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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거나 혹은 버리거나 in 부에노스아이레스
정은선 지음 / 예담 / 2009년 9월
평점 :
품절
오랜만에 일상의 여유가 생겨, 먼저 한숨 자고 일어나 밀린 책들을 읽었다. 읽어야 할 책이 너무 많아 어떤 책을 읽어야할지 혼란이 일 정도로, 최근에 책에 관심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랫동안 붙잡고 있던 책 한권을 꺼내 읽고, 책장에 꽂힌 책들을 둘러보다 <찾거나 혹은 버리거나>를 집어 들었다. 최근에 소설만 읽어서인지 다른 장르로의 여행이 필요하기도 했고, 최근들에 여행 책이 많이 출간되는 것에 관심이 갔다. 이 책을 꺼내든 계기는 남미에 대한 동경보다 책 제목이 주는 의미가 내게 더 와 닿았던 것 같다. 현재 내 마음상태와 비슷한 제목을 지닌 <찾거나 혹은 버리거나>에서 과연 내가 무엇을 찾고 버릴 수 있는 것인지 가늠할 수 있길 바랐다.
책의 겉표지에 적힌 '출간 즉시 영화화 확정'이라는 문구를 보고 처음에는 뜨악했었다. 여행 책을 영화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상상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책을 읽고 보니, 왜 그런 결정을 하게 되었는지 충분히 이해가 갔을 뿐만 아니라 영상으로 만나게 되는 책 속의 내용을 상상하게 되었다. 혼자서 이런 저런 상상을 하면서 남미를 떠올리니, 뜨거운 열정 같은 것이 속에서 뭉텅뭉텅 떨어져 나오는 느낌이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만난 사람들을 자유로운 영혼으로 보기는 힘들었다. 다들 무언가를 피해 오거나, 버리러 오는 사람들이었고, 개중에는 찾으러 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저자가 말한 여행의 두 가지(잊기 위해서, 자신 안에 새로운 것을 채워 넣기 위해서)의 목적 가운데,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전자에 속했다. OK김만이 사랑하는 로사를 찾기 위해 먼 곳으로 날아왔을 뿐, 불행을 자신이 옮긴다고 생각하는 로사, 사진작가 원포토, 방송작가인 나작가, 스스로를 가시고기라 생각하는 박벤처는 무언가를 잊기 위해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날아온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인물들의 이야기는 12월 23일부터 12월 31일까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현재의 시간이 그렇다는 것이고, 그들이 뿜어내는 이야기는 과거의 이야기이며, 현재와 미래를 아우르는 삶의 표상이었다. 다들 마음 깊이 상처를 안고 찾아온 이들이었지만, 그들이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머무르면서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여행의 매력을 한껏 고조시켰다. 처음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가 따로따로 펼쳐질 때는 과연 여행 책인지, 소설인지 헷갈렸던 게 사실이다. 책 속에 실린 사진들을 구경하면서 남미의 매력을 느낄 거라 생각했던 내게, 사진은 뒷전이었고 스토리를 읽어나가기 바빴다. 제각기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왜 다들 부에노스아이레스로 향하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어떤 결말을 맞을 것인지 조마조마했다. 사랑하는 로사를 찾기 위해 중요한 일을 버리고 비행기를 탄 OK김, 막장드라마 작가라는 비난을 피해 온 나작가, 사랑하는 연인을 잊기 위해 마지막 여행을 한 원포토, OJ여사 게스트 하우스에 이미 진을 치고 있는 박벤처는 서서히 얽히고 있었다.
그들이 얽히는 계기는 부에노스아이레스라는 공간적 배경과(OJ여사의 게스트하우스에서 머무르는 것도) 여행자라는 동질감이 끌어낸 계기가 컸다. 손님이 왕이 아니라 주인이 왕인 OJ여사의 게스트 하우스는 독특함 그 자체였다. 철저히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열정을 느끼려는 주인을 따라, 그 곳에 머물게 되는 주인공들도 어느새 조금씩 닮아가고 있었다. 제각기 사연을 안고 온 사람들인 만큼 그들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도 OJ여사였다. 그리고 OJ여사의 생활방식과 사고에 따라 그들이 찾고자 하는 것, 버리고자 하는 것들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할 수 있었다. 도망치듯 한국을 떠나온 나작가와 원포토가 그랬고, 로사를 찾아 온 OK김, OK김을 떠나온 로사가 그랬다. 긴장감을 늦추지 않은 채 펼쳐지는 그들의 이야기는 나를 이끌었고, 그들의 이야기에 익숙해 질 때쯤 배경으로 펼쳐지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어느 정도 눈길을 던질 수 있었다.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한 편의 영화처럼 펼쳐져서 인지, 뻔 한 결말이 예측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책을 소설책으로, 영화의 시나리오 배경으로 치부하고 싶지 않은 이유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매력을 져버리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OJ여사의 게스트하우스에 머무르는 사람들의 내면이 어떠하든 간에, 도시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관광하는 모습이 생경하면서도 친근했다. 한인 타운을 거닐면서 지구 반대편이라는 사실을 잊기도 하고, 전혀 다른 생활방식으로 살아가는 남미의 사람들로 인해 색다름을 느끼기도 했다. 거대한 자연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하찮은가를 느끼면서 자신을 되찾는 이가 있는가 하면, 도피처로 삼아온 곳에서 미약한 가능성을 끌어 올리는 사람도 있었다. 거기다 절절한 사랑의 마음을 담고 떠나온 두 남녀가 있었으니, 영화 같은 이야기면서도 여행의 묘미를 한껏 살려 주고 있는 이 책이 특별하게 다가왔음은 말할 것도 없다.
책 속의 주인공들과 얽히면서 이들의 이야기가 실화인지 여부를 따지기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배경과 맞물리는 구성이 돋보였다. 마음에 힘겨움을 가득 안고 있는 인물이 등장하면서도, 새로운 도시를 알아가는 새로움도 함께 부어주었다. 그들이 이동할 때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명물의 간단한 소개와 사진은 물론, 그들의 그곳에서 무엇을 느끼는 지까지 알 수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한 편의 영화 같다는 느낌은 허구적인 면으로 다가오는 것이 많았다. 그런 내 마음을 이해하듯 책의 중간 중간에 드러난 짧은 산문들은 여행지에서 느낄법한 마음들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랬으니 여행 책이라 단정 지을 수 없는 독특함이 이 책을 한 호흡에 읽게끔 나를 이끌었던 것 같다. OJ여사의 간단한 후기로 그들의 이후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그 소식들이 반갑고 안심이 되기도 했지만 결과를 가져다 준 책이라기보다, 과정에 더 긴 시간을 할애한 책이었으므로 그들이 부디 그곳에서는 많은 고통을 안고 있지 않길 바랄 뿐이다.
사진이 첨부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조금은 두툼한 책을 이렇게 순식간에 읽게 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무엇에 홀린 듯 정신없이 읽다 보니, 어느새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여행은 끝나 있었다. 그러나 내가 보통 보아온 여행책의 모습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모습이 펼쳐진 것이 아니라, 한 편의 소설처럼 영화처럼 독특한 여운을 남기고 있었다. 책을 덮으면서 '의외로 괜찮네!'라고 혼자 읊조릴 정도로 여행 책이 이런 형식으로 쓰일 수 있다는 사실이 도리어 신기했다. 저자가 영화 연출을 전공하고, 마케팅 관리도 했다는 경력이 빛을 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과 함께 실린 지극히 개인적인 여행 책에 익숙해 있는 독자라면,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여러 사람의 삶의 단상을 바라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