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테르 브뢰헬 Taschen 베이직 아트 (마로니에북스) 47
로제 마리 하겐 지음, 김영선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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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이직 아트 시리즈를 한 권씩 읽다보니 내용이 알차서 전 권을 다 모으고 싶었다. 만만치 않은 가격에 언제 다 모을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내쉬면서도, 미술책을 구입하게 되면 꼭 이 시리즈를 중점으로 구입한다. 그래봤자 이제 네 권밖에 모으지 못했지만 그 안에 포진되어 있는 많은 화가들 중에서 선택되는 경우는 특별한 규칙이 있다기보다, 대부분 책을 읽다 언급되면 구입하는 식이다. 피테르 브뢰헬도 마찬가지였다. 브뢰겔로 익숙한 화가인 그의 작품을 제대로 감상해보거나 그의 생애에 대해 아는 것은 없었다. 다른 책을 읽다가 심심찮게 언급되는 것을 보고 먼저 구입하게 되었다.

 

  베이직 아트 시리즈의 책들은 무척 얇지만 두께에 비해 풍부한 견해와 그림들이 생생하게 실려 있어 갈수록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책이다. 똑같은 화가에 대한 책이라도 새로움을 발견하게 해준다고나 할까. 앞으로 이 시리즈에서 소개된 화가들을 모두 만나보겠노라는 포부를 가진 채, 피테르 브뢰헬을 만나게 되었다. 말 그대로 이름만 들어본 화가였기에 그가 어느 나라 화가인지도 몰랐다. 출생연도도 분명하지 않아 1525년에서 1530년 사이로 추정하는 네덜란드 화가였고, 말년에는 종교전쟁을 겪기도 했다. 그 싸움에서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중 어느 쪽을 지지했는지 알 수 없다고 했는데, 당시에는 자신의 시대를 배경으로 성서의 사건을 그리는 것이 흔했다고 한다. 그가 그린 종교그림을 보고 있으면 종교적, 정치적 메시지가 내포되어 있어 자신의 의중을 그림으로 표현해 낸 것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브뢰헬의 성서 사건을 그린 그림을 살펴보면 사건의 중심 메시지 외에도 당시의 상황을 보여준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주로 배경인물들을 통해 어떠한 사건이 중심이 되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당시의 새로운 통치자를 빗댄 '검은 알바'라는 느낌을 살려 그를 등장시키기도 하고, 성서의 사건이지만 브뢰헬이 살았던 브뤼셀을 묘사하기도 한다. 그의 그림에서 등장하는 성서의 인물들은 다른 그림과는 좀 다른 면이 있었다. 보통 종교그림이라고 하면 인물들을 신성화 시키고,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게 묘사하는 게 대부분이다. 그러나 브뢰헬의 그림에서는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도 특별하지 않은 모습으로 그렸다.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으로 표현했기에 종교검열에서 분명 걸렸을 거라는 추측까지 하고 있었다. 설명이 깃들지 않으면 이 그림이 종교화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의 평범함 때문에 잠시 당황하기도 했다. 그 안에서 브뢰헬이 어떠한 메시지를 드러내고 있는지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자신만의 특별한 화풍으로 무언가를 전달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알 수 있었다.

 

  거기다 16세기의 네덜란드와 생활상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특히나 브뢰헬의 그림이 가치가 있는 것은 네덜란드의 풍습을 그대로 드러난 그림 때문이었다. 특히나 재미있게 들여다 본 그림은 <네덜란드의 속담>이었다. 굉장히 복잡하고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는 그림이어서 처음에는 정신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화가가 자주 언급하는 '뒤죽박죽인 세상'에 걸맞은 그림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 그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알지 않고 간과하려는 찰나, 그림에 번호를 붙여 속담을 일일이 설명하고 있는 것에 놀라고 말았다. 그림 안에 100개가 넘는 속담이 들어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 속담을 표현하고자 섬세하게 그린 브뢰헬의 인내와 표현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그림을 보면서 속담을 유추하니 그제야 그림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고, '간단히 그릴 수 없는 그림을 많이 그렸다.'라는 설명에 부합되는 것을 경험했다.

 

  또한 계절을 생생히 재연해 내는 그림도 그렸는데, 풍경 속에 녹아든 평범한 사람들이 푸근하게 다가오는 작품들이 많았다. 특히나 농부의 등장이 두드러졌고, 당시에 농부는 대접받지 못한 존재였기에 그의 그림에 등장한 농부의 모습을 보면서 익살스러워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브뢰헬에게 자연의 변화를 이렇게 설득력 있게 표현해 낸 화가가 없다고 말하면서, '세계에 대한 철학적 개념에 영향을 받고 자연사 및 하나의 전체로서의 지구에 대한 당대의 관심에 의해 더욱 분명해진 새로운 세계관이 드러난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지금 그의 그림을 바라보고 있으면 우리에게 익숙한 풍경화라는 느낌 때문에 별 특징을 잡아내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브뢰헬이 활동했던 시대를 감안한다면 단순한 풍경화를 넘어 시대를 표현하는 그림, 교훈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그림으로까지 확대 대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브뢰헬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오래 된 그림이라는 느낌이 드는 것 이외에 독자적인 메시지를 찾기가 어려웠다. 브뢰헬의 그림과 당시의 배경을 해석해주는 설명을 통해 새롭게 바라볼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브뢰헬의 생애보다는 그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고, 당시의 생활 풍습이나 중요 사건들을 중점으로 책이 엮어져 있었다. 그림을 통해서 브뢰헬을 내면을 어느 정도 이해해 볼 수 있다 하더라도, 그의 개인적인 생애가 결여되어 있어 조금은 아쉬운 감이 없지 않았다. 워낙 오래전의 화가라는 어려움이 따른다는 것을 어느 정도 감안한다면, 브뢰헬이 활동했던 당시의 생생함과 그림의 구석구석을 살펴볼 수 있어 즐거운 시간을 만끽할 수 있다. 달랑 그림만 보는 것에 부족함을 느낀다면 이런 책들을 통해서 열심히 도움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히 드는 경험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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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독 밀리어네어 - Q & A
비카스 스와루프 지음, 강주헌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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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언가 집중할 거리가 필요했다. 마음은 자꾸 궁지에 몰리고, 좁은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다른 것에 관심을 돌리지 않으면, 극단적인 생각들이 걷잡을 수 없이 움틀 것 같았다. 이미 손에 책을 쥐고 있었지만 도무지 그 책에 집중할 수 없어 책장에 시선을 돌렸다. 정신을 쏙 빼놓을 책을 골라서 읽을 작정이었다. 그러다 <슬럼독 밀리어네어>를 발견했다. 이미 영화로 만들어질 만큼 독자들 사이에서도 입소문을 탄 책이었고, '한 번 잡으면 놓을 수 없다.' 고 말한 사람들이 많았기에 이 책이다 싶었다. 현재의 정신적인 고통에서 나를 잠시라고 구해주길 바라며 책을 펼쳐 들었다.

 

  입소문은 사실이었다. 숨 가쁘게 책장이 넘어갔고, 복잡한 현실을 잊을 수 있었으며, 졸려서 눈이 감기는데도 책을 놓을 수 없었다. 책을 읽고 시간을 보니 새벽 1시가 넘어 있었다. 몇 시간 동안 읽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적어도 책을 읽는 순간에는 고스란히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간 사실이 고맙게 느껴졌다. 그러다 문득 책장 정리가 하고 싶어, 어지러운 책장을 골라 장르를 구분하고 책을 재배치했다. 한 권의 책을 읽으며 보냈던 시간을 마무하는 계기가 되었고, 훨씬 마음이 차분해져 편안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아침에 일어나 머리맡에 있는 책을 본 순간, 왠지 모를 허무함이 밀려왔다. 파란만장한 이야기였지만 무언가 충족되지 않은 허무함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늦게까지 책을 읽은 탓에 뻐근한 몸을 일으키기 힘들어서 그랬는지 내 마음을 휘감는 낯선 감정이 무엇인지 몰랐다. 재미나게 읽었음에도 한 사람의 인생을 통해서 나는 무엇을 얻었나 하는 진지한 질문을 아침나절부터 하게 되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는 끈기, 정직함, 이루고 싶은 꿈이 있는 열의를 닮아야 하는 걸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도 어떠한 것에도 대답할 수 없었다. 슬럼가의 웨이터인 람 모하마드 토머스가 퀴스쇼에 출현해 모든 문제를 맞혀 10억을 벌게 되었다는 사건이 이 소설의 중점이었다. 하지만 그가 퀴즈쇼에서 문제를 하나씩 맞춰갈 때마다 남다른 감동이 밀려오거나, 그 일로 인해서 많은 사람에게 희망을 준다는 진부함이 묻어 날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퀴즈쇼에 참가한 목적은 마지막에 드러나고, 한 문제씩 정답을 맞춰나갈 때마다 그가 어떻게 그 답을 알 수 있었는지 알려주는 람의 인생 자체에 초점이 맞춰져있기 때문이다.

 

  람은 퀴즈쇼의 어두운 배후 때문에 우승을 했다는 이유로 체포된다. 그가 모든 문제를 맞췄다는 것에 사기성을 부여해 상금을 지급하지 않으려는 목적이 있었다. 람에게 고문이 행해지고 있을 때, 한 여성 변호사가 그를 구해주고 어떻게 12문제를 다 맞출 수 있었는지 진실을 말해 달라고 한다. 그로 인해 람의 인생이 순차적으로 밝혀지는 것이 아니라 퀴즈의 문제에 따라 과거의 조각이 맞춰지기 시작했고, 그냥 모든 답을 다 알고 있었다는 람의 말이 사실임이 드러났다. 퀴즈쇼에서 12문제를 다 맞췄다고 해서 머리가 비상할 것이라는 편견을 벗기는 사건이었고, 삶의 치열한 현장에서 일반상식을 뛰어넘는 경험과 지혜를 얻으며, 그것이 판에 박힌 퀴즈쇼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람의 파란만장한 과거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인도의 배경은 물론 방치되는 인생이 얼마나 많은지에 놀라게 될 것이다. 인도의 실상을 알게 되었고, 그것이 꼭 남의 나라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저자가 인도에서 태어나 자랐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외교관의 신분으로 자국을 바라본 시선이 더 냉철했으리라 생각한다. 저자의 시선을 통해 힌두교, 이슬람교, 기독교의 이름을 모두 가지고 있는 람은 종교 갈등과 인종차별, 성(性)의 문란함, 자본주의의 이면을 알게 되었고, 그가 만난 사람들의 이중성까지도 모두 알게 되었다. 그것은 인도의 실상일지도 모르고, 다양한 사람들이 섞여 사는 세상의 실태를 그대로 보여준 것인지도 모른다. 그 안에서 삶의 끈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다는 것이 처절한 희망이라면 희망이었다.

 

  람은 감당하기 힘든 좌절과 고난, 아픔, 상처를 모두 이겨내고 있었다. 유명 배우의 집에서 일하게 된 것, 타지마할에서 관광 안내원으로 일하다 니타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강도를 만나 돈을 뺏기고 그에게 총을 쏜 일 등 20살도 안된 청년이 갖고 있기에 너무나 버거운 삶의 흔적이었다. 고아로 태어나 바텐더의 자격으로 퀴즈쇼에 참가하게 된 과정은 줄거리를 언급하기조차 벅찰 정도다. 18년의 인생이 그렇게 화려할(?) 수 있다는 것에 연민을 느꼈고, 나라면 진작 좌절하고 낙심해 버렸을 거라는 자기비판까지 튀어 나왔다. 진흙 구덩이 같은 삶에서 충실하게 살아온 람이 마냥 대견해 보였다. 그렇기에 퀴즈쇼에서 어떻게 답을 맞혔는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람이 살아온 이야기를 듣다보면 퀴즈쇼는 그야말로 쇼에 지나지 않았고, 하나의 과정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람이 풀어내는 문제들과 함께 그의 삶은 낱낱이 드러났지만 람의 체포로 시작된 이야기는 희망적으로 결론지어질 거라는 기대를 품을 수 없었다. 그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끝이 보이지 않았고, 그가 만들어 가는 삶인지 주어진 운명에 충실한 것인지 헛갈릴 정도였다. 또 다른 고난이 그의 앞에 닥칠 것 같았고, 상금의 지급여부도 투명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늘 반전이 있었고, 람의 인생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었으며 인연의 지속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가 만난 변호사가 예전에 자신이 도와준 사람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그가 퀴즈쇼에 참여하게 된 진실이 드러난다. 그리고 나의 염려와는 달리 조금은 안정된 삶을 살게 되는 그의 모습으로 마무리 지어졌다.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고, 다른 사람의 꿈을 이뤄주었으며, 행운의 동전을 버림으로써 행운은 내면에서 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가 겪어온 파란만장한 삶의 보상이라고 생각해도 좋고, 삶의 충실하게 살아온 희망의 증거가 이제 시작되었을 뿐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의 삶을 통해 인생의 중요한 것들을 알아 갔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도무지 한 사람이 겪었다고 생각되어 지지 않을 정도의 다양한 이야기는 이질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하룻밤이 지나자 그 이야기가 낯설게 다가왔던 이유는 내 삶의 주인공이 나임에도 이제껏 도피해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지금껏 내 삶을 방관하며 살아왔고, 타협하기 쉽다는 이유로 무엇 하나 진정한 노력을 기울여보지도 않았다. 그 결과가 현재 나의 모습이기에 람의 삶을 보면서 느꼈을 당황스러움은 불 보듯 뻔했다. 희망과 용기, 끈기, 삶에 대한 사랑은 배재한 채 오로지 현재에 안주하려는 내 모습과 거부반응을 일으킨 것이다. 허무한 이야기라고 치부해 버리고, 무언가 석연치 않다고 무시해 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람의 인생은 한동안 내 삶과 충돌을 일으키며 나를 괴롭힐 것이다. 그 괴롭힘 속에서 진정한 나를 뚫고 나오길 바라는 작은 희망을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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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데오 모딜리아니 - 열화당미술문고 213
장소현 지음 / 열화당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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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흐린 날씨 탓인지 몸도 쑤시는 것 같고 괜히 눕고만 싶었다. 기분까지 쳐지니 무엇으로 감정을 다스려야 할지 난감했다. 감미로운 음악이 듣고 싶어 뮤직 쿠폰이 있는 사이트에 들어가 피아노 연주곡을 들었다. 생각보다 괜찮은 곡들이 많아 핸드폰에 몽땅 담고, 그 음악을 다시 들으며 책을 읽었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소설책이 오히려 더 감정을 깎아내릴 수 있으므로, 최대한 감정을 건드리지 않는 책을 찾다 모딜리아니 책을 꺼내 들었다. 저자가 쓴 미술문고 시리즈 중에서 마지막 책이라서 그런지 아쉬움 반, 기대 반으로 펼쳐들게 되었다.  
 

  수많은 화가들 가운데서도 취향에 맞는 화가들의 그림만을 보게 되는 경향이 있다. 인상파 화가의 그림을 좋아하는 터라 비슷한 화풍만 좇다, 다른 그림도 보게 되면서 시각의 좁음을 조금씩 넓혀갔다. 그러다보니 이름만 들어본 화가나 그림만 익숙한 작품들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한 번쯤 제대로 알아보고 싶다는 열망이 든 화가도 많았지만, 늘 그렇듯 기회가 닿을 때까지 기다리다 마주하고 난 뒤에는 나의 무지를 탓하곤 하다. 모딜리아니도 예외가 아니었다. 모딜리아니의 그림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도무지 그의 그림을 좋아할 수 없어서 알기를 거부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무관심이 얼마나 이 화가를 오해하고 있었는지 책장을 열자마자 드러나는 사실 앞에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저자는 내가 모딜리아니의 그림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를 너무나 적확히 알려 주었다. '인상파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모딜리아니라는 화가는 빛에 대한 무관심, 데생의 명료함, 의도적인 형태의 왜곡 등의 점에서 참을 수 없는 존재였다.'고 말했다. 거기다 모딜리아니의 그림은 인물화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더 무관심 할 수밖에 없었다. 빈약한 지식으로 모딜리아니라는 화가를 맘대로 판단하기 급급했고, 그의 화풍을 보며 남미 쪽의 화가가 아닐까, 나이가 지극했을 때 그린 그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탈리아 출생으로 파리에서 활동했으며, 36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고는 무척 당황하고 말았다.

 

  흔히 모딜리아니라고 하면 술과 마약에 찌든 화가로 판단하고 그의 불행한 삶을 극단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모딜리아니에 대해 무지한 나로써도 그런 얘기를 듣고부터 그의 삶이 방탕한 생활 때문이라는 편견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저자는 모딜리아니가 방탕하고 무질서한 생활을 영위하긴 했지만, 올곧은 성품과 미술에 대한 열정을 내세워 제대로 알아가길 바랐다. 그는 무엇보다 '끈질기게 사람을 사랑하며, 사람을 그리고 조각한 작가이다.' '그저 시대적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세계를 고집스럽게 지킨 독창적인 작가일 뿐이다.' '그의 목표는 '아름다움과 진실을 통합하고, 인간에 대한 사랑을 통해 보편적인 인간상을 확립하는 것'이었다'는 표현을 통해 방탕한 생활상으로 그를 판단하기엔 무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가 술과 마약의 영향을 받고 말고를 따질 수 없다고 했듯이 편견으로 점철된 한 화가를 재조명하거나 제대로 알아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 같았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을 통해서 내가 알아간 모딜리아니라는 화가는 내가 멋대로 생각했던 화가를 뛰어넘어 순수한 내면을 발견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모딜리아니의 독창적인 작품세계는 이탈리아 고전에 바탕을 두고 했다고 했는데, 스피노자의 후손인 어머니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철학적 토론에 익숙한 것이 무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모딜리아니를 시인 혹은 철학자라고 불렀는데, 어릴 적의 가정환경이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 그가 미술에 몸담기로 다짐하고 파리로 건너왔을 때는 그런 면모가 많이 소실되어 버렸다. 가난과 타향살이의 외로움, 내적 갈등으로 인한 방탕한 생활이 한 몫 했다.

 

  그의 생활태도를 보며 많은 사람들이 그의 그림에 대해 의문을 갖기도 했다고 한다. 야수파나 표현주의를 그릴 것 같은데, 명확한 선과 형태, 우아한 아름다움 등 지극히 대조적인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란다. 거기다 눈을 명확하게 그리지 않은 초상화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모딜리아니의 그림을 이해하려면 그의 삶을 반드시 알고 난 뒤 감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 또한 길쭉한 얼굴과 흐리멍덩한 눈이 그려진 그의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의 독창성으로 탄생한 인물들과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그 무엇'을 명상하고 있는 것이다.'라는 설명을 들으니 그제야 그의 그림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눈동자를 선명하게 그리는 것과 길쭉한 인물들에 대해서 더 이상 토를 달 수 없었다. 치열한 내면의 갈등을 이겨내고 그가 만들어낸 인간의 형상이었기 때문이다.

 

  모딜리아니의 작품 중에서 초상화를 짚고 넘어 가지 않을 수가 없다. 모딜리아니아의 초상화는 철저하게 인물이 중심이 된(그것도 얼굴) 작품이 대부분이다. 저자는 '배우 한 사람만이 달랑 등장하여 펼치는 모노드라마를 보는 것 같은 팽팽함 긴장감'과 '모델을 철저하게 분석하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 일', 그것은 마치 '전쟁' 처럼 긴장되는 일이다'라고 했다. 별 특징을 잡아내지 못했던 그의 그림을 생애의 앎과 설명으로 인해 조금씩 변화되어 보이는 것이 느껴져 무척 신비한 기분에 빠져들곤 했다. 그가 그리고자 했던 인간에 대한 사랑이 느껴지기도 했고, 자화상을 통해서 자신을 표면화하려 했다는 것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림에 온 열정을 바쳐도 모자를 판에, 그는 여의치 않는 주변 환경에 의해 고통스런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술과 마약, 조각에 대한 열망(실제로 조각에 한 동안 몸담기도 했었다.), 불같은 사랑과 생활고 등 보헤미안의 삶을 떨쳐 버리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그에게 죽음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고, 반복되는 생활의 패턴으로 인해 그도 자신의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곤 했다. 현실을 극복하고 결혼한 잔느가 둘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을 때 그는 이탈리아를 그리워하며 삶을 마감한다. 잔느는 그가 죽은 다음 날 만삭의 몸으로 투신자살을 한다. 그의 죽음도 안타까웠지만, 사랑하는 남편을 따라 투신해버린 잔느의 죽음도 충격이었다. 그들의 딸 잔느 모딜리아니가 나중에 미술사가가 되어 아버지의 평전을 썼다고 하니 괜히 마음이 찡해진다.

 

  하나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 하루 종일 드로잉을 했다던 모딜리아니. 철학자이자 시인이기도 했던 그의 짧은 생애가 안타깝지만, 미술에 몸담은 기간 동안 열정적으로 작품 활동에 몰두 했다는 것이 인간의 삶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한다. 이 책을 통해 모딜리아니라는 화가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더 이상 그의 그림을 인상파 화가들과 비교하며 보지 않게 되었고(비교하는 자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그가 남긴 수많은 초상화를 통해서 그의 내면을 바라보게 되었다. 저자는 국내에서 모딜리아니를 알고자 하는 열망이 없음에 많이 안타까워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열정적으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한 화가에 대해서 많이 알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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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영 2011-03-17 2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 짱이네여!!!!!!!!!!!!!!!!!!!!!!!!!!!!!!!!!!!!!!!ㅋㅋ
 
메두사의 시선 - 예견하는 신화, 질주하는 과학, 성찰하는 철학
김용석 지음 / 푸른숲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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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에 관심이 있으면서도 정작 아는 것은 없고, 막상 철학에 관한 책이라도 볼라치면 이해가 되지 않아 금방 책을 덮어 버리곤 한다. 문학에 편중되어 있는 독서에 조금이나마 윤활유 역할을 하고자 종종 인문서적을 펼치는데, 마주할 때마다 지식의 한계를 느끼곤 한다. 지식의 한계를 대학 공부를 통해서 조금 채워 보려고 했던 적도 있었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 못해 그 시도는 실패했지만, 언젠가 다시 기회가 오리라 생각하며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다. 요즘에서야 스스로 지식이 채워지길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단순한 정의임에도 이제야 깨닫는 나는 배움에 있어서는 아직도 멀었다는 것을 느낀다.

 

  <메두사의 시선>을 마주할 때만 해도 약간의 희망이 있었다. 내가 자신 없어 하는 인문에 관한 책이었지만, 책도 그다지 두껍지 않아 읽어볼만 하다는 용기를 얻었다. 그런 마음으로 초반을 읽어 나갈 때는 알듯 말듯 한 난해함 때문에 이 책이 녹록치 않다는 것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한 페이지를 읽을 때도 평소의 독서보다 많은 시간을 할애했고, 오랜시간 정독하며 책을 읽었음에도 여전히 숨이 가파 오른다. 신화와 철학과 과학이 버무려진 이 책은 웬만한 배경지식이 없이는 완전한 이해를 불가능하게 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지식이 없었을 뿐더러, 철학과 과학에 관해서는 말해 무엇 하리. 한마디로 내가 소화할 수 없는 책임에도 묘한 매력으로 책을 끝까지 놓을 수도 없었다.

 

  인문서적에 관해서는 개인적인 분류가 뒤따른다.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책, 정독하며 생각하며 읽으면 이해가 되는 책,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는 책으로 분류한다. <메두사의 시선>은 두 번째와 세 번째의 중간에 속한 책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루에 조금씩 정독하면서 읽어 나갔고, 어떤 날은 저자의 글이 흥미롭게 다가오다가도 어떤 날은 언어의 흩어짐을 경험하기도 했다. 냉정하게 따져보면 꽤 오랫동안 붙들고 있었던 이 책을 이해하거나, 많은 것을 얻었다고 할 수 없을 정도의 읽기였다. 그러나 신화를 바탕으로 철학과 과학을 적절하게 요리할 줄 아는 저자의 역량을 느꼈고, 그 세계가 무한히 뻗어 방대한 범위를 아우르고 있는 것을 깨닫고 놀라기도 했다.

 

  그리스 신화라면 제대로 아는 이야기가 없었기 때문에 그냥 이번 기회를 통해 안다는 의미로 재미있게 접했다. 신화를 통해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안에 내포된 메시지를 끄집어 내 다른 학문과 연결 짓는 포용력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재미나게 읽던 그리스 신화마저 엉켜들어갔고, 신화에서 뻗어나간 철학과 과학에 대한 저자 나름의 사유까지 이해 못하고 지나갈 때가 많았다. 먼저 그리스 신화라도 좀 제대로 알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저자는 신화를 읽으면서 동식물 기록이 담긴 자연 다큐멘터리를 함께 보면 재미와 의미가 배가될 것이라고 했다. 둘 모두 변화와 변신의 파노라마를 보여주기 때문이란다. 그러면서도 왠지 신화 읽기가 식상하게 느껴질 것 같았는데, 아이들에게는 복잡하게 얽힌 등장인물과 이야기가 변주곡처럼 들리는 반면, 삶에 틀에 습관화된 의식 때문에 어른들은 지루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어쩌면 나의 내면을 그렇게 잘 알고 있는지 원. 결국 신화도, 철학과 과학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건져낸 것이 없다는 허망함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이 모든 이야기가 현실에 적용되지 않는 케케묵은 이야기도 아니고, 밀접하지 않다는 뜻도 아니다. 오히려 지극히 현실적으로 이끌어내는 많은 예시들과 과거와 미래를 아우르는 식견은 광활한 우주 가운데 미미한 존재로 자리 잡은 나를 돌아보게 만들어 주기도 했다. 내 자신의 존재가치부터, 존재 안에 내포된 수없이 뻗어나가는 의미와 가능성을 조명해 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이 글의 특징상 많은 인용문이 들어가고 주석이 따라오기 마련인데, 인용문을 그렇다 치더라도 주석을 배제한 채, 부록으로 설명을 덧붙여서 읽어나가는데 어려움이 조금이나마 해소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만약 이 책에 주석까지 주르륵 달려 있었다면, 안 그래도 글이 어려워 쭉쭉 읽지 못하는데 주석을 읽느라 지쳐 끝까지 읽지 못했을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이 철학 에세이라고 말하면서 지식으로 쓰는 글이라고 했다. 그렇기에 지식이 없는 내가 읽는데 힘이 들었는지 몰라도, '사건의 역사'의 서술을 하지 않고 저자가 의도한 글쓰기로 통해 더 많은 것들을 느끼게 해주었다는 것에는 동의하는 바이다. 그것을 '역사'를 쓰는 한 방법일 수 있다고 했고, 세계에 대한 관심, 개념, 분석, 유비, 은유 등으로 과거를 성찰하고 현재를 이해하며 미래를 전망하는 성과를 얻고 있다고 말했다. 이것이 이 책의 주된 목적이었고 핵심 메시지다. 통째로 아우르지 못하고, 글쓰기의 방법에서 헤매버려 저자의 메시지를 제대로 통감하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기도 한다. 그러나 이 책을 만난 덕에 아주 미미하게나마 이런 책을 소화해 나간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인문학의 매력의 연결고리를 끊지 않게 해 준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언젠가는 내 나름대로의 생각을 자유자재로 넣어 리뷰를 쓸 날을 기대해보며, 힘겨웠지만 흥미로웠던 <메두사의 시선>을 내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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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샤 튜더, 인형의 집 - 마법 같은 작은 세상
해리 데이비스 지음, 공경희 옮김, 제이 폴 사진 / 윌북 / 200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집에 오자마자 청소, 빨래, 재활용 쓰레기 버리기 등등 대대적인 집 청소를 했다. 몸이 휘청거릴 만큼 힘들었음에도 되돌아보니 깨끗해진 집 때문에 마음이 뿌듯해졌다(곧 조카 네 명이 집안을 휩쓸고 돌아다녔지만.). 내 방으로 돌아와 책 정리를 간단하게 한 후 노트북을 켰다. 인터넷을 켜봤자 블로그와 온라인 서점 밖에 둘러 볼 곳이 없기에 바로 컴퓨터를 끄려고 했는데, 오늘따라 유난히 내 블로그 음악이 나를 이끌었다. 잔잔한 피아노곡들로 이루어진 배경음악을 듣고 있자니 그제야 쌓였던 피로가 풀어진 듯 했다. 내친김에 이런 분위기에서 책이나 읽자 해서 꺼낸 책이 오늘 도착한 <타샤 튜더, 인형의 집>이었다. 출간 소식을 좀 늦게 알아 이제야 내 책장으로 들인 책인데, 지금 분위기에서 펼치면 제격일 것 같았다.

 

  나의 예감을 꿰뚫듯, 오랜만에 찾아온 타샤 할머니의 책은 고적한 분위기로 이끌었다. 귀에 감기는 감미로운 음악과 함께 차분해지는 마음을 향해 타샤 할머니의 손길이 묻어 있는 인형들의 세상이 들어왔다. 타샤 할머니의 독특한 라이프스타일에 관해 조금만 관심 있는 독자라면, 타샤 할머니가 만든 인형의 세계가 낯설지 않을 것이다. 워낙 다방면으로 관심을 기울이고 재주가 있는 타샤 할머니라서, 이렇게 분권으로 책이 나올 정도다. 타샤 할머니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쁘거니와 그 안으로 들어가 보면 상상하지 못한 또 다른 세계가 기다리고 있음에 놀랄 것이다.

 

  타샤 할머니는 어릴 때 엄마로부터 선물 받은 인형을 통해 작고 오밀조밀한 세계에 빠져들게 되었다. 타샤 할머니가 직접 만든 인형을 통해 자녀들과 함께 많은 추억을 쌓았음은 물론, 전시회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도 교감이 되었다. 타샤 할머니는 정교하기 짝이 없는 인형들의 세계를 즐겁기 때문에 만들어 갔다고 했는데, 보통 사람이 보기에는 예술적인 가치가 충분해 보였다. 남자 인형 새디어스를 만들고, 여자 인형 멜리사를 만든 후 결혼을 시키면서 또 다른 세계의 포문을 열었다. 인형들의 결혼식은 <라이프>지에 실릴 만큼 엄청난 화제가 되었다고 하는데, 지금 인형의 집 안주인은 엠마다. 엠마라는 인형을 만들고 나서 돌하우스의 안주인이 바뀐 것이다. 타샤 할머니의 분신이라고 해도 될 만큼 쏙 빼닮은 엠마는, 타샤 할머니의 결혼생활에 대한 안타까움과 소망을 드러내고 있는 것 같아 잠시 마음이 찡해지기도 했다.

 

  타샤 할머니는 네 자녀를 두었지만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진 못했다. 사랑 없는 결혼을 했고, 이혼을 한 뒤 혼자서 네 자녀를 훌륭하게 길러냈다. 그래서인지 멜리사가 안주인에서 물러난 것도 타샤 할머니의 분신인 엠마가 새디어스와 행복하게 지내는 것에서 타샤 할머니의 그림자를 느낄 수 있었다. 타샤 할머니에게 남편의 빈자리가 흠으로 보일 정도로 자신의 독특한 삶에 매료되어 살아왔다. 엠마와 새디어스를 통해서 결혼생활의 행복을 갈망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만큼 인형들의 세계임에도 타샤 할머니는 현실을 반영한 또 다른 세계의 이면을 보여준 셈이었다.

 

  인형들의 집을 보고 있노라면 저것이 실재인지, 미니어처인지 헛갈릴 정도였다. 그만큼 타샤 할머니의 손길이 묻어난 작은 세계는 철저히 타샤 할머니의 집과 취향을 반영한 것이었고, 타샤 할머니의 손길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의 정성이 들어간 결과였다. 엠마와 새디어스가 생활하고 있는 집은 코기 코티지를 축소해 놓은 것이었다. 부엌, 침실, 서재, 염소 헛간 등 코기 코티지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인형의 집은 타샤 할머니의 단순한 취미라고 단정 지을 수 없었다. 애정과 사랑이 아니었다면 결코 만들 수 없었을 것이고, 완벽한 인형의 집이 탄생하기까지 도움을 준 많은 사람들의 손길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인형의 집의 살림살이 하나하나를 꼼꼼히 둘러보면서 감탄밖에 터트릴 것이 없었다. 또 인형들의 세계지만 무척 행복하고 편안해 보이는 모습에 괜히 미소가 지어졌다. 결혼을 하게 된다면 엠마와 새디어스처럼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기자기 하면서도 장인들의 정성이 빚어낸 분위기는 말로 형언할 수 없었다. 타샤 할머니의 삶이 그대로 녹아 있는 인형의 집으로 새로 태어난 또 다른 세계는 그렇게 깊은 감동을 자아냈다. 타샤 할머니이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삶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넘쳤기에 이런 세계를 만들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타샤 튜더, 인형의 집>을 다 둘러보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평소의 속도라면 더 빨리 읽어버릴 수 있었겠지만, 오랜만에 만난 타샤 할머니의 흔적을 대충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음악을 들으며 천천히 책을 읽어 나갔고, 인형의 집을 구경하면서 실재하지 않는 세계를 상상했다. 그 세계에서 엠마와 새디어스가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길 진심으로 바랐다. 타샤 할머니는 더 이상 뵐 수 없지만, 할머니의 흔적이 배어있는 인형의 집은 오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색다른 세계를 열어주었으면 했다. 늘 그렇듯, 타샤 할머니의 책을 한 권씩 읽을 때마다 그리움이 짙게 묻어난다. 그래도 타샤 할머니가 남겨준 흔적을 이렇게나마 조우할 수 있으니 그것에 감사하면서, 오늘 밤에는 인형의 세계의 행복감 속으로 빠져들고 싶은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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