삶이 연구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의 전기문을 쓰는 것으로 착각했다. 저자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차마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고 대신 그곳에서 경험한 모든 것을 낱낱이 기록해 나간다.

 

  로버트 테일러 홈스는 그야말로 딴 세상이었다. 구급차와 경찰을 불러도 오지 않는 곳, 사회적인 혜택은커녕 오히려 갱단이 사람들의 안전을 지켜주고 스스로 규칙을 만들어가며 생활을 영위해 가는 곳이었다. 그렇다고 그곳의 사람들이 정의감으로 불타올라 서로를 돕는다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위계질서가 있었다. 그곳의 보스는 제이티였고, 그 아래 수많은 갱단 조직원들에 의해서 아파트에 입주해 있는 사람들이 관리 되며 어느 정도의 상납이 이루어졌다. 그 안에서는 마약 거래, 매춘, 도박, 장물 매매 등 불법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모든 것들이 행해지고 있었다. 그런 불법행위들이 경찰과 국가에 의해 제어 된다는 것은 꿈꿀 수도 없었고, 불법 행위로 인한 자본이 형성되지 않으면 도무지 살아갈 수 없는 환경이었다. 보통의 상식이 통하지 않고, 평범한 일상은 꿈꿀 수도 없는 곳이 바로 로버트 테일러 홈즈였다.

 

  저자는 그곳에서 10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많은 일을 경험하게 된다. 제이티 대신 일일 보스가 되어 보기도 하고, 보스들의 모임에도 가보며, 총격전의 현장에도 있었고, 제이티의 영역 안에 있지만 또 다른 권력이 행해지고 있는 베일리 부인의 동네에서도 생활하게 된다. 그곳의 모든 것을 경험하게 되면서 중립적인 입장이 되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모두 기록해야 했기에 저자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의도가 개입되지 않았지만 공유되지 않는 사적인 정보들이 저자에 의해 제이티에게 알려지면서, 다른 사람들이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된 것이다. 저자는 그 경험을 통해 약자에 속한 자들과 그 위에 군림한 권력자들의 생활이 어떻게 엉켜 가는지를 철저히 지켜보게 되었다. 저자는 위험을 무릅쓰면서 그들과 함께했지만, 그 상황을 어찌할 수 없었고, 그곳 사람들에게 여전히 이방인일 뿐이요 관찰자일 뿐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그의 연구가 끝이 보일수록 처음 시작과는 다르게 조금씩 시들해 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저자는 담담하게 기록해 갔지만, 그곳의 생활을 알아 가면 갈수록 처참한 환경만 드러난다는 사실 때문에 무언가가 지속되지 않는다는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저자가 이제는 그곳을 떠나야하며, 그들과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시카코 주택공사에 의해 그곳이 철거되는 것으로 저자의 연구도, 그들의 만남도 끝이 났다. 오랫동안 그곳이 삶의 터전인 냥 살아온 사람들은 모두 흩어졌고, 교수직을 얻은 저자도 그곳을 떠났다. 종종 제이티를 만나긴 하지만 속내를 털어놓지 않는다는 저자의 말이 조금은 씁쓸하게 다가왔다. 자신의 인생에 제이티가 큰 의미로 다가온 만큼 제이티도 그렇게 느낄 것이라는 말이 조금 위로가 되었다. 제이티도 언제까지 갱단에 몸을 담고 있지 않을 것이고, 저자도 새롭게 주어진 삶에 충실할 것이므로 예정된 헤어짐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저자가 전통과 관습을 깨고 과감히 빈민가에 들어가 10년 동안 경험한 것은 단순한 자료의 의미만으로는 남지 않을 것이다. 이 기록을 통해서 현장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음은 물론, 있는 그대로를 보여줌으로써 소외 받는 사람들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 일으켰다. 저자가 나름대로 일궈놓은 이 자료를 통해서 사회학자뿐만이 아니라 정부와 같은 사회의 구성원들이 어떠한 관심을 보여야 하는지 깨달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조금만 고개를 돌려도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널리고 널렸다. 그 사람들에게 순간적인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근본적인 삶의 방향을 전환시켜 주는 것도 필요하다. 그들을 방치하는 순간 사회라는 거대한 조직은 균형을 잃어갈 것이며, 인간이 인간을 존중하지 못하는 사상은 앞으로도 뿌리 뽑히지 않을 것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져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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