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말로 좋은 날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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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나에게 오는 우연의 만남은 어떠한 결과를 낳든 숙명적일 수 밖에 없다고. 그런 생각을 하게 된 매개물은 사람이 아니라 음악과 책이 더 자주였다. 한 음악가나 한 작가의 작품 속에서 혹평 되거나 난해하거나 지금껏 발표된 분위기와 다른 것을 첫 만남으로 대했을 때 나는 그 음악가와 작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별 느낌없이 지나치는 작품들도 많지만 명성에 비해 나의 만족감을 채우지 못할때는 이런 아쉬움이 든다. 다른 작품을 먼저 만났더라면, 그랬다면 좀 더 포괄적으로 생각할 수 있었을 텐데 하며 그들의 작품을 많이 듣고 읽는 건 깊은 인연이라 생각한다.

 

거창하게 이런 궤변을 늘어놓는 것은 이 책이 성석제님의 작품 중에서 첫 만남이였기 때문이다. 책을 읽기 전 성석제님의 문체, 이야기에 대해 신선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던 터라 설레임으로 책장을 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러한 신선함을 만나기도 전에 이 책은 분위기가 다르다는 것을 예감했다. 무언가가 내 마음 속에서 꿈틀대는 감정이 솟구치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것은 인간의 극과 잔인한 우울함이 깃든 현실의 부분을 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실의 모습을 그린 작품을 피하는 나의 편독에는 이러한 요소들을 만나기 싫어서였다. 현실을 살고 있으면서 현실을 피한다는 나의 편독이 이해가 가지 않을 때가 많지만 음지의 한가운데를 살아가기에 양지만을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책을 읽다가 많이 덮어버렸다.

책 속의 감정들이 책 밖으로 비져나올라 치면 나는 황급히 도망쳐 버린 것이다. 그 우울의 짙음은 책을 읽어나가는 페이지 수 만큼 두꺼워지고 농도도 짙어가고 있었기에 나의 도망은 자주일 수 밖에 없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길 곁의 잔상을 그려내고 있다는 관심의 유도 속에서 허우적 댈 수 밖에 없었다.

 

책을 읽으면서 책 속의 분위기에 동화되어 가는 것을 책 읽기의 즐거움으로 꼽기도 하지만 인간의 어두운 감정을 계속 드러나게 하는 참말로 좋은 날은 제목과는 상반된 분위기 속에서 극을 달리고 있었다.

7편의 단편이 다 그러한 분위기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였지만 툭툭 불거지던 꽃이 한꺼번에 와르르 피어나듯 우울함은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특히 마지막 작품 '저만치 떨어져 피어 있네'는 희망이라곤 눈꼽만큼도 들지 않는 어둠을 그려낸 작품에다 살아 있어야 겠다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잔인한 몰락을 그리고 있있다. 지나가는 말로 들어도 안타까움에 마음이 무거웠을텐데 그 세세함을 만나야 하는 나는 깊은 어둠을 맛 보고 있었다. 삶이 이래야만 하는 걸까 과연 나는 이들보다 낫다고 말할 수 있을까란 질문을 던져보지만 그들이 그려내는 좌절과 현실의 팍팍함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없음일터다.

결말을 바꿀 힘도 처음부터 곁길만 존재했던 그들 앞에 그 곁길을 벗어나라고 용기를 북돋워 줄 수 없었다.

행복은 이렇게 먼 것일까, 과연 행복은 큰 것 에서 나오는 것인가 수없이 질문을 던져 보아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귀가 멀어져 가는 아내, 부모와 자식간의 끈이 끊어져 버릴 듯 변해가는 딸, 집을 잃고 갈 곳이 없는 가족, 점점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이 작품 뿐만이 아닌 다른 작품 속에서도 나의 우울을 끌어내었던 것은 가족의 불화였고 가정의 파괴였다. 존재감 상실로 이어지는 혈연관게는 예의를 차리지 않은지 오래였고 같은 공간에서 겨우 겨우 형식의 틀을 이어갈 뿐 가족이라는 허울만 겨우 뒤집어 쓰고 있었다.

거기다 저자의 언어는 태연히 그 모든 것을 그려내고 있었기에 잔인한 우울의 탓을 누구에게 돌려야 할지 헷갈릴 정도였다.

저자가 만들어낸 세계의 사람들, 실재로 존재하고 있는 어둠의 실체, 자꾸 엇나가 버리는 그들을 보면서 이것은 나와 상관없다, 난 현실이 싫어 라고 언제까지 외칠 수 있을까. 그 또한 내가 버릴 수 없는 잔인함이로다.

 

이러한 내용이였기에 성석제님에 대한 인상은 이 책으로 관철될 것이다.

다른 책을 읽어 봐야겠다라는 생각은 들지만 이미 맛 본 쓴맛을 단맛으로 잠재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이 또한 성석제님과 나와의 숙명이고 나는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언젠가는 만나게 될 좋을 날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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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의 당신에게 - 흔들리는 청춘에게 보내는 강금실의 인생성찰
강금실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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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인사들의 책을 만날때마다 읽기도 전에 드는 편견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그 인물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책이 나왔다고 하면 알기 위해 읽어 보려는 것이 아닌 내 안의 편견 속에 더욱 더 가둬 버린다.

이 책도 그랬었다. 법무부 장관을 지내면서 획기적인 일들을 단행했기에 강금실 변호사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너무나 유명하기에 그리고 그런 똑부러짐에 기가 죽었기에 멋지다는 인상을 받으면서도 그녀의 책을 손에 쥐는 건 쉽지 않았다. 그녀에 대한 나의 생각이 어떻게 바뀌게 될지 두렵기도 하였다.

그녀는 자기의 일을 말하고 있음에도 나는 젠체한다고 느낄 수도 있는 것이 그녀가 특별하다는 걸 인정할 수 밖에 없음이다.

분명 그녀는 대단한 사람이다. 법조인으로써가 아니라 여성으로써가 아니라 사람 강금실은 멋있는 사람이다.

 

거기다 그녀는 글을 통한 또 하나의 통찰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강금실과 깊은 친분을 맺고 있으면서 그녀의 책 머릿말을 쓴 분도 질투가 날 정도였다고 하니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솔직히 유명인사의 책들은 자기의 인생을 되짚으며 독자들에게 보여줌에 힘썼다라고 생각하고 대충 훑어본 그녀의 사진들을 보며 이 책도 그렇겠구나 생각하였다. 처음 책을 읽으면서 그녀의 일, 결혼 얘기가 나올때 '그럼 그렇지'라며 내 멋대로 생각해 버리고 있었다. 그러나 책을 읽어 나가면 나갈 수록 나의 생각이 부끄러워지고 있었다. 그녀의 글은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았지만 쉽게 지나칠 수 없는, 한번에 주르륵 읽고 나아가기엔 무언가가 걸리는 글이였다.

그녀의 글을 깊이 공감할 수 없어 겉도는 나를 발견하면서도 그녀의 글을 외면할 수 없었다. 책을 대하면서도 법조인 강금실을 마주하고 있었지만 어느새 강금실이라는 소소한 사람의 일상속으로 빠져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야기이고 자신 내면의 드러남이였지만 우리가 알아갈거라 추측한 그녀의 시시콜콜한 것들이 아닌 그녀의 생각, 그녀의 삶의 자세를 읽는 듯한 기분이였다.

 

책의 구성이 조금은 어수선 하다라는 느낌과 곳곳에 그녀야 예전에 기고했던 글들이 실려있고 또한 그녀의 사진들이 글의 성격과 맞지 않고 생뚱맞다라는 느낌이 들어 일관성이 없어 들쑥날쑥 하다는 기분이 들기도 하였지만 그녀의 글에 대한 편견과 유명인사의 책이라는 무조건적인 불신은 사라지고 있었다.

내가 한권의 책으로 그녀를 판단하고 논한는 것은 가당치도 않지만 그녀의 다른면을 만난 것은 분명하다. 어쩌면 그녀의 일, 경력이 주류가 된 것이 아닌 그녀의 사고의 드러남이 짙어 조금은 가까이 다가간 기분이다.

무언의 장벽이 거느리고 있었던 수직구조의 딱딱함, 긴장감을 그녀가 법무부장관시절 조금씩 무너뜨렸던 것처럼 독자와의 장벽도 무너진 느낌이다.

순전히 내가 그녀에게 가지고 있던 편견의 무너짐이였지만 글을 통한 소통으로 인해 그녀에 대한 생각이 조금은 소원해졌다.

얼마나 많은 몰이해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그녀의 소소함에서 칼끝 같은 날카로움을 보며 무언가를 깨트려가고 있었다. 그 무언가는 개개인의 몫이겠지만.

 

내가 느꼈던 것들이 이러했기에 그녀의 책 '서른의 당신에게'는 제목이 폭이 좁거나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른 즈음에 그녀가 느꼈던 것이 특별하다고는 하나 제목에 편중되어 꼭 서른즈음의 독자들에게만 뿌려지는 내용이라 생각했다.

이 책의 완성이 서른즈음의 고독과 환희로부터 시작되었을 수도 있으나 인생의 성찰, 삶의 고뇌라는 거창한 발언보다는 그녀의 삶의 소소함이라는 모습으로 좀 더 가깝게 다가갈 수도 있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든다.

소소함이든 성찰이든 그녀의 드러남을 부인할 수 없지만 조금은 그녀에게 가깝게 다다가길 원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염려로 보아준다면 고맙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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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똥별 머신
하시모토 쓰무구 지음, 박승애 옮김 / 노블마인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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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적 부모님이 모두 잠든 깊은 밤, 마당을 서성이며 별자리를 보던 기억이 난다. 우연히 별자리 공을 하나 얻은 후 그 공과 하늘을 비교하고 신기해하며 한껏 고개를 젖힌 후 보던 밤하늘을 잊을 수 없다.

별똥별을 본 후 혼자 흥분해 날뛰던 밤이며 수 많은 추억이 깃든 시골집 마당의 밤하늘은 이제 추억이 되었지만 이젠 밤하늘을 보고 있으면 가지가 생각날 것 같다.

 

별똥별 머신으로 나오코에게 사랑을 고백했던 가지.

6년의 짝사랑의 고백을 멋지게 한 후 가지와 나오코는 하나가 되었다.

설레임과 깊은 융화감이 기든 연인이라고나 할까. 그러한 사랑을 해본적이 언제이던가 감상에 빠지기도 전에 그들의 미래는 내 밤하늘의 추억처럼 흔적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오로지 추억만이 존재한채.

외국의 섬에서 낯선 여자와 버스 추락 사고로 죽은 가지.

나오코에겐 그의 죽음도 받아들이기 힘든데 죽어버린 낯선 여자에 대한 질투심으로 혼란스럽고 괴롭기만 하다. 늘 가지는 나오코 안에 잠재되어서 절대 빠져나올 수 없지만 나오코는 가지의 친구였던 다쿠미와 새로운 사랑을 만들어 가고 있다. 가지와는 완전히 다른 다쿠미지만 언제든 보고 있으면 힘이 나기에 나오코는 그에게 점점 의지해간다.

그러나 가지를 잊을 순 없다. 가지는 그녀 곁에 없으니 그와의 추억은 더욱 더 미화되어서 그녀를 짓누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건 다쿠미도 마찬가지다. 가지의 연인을 자기 연인으로 만들었지만 가지를 잊지 못하는 나오코를 알고 자신 또한 가지를 진정 좋아했기에 가지라는 울타리 안에서 태연히 가지를 의식하지 않은 척 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가지는 소중한 사랑이자 친구였기에 그리고 가지와의 추억도 남달랐기에. 가지는 멋진 녀석이였기에.

 

그러나 언제까지 그들은 가지 주위를 멤돌며 그렇게 힘든 사랑을 꾸려갈 것인가. 서로 잘 알고 있지만 모른척 하면서 도대체 언제까지.

나오코는 우연히 동창회에 갔다가 가지에 대한 친구들의 제 멋대로의 말을 듣고 다쿠미는 그 소식을 전해 듣고 둘은 각자 무너져 버린다. 가지가 살아있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채 가지를 그리워하며.

그러나 그들은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다. 가지라는 울타리 안에서 서로의 위치와 연결고리의 존재를 인정한 채 말이다. 그러곤 말한다.

우린 가지를 잊을 수 없을 거라고. 어떻게 잊을 수 있겠냐고. 그들은 비로소 마음 속에 품었던 가지를 공유함으로써 가지와의 이별을 극복해 나가기로 한 것이다.

 

처음엔 가지와 서로 연결이 되어 있는 사람들끼리의 만남이 더 고통스럽지 않을까. 가지를 배신하는 경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분명 그들은 힘든 상황에서 힘든 사랑을 하고 있었지만 가지가 서로에게 특별하기에 가지를 잊을 수 없기에 차라리 가지를 서로 공유한 채 살아가기로 한 것이다. 그러한 상황이 처음엔 힘이 들겠지만 그게 오히려 가지 안에 갇혀 사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한다. 가지와의 추억을 되새기며 그리움이 짙어 지더라도 그 아픈 마음을 채워줄 수 있는건 가지를 잘 아는 둘이기에 상처회복이 더 빠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속도는 느리지만 그들의 출발은 힘차 보인다. 가지와 나오코와 다쿠미는 그렇게 그들의 추억을 새롭게 만들어 갈 것이다. 사랑하는 가족들과의 소소한 일상 가운데에서 평화롭게. 그들의 마음속엔 가지와 새로운 연인과 같이 살아가는 힘겨움과 즐거움이 함께 존재하더라도 말이다.

 

이별 후의 그들의 모습은 그랬기에 조금씩 아름다워 보이기 시작했다.

무조건 가지와의 추억을 미화시키는 것 보다 그 추억을 통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삶의 희망을 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가지가 죽어서만이 아닌 우리는 이별에 익숙해져야 하고 익숙해 지더라도 이별엔 늘 서투르기에 이별 후의 희망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연습해도 이별과 절대 친해질 수 없다는 걸 알지만 나오코와 다쿠미를 통해 이별 후의 상실감만이 아닌 살아가는 힘을 품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늘 가지가 따라다니더라도.

 

 

오타발견 : p.195 근본족인 -> 근본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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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들에게 길을 묻다 - 영상아포리즘 01
김판용 지음 / 예감출판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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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책에선가 그런 글귀를 읽은 적이 있다.

자유를 얻고 싶다면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말.

그 한마디가 나의 뇌리를 스치며 맞아,맞아 긍정을 하고 있었지만 자연속에 묻히다 보면 금새 내 몸과 마음에 배어있는 도시의 흔적을 그리워하는 나를 발견 할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여서 오랜 간구는 하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늘 자연과 자유가 동경이 되었지만 이 둘의 관계가 이토록 교묘하니 정작 나는 그 둘을 벗어나서 멤도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의 마음속에는 늘 끊임없이 자연과 자유가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다.

무조건적인 동경의 대상이 아닌 지극히 내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모른채 말이다.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이 책 덕분이다.

나의 동경의 대상인 자연에 한번 푹 빠져 보고자 읽게 되었는데 자주 보아왔던 자연에 대한 찬미, 그 안에서 인간의 미미함을 써놓았을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정말 멋진 사진들도 많았지만 인간과 자연이 어우러져 있는 소박한 사진과 글은 한탄이 아닌 그 안에서 느끼는 단아함을 그려내고 있어 마음이 편안해졌다. 책의 제목처럼 꽃에 대한 이야기와 사진들이 참 많았던게 인상 깊었다.

그러나 왜 꽃이였을까를 곰곰히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아름답긴 하지만 금방 져버리는 꽃, 그래서 받는 순간의 기쁨이 오래가지 않는 꽃. 그 꽃의 느낌만 생각하고 있었지만 저자는 꽃의 이면까지 들여다 보고 있었다. 단순히 겉모습만이 아닌 인간의 눈으로 비춰지는 꽃만을 사진으로 담는 것이 아닌 꽃들에게 말을 걸고 애정을 쏟고 있었다. 꽃을 지켜보는 것만도 행복에 겨워 잠시 지친 육신을 내려 놓듯이 태초의 나를 찾아가듯이 말이다.

대부분 확짝 피어있는 꽃들의 모습이였지만 저자는 꽃이 지는 순간 꽃을 피워올리기 위해 애쓰는 모습까지 다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아름다웠던 날들과 앞으로 열어갈 아름다운 날을 그려 보며 나아가라는 의미는 아니였을까?

그래서 꽃들에게 길을 물어 보라고 한게 아니였을까?

 

길을 쉬이 찾을리가 없겠지만 분명 활짝 핀 꽃을 보고 있으면 그 꽃 속에서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을 터였다.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꽃에서부터 깊은 산 혼자 폈다 지는 꽃까지 말이다.

꼭 꽃에서만 길을 찾으란 법이 있으랴. 자연속에서 그 안에서 어우러지며 자연과 좀 더 가까워질때 우리는 좀 더 맑은 숨을 쉴 수 있을 것이고 일상의 평범함 속에서 뿌듯함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답답하거나 외롭거나 슬플 때 자연에 기대듯이 우리는 자연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꽃들에 관해, 장소에 관해, 자연에 대한 추억과 동경을 담담히 풀어낸 저자의 글과 사진은 그래서 더 소박하고 가깝게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그 안에 녹아 있는 추억과 담담한 언어는 우리를 일상에서 멀어지게 하거나 무조건적인 자연에 대한 동경만을 심어주는 것이 아닌 그 안에서 얼마나 잘 어울려 살고 있는지 알려 주고 있었던 것이다.

컴퓨터 모니터 바깥의 세계를, 아파트 밖의 자연을, 치열한 경쟁속의 사회를 떠나 진실된 마음을 보라고 무언의 길을 열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희망적인 저자의 언어가 좋았다.

아프고 슬프고 씁쓸한 추억도 많았지만 그래도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긍정을 담고 있는 것 같아 책을 곁에 두는 내내 즐거웠다.

 

처음 책을 대할 때 꽃들에게 내 길을 말해 달라고 내 길을 찾고 싶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평안해진 내 마음은 꽃들에게 되려 이렇게 묻는다.

어디로 가고 싶니 라고.......

이젠 그들에게 길을 열어 주는 내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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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베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7
서머셋 모옴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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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 보여지는 내가 아닌 내가 하고 있는 생각, 내가 품고 있는 마음을 온전히 아는 이가 몇이나 될까. 아마 그건 단 한사람 나 뿐일 것이다.

그랬기에 나를 드러내는 것보다 나를 감추는 것에 더 익숙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내 모습을 글로 써 내려 갈 수 있을까.

그럴 용기가 없기에 일기를 쓰는 것 조차 꺼려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설국'의 고마짱이 했던 말을 빌자면 어쩔 땐 너무 솔직하게 써서 내가 읽어도 부끄러울 때가 있는 자신의 일기처럼 '인생의 베일'은 키티의 내면을 키티보다 내가 더 자세하게 들여다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키티 자신도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를 키티의 생각, 키티의 감정, 키티의 마음은 냉정할 정도로 솔직했다. 그랬기에 그녀가 겪은 고통들이 내게 진하게 전해져 오는 것이 아닌 담담하게 제 3자로써 바라 보고 있을 뿐이였다.

 

키티에게 동화될 수 없었던 것은 사람의 마음이 절대 인력으로 될 수 없다는 걸 다시 한번 인식하게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란 생각을 해보았지만 어쩌면 사랑 없는 결혼을 한 키티가 처음부터 두려웠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남들이 슬슬 결혼을 제촉하는 적령기에 내가 있다라는 인식을 하기도 전에 주변의 친구들이 하나 둘 결혼을 하고 덩그러니 남겨진 나를 보고 있자니 키티의 결혼이 두렵게 다가왔다.

친구들이 결혼을 해서 조바심을 느끼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과의 동떨어짐이 낯설게 다가와 적잖이 당황함을 느끼고 있는 중이다.

마치 바보가 된 느낌, 남들은 정상으로 보이지만 나만 이상해 보이는 가운데 바라 본 키티의 결혼, 외도는 결혼에 대한 거리감과 이질감이 느껴지기에 충분했다.

 

사교계에 멋지게 등장했지만 꽉찬 나이와 남들의 시선 때문에 도피하듯 결혼을 한 키티는 남편 월터를 따라 홍콩으로 간다.

거기서 유부남 타운센트와 사랑에 빠지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월터의 분노에 또한 타운센트의 배신에 콜레라가 창궐한 중국의 오지로 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월터는 그러한 키티를 용서할 수 없어 키티가 죽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같이 중국으로 갔는지도 모르나 키티도 그도 상처와 고통뿐인 마음을 위험한 마을에 흩뿌리듯 놓아 버린다.

자신을 절제하며 키티를 증오하는 월터, 월터에게 상처를 준 것은 알지만 타운센트의 배신을 보고도 그를 그리워하며 절대 월터를 사랑할 수 없는 키티.

콜레라가 들끓고 하루에 수 십명씩 죽어 나가는 마을이라고 해서 그들은 달라질 것도 없이 상처와 분노, 그리움, 사랑을 안은채 살아가고 있다.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 주던 월터를 단 한번도 사랑한 적이 없다고 냉랭히 말하던 키티와 타운센트가 얼마나 비열한 인간인지 알면서도 또 한번 몸을 내주었던 키티를 한 인간으로 볼 수 있을까.

분명 나의 내면에도 수 없는 양면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 양면성을 드러내는 키티를 나 또한 키티가 월터를 바라보던 시선으로 보고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 키티는 임신 사실을 알고 그 아이가 누구 아이인지 확신을 갖지 못한채 자살의 가능성을 안고 월터는 콜레라에 걸려 죽는다.

월터의 죽음은 충격이였지만 큰 슬픔을 느낄 수 없는 키티는 잔인하기까지 하다.

그러곤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타운센트에게 몸을 내 주는 것이다.

 

중국의 오지 마을에서 철저히 혼자가 된 키티는 수녀들을 통해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지만 자신의 행동에 대해 많은 자책을 한다.

어떠한 비난도 원망의 말을 끝내 하지 않고 죽은 월터를 보며 어쩌면 죽음이야말로 그의 내면에 잠식된 증오를 떨쳐낼 수 있다 생각하지만 자신에 대한 증오를 번번히 이기지 못한 키티는 월터와 무엇이 다를까.

단지 살아 있음과 죽음? 포기와 희망?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가고(월터가 견디지 못한 것도 있지만)자신의 마음을 감당해 내지 못하는 키티를 비난할 자격이 내게 있을지 모르겠지만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 아버지와 화해하는 모습에서 조금씩 나의 마음을 열어 본다. 

죄 없는 자 그녀에게 돌을 던지라는 예수의 말처럼 나의 죄와 그녀의 행위를 비교함이 아닌 인간 대 인간으로써 진실의 베일을 벗겼을 때 나 또한 그녀 앞에서 당당하게 나서지 못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나약함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이리라.

그 나약함이 내게 나타나지 않았다고 그녀를 맹렬히 비난할 수도 없고 그 나약함이 드러났다고 그녀를 동정할 수도 없는 것이다.

단지 그녀가 느꼈던 삶의 공허감이 밀려와 어느 곳으로 치우치지 못한채 중립을 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분명 자신의 잘못된 마음과 행위를 벗어 던지는 그녀는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안겨 주었지만 온전히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나의 마음은 무엇일까. 

두려움, 미래에 받을 상처에 대한 걱정, 그 상처를 상대방에게 안겨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일까?

진정 용기 없는 자는 나이고 잘못된 길을 걸어갔지만 고통속에서 희망의 길로 빠져나온 키티가 진정한 개척자이다.

그렇기에 그녀에게 배워야 할 것은 상대방에 대한 용서가 아닌 내 자신을 향한 용서가 될 터였다.

 

 

 

오타 발견 : p.23 그녀의 릿속엔 -> 그녀의 머릿속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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