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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독 밀리어네어 - Q & A
비카스 스와루프 지음, 강주헌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2월
평점 :
무언가 집중할 거리가 필요했다. 마음은 자꾸 궁지에 몰리고, 좁은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다른 것에 관심을 돌리지 않으면, 극단적인 생각들이 걷잡을 수 없이 움틀 것 같았다. 이미 손에 책을 쥐고 있었지만 도무지 그 책에 집중할 수 없어 책장에 시선을 돌렸다. 정신을 쏙 빼놓을 책을 골라서 읽을 작정이었다. 그러다 <슬럼독 밀리어네어>를 발견했다. 이미 영화로 만들어질 만큼 독자들 사이에서도 입소문을 탄 책이었고, '한 번 잡으면 놓을 수 없다.' 고 말한 사람들이 많았기에 이 책이다 싶었다. 현재의 정신적인 고통에서 나를 잠시라고 구해주길 바라며 책을 펼쳐 들었다.
입소문은 사실이었다. 숨 가쁘게 책장이 넘어갔고, 복잡한 현실을 잊을 수 있었으며, 졸려서 눈이 감기는데도 책을 놓을 수 없었다. 책을 읽고 시간을 보니 새벽 1시가 넘어 있었다. 몇 시간 동안 읽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적어도 책을 읽는 순간에는 고스란히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간 사실이 고맙게 느껴졌다. 그러다 문득 책장 정리가 하고 싶어, 어지러운 책장을 골라 장르를 구분하고 책을 재배치했다. 한 권의 책을 읽으며 보냈던 시간을 마무하는 계기가 되었고, 훨씬 마음이 차분해져 편안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아침에 일어나 머리맡에 있는 책을 본 순간, 왠지 모를 허무함이 밀려왔다. 파란만장한 이야기였지만 무언가 충족되지 않은 허무함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늦게까지 책을 읽은 탓에 뻐근한 몸을 일으키기 힘들어서 그랬는지 내 마음을 휘감는 낯선 감정이 무엇인지 몰랐다. 재미나게 읽었음에도 한 사람의 인생을 통해서 나는 무엇을 얻었나 하는 진지한 질문을 아침나절부터 하게 되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는 끈기, 정직함, 이루고 싶은 꿈이 있는 열의를 닮아야 하는 걸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도 어떠한 것에도 대답할 수 없었다. 슬럼가의 웨이터인 람 모하마드 토머스가 퀴스쇼에 출현해 모든 문제를 맞혀 10억을 벌게 되었다는 사건이 이 소설의 중점이었다. 하지만 그가 퀴즈쇼에서 문제를 하나씩 맞춰갈 때마다 남다른 감동이 밀려오거나, 그 일로 인해서 많은 사람에게 희망을 준다는 진부함이 묻어 날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퀴즈쇼에 참가한 목적은 마지막에 드러나고, 한 문제씩 정답을 맞춰나갈 때마다 그가 어떻게 그 답을 알 수 있었는지 알려주는 람의 인생 자체에 초점이 맞춰져있기 때문이다.
람은 퀴즈쇼의 어두운 배후 때문에 우승을 했다는 이유로 체포된다. 그가 모든 문제를 맞췄다는 것에 사기성을 부여해 상금을 지급하지 않으려는 목적이 있었다. 람에게 고문이 행해지고 있을 때, 한 여성 변호사가 그를 구해주고 어떻게 12문제를 다 맞출 수 있었는지 진실을 말해 달라고 한다. 그로 인해 람의 인생이 순차적으로 밝혀지는 것이 아니라 퀴즈의 문제에 따라 과거의 조각이 맞춰지기 시작했고, 그냥 모든 답을 다 알고 있었다는 람의 말이 사실임이 드러났다. 퀴즈쇼에서 12문제를 다 맞췄다고 해서 머리가 비상할 것이라는 편견을 벗기는 사건이었고, 삶의 치열한 현장에서 일반상식을 뛰어넘는 경험과 지혜를 얻으며, 그것이 판에 박힌 퀴즈쇼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람의 파란만장한 과거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인도의 배경은 물론 방치되는 인생이 얼마나 많은지에 놀라게 될 것이다. 인도의 실상을 알게 되었고, 그것이 꼭 남의 나라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저자가 인도에서 태어나 자랐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외교관의 신분으로 자국을 바라본 시선이 더 냉철했으리라 생각한다. 저자의 시선을 통해 힌두교, 이슬람교, 기독교의 이름을 모두 가지고 있는 람은 종교 갈등과 인종차별, 성(性)의 문란함, 자본주의의 이면을 알게 되었고, 그가 만난 사람들의 이중성까지도 모두 알게 되었다. 그것은 인도의 실상일지도 모르고, 다양한 사람들이 섞여 사는 세상의 실태를 그대로 보여준 것인지도 모른다. 그 안에서 삶의 끈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다는 것이 처절한 희망이라면 희망이었다.
람은 감당하기 힘든 좌절과 고난, 아픔, 상처를 모두 이겨내고 있었다. 유명 배우의 집에서 일하게 된 것, 타지마할에서 관광 안내원으로 일하다 니타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강도를 만나 돈을 뺏기고 그에게 총을 쏜 일 등 20살도 안된 청년이 갖고 있기에 너무나 버거운 삶의 흔적이었다. 고아로 태어나 바텐더의 자격으로 퀴즈쇼에 참가하게 된 과정은 줄거리를 언급하기조차 벅찰 정도다. 18년의 인생이 그렇게 화려할(?) 수 있다는 것에 연민을 느꼈고, 나라면 진작 좌절하고 낙심해 버렸을 거라는 자기비판까지 튀어 나왔다. 진흙 구덩이 같은 삶에서 충실하게 살아온 람이 마냥 대견해 보였다. 그렇기에 퀴즈쇼에서 어떻게 답을 맞혔는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람이 살아온 이야기를 듣다보면 퀴즈쇼는 그야말로 쇼에 지나지 않았고, 하나의 과정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람이 풀어내는 문제들과 함께 그의 삶은 낱낱이 드러났지만 람의 체포로 시작된 이야기는 희망적으로 결론지어질 거라는 기대를 품을 수 없었다. 그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끝이 보이지 않았고, 그가 만들어 가는 삶인지 주어진 운명에 충실한 것인지 헛갈릴 정도였다. 또 다른 고난이 그의 앞에 닥칠 것 같았고, 상금의 지급여부도 투명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늘 반전이 있었고, 람의 인생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었으며 인연의 지속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가 만난 변호사가 예전에 자신이 도와준 사람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그가 퀴즈쇼에 참여하게 된 진실이 드러난다. 그리고 나의 염려와는 달리 조금은 안정된 삶을 살게 되는 그의 모습으로 마무리 지어졌다.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고, 다른 사람의 꿈을 이뤄주었으며, 행운의 동전을 버림으로써 행운은 내면에서 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가 겪어온 파란만장한 삶의 보상이라고 생각해도 좋고, 삶의 충실하게 살아온 희망의 증거가 이제 시작되었을 뿐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의 삶을 통해 인생의 중요한 것들을 알아 갔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도무지 한 사람이 겪었다고 생각되어 지지 않을 정도의 다양한 이야기는 이질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하룻밤이 지나자 그 이야기가 낯설게 다가왔던 이유는 내 삶의 주인공이 나임에도 이제껏 도피해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지금껏 내 삶을 방관하며 살아왔고, 타협하기 쉽다는 이유로 무엇 하나 진정한 노력을 기울여보지도 않았다. 그 결과가 현재 나의 모습이기에 람의 삶을 보면서 느꼈을 당황스러움은 불 보듯 뻔했다. 희망과 용기, 끈기, 삶에 대한 사랑은 배재한 채 오로지 현재에 안주하려는 내 모습과 거부반응을 일으킨 것이다. 허무한 이야기라고 치부해 버리고, 무언가 석연치 않다고 무시해 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람의 인생은 한동안 내 삶과 충돌을 일으키며 나를 괴롭힐 것이다. 그 괴롭힘 속에서 진정한 나를 뚫고 나오길 바라는 작은 희망을 품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