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를 타고 달렸어 민음의 시 154
신현림 지음 / 민음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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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우리 집 근처로 이사 온 지인의 집에 놀러갔다. 간 김에 하룻밤 묵고 가기로 했는데, 놀다 보니 12시가 훌쩍 넘어 버렸다. 그 시간에 잠을 자도 다음 날 피곤할 것을 앎에도 적막한 분위기가 좋아 책을 펼쳤다. 내가 사는 아파트가 아닌 주택이라서 고요한 가운데 풀벌레 소리를 들으니 책을 펼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 가져간 책이 그런 분위기에서 읽기 좋은 시집이라서 몹시 피곤함에도 눈을 부릅뜨고 시를 읽어 나갔다.
 

  적막한 분위기가 아니더라도 신현림 시인의 시집은 마음을 사로잡는 무언가가 있었다. 집중하지 않으면 흐트러져 버릴 시가 아닌 주변의 소음을 삼킬 정도로 내면을 울리는 시들이 많았다. 시집을 좋아하면서도, 책장에 읽지 않은 시집이 즐비하면서도 쉽게 손을 뻗을 수 없던 이유는 시의 난해함 때문일 것이다. 문학의 꼭대기에 위치한 장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충분히 느낄 수 있기에 선뜻 즐겨 읽을 수 없었던 장르인 시를, 신현림 시인을 통해 한 발짝 다가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마치 일기를 읽는 듯 시인 자신의 아픔을 드러내며, 내면 깊숙이에 자리한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세계를 기꺼이 보여줬음으로 인한 동질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르리라.

 

  그녀의 시를 접한 적은 없지만, 6년 만에 나온 시집이라는 말이 아니더라도 꾹꾹 눌러 담은 흔적이 자연스레 배어나왔다. 아픔, 상실, 사랑, 고통 들이 마치 춤을 추듯 쉴 새 없이 터져 나왔음에도 독자의 감정을 바닥으로 끌어내리지 않았다. 오히려 시인의 내면을 보면서 내 안에 숨겨 두었던 어두운 감정들이 쏟아져 깨끗해진 기분이라고 하면 과장일까? 잠이 오지 않는 날 우울함에 발버둥 치던 나의 모습, 사랑의 아픔으로 슬픔에 빠졌던 나날, 왠지 모를 상실감에 울적해진 마음을 한 권의 시집에서 모두 만난 느낌이었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함 같은 감정들도 나 혼자만이 가지는 느낌이 아니라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줌으로써, 되레 위로를 받고 있었다. "변하는 관계, 유통기한의 세계가 낯설어 적응 못하는 나/지루한 삶을 못 바꾸는 내가 싫어 몸에 불 지르고 싶거나/(중략)/정말 속의 씨앗도 못 보고 탄식하는 내가 싫어<아직도 가야 할 길>" 란 시구는 나의 얘기를 하는 것 같아 움찔하면서도 한 번 더 음미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시집 안에는 시인이 직접 찍은 사진들과 여행 시들도 실려 있었다. 새로운 곳을 갈 때마다 무언가 글로 남겨보고 싶단 생각을 하면서도 쉽지 않았는데, 시인의 시를 읽다보면 짧은 시로 이처럼 맛깔나게 표현해 내는 것에 감탄을 하곤 했다. 직접 보고 느낀 것들을 장황하거나 거창하게 표현한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시로 포현해 내는 솔직함이 좋았는지도 모르겠다. 시인은 자신의 감정 이외에도 시에 대한 갈망, 사랑에 대한 열정을 스스럼없이 표현하기도 했다. 신현림 시인의 키워드가 '솔직함'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내면의 바닥까지 샅샅이 드러낸 그녀의 시 앞에서 더 이상 부끄러울 것이 없었다. 나라면 이토록 솔직하게 토로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을 던질 정도로 진솔한 그녀의 시는 독자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오랜만에 읽은 시집임에도 다른 문학 장르만 읽어댔던 공백기를 깨트려 주기에 충분한 시집이었다. 시에게 한껏 다가갈 수 있었던 시간은 신현림의 시를 통해서였고, 그녀의 시집을 처음 접함에도 낯섦이나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아 좋았다. 침대를 통한 그녀의 고백도 공감이 갔고, 사랑하고 싶은 그녀의 욕망도(나 또한 아직 연인이 없어서인지 몰라도)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었다. 세상을 향한 시이면서도 자신을 향한 시이기도 한 신현림의 시집 <침대를 타고 달렸어>는 수많은 독자들에게 보이지 않은 위로를 던져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세상의 많은 것들이든, 사람이든 "다시 못 만날 때를 생각하며 사랑해라/영영 다시 못 만날 때가 오니 깊이 사랑해라<엄마의 유언, 너도 사랑을 누려라>" 라고 말한 저자처럼 사랑을 통한 희망을 가져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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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송 카프카 전집 3
프란츠 카프카 지음, 이주동 옮김 / 솔출판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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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 휴가를 보내기 위해 서울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펼친 책은 카프카의 <소송>이었다. 26살 생일에 선물 받은 책인데 2년을 묵혀 두다 꺼냈음에도 결국 완독을 못하고 말았다. 기차 안에서 읽은 양 그대로 책장에서 또 1년을 묵히고 올 여름 또 다시 <소송>을 꺼내 들었다. 이상하게도 이 책은 여름에만 꺼내게 되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기보다 여름이란 계절이 가져다주는 더위와 진부함, 육체의 늘어짐에 대한 보상을 이런 책에서 찾을 수 있을 거란 기대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계절과 반대되는 분위기의 책을 찾는 것보다 그와 비슷한 분위기의 책을 통해 함께 나아가는 것. 카프카의 <소송>이 그 느낌을 그대로 전달해 주기를 의심치 않았다. 그의 작품은 <성>밖에 읽지 않았지만, 무척 힘겹게 읽은 작품이었음에도 미완성으로 끝나 좌절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런 경험 덕에 카프카의 작품이 녹록치 않음을 알기에 여름에 느껴지는 진부함을 묻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작년에 읽은 절반 정도의 양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을 리 만무했다. 책을 처음부터 다시 읽을 용기가 없어 내용은 생각이 나지 않더라도, 읽어 가면서 앞의 내용을 떠올려 보기로 했다. 그렇게 책을 읽다 보니 처음에는 새로운 소설을 읽는 듯 낯섦이 가득해 혼란스러웠다. 어느 정도 읽어 나가자 상세하게는 아니더라도 어떤 분위기였는지 조금씩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여전히 주인공 요제프 카의 소송은 진행 중이었고, 소송에 진도가 나가지 않았으며, 왜 소송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카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가면서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을 토로하기도 하며, 충고를 받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소송의 원인에 대해서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책의 시작은 카가 체포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30살의 생일을 맞은 날 아침, 자신의 침대에서 체포된 카는 아무런 잘못도 없기에 누군가가 자신을 모함했다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가볍게 받아들이며, 소송의 실체가 드러나면 자신의 무혐의는 밝혀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전히 소송의 진위는 모호했고, 카가 아무리 노력하고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녀도 소송의 원인의 밝혀짐은 물론 과연 소송의 중심에 카가 온전히 서 있는지에 여부도 의심이 되었다. 소제목을 달고 있는 사건들 사이에 늘 카가 있었지만, 소송과는 무관해 보이는 일도 많았고 소송의 진부함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을 뿐이었다. 카는 자신이 근무하고 있는 은행에서도 일을 제대로 못할 정도로 자신을 옥죄고 드는 소송에 휘말리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카가 소송에 휘말렸다는 것을 알고 도움을 주려는 손길이 있음에도 소송의 실체를 모르고, 자신이 노력해 봐도 '법'의 언저리에도 접근하지 못한다.

 

  카의 그런 행보를 지켜보고 있다 보면, 소송의 중요성이 크게 와 닿지 않은 게 사실이었다. 진부하긴 하지만 언젠가는 진위 여부가 밝혀질 것이라 생각하고, 카가 맞이하는 일상과 생각들을 별 부담 없이 읽어 나갔다. 때론 카를 비롯한 타인과의 대화가 이질적이고, 그 모든 것을 표현하는 비유에서 문화의 차이를 느껴 소송의 중요성을 망각할 정도였다. 소송 때문에 찾아간 곳에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과 어울리며, 왜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 싶을 정도로 카를 둘러싸고 있는 소송이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하면서도 긴 터널을 지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과정을 카와 함께 보냈음에도 결말 앞에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카의 진부하고도 긴 노력에도 불구하고 카는 두 명의 사형 집행인들에게 의해 잔인하게 처형되고 만다. 카가 어떤 잘못을 해서 소송에 휘말렸는지 설명을 해 주지도 않은 채, 카가 당면한 지난함만 보여 주고 '개' 같은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어쩌면 책 내용 가운데 카가 당면하고 있는 소송의 이면인 법의 무자비함과 법의 테두리 밖에 머물러 있음을 이미 알려 줬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의 충고 속에 카가 당면한 현실을 냉정하게 보여준 몇몇 장면들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카가 잔인하게 처형당할 정도로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모함이든 장난이든 원인을 규명해 주어야 하는데 끝내 밝혀지지 않은 채 카는 형장의 이슬도 아닌, 개죽음으로 생을 마감한 것이 그랬다. 옮긴이는 '우리가 망각하고 있던 정신적, 영혼적 세계와 그와 상반되는 현실세계가 만나는 중간 상태를 시작으로 보여줌으로써 독자에게 서로 괴리되어 있던 두 세계를 동시에 접하게 한다.'고 했다. 그렇더라도 나 같은 무지한 독자들에겐 그런 괴리의 접함이 당황스러울 뿐, 숨은 의미를 찾아내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거기다 카프카의 <소송>은 원전 텍스트 비판 문제로 논란이 많았던 작품이라고 한다. 지금까지는 막스 브로트판이 유일한 것이었으며 카프카에게 직접 원고를 건네받아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임의적으로 수정, 보완해서 발표했다고 한다. 그러다 브로트의 사후 카프카의 유족들에게 원고가 돌아갔고, 영국 독문학자 M. 패슬리에 의해 학술 비판본이 발간되었다고 한다. 이 책은 패슬리의 비판본으로 원고 그대로 실려 있다. 책의 후반부에는 미완성의 장들도 있는데, 그 장들도 역시 원본에 충실했다. 소설을 읽고, 미완성 된 부분까지 읽는 경험 또한 독특했지만 <소송>을 읽으면서 저자의 의도를 충분히 만끽하지 못한 나의 부족함이 아쉬웠다. 그러나 그의 작품이 이렇게 모호했음에도 카프카의 다른 작품은 여전히 궁금하다. 오래 전에 선물 받은 카프카의 다른 작품이 있지만, 카프카의 가장 난해한 3대 소설을 완성 시키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실종자>를 읽어보려 한다. 카프카와의 만남이 더디긴 하지만 저자와의 만남의 끈을 놓고 싶지 않기에, 당분간은 만남 자체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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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타락천사 새로고침 (책콩 청소년)
A. M. 젠킨스 지음, 천미나 옮김 / 책과콩나무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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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문학을 아무리 좋아한다고 해도, 겉표지의 섬뜩한 소년과 책 제목은 나를 주춤거리게 만들었다. 읽을까 말까를 몇 번 망설이다 책이 내게로 왔음에도 쉽게 손길이 가지 않았다. 내면에 있는 타락함을 그렸게니 생각해봐도 혹시나 우울하게 만들어 버릴까봐 걱정스러웠다. 그렇게 망설이다 책을 집어 들었건만, 너무나 흡인력 있게 다가오고 전혀 우울하지 않는 내용에 잠시 멍해졌다. 이런 내용이었다면 진작 읽었을 텐데, 오히려 겉표지와 책 제목이 거리감을 두게 만들어 버린 것이 아닌가. 반대로 인간의 타락을 만끽(?) 하려 책을 펼쳤다면, 역시나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과연 이 이야기를 타락이라고 할 수 있을지 쉽게 결론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타락천사 키리엘은 십대 소년인 숀의 육체를 훔쳤다. 훔쳤다고 표현이 적절한 것은 교통사고로 영혼이 빠져나간 그 사이에 키리엘이 숀의 육체에 안착했기 때문이다. 키리엘이 숀의 육체에 들어오면서 진짜 숀의 영혼은 떠나갔지만(그것을 숀의 죽음이라 불러야 하는지 의문이다.), 육체는 그대로 남아 겉의 숀은 여전히 존재했다. 물론 키리엘의 행동은 그들 세계의 법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지옥에서 감독을 해야 하는 키리엘이 인간 세계로 내려온 것도 그렇고, 육체 탈환을 한 것도 그랬다. 키리엘의 목적 또한 불순했기에 나의 섣부른 짐작으로 결코 고운 시선을 던질 수 없는 내용들이 나올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이론상으론 모든 것을 알지만 경험이 부족한 키리엘에겐 인간세계는 그야말로 호기심을 맘껏 충족할 수 있는 세계였고, 오히려 하나님의 경이로움을 깨달을 수 있는 특별한 시간이 되어갔다.

 

  키리엘은 십대인 소년의 육체에 들어온 만큼 그 나이 대에 생각할 수 있는 불순한 것들을 생각하고 실행해 보기로 한다. 섹스를 하고 싶어 하고, 자위를 경험하며, 연애를 하고 싶어 한다. 십대인 만큼 숀의 관심사는 성적인 것들에 초점이 맞춰질 수밖에 없었는데, 키리엘 또한 경험해 본 것이 하나도 없었으므로 그것들에 대한 호기심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키리엘이 하는 행동들과 생각들이 숀의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었다. 인간의 육체를 가지고 있기에 느끼는 생리욕구라든가 자연스레 갖게 되는 다양한 인간의 조건들이 오로지 키리엘의 의지대로 한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숀의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숀은 평상시와는 좀 달라 보일 뿐, 숀 이외의 존재로 볼 수 있는 시각이 없었다. 고양이 피너츠와 숀을 좋아하는 레인 정도가 숀의 변화를 감지했지만, 그렇다고 눈에 띄는 변화는 없었다.

 

  키리엘의 불손했던 마음들을 하나하나 실행시키기 위해 숀의 육체를 빌어 계획을 하나씩 세우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키리엘이 가장 경험해 보고 싶은 것은 섹스였는데, 자신을 좋아하는 같은 학교 학생인 레인에게 접근하지만 기회는 오지 않는다. 오히려 레인의 진짜 매력을 발견하게 되고, 인간세계에서 시간마다 느끼는 모든 경험들을 만끽하는 것에 더 관심이 쏠려 있었다. 옷의 느낌, 시각, 음식의 맛 등 키리엘은 인간에게 적응하기보다 이론상으론 빠삭한 것들을 경험해보는 데에 더 치중했다. 그러나 키리엘의 내면은 생각과는 조금 다르게 흘러간다. 자신의 신분은 타락천사이고, 자신을 분명 데리러 '보스(타락천사의 우두머리)'가 나타날 것이며, 영원히 숀의 육체에 머무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숀의 육체에서 하루를 보내도 자신에게 복귀하라는 명령도, 숀이 아니라는 비난도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키리엘은 숀이 살아왔던 세계에 좀 더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숀은 함께 살고 있는 엄마와 남동생 제이슨, 그리고 가장 친한 친구인 베일리와 자신을 좋아하는 레인에게 초점을 맞춰 생활해 간다. 이 책은 키리엘이 숀의 몸을 빌려 3일 동안 체험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는데, 정말 인간세계로 내려온 적이 없는 것 같은 타락천사가 적응해 간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세세했다. 또한 인간에게 느껴지는 감정에도 충실했다. 숀의 원래 모습은 그다지 살갑지도 않고, 동생과 잘 지내지 못하며, 학교에서도 조용하고, 친구라곤 베일리뿐인 평범하지만 별 특징 없는 소년이었다. 그런 소년의 몸에 키리엘이 들어갔으니, 키리엘의 인격과 습관들이 그대로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숀과는 전혀 다른 행동과 생각들로 키리엘은 인간세계에서의 3일을 빠듯하게 보낸다. 3일이라는 시간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인간화 되어 가는 키리엘을 보는 것은 그만큼 흥미로웠다.

 

  숀의 변화는 인간관계에서 바로 나타났다. 평상시에 잘 지내지 못했던 제이슨과 엄마를 마음 써 주며, 불순한 마음으로 접근했지만 정말 레인을 좋아하고, 학교의 말썽쟁이에게 훈계를 하는 등 평소의 숀 답지 않은 행동들을 한다. 오히려 그런 키리엘을 지켜보면서, 타락천사가 아닌 원래의 숀보다 더 나아 보이기도 했다. 원래의 숀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지만, 키리엘이 숀의 육체에 들어왔을 때는 몸의 주인보다 더 나쁜 행실을 하게 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숀보다 더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며, 상대방을 배려하고, 충고하고, 조금씩 정이 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니 육체를 잃어버린 숀에 대한 안타까움은 들지 않았다. 엉뚱하게도 키리엘이 계속 내면에 머물러 그렇게 주위 사람들과 성실하게 얽혀가길 바랐다. 하지만 그는 인간이 아니었고, 불법을 저지른 채 인간세계로 왔기 때문에 언젠가는 자신이 속한 세계로 돌아가야만 했다.

 

  키리엘이 보여준 모습과 행동들은 10대 소년이 가질법한 것들이면서, 추락천사인 원래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어 오히려 인간적인 면을 많이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끊임없이 신에게 관심 받고 싶어 하며, 불평하고, 비난하고 힐난한다. 그러면서도 인간세계에서 느끼는 작은 것들에 감탄을 하게 된다. 그것은 곧 신에 대한 감탄 일 수도 있는데,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는 이 책의 제목을 '내 안의 타락천사'(악행을 저지르는 존재가 아닌 숀 안에 자리한 키리엘 자체로도 볼 수 있지만)가 아닌 '타락천사의 인간세상 체험기' 정도로 바꿔도 될 정도로 긍정적인 시선이 많았다. 그러나 그가 체험한 인간세계는 3일에 불과했고(3일이라는 시간이 부활과 연관 있어 보였다. 누구의 부활일까.), 처음 먹었던 불순한 마음들을 실행하지 못한 채 숀의 육체에서 빠져나와야 했다. 그가 숀의 육체에 들어왔을 때 그것을 숀의 죽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나 말아야 하나 헷갈렸는데, 천사가 나타나 숀의 영혼을 다시 불러들이려 했다. 키리엘이 숀의 육체에 들어왔던 때와 같은 상황을 만들어 키리엘의 인간 세계 체험기를 끝내려 했다.

 

  어떠한 결과를 낳았는지 들려주지 않은 채 책은 끝이 나지만, 키리엘이 경험하고 생각한 모든 것에서 과정은 충분히 보여줬다고 생각하므로 결론에 와서 큰 혼란을 겪지는 않았다. 그러나 키리엘이 '타락천사'가 아닌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세계를 살아가 주었으면 하는 갈망은 여전했다. 역으로 생각하면 숀의 정체성은 잃어버린 채, 키리엘이 들어와 더 나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며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내 자리(삶)에 대해 되짚어 보게 된다. 그렇게 생각하니 내가 아닌 다른 이가 내 안에 들어와 평상시의 나보다 더 잘 살아간다면, 질투가 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이기에 그것만으로 특별하므로 여전히 '나'여야 했다. 그런 것들을 따져본다면 키리엘이 경험했던 인간세계의 3일의 소중함을 떠올려 보지 않을 수 없다. 결국은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조금은 진부한 깨달음이 나를 지배했지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현재도 내게는 무척 과분한 시간임을 감사해 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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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오스 하룻밤의 지식여행 53
지아우딘 사르다르 지음, 이보나 에이브럼스 그림, 이충호 옮김 / 김영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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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나로 우주센터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나마 내가 사는 곳에서 가까워서 근처에 갈 일이 있어 겸사겸사 방문을 했는데, 역시나 흥미를 끌었던 것은 하나도 없었고 지루했던 기억만 난다. 관심의 차이라 해도 서점을 방문한 것처럼 폴짝거리며 뛰어다닐 거라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우주에 관한 다양한 전시가 되어있음에도 담너머 불구경 하듯이 눈도장도 못 찍고 왔으면서 책장에서 빼낸 책이 '카오스'라니. 정신이 혼미해서 책장에서 책을 잘못 꺼냈나 싶을 정도로 나와는 어색한 조우였다.
 

  다양한 장르의 책을 섭렵하는 것이(아주 미미한 건드림에 지나지 않는 독서지만.) 즐거운 것임을 앎에도 내가 이런 책을 읽게 될 줄은 몰랐다. 과학에 '과'자도 모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뿐더러(이런 말은 새로운 장르가 나올 때마다 내가 즐겨 들먹이는 말이다.), 과학은 학창시절에 전혀 흥미가 없었던 과목 중 하나였다. 조금씩 일상생활에서도 과학의 흥미로움이 깔려 있다는 것을 알고 생각을 조금씩 고쳐나가고 있지만, 여전히 이런 책을 보면 별 세계를 얘기하고 있는 것 같다. 이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그렇게 보이는 것은 당연하고, 나와는 차원이 달라도 한참 다른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을 늘 인정하게 된다.

 

  나 같은 독자를 위해서인지 이 책은 '하룻밤의 지식여행'이라는 부제목을 달고 있었다. 어차피 깊이 들어간다 해도 내가 이해하기는 불가능 하니 가볍게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조금은 부담이 덜어졌다. 책을 펼치고 있음에도 왜 이 책을 집어 들었는지를 나조차도 알 수 없었으므로, 하룻밤에 어떠한 효과를 볼 수 있는지 가늠해 보기로 했다. 카오스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은 혼돈이나 무질서 상태라는 기본적인 뜻 밖에 없다. 그런 상태에서 이 책을 읽었으므로 아무리 '하룻밤의 지식여행'이라고 해도 새로운 영역에 발을 들여놓음에 멍해지고 말았다.

 

  이 책의 구성은 좀 독특했다. 카오스에 관련된 소제목과 간략한 글이 있고, 그 아래 그림이 있다. 대부분 사진에 다른 그림이 따로 그려져 있었는데, 그림 자체가 독특했다. 카오스에 관한 여러 가지를 소개하다 보니 그랬으려니 싶어도 생뚱맞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림 안에는 말풍선이 있어 소제목에 대한 설명을 돕기도 한다. 하지만 이질감이 가득했고, 카오스에 대한 소제목에 합당한 부가설명인지 의심이 가기도 했다. 워낙 아는 것이 없어서 책을 읽고, 그림을 보고, 말풍선을 보아도 그것들을 내 머릿속에 들여 놓기란 쉽지 않았다. 카오스 현상이 흥미롭긴 하지만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는 발견이어서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유명한 과학자들조차 그저 환상적인 이야기로 여겼다고 한다. 카오스 이론은 단순성과 복잡성, 질서와 무작위성 사이의 미묘한 관계를 드러냄으로써 우리의 일상 경험을 자연의 법칙과 연결해 준다고 한다. 그런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연구할 가치가 있으며, 과학자들의 흥미를 끓어 들일 테지만 나 같은 문외한들에게는 여전히 미지의 세계로 남겨두고 싶은 욕망이 가득했다.

 

  너무 많은 지식의 방대함 때문인지 카오스 이론은 쉽게 피부에 와 닿지 않았다. 미미하게나마 어느 정도 수긍이 가기도 했지만, 일상생활에서 그것을 찾아내거나 어떠한 현상 속에서 발견해 내기란 쉽지 않았다. 책에서는 카오스 이론은 간단하게 결정론적 계 안에서 비주기적이고 무작위적인 것처럼 보이는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하지만 역시나 내가 속한 현재에서 카오스 현상과 연결 지을 만한 것들은 여전히 드러나지 않았다. 이런 나의 반응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책은 다양한 현상과 파생되는 여러 이론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고 있었다. 복잡하고 깊게 설명해 주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 뻔 하지만, 간단하게 설명을 해주었음에도 혼란스러웠다. 아무래도 기본적인 지식을 다양하게 나열한 구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물체가 지닌 울퉁불퉁함이나 끊어짐, 불규칙성의 정도처럼 달리 명확하게 정의를 내릴 수 없는 속성을 측정하는 방법인 프랙탈부터, 카오스 경제학까지 뻗어 나가는 방대함에 기가 눌릴 지경이었다.

 

  두껍지 않은 한 권을 책을 읽었음에도(그림이 더 많았는데도), 너무나 많은 것들이 내 눈앞에서 스쳐간 기분이다. 내 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겉핥기만 했는데도 정작 내가 건져낼 수 있는 것들은 없었다. 워낙 문외한이기도 했거니와 나의 이해력이 느려 카오스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 것 같은 느낌이다. 카오스에 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정리하는 식으로 읽어본다면 좋을지는 몰라도, 나처럼 전혀 발을 들여놓지 않은 분야의 책을 꺼낸 사람들은 낭패감을 맛볼 수도 있다. 선호하지 않은 장르라고 해도 새로운 영역에 발을 들여 놓는 것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나에게 많이 부족함을 느꼈다. 이런 책은 나보다 더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에게 넘겨주는 것이 제격이므로, 과학을 공부하고 있는 지인에게 어서 넘겨주고 무거운 짐을 털어 버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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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일
오츠이치 지음, 김수현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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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츠이치란 작가는 <ZOO>를 통해서 독특함을 인식하게 되었고, <여름과 불꽃과 나의 사체>로 저자의 가치를 각인시키게 된 작가다. 분명 이런 장르를 좋아하지 않음에도 작품의 독특함과 완성도면에서는 후한 점수를 주지 않을 수 없었다. 공포보다는 서늘함과 오싹함이 여운으로 남는 작품들이 주류였기에 썩 즐거운 마음으로 책을 읽을 수 없었다. 그러나 신간이 나왔다고 하면 관심이 가기 마련이었는데, 여전히 그의 작품을 대할 때는 멈칫하게 만드는 무엇인가가 있다. 평상시에 내가 생각하지 않는 세계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베일>에 실린 첫 번째 단편 '천제요호'가 그랬다. 기이한 이야기였고, 묘한 공감을 끌어내면서도 기억의 연속성을 이어가고 싶지 않은 소설이었다. 소년이었던 야기는 몸이 아파 누워있다가 심심해서 당시 친구들이 즐겨하던 코쿠리 상(초혼술의 일종) 놀이를 한다. 내가 어릴적에 했던 분신사바 놀이가 아마 여기서 유래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흡사했다. 분신사바 놀이는 내가 직접 하지는 않고 친구들이 하는 것을 구경했는데, 의식을 잃은 것 같은 친구의 손이 스윽스윽 선을 그으며 이동할때는 정말 오싹했다. 야기는 혼자서 그 놀이를 하는데, 10엔 동전이 이동하면서 글자를 만들어 냈다. 단지 심심해서 시작한 놀이에서 '누구 있어요......?'란 질문을 했는데, 어느새 동전은 '예'에 향해 있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사나에라고 불리는 여자와의 악연은 시작된다.

 

  '천제요호'는 야기가 쿄코라는 여자에게 쓴 편지와 쿄코가 바라본 야기의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야기는 편지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모두 담아 두었고, 왜 떠날 수밖에 없었는지를 상세히 말해주고 있었다. 자신의 모든 것에는 사나에가 있었기에 어린시절의 이야기를 풀어놓지 않을 수 없었다. 코쿠리상 놀이를 하다 사나에의 예언능력을 맛본 야기는 그녀에게 매혹돼 위험한 약속을 하고 말았다. 사나에의 자신의 아기가 되면 영원한 생명을 준다고 했다. 야기는 그런 삶이 어떤 것인지도 모른 채 사나에와 약속을 하고 만다. 그 이후로 야기에게는 이상한 힘이 생겼다. 상처가 나면 쉽게 나음과 동시에 그곳이 사람의 뼈가 아닌 이상한 무언가로 채워지면서 강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배고픔을 참을 수 있었으며, 상처가 날때마다 몸은 괴상하게 변해갔고 붕대로 그곳을 숨기다 결국 가출한다. 야기가 살 수 있는 곳이 있을까 싶었지만, 그 상태로는 어느곳에도 머무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발길 닿는 곳을 다니다 길가에 쓰러졌는데, 그때 쿄코를 만났다.

 

  쿄코는 야기의 몰골이 무서웠지만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자신의 집으로 데려온다. 그리고 그런 야기를 돌봐주며 남들이 보는 겉모습이 아니라 내면을 보아주는 유일한 사람이 된다. 자신의 정체를 잘 아는 야기는 쿄코 곁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떠나려 했지만, 안정된 생활이 이어지자 쿄코 곁에서 남들이 사는 인간적인 삶을 갈망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자신이 다니던 공장의 아들과 그의 친구가 자신의 생명을 빼앗자 쿄코는 그들에게 복수를 하면서 더이상 쿄코 곁에 머물 수가 없게 된다. 사나에에게 이미 영원한 생명을 얻은 야기는 흙 속에 묻혀 있다 깨어난다. 그리고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간 사람들에게 복수를 하고, 쿄코에게 긴 편지를 남기며 사라진다. 그런 야기를 바라보는 쿄코의 마음이 많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곁에 있고 싶어했던 안타까움과 야기가 떠날 수 밖에 없는 이유들이 겹치면서 많은 감정을 흩뿌려 놓았다. 기이해서 발을 들여놓고 싶지 않은 세계의 이야기였지만, 인간도 괴물도 아닌 야기가 겪은 일들과 그런 야기를 측은하게 바라보는 쿄코의 시선은 닿을 수 없는 경계로 치닫고 있었다.

 

  두 번째 단편 'A MASKED BALL'은 화장실 낙서로 인해 벌어지는 학교의 기이한 이야기였다. 고등학생인 우에무라는 담배를 피울 장소를 찾다 구석진 화장실 한 칸을 알아낸다. 그곳에서 담배를 피우다 '낙서금지'라는 정자체로 된 낙서를 발견으로 자신 이외에도 네 명의 사람들이 이 곳에 들어와 낙서를 한 것을 알게 된다. 우에무라도 G.U라는 이니셜로 낙서를 남기는데, 그것은 다섯사람이 낙서로 인해 대화하는 방식이었다. 그렇게 시답잖아 보이던 낙서가 사건이 된 것은 정자체가 남긴 낙서 이후부터였다. 교내 자판기가 적다는 불평을 하자, 정자체로 낙서를 남긴 이는 '이 학교에는 깡통이 너무 많다'란 낙서를 남기고, 교내 자판기 전선이 싹뚝 잘려져 있는 것이 발견된다. 그 일이 일어나자 낙서를 남긴 사람들은 정자체가 한 짓임을 알고 여러가지 의견을 남기지만, 사건은 끊이지 않는다.

 

  주차를 똑바로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선생님의 차가 테러를 당하고, 담배를 피웠다는 이유로 여학생 또한 테러 위기에 처한다. 정자체가 낙서를 남길 때마다 그 일은 터지곤 했는데, 정작 교칙에 위반되는 담배를 피우러 화장실에 들르는 우에무라는 여전히 무사했다. 자꾸 그런 일이 터지자 우에무라는 범인을 유인하기 위한 미끼를 던지는데, 도무지 범인이 누구인지 추측할 수 없었다. 분명 존재하지 않는 존재일 거라는 느낌은 들었지만, 이야기 속에 청소에 관해서 약간 나온 터라 잠시 '청소 아줌마 아니야?'란 생각이 스치기도 했다. 화장실에 '낙서 하지 맙시다'란 글을 남겼더니 그 아래 '잡히면 죽는다 - 청소 아줌마'의 낙서가 있었다는 우스갯 소리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우에무라가 범인을 유인하다 자신이 목적임을 알았고, 마주친 범인은 주름이 자글자글한 할머니였으며, 그 할머니가 청소를 한 모습을 본 적도 있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끝내 할머니의 정체는 드러나지 않고, 사건들이 그렇게 일이 끝나나 싶었지만, 이후에도 화장실 벽에는 정자체로 낙서가 태연히 남아 있었다.

 

  짧은 두 편의 단편을 읽는 동안 저자의 상상력과 소설로 끌어내는 소재에 놀랐지만, 기존 작품에 비해 흡인력이 약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소재도 좋고, 이야기를 풀어가는 구성도 괜찮았는데 완결이 미흡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정속에서 충분히 흐름을 감지할 수 있다해도, 기억에 남는 여운을 주지 못한 것은 기존 작품과 비교했을 때 드는 높은 기대치였는지도 모른다. 달랑 두 권의 작품밖에 읽지 않았지만, 경계를 넘나들며 완성도 높은 글을 써내는 작가로 인식된 터라 너무 많은 기대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책의 제목처럼 베일에 쌓인 이야기를 꺼내 놓긴 했어도, 말 그대로 베일의 휘장만 내려지고 샅샅이 파헤쳐진 느낌이 들지 않았다. 약간의 아쉬움이 남았지만, 흔한 공포를 유도해 독자를 진부하게 만드는 것 보다 기이한 서늘함을 주는 오츠이치의 작품에 여전히 마음이 더 쏠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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