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베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7
서머셋 모옴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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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 보여지는 내가 아닌 내가 하고 있는 생각, 내가 품고 있는 마음을 온전히 아는 이가 몇이나 될까. 아마 그건 단 한사람 나 뿐일 것이다.

그랬기에 나를 드러내는 것보다 나를 감추는 것에 더 익숙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내 모습을 글로 써 내려 갈 수 있을까.

그럴 용기가 없기에 일기를 쓰는 것 조차 꺼려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설국'의 고마짱이 했던 말을 빌자면 어쩔 땐 너무 솔직하게 써서 내가 읽어도 부끄러울 때가 있는 자신의 일기처럼 '인생의 베일'은 키티의 내면을 키티보다 내가 더 자세하게 들여다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키티 자신도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를 키티의 생각, 키티의 감정, 키티의 마음은 냉정할 정도로 솔직했다. 그랬기에 그녀가 겪은 고통들이 내게 진하게 전해져 오는 것이 아닌 담담하게 제 3자로써 바라 보고 있을 뿐이였다.

 

키티에게 동화될 수 없었던 것은 사람의 마음이 절대 인력으로 될 수 없다는 걸 다시 한번 인식하게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란 생각을 해보았지만 어쩌면 사랑 없는 결혼을 한 키티가 처음부터 두려웠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남들이 슬슬 결혼을 제촉하는 적령기에 내가 있다라는 인식을 하기도 전에 주변의 친구들이 하나 둘 결혼을 하고 덩그러니 남겨진 나를 보고 있자니 키티의 결혼이 두렵게 다가왔다.

친구들이 결혼을 해서 조바심을 느끼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과의 동떨어짐이 낯설게 다가와 적잖이 당황함을 느끼고 있는 중이다.

마치 바보가 된 느낌, 남들은 정상으로 보이지만 나만 이상해 보이는 가운데 바라 본 키티의 결혼, 외도는 결혼에 대한 거리감과 이질감이 느껴지기에 충분했다.

 

사교계에 멋지게 등장했지만 꽉찬 나이와 남들의 시선 때문에 도피하듯 결혼을 한 키티는 남편 월터를 따라 홍콩으로 간다.

거기서 유부남 타운센트와 사랑에 빠지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월터의 분노에 또한 타운센트의 배신에 콜레라가 창궐한 중국의 오지로 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월터는 그러한 키티를 용서할 수 없어 키티가 죽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같이 중국으로 갔는지도 모르나 키티도 그도 상처와 고통뿐인 마음을 위험한 마을에 흩뿌리듯 놓아 버린다.

자신을 절제하며 키티를 증오하는 월터, 월터에게 상처를 준 것은 알지만 타운센트의 배신을 보고도 그를 그리워하며 절대 월터를 사랑할 수 없는 키티.

콜레라가 들끓고 하루에 수 십명씩 죽어 나가는 마을이라고 해서 그들은 달라질 것도 없이 상처와 분노, 그리움, 사랑을 안은채 살아가고 있다.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 주던 월터를 단 한번도 사랑한 적이 없다고 냉랭히 말하던 키티와 타운센트가 얼마나 비열한 인간인지 알면서도 또 한번 몸을 내주었던 키티를 한 인간으로 볼 수 있을까.

분명 나의 내면에도 수 없는 양면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 양면성을 드러내는 키티를 나 또한 키티가 월터를 바라보던 시선으로 보고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 키티는 임신 사실을 알고 그 아이가 누구 아이인지 확신을 갖지 못한채 자살의 가능성을 안고 월터는 콜레라에 걸려 죽는다.

월터의 죽음은 충격이였지만 큰 슬픔을 느낄 수 없는 키티는 잔인하기까지 하다.

그러곤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타운센트에게 몸을 내 주는 것이다.

 

중국의 오지 마을에서 철저히 혼자가 된 키티는 수녀들을 통해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지만 자신의 행동에 대해 많은 자책을 한다.

어떠한 비난도 원망의 말을 끝내 하지 않고 죽은 월터를 보며 어쩌면 죽음이야말로 그의 내면에 잠식된 증오를 떨쳐낼 수 있다 생각하지만 자신에 대한 증오를 번번히 이기지 못한 키티는 월터와 무엇이 다를까.

단지 살아 있음과 죽음? 포기와 희망?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가고(월터가 견디지 못한 것도 있지만)자신의 마음을 감당해 내지 못하는 키티를 비난할 자격이 내게 있을지 모르겠지만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 아버지와 화해하는 모습에서 조금씩 나의 마음을 열어 본다. 

죄 없는 자 그녀에게 돌을 던지라는 예수의 말처럼 나의 죄와 그녀의 행위를 비교함이 아닌 인간 대 인간으로써 진실의 베일을 벗겼을 때 나 또한 그녀 앞에서 당당하게 나서지 못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나약함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이리라.

그 나약함이 내게 나타나지 않았다고 그녀를 맹렬히 비난할 수도 없고 그 나약함이 드러났다고 그녀를 동정할 수도 없는 것이다.

단지 그녀가 느꼈던 삶의 공허감이 밀려와 어느 곳으로 치우치지 못한채 중립을 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분명 자신의 잘못된 마음과 행위를 벗어 던지는 그녀는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안겨 주었지만 온전히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나의 마음은 무엇일까. 

두려움, 미래에 받을 상처에 대한 걱정, 그 상처를 상대방에게 안겨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일까?

진정 용기 없는 자는 나이고 잘못된 길을 걸어갔지만 고통속에서 희망의 길로 빠져나온 키티가 진정한 개척자이다.

그렇기에 그녀에게 배워야 할 것은 상대방에 대한 용서가 아닌 내 자신을 향한 용서가 될 터였다.

 

 

 

오타 발견 : p.23 그녀의 릿속엔 -> 그녀의 머릿속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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