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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를 타고 달렸어 ㅣ 민음의 시 154
신현림 지음 / 민음사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며칠 전, 우리 집 근처로 이사 온 지인의 집에 놀러갔다. 간 김에 하룻밤 묵고 가기로 했는데, 놀다 보니 12시가 훌쩍 넘어 버렸다. 그 시간에 잠을 자도 다음 날 피곤할 것을 앎에도 적막한 분위기가 좋아 책을 펼쳤다. 내가 사는 아파트가 아닌 주택이라서 고요한 가운데 풀벌레 소리를 들으니 책을 펼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 가져간 책이 그런 분위기에서 읽기 좋은 시집이라서 몹시 피곤함에도 눈을 부릅뜨고 시를 읽어 나갔다.
적막한 분위기가 아니더라도 신현림 시인의 시집은 마음을 사로잡는 무언가가 있었다. 집중하지 않으면 흐트러져 버릴 시가 아닌 주변의 소음을 삼킬 정도로 내면을 울리는 시들이 많았다. 시집을 좋아하면서도, 책장에 읽지 않은 시집이 즐비하면서도 쉽게 손을 뻗을 수 없던 이유는 시의 난해함 때문일 것이다. 문학의 꼭대기에 위치한 장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충분히 느낄 수 있기에 선뜻 즐겨 읽을 수 없었던 장르인 시를, 신현림 시인을 통해 한 발짝 다가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마치 일기를 읽는 듯 시인 자신의 아픔을 드러내며, 내면 깊숙이에 자리한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세계를 기꺼이 보여줬음으로 인한 동질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르리라.
그녀의 시를 접한 적은 없지만, 6년 만에 나온 시집이라는 말이 아니더라도 꾹꾹 눌러 담은 흔적이 자연스레 배어나왔다. 아픔, 상실, 사랑, 고통 들이 마치 춤을 추듯 쉴 새 없이 터져 나왔음에도 독자의 감정을 바닥으로 끌어내리지 않았다. 오히려 시인의 내면을 보면서 내 안에 숨겨 두었던 어두운 감정들이 쏟아져 깨끗해진 기분이라고 하면 과장일까? 잠이 오지 않는 날 우울함에 발버둥 치던 나의 모습, 사랑의 아픔으로 슬픔에 빠졌던 나날, 왠지 모를 상실감에 울적해진 마음을 한 권의 시집에서 모두 만난 느낌이었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함 같은 감정들도 나 혼자만이 가지는 느낌이 아니라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줌으로써, 되레 위로를 받고 있었다. "변하는 관계, 유통기한의 세계가 낯설어 적응 못하는 나/지루한 삶을 못 바꾸는 내가 싫어 몸에 불 지르고 싶거나/(중략)/정말 속의 씨앗도 못 보고 탄식하는 내가 싫어<아직도 가야 할 길>" 란 시구는 나의 얘기를 하는 것 같아 움찔하면서도 한 번 더 음미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시집 안에는 시인이 직접 찍은 사진들과 여행 시들도 실려 있었다. 새로운 곳을 갈 때마다 무언가 글로 남겨보고 싶단 생각을 하면서도 쉽지 않았는데, 시인의 시를 읽다보면 짧은 시로 이처럼 맛깔나게 표현해 내는 것에 감탄을 하곤 했다. 직접 보고 느낀 것들을 장황하거나 거창하게 표현한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시로 포현해 내는 솔직함이 좋았는지도 모르겠다. 시인은 자신의 감정 이외에도 시에 대한 갈망, 사랑에 대한 열정을 스스럼없이 표현하기도 했다. 신현림 시인의 키워드가 '솔직함'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내면의 바닥까지 샅샅이 드러낸 그녀의 시 앞에서 더 이상 부끄러울 것이 없었다. 나라면 이토록 솔직하게 토로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을 던질 정도로 진솔한 그녀의 시는 독자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오랜만에 읽은 시집임에도 다른 문학 장르만 읽어댔던 공백기를 깨트려 주기에 충분한 시집이었다. 시에게 한껏 다가갈 수 있었던 시간은 신현림의 시를 통해서였고, 그녀의 시집을 처음 접함에도 낯섦이나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아 좋았다. 침대를 통한 그녀의 고백도 공감이 갔고, 사랑하고 싶은 그녀의 욕망도(나 또한 아직 연인이 없어서인지 몰라도)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었다. 세상을 향한 시이면서도 자신을 향한 시이기도 한 신현림의 시집 <침대를 타고 달렸어>는 수많은 독자들에게 보이지 않은 위로를 던져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세상의 많은 것들이든, 사람이든 "다시 못 만날 때를 생각하며 사랑해라/영영 다시 못 만날 때가 오니 깊이 사랑해라<엄마의 유언, 너도 사랑을 누려라>" 라고 말한 저자처럼 사랑을 통한 희망을 가져 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