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송 카프카 전집 3
프란츠 카프카 지음, 이주동 옮김 / 솔출판사 / 200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작년 여름, 휴가를 보내기 위해 서울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펼친 책은 카프카의 <소송>이었다. 26살 생일에 선물 받은 책인데 2년을 묵혀 두다 꺼냈음에도 결국 완독을 못하고 말았다. 기차 안에서 읽은 양 그대로 책장에서 또 1년을 묵히고 올 여름 또 다시 <소송>을 꺼내 들었다. 이상하게도 이 책은 여름에만 꺼내게 되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기보다 여름이란 계절이 가져다주는 더위와 진부함, 육체의 늘어짐에 대한 보상을 이런 책에서 찾을 수 있을 거란 기대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계절과 반대되는 분위기의 책을 찾는 것보다 그와 비슷한 분위기의 책을 통해 함께 나아가는 것. 카프카의 <소송>이 그 느낌을 그대로 전달해 주기를 의심치 않았다. 그의 작품은 <성>밖에 읽지 않았지만, 무척 힘겹게 읽은 작품이었음에도 미완성으로 끝나 좌절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런 경험 덕에 카프카의 작품이 녹록치 않음을 알기에 여름에 느껴지는 진부함을 묻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작년에 읽은 절반 정도의 양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을 리 만무했다. 책을 처음부터 다시 읽을 용기가 없어 내용은 생각이 나지 않더라도, 읽어 가면서 앞의 내용을 떠올려 보기로 했다. 그렇게 책을 읽다 보니 처음에는 새로운 소설을 읽는 듯 낯섦이 가득해 혼란스러웠다. 어느 정도 읽어 나가자 상세하게는 아니더라도 어떤 분위기였는지 조금씩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여전히 주인공 요제프 카의 소송은 진행 중이었고, 소송에 진도가 나가지 않았으며, 왜 소송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카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가면서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을 토로하기도 하며, 충고를 받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소송의 원인에 대해서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책의 시작은 카가 체포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30살의 생일을 맞은 날 아침, 자신의 침대에서 체포된 카는 아무런 잘못도 없기에 누군가가 자신을 모함했다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가볍게 받아들이며, 소송의 실체가 드러나면 자신의 무혐의는 밝혀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전히 소송의 진위는 모호했고, 카가 아무리 노력하고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녀도 소송의 원인의 밝혀짐은 물론 과연 소송의 중심에 카가 온전히 서 있는지에 여부도 의심이 되었다. 소제목을 달고 있는 사건들 사이에 늘 카가 있었지만, 소송과는 무관해 보이는 일도 많았고 소송의 진부함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을 뿐이었다. 카는 자신이 근무하고 있는 은행에서도 일을 제대로 못할 정도로 자신을 옥죄고 드는 소송에 휘말리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카가 소송에 휘말렸다는 것을 알고 도움을 주려는 손길이 있음에도 소송의 실체를 모르고, 자신이 노력해 봐도 '법'의 언저리에도 접근하지 못한다.

 

  카의 그런 행보를 지켜보고 있다 보면, 소송의 중요성이 크게 와 닿지 않은 게 사실이었다. 진부하긴 하지만 언젠가는 진위 여부가 밝혀질 것이라 생각하고, 카가 맞이하는 일상과 생각들을 별 부담 없이 읽어 나갔다. 때론 카를 비롯한 타인과의 대화가 이질적이고, 그 모든 것을 표현하는 비유에서 문화의 차이를 느껴 소송의 중요성을 망각할 정도였다. 소송 때문에 찾아간 곳에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과 어울리며, 왜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 싶을 정도로 카를 둘러싸고 있는 소송이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하면서도 긴 터널을 지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과정을 카와 함께 보냈음에도 결말 앞에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카의 진부하고도 긴 노력에도 불구하고 카는 두 명의 사형 집행인들에게 의해 잔인하게 처형되고 만다. 카가 어떤 잘못을 해서 소송에 휘말렸는지 설명을 해 주지도 않은 채, 카가 당면한 지난함만 보여 주고 '개' 같은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어쩌면 책 내용 가운데 카가 당면하고 있는 소송의 이면인 법의 무자비함과 법의 테두리 밖에 머물러 있음을 이미 알려 줬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의 충고 속에 카가 당면한 현실을 냉정하게 보여준 몇몇 장면들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카가 잔인하게 처형당할 정도로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모함이든 장난이든 원인을 규명해 주어야 하는데 끝내 밝혀지지 않은 채 카는 형장의 이슬도 아닌, 개죽음으로 생을 마감한 것이 그랬다. 옮긴이는 '우리가 망각하고 있던 정신적, 영혼적 세계와 그와 상반되는 현실세계가 만나는 중간 상태를 시작으로 보여줌으로써 독자에게 서로 괴리되어 있던 두 세계를 동시에 접하게 한다.'고 했다. 그렇더라도 나 같은 무지한 독자들에겐 그런 괴리의 접함이 당황스러울 뿐, 숨은 의미를 찾아내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거기다 카프카의 <소송>은 원전 텍스트 비판 문제로 논란이 많았던 작품이라고 한다. 지금까지는 막스 브로트판이 유일한 것이었으며 카프카에게 직접 원고를 건네받아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임의적으로 수정, 보완해서 발표했다고 한다. 그러다 브로트의 사후 카프카의 유족들에게 원고가 돌아갔고, 영국 독문학자 M. 패슬리에 의해 학술 비판본이 발간되었다고 한다. 이 책은 패슬리의 비판본으로 원고 그대로 실려 있다. 책의 후반부에는 미완성의 장들도 있는데, 그 장들도 역시 원본에 충실했다. 소설을 읽고, 미완성 된 부분까지 읽는 경험 또한 독특했지만 <소송>을 읽으면서 저자의 의도를 충분히 만끽하지 못한 나의 부족함이 아쉬웠다. 그러나 그의 작품이 이렇게 모호했음에도 카프카의 다른 작품은 여전히 궁금하다. 오래 전에 선물 받은 카프카의 다른 작품이 있지만, 카프카의 가장 난해한 3대 소설을 완성 시키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실종자>를 읽어보려 한다. 카프카와의 만남이 더디긴 하지만 저자와의 만남의 끈을 놓고 싶지 않기에, 당분간은 만남 자체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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