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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스러운 세 도시
J.M.G. 르 클레지오 지음, 홍상희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10월
평점 :
르 클레지오는 200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알게 된 작가다. 개인적으로 노벨문학상에 큰 의의를 두지 않은 편이지만, 이목이 집중되는 터라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관심을 스스로 채우기도 전에 지인으로부터 르 클레지오의 책을 선물 받았다. 그 가운데 <성스러운 세 도시>를 먼저 접하게 되었는데, 무척 얇은 책이라고 얕보았다가 고역을 치르고 말았다. 100페이지가 안 되는 책이었기에 순식간에 읽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오만이었다. 무수히 흩어져 버린 언어를 부여잡을 길이 없어 책을 다 읽고도, 도무지 읽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다 다음에 다시 읽어보겠노라 다짐하며 책꽂이에 도로 꽂아 버렸다.
책장에 묵혀 놓고 시간이 흐른 후에 다시 펼쳐들었을 때, 오히려 득이 되는 책을 만나게 된다. <성스러운 세 도시>와의 첫 만남이 실패로 끝났기 때문에 시간에 흐름에 어느 정도 기대를 품고 책을 묵혀 두었다. 이미 한 번 읽은 뒤라 다시 도전해 볼 양으로 6개월 쯤 지난 후에 책을 다시 펼쳐 들었지만 절반 정도 읽다가 다시 덮어 버렸다. 그렇게 책이 내게 온지 1년 쯤 되어 다시 펼쳤을 때는 세 번째로 만나는 셈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세 번째 만남에서도 이 작품과의 조우는 실패로 끝났다. 줄거리를 가늠한다는 것도 무리였고, 한 문장에서도 의미는 수십 개로 갈렸다. 그런 문장이 이어져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지고, 한 권의 책으로 묶인다는 것은 도무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무게가 아니었다.
총 세 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 <성스러운 세 도시>는 지명도 낯선 샨카, 딕스카칼, 슌폼을 향해가는 여정을 담고 있었다. 작품 속에서 언급된 지명과 묘사를 통해서 문명과 닿지 않는 곳이라는 것과 남미 쪽을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을 했다. 역자 후기를 보고 추측이 어느 정도 맞아 떨어짐을 알았지만, 그 이상을 얻어내기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신성의 언어를 아름답게 흩뿌려놓는 작가'라는 찬사도 내게는 낯설 정도로 언어의 흩어짐만 경험한 셈이었다. 마치 한 그루의 나무에서 무수히 뻗어 있는 가지들이 저마다의 목소리를 한꺼번에 드러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혼란스러움에서 저자가 작품 속에 녹여놓은 의미를 찾는다는 것도 꼭 그 의미와 일치하지 않더라도 독자가 무언가를 찾아낸다는 것도 여전히 무리였다.
차라리 그의 문장을 이어가려고 애쓰지 말고, 문장 자체에 의의를 두고 읽어간다면 언어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실제로도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문장을 읽어보면 묘사의 뛰어남을 느낄 수 있다. 조금씩 마음을 뺏겨 몇 문장을 더 읽어나가다 보면 평소에 문학을 읽으며 만날 수 없었던 독특한 이미지를 그려주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문장과 문장이 만나 이야기를 엮어 가는 것이 소설의 매력인데 그 이야기들이 어디를 향하는 지 알 수 없었고, 문명을 멀리한 그들과 나는 더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그 숭고함과 신성함을 세상에 찌든 내가 알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며, 어떠한 생각으로 읽어야 이 소설이 온전히 들어올 수 있을까? 책을 읽는 내내 나를 사로잡는 생각이었고, 세 번째의 만남에서도 큰 수확을 얻지 못해 여전히 남아 있는 아쉬움이었다. 어쩌면 이 책을 읽는 방법은 문장을 느끼고 줄거리를 이해하며 따라가기보다, 순간순간 느껴지는 것들로 자신을 채우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어디로 향하는지, 무슨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에 중점을 두다보면 언어의 아름다움을 느끼기도 전에 지쳐버릴 것이다. 때로는 내용을 파악하는 것보다 만남 그 자체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독서의 한 방법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언어의 흩어짐으로 온전한 만남을 이루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언어의 흩어짐이 수려한 흩뿌려짐이었다는 것을 느낄 날이 있음에 희망을 걸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