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일
오츠이치 지음, 김수현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9년 8월
평점 :
품절


오츠이치란 작가는 <ZOO>를 통해서 독특함을 인식하게 되었고, <여름과 불꽃과 나의 사체>로 저자의 가치를 각인시키게 된 작가다. 분명 이런 장르를 좋아하지 않음에도 작품의 독특함과 완성도면에서는 후한 점수를 주지 않을 수 없었다. 공포보다는 서늘함과 오싹함이 여운으로 남는 작품들이 주류였기에 썩 즐거운 마음으로 책을 읽을 수 없었다. 그러나 신간이 나왔다고 하면 관심이 가기 마련이었는데, 여전히 그의 작품을 대할 때는 멈칫하게 만드는 무엇인가가 있다. 평상시에 내가 생각하지 않는 세계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베일>에 실린 첫 번째 단편 '천제요호'가 그랬다. 기이한 이야기였고, 묘한 공감을 끌어내면서도 기억의 연속성을 이어가고 싶지 않은 소설이었다. 소년이었던 야기는 몸이 아파 누워있다가 심심해서 당시 친구들이 즐겨하던 코쿠리 상(초혼술의 일종) 놀이를 한다. 내가 어릴적에 했던 분신사바 놀이가 아마 여기서 유래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흡사했다. 분신사바 놀이는 내가 직접 하지는 않고 친구들이 하는 것을 구경했는데, 의식을 잃은 것 같은 친구의 손이 스윽스윽 선을 그으며 이동할때는 정말 오싹했다. 야기는 혼자서 그 놀이를 하는데, 10엔 동전이 이동하면서 글자를 만들어 냈다. 단지 심심해서 시작한 놀이에서 '누구 있어요......?'란 질문을 했는데, 어느새 동전은 '예'에 향해 있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사나에라고 불리는 여자와의 악연은 시작된다.

 

  '천제요호'는 야기가 쿄코라는 여자에게 쓴 편지와 쿄코가 바라본 야기의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야기는 편지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모두 담아 두었고, 왜 떠날 수밖에 없었는지를 상세히 말해주고 있었다. 자신의 모든 것에는 사나에가 있었기에 어린시절의 이야기를 풀어놓지 않을 수 없었다. 코쿠리상 놀이를 하다 사나에의 예언능력을 맛본 야기는 그녀에게 매혹돼 위험한 약속을 하고 말았다. 사나에의 자신의 아기가 되면 영원한 생명을 준다고 했다. 야기는 그런 삶이 어떤 것인지도 모른 채 사나에와 약속을 하고 만다. 그 이후로 야기에게는 이상한 힘이 생겼다. 상처가 나면 쉽게 나음과 동시에 그곳이 사람의 뼈가 아닌 이상한 무언가로 채워지면서 강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배고픔을 참을 수 있었으며, 상처가 날때마다 몸은 괴상하게 변해갔고 붕대로 그곳을 숨기다 결국 가출한다. 야기가 살 수 있는 곳이 있을까 싶었지만, 그 상태로는 어느곳에도 머무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발길 닿는 곳을 다니다 길가에 쓰러졌는데, 그때 쿄코를 만났다.

 

  쿄코는 야기의 몰골이 무서웠지만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자신의 집으로 데려온다. 그리고 그런 야기를 돌봐주며 남들이 보는 겉모습이 아니라 내면을 보아주는 유일한 사람이 된다. 자신의 정체를 잘 아는 야기는 쿄코 곁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떠나려 했지만, 안정된 생활이 이어지자 쿄코 곁에서 남들이 사는 인간적인 삶을 갈망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자신이 다니던 공장의 아들과 그의 친구가 자신의 생명을 빼앗자 쿄코는 그들에게 복수를 하면서 더이상 쿄코 곁에 머물 수가 없게 된다. 사나에에게 이미 영원한 생명을 얻은 야기는 흙 속에 묻혀 있다 깨어난다. 그리고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간 사람들에게 복수를 하고, 쿄코에게 긴 편지를 남기며 사라진다. 그런 야기를 바라보는 쿄코의 마음이 많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곁에 있고 싶어했던 안타까움과 야기가 떠날 수 밖에 없는 이유들이 겹치면서 많은 감정을 흩뿌려 놓았다. 기이해서 발을 들여놓고 싶지 않은 세계의 이야기였지만, 인간도 괴물도 아닌 야기가 겪은 일들과 그런 야기를 측은하게 바라보는 쿄코의 시선은 닿을 수 없는 경계로 치닫고 있었다.

 

  두 번째 단편 'A MASKED BALL'은 화장실 낙서로 인해 벌어지는 학교의 기이한 이야기였다. 고등학생인 우에무라는 담배를 피울 장소를 찾다 구석진 화장실 한 칸을 알아낸다. 그곳에서 담배를 피우다 '낙서금지'라는 정자체로 된 낙서를 발견으로 자신 이외에도 네 명의 사람들이 이 곳에 들어와 낙서를 한 것을 알게 된다. 우에무라도 G.U라는 이니셜로 낙서를 남기는데, 그것은 다섯사람이 낙서로 인해 대화하는 방식이었다. 그렇게 시답잖아 보이던 낙서가 사건이 된 것은 정자체가 남긴 낙서 이후부터였다. 교내 자판기가 적다는 불평을 하자, 정자체로 낙서를 남긴 이는 '이 학교에는 깡통이 너무 많다'란 낙서를 남기고, 교내 자판기 전선이 싹뚝 잘려져 있는 것이 발견된다. 그 일이 일어나자 낙서를 남긴 사람들은 정자체가 한 짓임을 알고 여러가지 의견을 남기지만, 사건은 끊이지 않는다.

 

  주차를 똑바로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선생님의 차가 테러를 당하고, 담배를 피웠다는 이유로 여학생 또한 테러 위기에 처한다. 정자체가 낙서를 남길 때마다 그 일은 터지곤 했는데, 정작 교칙에 위반되는 담배를 피우러 화장실에 들르는 우에무라는 여전히 무사했다. 자꾸 그런 일이 터지자 우에무라는 범인을 유인하기 위한 미끼를 던지는데, 도무지 범인이 누구인지 추측할 수 없었다. 분명 존재하지 않는 존재일 거라는 느낌은 들었지만, 이야기 속에 청소에 관해서 약간 나온 터라 잠시 '청소 아줌마 아니야?'란 생각이 스치기도 했다. 화장실에 '낙서 하지 맙시다'란 글을 남겼더니 그 아래 '잡히면 죽는다 - 청소 아줌마'의 낙서가 있었다는 우스갯 소리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우에무라가 범인을 유인하다 자신이 목적임을 알았고, 마주친 범인은 주름이 자글자글한 할머니였으며, 그 할머니가 청소를 한 모습을 본 적도 있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끝내 할머니의 정체는 드러나지 않고, 사건들이 그렇게 일이 끝나나 싶었지만, 이후에도 화장실 벽에는 정자체로 낙서가 태연히 남아 있었다.

 

  짧은 두 편의 단편을 읽는 동안 저자의 상상력과 소설로 끌어내는 소재에 놀랐지만, 기존 작품에 비해 흡인력이 약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소재도 좋고, 이야기를 풀어가는 구성도 괜찮았는데 완결이 미흡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정속에서 충분히 흐름을 감지할 수 있다해도, 기억에 남는 여운을 주지 못한 것은 기존 작품과 비교했을 때 드는 높은 기대치였는지도 모른다. 달랑 두 권의 작품밖에 읽지 않았지만, 경계를 넘나들며 완성도 높은 글을 써내는 작가로 인식된 터라 너무 많은 기대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책의 제목처럼 베일에 쌓인 이야기를 꺼내 놓긴 했어도, 말 그대로 베일의 휘장만 내려지고 샅샅이 파헤쳐진 느낌이 들지 않았다. 약간의 아쉬움이 남았지만, 흔한 공포를 유도해 독자를 진부하게 만드는 것 보다 기이한 서늘함을 주는 오츠이치의 작품에 여전히 마음이 더 쏠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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