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단순한 균형의 문제
장 자크 상뻬 글 그림 / 미메시스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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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지방 소도시에 살다 보니, 대도시를 갈 때면 으레 들르는 곳이 대형서점이다. 오랜만에 서울 갈 일이 생겨 간 김에 서점을 둘러보았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서점에 들러 문학코너 책을 살펴보고 있는데, 얼마 되지 않아서 상뻬의 책을 발견하게 되었다. 인기작가 작품을 모아놓은 곳이었는데, 상뻬의 작품들이 눈에 띄었다. 그 가운데서 <인생은 단순한 균형의 문제>를 보고 흥분하게 된 것은, 온라인 서점은 이미 절판이 되었고, 오프라인 서점에서도 보기 힘든 책이었기 때문이었다. 상뻬의 데생을 좋아하는 터라 모두 모으고 싶어서 안달하고 있는데, 절판된 책을 서점에서 발견 하는 기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달랑 한 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권이 있어서 그 가운데 가장 깨끗한 책을 골라왔다. 이 책을 구한 것만으로도 조금은 힘들었던 서울 여정의 피곤이 스르르 녹는 기분이었다.

 

  상뻬의 데생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은 글이 별로 없는 그림임에도, 많은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글이 없어도, 설명이 없어도 데생이 보여주는 의미는 보는 이로 하여금 다양한 감정을 만끽하게 해주었다. 상뻬의 책을 읽는다고 하지 않고 본다고 말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다양한 감정들이 독자들 사이에 물결치는 의미 때문일 것이다. 책을 보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고, 마음속에 떠오르는 감정들이 오래 지속되지 않더라도 자꾸 상뻬의 책을 찾게 되는 것은 그런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한 권씩 모아온 상뻬의 책이 쌓여 갈 때마다 뿌듯하기도 하지만, 볼 책이 떨어질까 아쉬운 마음이 들지도 않는다. 언제든지 꺼내서 볼 수 있고, 볼 때마다 달라지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만끽하는 것이 무척 기쁠 뿐이다.

 

  그렇더라도 내가 아직 만나보지 못한 상뻬의 데생을 마주할 때의 기분은, 설렘으로 가득 찬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책을 펼치면 순식간에 상뻬의 데생이 스쳐갈 것을 알기에, 아껴두다 고요함이 흐르는 깊은 밤에 꺼내 들었다. 차근차근 본다고 해도 순식간에 상뻬의 데생은 흩어져갔고, 책을 덮었을 때는 흐뭇한 미소만이 내 안에 맴돌고 있었다. 상뻬의 데생은 익살맞고, 사실적이면서 과장된 느낌이 들 때도 있고, 대충 그린 것 같은 손길 속에도 모든 것이 들어있다. 특히나 이 책에서 그 부분이 더 돋보였던 것은 같은 주제로 그려진 데생 때문일 것이다. '균형'이라는 것이 어떠한 균형을 말하는 것인지 몰랐을 뿐더러, '인생'과 '단순함'이 곁든 '균형'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쉽게 추측할 수 없었다. 책을 펼치고 나서야 자전거를 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균형'이 자전거 위의 균형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인생'은 자전거 위에 펼쳐진 '단순함'이라는 것을 끌어낼 수 있었다.

 

  한 권의 책 속에 자전거 타는 사람들만 등장하니(혹은 자전거 곁에 있거나), 자전거가 사람들의 몸에 떨어져 있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할 정도였다. 자전거를 타지 못하거나, 안타고 있으면 불안함을 느낄 정도로 자연스런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거대한 자연의 한가운데를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 어린 아이들이 균형을 잡는 모습, 자전거 위에서 다양하게 비춰지는 연인들의 모습은 자전거가 삶의 일부분으로 들어오게 했다. 아이들은 자전거 위에서 균형을 잡으려 애쓰고 있었지만, 어른들은 자전거 위에서 삶을 펼쳤고, 자전거와 관련된 인생의 일부분을 드러내고 있었다. 상뻬의 데생들은 대부분 색(色)이 없게 드러난 것들이 많은데, 이 책에서는 우표 모양으로 채색된 자전거와 관련된 데생들이 있었다. 한 편의 사진처럼 추억이 담긴 자전거와의 다양한 모습은 색다른 묘미를 안겨 주었다. 과거에는 자전거와 어떻게 단순한 균형을 이루었는지를 보여주는 일례 같았다.

 

  자전거를 타는 많은 사람들은 모두들 멋지게 균형을 잡고 있었다. 모두들 자연스레 자전거를 끌거나 타고 있었기 때문에, 자전거를 밑바탕으로 깔고 그들이 갖춘 옷매무새나 행동으로 인생과 연관 지을 수 있었다. 익살스런 연인들부터, 자전거를 타는 여러 부인들의 모습으로 자전거 위에서 펼쳐지는 그네들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었다.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무엇을 꿈꾸고, 무슨 생각을 하며 자전거를 타고 있을까란 상상까지, 한 줄의 설명도 없는 곳에서 나름대로 추측하는 재미가 있었다. 단순한 데생임에도 움직임이 힘차고, 페달을 밟고 박차고 나갈 것 같은 역동감이 느껴져 자전거를 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일상에도 자전거를 끌어당기고 싶었고, 그들만큼은 아니더라도 친숙하게 만들어 자전거와 함께인 나날을 보내고 싶었다. 그 위에서 어떠한 인생이 펼쳐지든 지간에, 자전거가 밑바탕이 되었을 뿐이지 자전거를 탄다고 해서 무언가가 크게 달라질 거란 생각을 한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힘차게 페달을 밟고, 상뻬의 그려낸 데생처럼 그네들의 경험을 만끽하고 싶은 욕망은 스멀스멀 자꾸만 올라왔다.

 

  자전거가 밑바탕이 되고 공통된 주제로 드러나긴 하지만, 이 책에서도 상뻬의 다양함을 만끽할 수 있었다. 채색의 변화, 시점의 변화, 장소의 변화에 따라 펼쳐지는 인생의 균형과 단순함은 맘껏 펼쳐졌다. 데생만으로 독자들에게 무한한 상상거리를 던져주며, 삶의 다양함을 만끽하게 해주어서 상뻬의 책은 마냥 반갑고 고마울 따름이다. 그래서 상뻬가 삽화만 그렸다고 해도 그 책을 읽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는 것 같다. 앞으로도 상뻬의 책들이 꾸준히 발간되어 그를 통해 이런 흐뭇함과 유머를 만끽할 수 있다면 바랄 게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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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현장이 강한 기업을 만든다 - 지속 성장하는 글로벌 초일류기업 포스코, 성장과 혁신의 비밀
허남석과 포스코 사람들 지음 / 김영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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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전남 여수이고, 학창시절을 보낸 곳은 순천이다 보니 광양제철소가 낯설지 않다.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지역소식을 떠 올려 보면, 광양제철소에 관한 소식도 많았다. 광양제철소 덕분에 광양시의 자립도가 높다는 둥, 백운아트홀에서는 영화를 공짜로 볼 수 있다는 둥, 광양제철소 자체에 대한 소식과 자질구레한 소식이 전부 들려왔다. 그 소식들이 나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굳이 따져볼 필요도 없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 조금씩 꿰어 맞춰지는 흐름에 기억력을 바짝 곤두세웠던 것은 사실이다. 광양에 제철소가 있다는 사실을 자부심이나 불편사항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무관심으로 일관 했던 내게, 이렇게 가까이에 뜨거움으로 뭉친 사람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참 감사하게 느껴졌다.

 

  이 책의 키워드는 '혁신'이다. '혁신'이라는 단어는 많은 직장인들에게 낯선 단어가 아니다. 특히나 현장의 중요성이 강한 회사라면 어느 곳에서나 '혁신'의 팻말이 걸려 있을 것이다. 혁신은 '묵은 풍속, 관습, 조직, 방법 따위를 완전히 바꾸어서 새롭게 함'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뜻만 살펴보면 무언가 신선한 느낌이 들지만, 이 뜻을 회사에 적용하고 나의 일에 대입시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실감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많은 직장인들이, 또한 많은 사람들이 혁신함으로써 자신을 바꾸고, 회사를 바꾸고, 자신 안에 잠재해 있는 잠재력을 끌어내는 일을 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런 변화를 스스로 이끌어 낸다는 것은 여전히 힘이 들고, 회사에서 요구하는 혁신에 발맞추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 책에서 광양제철소는 거대한 그룹 안에 혁신의 불길을 던져 놓았을 뿐만 아니라, 포항제철소까지 혁신의 불길을 번지게 했다. 과연 어떻게 했기에 광양제철소는 혁신의 불길 한가운데 있었으며, 지역과 화합해 나가는 기적을 이끌어 냈던 것일까.

 

  이 책의 주요 저자이자 포스코 생산기술부문장인 허남석씨는 책머리에 그런 말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열정을 쏟아도 리더 혼자서는 혁신을 이룰 수 없'고, '산업은 현장에서 시작돼 현장에서 열매를 맺는다.'며 혁신을 이룰 대상이 전체임을 드러내고 있었다. 리더와 현장, 그리고 그룹 전체가 혁신에 동참하지 않는다면 변화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었다. 리더가 혁신의 필요성을 느껴 변화를 이루려 해도, 진심이 통하지 않은 채 사원들에게 강요만 한다면 혁신 자체가 또 하나의 스트레스로 추락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정준양 회장은 명확한 목표와 확신을 가지고 혁신을 이룰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2002년 민영화를 통해 포항제철이 포스코로 새롭게 태어난 해에 포스코 임원을 홍콩으로 불러 모아 '홍콩선언'을 한다. '범용강을 대량 생산하는 것에 벗어나 세계적인 자동차 강판 회사가 될 것을 천명'했다. 그것은 포스코 내부나 회사가 속해 있는 모든 곳에 청천벽력과 같은 발언이라 많은 파장을 불러 일으켰음은 당연했다.

 

  지금껏 혁신을 추구하지 않은 것도 아닌 회사가 전혀 새로운 혁신을 이뤄내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과 인내가 필요했다. 정양준 회장은 그 혁신이 광양제철소에서 이뤄지길 바랐다. 당시 광양제철소 소장으로 발령받은 허남석씨는 현장의 중요성을 느끼고, 현장에서 일하는 직원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 일일이 현장 직원들을 만나고 멘토링을 통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중간관리자를 혁신 시키고, 그들 스스로에게 변화를 시킬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현장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기에, 지금과는 다른 변화의 물꼬를 터 'TOP'이 시켜서 하는 혁신이 아닌, 마음속에 스스로 일어난 열정으로 이뤄내길 바랐다. 그것은 리더도, 현장에 속한 사람들, 그 이외의 사원들에게 모두 해당되는 요구였다. 한 사람도 아닌 회사 전체를 혁신의 불길로 이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이 책 속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기존에 뿌리 박혀 있는 묵은 관습을 벗겨낸 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고, 또 그 안에 속해 있는 사람들을 이끌어 나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자신이 속해 있는 그룹 안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 어려움을 알기에 '혁신은 현장에서 뿌리 내릴 수 있는 것이어야 하고, 혁신의 주체는 현장 사원이어야 한다.'는 확신으로 현장의 변화를 이끌어 갔기에 광양제철소의 혁신의 불길은 퍼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값싼 노동력으로 바짝 쫓아오는 중국과 앞선 기술로 저만치 달음질치는 일본의 틈바구니에서 자동차 강판으로 살아남으려면, 속도와 기술력을 두루 갖추어야 했다. 말은 쉽고, 마음으로는 해야 한다는 절실함이 있었지만 그것을 실현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사원들이 땀을 흘리고, 혁신에 동참하고, 자신과 가족, 회사, 심지어 지역의 활성화를 위해 어떠한 노력을 했는지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각본은 있지만 가망성이 없는 한 편의 시나리오를 보는 듯해서,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두근거렸던 것이 사실이다. 그들이 좀 더 힘을 내어 더 높은 곳으로 올라 가주었으면 했고, 개개인의 열정을 끌어내어 그룹의 힘을 보여주었으면 했다.

 

  혁신은 결코 짧은 시간에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몇몇 사람이 이끌어 낼 수 있는 것도 아니며, 확신과 목표, 신뢰가 없다면 이루어 낼 수도 없다. 광양제철소의 혁신은 기적이 아니라 살아있는 증거였으며, 결과는 회사의 성장으로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많은 회사들이 혁신을 통해 성장하길 꿈 꿀 것이다. 또한 회사의 혁신을 통해 사원들 개개인도 성장하길 바랄 것이다. 이 책을 통해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게 되었지만, 불가능 하다는 것을 보여 준 것도 아니었다. 마음과 마음이 통하고, 사람들 간의 신뢰, 먼저 변화하는 솔선수범을 보인다면 이미 혁신은 시작된 것이다. 광양제철소는 오로지 회사의 성장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모든 사람들이 동참하게 한 것이 눈에 띄는 모습이었다. 조금 나아졌다고 해서 그곳에서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다른 곳을 견학해서 배울 수 있다면 세세한 것에서 멈추지 않고, 서슴없이 직원들을 파견하고 적용하는 모습도 인상 깊었다.

 

  한 발짝 떼는 것이 처음엔 어려웠지만, 조금씩 전진하다 보면 속도감이 붙어 무척 쉽게 내달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곳이 광양제철소의 '혁신'의 현장이었다. 회사 혼자서 달음박질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주변의 많은 것까지 포용하고 껴안으려는 모습에, 이 지역에 살고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워 질 정도였다. 이제 가까운 곳의 혁신의 불길을 보았으니, 내가 속한 곳과 내가 혁신을 일으키고 싶은 분야에 대입하면 된다. 읽기로만 끝나고, 느끼는 것이 있어도 실천하지 않는다면 절대 우리의 마음에 '혁신'의 불꽃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깨달았을 때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용기이고, 변화를 일으키시는 시작이 될 것이다. 현재 내가 바꾸고 싶은 것은 무엇이고, 변화를 일으키고 싶은 곳이 어디인지 떠올랐다면, 광양제철소 사람들이 일으켰던 혁신의 불꽃을 조금이라도 나눠 갖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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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의 피아니시모
리사 제노바 지음, 민승남 옮김 / 세계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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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을 뜨니 새벽 두 시, 또 깨고 말았다. 요즘 들어 깊은 잠을 자지 못하고, 새벽에 몇 번씩 눈을 뜨게 된다. 조금 뒤척이다 잠이 들겠지 하는 무심함도 잠시, 도무지 잠이 오질 않았다. 이렇게 어정쩡한 시간에 잠이 깨어 버리면 어쩌자는 건지. 오늘 충분히 잠을 자지 못하면, 내일 무척 피곤할 것이고 일과가 엉망으로 꼬일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걱정만 밀려왔다. 눈을 질끈 감고 잠을 청해 보려 했지만, 잠은 이미 멀리 달아난 상태였다. 결국 자야한다는 강박관념을 뒤로 한 채, 그 새벽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음을 깨닫고 책을 꺼내들었다.

   새벽의 고요함 때문이지, 요 며칠 잠을 푹 못자는 뒤척임 때문인지 딱딱한 책은 읽고 싶지 않았다. 나의 감성을 자극하고, 지금의 피곤함을 메워줄 책을 읽고 싶었다. 다행히 내 눈에 확 띄는 책이 있었으니, 책 사진을 찍는답시고 책장에 그대로 세워 둔 <내 기억의 피아니시모>였다.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중년 여성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 밖에 몰랐지만, 새벽의 생뚱맞음을 충분히 보완시켜 줄 것 같았다. 그런 나의 마음을 알고 있는 듯, 새벽 4시가 넘도록 책을 읽게 만들었고 한없이 마음을 먹먹하게 했다. ‘내가 지금 왜 깨어 있나’란 물음과, 수면 부족으로 인한 미미한 두통까지 모두 덮어버릴 수 있는 극적인 만남이었다.
 

  한 여인이 있다. 50번 째 생일을 앞두고 있고, 하버드 대학교에서 심리학을 가르치며, 같은 학교 교수인 남편과 세 자녀를 두고 있는 앨리스란 여인이었다. 막내 딸 리디아와 관계가 조금 소원하긴 했지만, 만족스러운 삶이었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왔고, 총명 했으며, 대학에서도 만족스러운 성과를 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에게 기억이 조금씩 감퇴하고 있는 증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강의를 하기 위해서는 지금껏 쌓아온 지식과 기억력이 언제나 팽팽하게 견디어 주어야 했다. 처음엔 그녀 자신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였으나, 집 앞에서 조깅을 하다 길을 잃은 후 자신에게 닥친 일들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이 조발성 알츠하이머란 진단을 받을 때 까지도 그녀의 삶이 그렇게까지 뒤틀리고 무너질 거라 상상할 수 없었다.
 

  어리석게도 앨리스가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고, 진단을 받기 전 후로 기억에 관한 문제의 드러남을 여실히 보아왔으면서도, 그녀의 병이 어떠한 결과를 야기하는 지 연관시키려 들지 않았다. 책을 거의 다 읽어갈 즈음에 그것이 ‘치매’라는 것을 알고, 먹먹해 진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었고, 앨리스의 내면을 세세하게 알아가면서도 그녀의 마음을 헤아려주지 못해 미안해졌다. 철저히 앨리스의 시선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고, 그녀의 내면을 통해서 자신에게 드리워진 기억이 사라져 가는 것을 지켜봐서인지 미처 병에 대한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다만, 쉰이라는 젊은 나이에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은 그녀의 상황이 안타깝고, 답답해서 어찌 할 바를 몰랐다. 

  저자는 앨리스의 관점에서 이야기하다보니, 다른 인물들의 생각을 들여다 볼 수 없지만, 알츠하이머의 수렁으로 빠져드는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다고 했다. 그것을 지켜보는 것이 무엇보다 힘들었고, 지나치게 세세하다 싶을 정도로 그녀가 퇴행적으로 기억을 잃어가는 과정은 처절했다. 그녀가 진단을 받으면서 받게 되는 각종 검사들과 기억을 잃어버릴까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독자를 지치게 했다. 그러나 그 절망과 상실감은 결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경계의 고통이었고, 지켜보는 것조차 힘들다고 투덜대는 것이 이기적으로 느껴졌다. 종신교수직을 얻었기 때문에 앞으로 얼마든지 일할 수 있음에도, 학교에서 물러나고, 가정에서도 더 이상 부인과 엄마의 역할을 할 수 없었다. 말 그대로 그녀는 알츠하이머 환자일 뿐이었다.
 

  앨리스는 자신이 기억을 잃어가고, 조만간 사랑하는 가족들을 알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하려 했다. 각종 증상들이 그녀를 엄습할 때도, 그녀 안에 퍼지는 또 다른 존재감을 지켜내려 애썼다. 비교적 초기 증상이 그녀를 지배할 때, 자신과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끌어 모아 위로를 받기로 했다. 너무나 젊은 나이에 발병했기에, 똑같은 처지의 사람들만이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히 힘이 든 앨리스는 가족들과의 충돌도 함께 감내해야 했다. 남편 존은 그녀를 사랑하고 이해해 주었지만, 그녀가 기억을 잃어가는 것을 담담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자신의 일을 놓지 못하고 있었고, 세 자녀들도 앨리스를 생각하기보다 자신들의 미래를 생각하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가족이라는 울타리는 사랑으로 이루어 져 있다는 것을 보여 준 사람 또한 앨리스였다. 앨리스가 기억을 잃어가는 과정은 빠르면서도 체계적으로 진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막내 딸 리디아와 화해를 이끌어 낸 것이 극적이었고, 자녀들이 엄마인 앨리스를 포기하지 않고 함께 하려는 모습이 눈물겨웠다. 알츠하이머를 앓는 사람을 옆에 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 사람이 사랑하는 엄마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떤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또한 총명하고 사랑스러웠던 아내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남편 존의 마음도 헤아릴 수 없다. 철저히 앨리스의 시선으로 쓰여 졌지만, 가족들의 마음과 앨리스의 또 다른 내면을 모두 알았다고 할 수도 없다. 2년 여 동안의 기록으로 한 사람의 인생과 그녀를 둘러싼 관계를 잃었다 다시 찾는 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섣부른 판단을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희미해져가는 기억을 부여안은 채, 앨리스는 가족들 틈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 모습은 병으로 인해 나락으로 떨어진 앨리스의 삶에 너무나 큰 변화였지만, 시작만큼 절망적인 것도 아니었다. 알츠하이머를 앓는 환자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해도 그녀로 인해 그들이 겪는 고립과 외로움이 어떤 것인지 아주 조금 가늠할 수 있었다. 알츠하이머가 노인에게 오는 병이라 치부해 버리고, 극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았던 시간들이 마냥 부끄러울 따름이다. 그 대상자가 내가 되지 말란 법도 없기에, 한 여인의 삶과 그녀가 속한 가족, 사회라는 울타리 속에서 무엇을 소중히 해야 할지 깨달아 가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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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도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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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훈의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가 생각난다. 이상 문학상 수상작인 <화장>을 읽고, 완벽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완벽하다는 느낌은 단편소설의 완성도보다 문체에 관한 감탄이 더 짙었다. 문장과 문장을 아우르는 공백의 미를 여실히 드러내는 그의 글에서 군더더기를 느낄 수 없었다. 한참을 멍하니 글이 남긴 여운을 느끼다 그제야 저자의 프로필을 보았고, 내가 느낀 완벽함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가늠할 수 있었다. 간결하면서도 충분한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문장이 오랫동안 기자생활을 해 온 탓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 경험을 빗대어 문학으로 승화시킨 것은 순전히 그의 능력이었다. 단 번에 그의 문체에 빠져 문학선집을 섭렵했건만, 단시간에 너무 많은 작품을 소화시켜서인지 그의 문체에 질려 버리고 말았다.
 

  틈틈이 발행되는 그의 작품을 만나면서도, 처음 느꼈던 그 열정을 끌어내는 것은 무리였다. 그렇게 한동안 그의 글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언저리만 맴돌다, 본격적으로 만나고 싶어 꺼내든 책은 <공무도하>였다. 온라인 카페에서 인기리에 연재 될 때에도 꿋꿋이 종이 책으로 나오기를 기다려 사인 본까지 받고도, 한참을 책장에 묵혀둬야 했다. 책장에 수북이 쌓여 있는 책 틈에서 길을 잃었던 것도 사실이나, 그의 작품이 스스로 내게 다가올 때를 기다린 것이다. 그 때에 맞춰 온 것이 <공무도하>이므로, 저자와의 오랜만의 조우를 성공리에 이끌고 싶었다. 그냥 책을 읽으면 읽는 것이지 성공적인 조우라는 거창함을 들출 필요가 있을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 권의 책과 만나는 것도 적절한 시기, 읽는 이의 마음 상태, 주변 환경이 밑받침 되어야 온전히 들어옴을 경험한 사람은, 저자와의 만남을 앞둔 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으리라.

 

  책의 시작은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마치 자연의 재해가 한꺼번에 밀려오듯이 여기저기서 무너지고 깨지고 있었고, 사람들의 마음도 불안하고 절망적이 되어갔다. 뚝방이 무너져 마을이 휩쓸리고, 지하철이 잠기는 것을 장마전선의 영향으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자연재해 속에서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의 불안함이 그대로 밀려왔다. 그 현장에 있는 사람들, 그것을 취재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TV화면을 통해 지켜보는 사람들로 나뉘어졌다. 불안함은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가장 클지 모르겠으나, 글을 읽으며 현장으로 빨려 들어가는 독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불안감은 책을 읽는 내내 이어졌다. 불안과 절망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긴 했지만, 감정의 한가운데로 들어가지 않은 저자의 위치 때문인지도 모른다. 세상의 많은 정보를 인터넷과 TV를 통해서 알아가는 것처럼, 책을 통해 내가 알지 못하는 세상 곳곳의 소식을 알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등장시킨 인물들이 전해주는 세상 소식이나 삶의 표상들을 그대로 지나칠 수가 없었다. 불안감이 내 안에 계속 포진해 있는 상태에서도 그들이 행보를 주목할 수밖에 없었고, 흐름을 따라가고 싶었다. 그런 인물들은 신문기자 문정수, 에디터 겸 디자이너 노목희, 노목희의 고향 선배인 장철수였다. 그들로 인해 수없이 얽히고설키는 인연과 세상의 소식들은 때로는 평이하면서도 격정적이어서 이유 없는 한숨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사람 사는 모습일 수도 있고, 자연스런 삶일 수도 있는데 그 주변을 맴도는 나는 왜 그렇게 불안했는지 모르겠다. 문정수는 기자생활을 한 저자를 생각나게 했고, 장철수는 격동의 시류를 갈아타지 못한 아류의 표본으로 비춰졌다. 문정수와 관계를 맺고 미술교사에서 출판사로 이직한 노목희는 손에 잡히지 않는 인물로, 결국 스르르 사라져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문정수의 직업이 기자인 만큼, 그가 일하면서 겪게 되는 수많은 일들이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독자에게 전해졌고, 신문기사로 쓰였으며, 노목희에게 전달자로 직접 전해졌다. 그 일들은 기사화시킨 것보다 훨씬 진하고 노골적으로 전해졌으며, 신문으로 접했을 때 상상할 수 없는 이면이 드러나 있었다. 이면의 드러남을 문정수가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지켜보는 자들이 색다른 감흥을 느껴가는 것도 아니었지만, 실체를 바라보는 동안 마음이 불편했던 것은 사실이다. 나를 계속 엄습했던 불안감이 실체를 드러냈음에도 또렷이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모든 것은 흩어져 버렸다. 곳곳에서 들려오던 정보와 사람들의 이야기, 그들의 행보는 낱낱이 흩어져 아무 것도 쥐어지지 않은 빈손을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그런 바라봄은 어느 것이 주목할 만한 삶이라는 주됨도 없이, 뿔뿔이 흩어져 버렸고 그렇게 끝이 났다. 굵은 줄기를 잡아낸다는 것이 무모할 정도로 흐름을 보여주었던 글이었기에, 흩어짐이 야속하지 않았다. 다만 인연이라고 해야 할지, 악연이라고 해야 할지, 운명의 장난이라고 해야 할지 따져 물을 수 없는 허무함이 책의 끝에 잠재해 있었다. 흩어짐 가운데 조금이라고 후련함을 던져주었으면 좋았으련만, 덧없음을 한탄할 새도 없이 그들은 인생의 틈바구니로 잠식해 버렸다. 그 잠식이 더 이상 그들에게 허무함을 안겨주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다. 시종일관 무표정으로 살아갈 것 같은 그들을 어떤 식으로 위로해야 할지,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아야할지 여전이 내겐 의문으로 남아있다.

 

  책을 읽을 때, 제목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편이다. <공무도하>의 의미를 알고 난 후에도, 책 내용과 연관시키지 못할 정도로 지나쳐 버리기 일쑤인데 왜였을까. '사랑아 강을 건너지 마라' 라는 문구가 계속 내 마음에 남아 있는 이유는. 사랑을 느낄 여지도, 겨를도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었음에도 왜 자꾸 그 말은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책을 덮고 며칠이 지나 그 이유를 생각해 보니, 그들은 결국 뭍으로 올라오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떠한 강도 건너지 못한 채, 자신이 만들어 놓은 터전을 전전하는 사람들로 남겨지고 말았다. 그것이 스스로의 의지에 의한 것인지, 흐름에 맡긴 것인지 따져 묻고 싶지 않다. 그들이 뭍에서 부르는 노래를 들어 줄 밖에는. 그들이 남겨놓은 흔적을 따라 강 너머를 바라보며 뭍 속으로 따라가는 수밖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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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거나 혹은 버리거나 in 부에노스아이레스
정은선 지음 / 예담 / 2009년 9월
평점 :
품절


    오랜만에 일상의 여유가 생겨, 먼저 한숨 자고 일어나 밀린 책들을 읽었다. 읽어야 할 책이 너무 많아 어떤 책을 읽어야할지 혼란이 일 정도로, 최근에 책에 관심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랫동안 붙잡고 있던 책 한권을 꺼내 읽고, 책장에 꽂힌 책들을 둘러보다 <찾거나 혹은 버리거나>를 집어 들었다. 최근에 소설만 읽어서인지 다른 장르로의 여행이 필요하기도 했고, 최근들에 여행 책이 많이 출간되는 것에 관심이 갔다. 이 책을 꺼내든 계기는 남미에 대한 동경보다 책 제목이 주는 의미가 내게 더 와 닿았던 것 같다. 현재 내 마음상태와 비슷한 제목을 지닌 <찾거나 혹은 버리거나>에서 과연 내가 무엇을 찾고 버릴 수 있는 것인지 가늠할 수 있길 바랐다.

 

  책의 겉표지에 적힌 '출간 즉시 영화화 확정'이라는 문구를 보고 처음에는 뜨악했었다. 여행 책을 영화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상상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책을 읽고 보니, 왜 그런 결정을 하게 되었는지 충분히 이해가 갔을 뿐만 아니라 영상으로 만나게 되는 책 속의 내용을 상상하게 되었다. 혼자서 이런 저런 상상을 하면서 남미를 떠올리니, 뜨거운 열정 같은 것이 속에서 뭉텅뭉텅 떨어져 나오는 느낌이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만난 사람들을 자유로운 영혼으로 보기는 힘들었다. 다들 무언가를 피해 오거나, 버리러 오는 사람들이었고, 개중에는 찾으러 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저자가 말한 여행의 두 가지(잊기 위해서, 자신 안에 새로운 것을 채워 넣기 위해서)의 목적 가운데,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전자에 속했다. OK김만이 사랑하는 로사를 찾기 위해 먼 곳으로 날아왔을 뿐, 불행을 자신이 옮긴다고 생각하는 로사, 사진작가 원포토, 방송작가인 나작가, 스스로를 가시고기라 생각하는 박벤처는 무언가를 잊기 위해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날아온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인물들의 이야기는 12월 23일부터 12월 31일까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현재의 시간이 그렇다는 것이고, 그들이 뿜어내는 이야기는 과거의 이야기이며, 현재와 미래를 아우르는 삶의 표상이었다. 다들 마음 깊이 상처를 안고 찾아온 이들이었지만, 그들이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머무르면서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여행의 매력을 한껏 고조시켰다. 처음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가 따로따로 펼쳐질 때는 과연 여행 책인지, 소설인지 헷갈렸던 게 사실이다. 책 속에 실린 사진들을 구경하면서 남미의 매력을 느낄 거라 생각했던 내게, 사진은 뒷전이었고 스토리를 읽어나가기 바빴다. 제각기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왜 다들 부에노스아이레스로 향하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어떤 결말을 맞을 것인지 조마조마했다. 사랑하는 로사를 찾기 위해 중요한 일을 버리고 비행기를 탄 OK김, 막장드라마 작가라는 비난을 피해 온 나작가, 사랑하는 연인을 잊기 위해 마지막 여행을 한 원포토, OJ여사 게스트 하우스에 이미 진을 치고 있는 박벤처는 서서히 얽히고 있었다.

 

  그들이 얽히는 계기는 부에노스아이레스라는 공간적 배경과(OJ여사의 게스트하우스에서 머무르는 것도) 여행자라는 동질감이 끌어낸 계기가 컸다. 손님이 왕이 아니라 주인이 왕인 OJ여사의 게스트 하우스는 독특함 그 자체였다. 철저히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열정을 느끼려는 주인을 따라, 그 곳에 머물게 되는 주인공들도 어느새 조금씩 닮아가고 있었다. 제각기 사연을 안고 온 사람들인 만큼 그들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도 OJ여사였다. 그리고 OJ여사의 생활방식과 사고에 따라 그들이 찾고자 하는 것, 버리고자 하는 것들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할 수 있었다. 도망치듯 한국을 떠나온 나작가와 원포토가 그랬고, 로사를 찾아 온 OK김, OK김을 떠나온 로사가 그랬다. 긴장감을 늦추지 않은 채 펼쳐지는 그들의 이야기는 나를 이끌었고, 그들의 이야기에 익숙해 질 때쯤 배경으로 펼쳐지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어느 정도 눈길을 던질 수 있었다.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한 편의 영화처럼 펼쳐져서 인지, 뻔 한 결말이 예측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책을 소설책으로, 영화의 시나리오 배경으로 치부하고 싶지 않은 이유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매력을 져버리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OJ여사의 게스트하우스에 머무르는 사람들의 내면이 어떠하든 간에, 도시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관광하는 모습이 생경하면서도 친근했다. 한인 타운을 거닐면서 지구 반대편이라는 사실을 잊기도 하고, 전혀 다른 생활방식으로 살아가는 남미의 사람들로 인해 색다름을 느끼기도 했다. 거대한 자연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하찮은가를 느끼면서 자신을 되찾는 이가 있는가 하면, 도피처로 삼아온 곳에서 미약한 가능성을 끌어 올리는 사람도 있었다. 거기다 절절한 사랑의 마음을 담고 떠나온 두 남녀가 있었으니, 영화 같은 이야기면서도 여행의 묘미를 한껏 살려 주고 있는 이 책이 특별하게 다가왔음은 말할 것도 없다.

 

  책 속의 주인공들과 얽히면서 이들의 이야기가 실화인지 여부를 따지기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배경과 맞물리는 구성이 돋보였다. 마음에 힘겨움을 가득 안고 있는 인물이 등장하면서도, 새로운 도시를 알아가는 새로움도 함께 부어주었다. 그들이 이동할 때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명물의 간단한 소개와 사진은 물론, 그들의 그곳에서 무엇을 느끼는 지까지 알 수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한 편의 영화 같다는 느낌은 허구적인 면으로 다가오는 것이 많았다. 그런 내 마음을 이해하듯 책의 중간 중간에 드러난 짧은 산문들은 여행지에서 느낄법한 마음들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랬으니 여행 책이라 단정 지을 수 없는 독특함이 이 책을 한 호흡에 읽게끔 나를 이끌었던 것 같다. OJ여사의 간단한 후기로 그들의 이후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그 소식들이 반갑고 안심이 되기도 했지만 결과를 가져다 준 책이라기보다, 과정에 더 긴 시간을 할애한 책이었으므로 그들이 부디 그곳에서는 많은 고통을 안고 있지 않길 바랄 뿐이다.

 

  사진이 첨부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조금은 두툼한 책을 이렇게 순식간에 읽게 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무엇에 홀린 듯 정신없이 읽다 보니, 어느새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여행은 끝나 있었다. 그러나 내가 보통 보아온 여행책의 모습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모습이 펼쳐진 것이 아니라, 한 편의 소설처럼 영화처럼 독특한 여운을 남기고 있었다. 책을 덮으면서 '의외로 괜찮네!'라고 혼자 읊조릴 정도로 여행 책이 이런 형식으로 쓰일 수 있다는 사실이 도리어 신기했다. 저자가 영화 연출을 전공하고, 마케팅 관리도 했다는 경력이 빛을 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과 함께 실린 지극히 개인적인 여행 책에 익숙해 있는 독자라면,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여러 사람의 삶의 단상을 바라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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