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 6 - 양장본 조정래 대하소설
조정래 지음 / 해냄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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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4월에는 읽다만 장편소설을 읽기로 하고, 첫 번째로 <홍루몽>을 완독했다. 4권남은 책이어서 빨리 읽을 수 있었지만 <홍루몽>을 읽고 나니 자신감이 붙어 <아리랑> 6권을 꺼내들었다. 5권의 리뷰를 보니 역시나 우울해지는 소설의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잠시 쉰다는 것이 4년 동안 방치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정래 작가의 장편을 다 읽고도 유독 <아리랑>만 독파하지 못해 늘 애가심으로 남아 있었는데, 벌써부터 마음이 홀가분해지는 기분이다. 책 내용이 유쾌하지 못하더라도, 5권까지 읽은 과정이 기억나지 않더라도 다시 꺼내들었다는 사실에 스스로에게 용기를 부여해 본다.

 

  오랫동안 읽기가 끊겨 버린 책이라도 읽다보면 신기하게도 기억이 난다는 것을 <홍루몽>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아리랑>은 <태백산맥>과는 달리 인명사전이 없어 걱정이 앞섰는데, <홍루몽> 덕분에 걱정을 덜게 되었다. 거의 백지 상태에서 다시 읽기를 시작했으나, 6권을 읽고 어느 정도 전체적인 분위기의 틀을 잡을 수 있었다. <아리랑>을 읽으니 해외문학을 읽느라 번역체에 익숙해져 있고, 국내소설을 읽더라도 젊은 작가들의 현대소설이 대부분이어서 문체의 아름다움을 느낄 틈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 조정래 작가에 반하게 된 것도 단편속의 군더더기 없는 문체 때문이었는데, 4년 만에 다시 저자의 문체와 조우하게 되니 그때의 감동이 되살아났다. 더불어 오랜만에 만끽해보는 우리 언어의 수려함에 소름이 오소소 돋을 정도로 만족해하며 책을 읽어나갔다.

 

  6권은 총 4부로 이루어진 <아리랑> 2부의 마지막 책이었다. 5권에서 땅을 뺏긴 농민들이 만주로 떠나는 것을 보고 한탄했던 것으로 보아, 6권에서 변화된 동태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일제 감정기가 36년 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이제 10년째를 맞이하는 6권이 답답하기도 했다. 나라를 잃은 설움은 절정에 이르러 3·1 만세 운동을 배경에 담고 있었지만, 앞으로 16년이 흐른 후에 해방될 거라는 사실을 혼잣말로도 할 수 없었다. 들불같이 일어나 전국을 넘어 해외까지 강타한 만세 운동 앞에서 숙연해짐은 물론, 우리 민족의 한이 서려있어 쉽게 간과할 수 없었다. 그렇게 들고 일어난 후에 일본이 어떻게 보복을 가할 지 뻔히 알면서도 일어설 수밖에 없는 그들의 고충을 과연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까?

 

  저자의 대하소설을 읽을 때마다 감탄하곤 하는 것은 역사의 큰 틀과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민중의 세세함을 표현해 내는 역량이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만들어 놓은 수많은 가상인물과(우리가 기억하지 못할 뿐, 그들은 분명 존재했던 사람들이었다.) 실존인물들이 뒤섞여 등장하는 것은 간접경험에 생생함을 부여해 주는 것이었다. 3·1 만세 운동의 중요한 사건으로 역사 속에 묻혀있던 사람들의 등장이 색다르게 다가왔다. 늘 고달픈 농민들의 삶이나 일제 앞잡이들의 이야기만 읽다 보니, 그들의 등장으로 인해 아직 조선이라는 나라는 사라지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이 독립에 힘쓰고 있다는 사실에 용기가 샘솟았다. 3·1 만세 운동이 전국에서 일어난 만큼 여러 장면을 통해 정황을 살펴보게 해주었고, 일본과 만주, 상해 등 해외에 흩어져 있는 조선 사람들의 삶을 파고들어 속속들이 전해 해주었다.

 

  인물 사전이 없었기 때문에 각지에 퍼져있는 인물들의 등장이 당황스럽기도 했다. 너무 오랜만에 읽은 책이었고, 기억에 남아 있을 리 만무했으므로 대화나 저자의 설명을 통해 추측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속 시원히 그들의 행적을 되짚어 볼 수 없었다고 해도, 흐름을 익힐 정도는 파악이 되어서 마치 오랫동안 헤어졌던 이웃을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송수익, 공허 스님, 장칠문, 수국, 방영근, 양치성 등등 역사의 인물로 기억되는 사람들보다 이들과의 만남이 더 반가웠음은(반갑지 않은 인물들도 있었지만) 더 말할 것도 없다. 거기다 전라도의 사투리가 그대로 녹아들어 읽어나가는데 속도가 더뎌지기도 했는데, 전라도에 살고 있어서인지 그들의 언어가 구수하게 들릴 정도였다.

 

  흩어진 조각들은 조금씩 맞춰지기 시작해 앞으로의 이야기를 읽어나갈 원동력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문학평론가 김철님이 좋은 소설의 미덕은 아주 작은 것들의 섬세한 묘사로부터 나온다고 아리랑을 극찬했던 것처럼, 알려지지 않은 보통 사람들의 묘사가 이 소설을 훌륭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곳곳에서 벌어지는 독립운동은 황폐한 농민들의 삶과 어우러져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었다. 끈끈한 민족애로 뭉친 그들이 있어 현재의 내가 있고, 대한민국이 있다는 사실을 진부하도록 말해 무엇하리. 많은 사람들이 역사를 기억하고 있지 않고, 당시의 고충을 잊어 버렸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정도였다. 나도 마찬가지지만 <아리랑>을 통해 역사의 과거를 간접경험하고, 윗세대들의 고달픈 삶을 통해 현재를 조망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3·1 만세 운동이 6권의 주요 사건인 만큼 그 이후에 일본의 횡포는 더 극심해 졌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대학살이 있었고, 조선 사람들은 이 땅에서 더 살기가 팍팍해졌다. 그러나 조선 사람들이 살고 있는 조선 땅에 일본인이 들어왔다고 해서 수많은 사람들의 움직임까지 제재할 순 업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 땅을 잃고 타지로 나간 사람들, 일본인 지주아래 소작농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출세하려는 사람들 등 그 수많은 사람들이 들썩여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앞으로 그들이 어떤 움직임을 통해 어떤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지 지켜보는 것이 중요하다. 역사를 더듬어 보는 것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에서도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은 앞으로 펼쳐질 삶의 의미가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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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루몽 12
조설근 외 지음, 안의운 외 옮김 / 청계(휴먼필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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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홍루몽 12권을 읽어 3년 동안 끊겨버린 이야기를 완성 시켰다. 9권부터 줄기차게 읽어내던 책이 12권에서는 좀 주춤거렸던 것이 사실이다. 왠지 모를 서운함과 장편을 마감 짓는 서사적인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아서인지 며칠을 노닥거리다 책 읽기를 마쳤다. 3년만에 책을 다시 잡았을 때는 이 방대한 이야기를 어떻게 마무리 지을 것인가에 대한 기대가 어느 정도 있었다. 결말을 대충 알고 있다고 해도 과정이 중요한 작품이므로 저자가 인도하는 길로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것에 대해 저자도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이왕이면 긍정적이고 교훈을 줄 수 있는 결말로, 많은 사람들이 수긍하며 희망을 엿볼 수 있기를 바랐던 것 같다. 결말을 향해 가면서 그런 저자의 뜻을 간파해서 그런지 어떠한 일에도 놀라지 않았으며, 그것이 삶의 흐름이라는 순종적인 태도로 홍루몽의 이야기를 받아들였다.

 

  보옥이 현세에서 복을 누리며 살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완벽한 세대교체가 이뤄질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가세는 기울어가고, 사소한 것부터 큰일까지 많은 사고가 일어나며 가족들의 죽음이 연달아 일어났다. 그런 상황에서 보옥에게 기대를 걸 수 없으니, 앞으로 가씨 집안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졌다. 가씨 집안의 분위기는 다시 살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암울했다. 대부인을 따라 원앙도 따라 죽고, 어른들이 집을 비우고 있는 사이 집안에 도둑이 들었다. 물건만 훔친 것이 아닌 묘옥스님을 납치해 못된 짓을 하고, 왕희봉도 병을 이기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다.

 

  묘옥스님이 납치 되어 소식도 없자 석춘은 출가의 뜻을 비친다. 그런 가운데 보옥은 정신을 놓았다 차렸다 하는데, 보옥 또한 현세에 미련을 두지 않으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통옥령을 얻어 태허환경을 경험한 뒤였다. 보옥이 갑자기 몸이 안 좋아져 생사를 오락가락 할 때에 웬 스님이 찾아와 구슬을 전해주며, 구슬 값으로 만 냥을 내놓으라고 한다. 그 사이에 보옥은 태허환경에 이르러 죽은 가족들을 만난다. 다시 목숨이 살아난 보옥은 그 일로 인해 현세의 물욕이 다 쓸데없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가정의 명령으로 과거시험을 봐야 했기에 잠시 정신을 차린 듯 열심히 공부를 하기도 한다.

 

  가정은 대부인을 비롯한 대옥의 시신을 가지고 강남으로 가는 길이라 집안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남은 식구들에게 집안일을 맡겼는데, 욕심에 눈이 멀어 희봉의 딸 교저에게 잘못된 혼사를 이어주려는가 하며, 놀음과 주색잡기에 정신이 팔려 있는 큰 댁 식구들에 의해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기도 한다. 더 이상 일이 잘못되려야 잘못 될 수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보옥과 가란은 나란히 과거에 급제한다. 좋은 성적으로 급제한 보옥은 그 길로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사라진다. 다행히도 보옥과 가란이 나란히 합격한 것을 황제가 원춘 귀비의 식구임을 알아보고 갸륵히 여겨 가사의 죄를 용서함과 동시에 몰수 되었던 재산까지 돌려준다. 안 좋은 일만 일어나 흉흉하던 가씨 집안에 조금씩 화기가 돌고 제자리를 찾으려는 움직임이 일어난 것이다.

 

  가정은 어머님의 시신을 안치하고 돌아오던 중에 구 소식을 들도, 보옥의 마지막 모습을 보게 된다. 그 모습을 보고 보옥이 하계로 내려온 중이라는 것을 깨닫고 식구들에게도 보옥의 존재를 단념시키지만, 이미 보옥의 아이를 가진 보채와 왕부인, 습인은 슬픔을 가눌 길이 없었다. 보옥 자신이 그렇게 될 줄 알고, 식구들에게 여러 말은 해 준 것이 현실이 되면서 보옥이 빠진 가씨 집안은 예전의 부귀영화를 되찾아가고 있었다. 그 사이에 많은 일들이 있고, 사랑하는 식구들과 헤어지는 일도 있었지만 남겨진 식구들이 앞으로의 생을 잘 이어갈 거라 생각한다. 세상의 인연은 억지로 된 것이 아니고, 이미 정해진 이치에 따라간다고 하니 아쉬우면 아쉬운 대로 흐뭇하면 흐뭇한 대로 순리에 따라야 할 것 같다.

 

  조설근이 완성하지 못한 이야기를 고악이 이어 썼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그럼에도 책의 말미에는 가우촌을 통해 조설근 선생을 등장시켜 이 이야기를 소설로 써달라는 익살을 남긴다. '부질없는 이야기'라는 것과 '인생의 허무를 찔러 놓았다.'며 소설을 마무리 하고 있기에, 나 또한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마치 한 편의 긴 꿈을 꾼 것 같은 착각이 일 정도로 홍루몽의 이야기는 그렇게 마무리 되었다. 방대하고 거대한 이야기 속에는 사람들이 중심이었고, 그네들의 삶이 그대로 녹아 있었다. 그것이 빠졌다면 이 책을 읽는데 흥미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고 끝까지 읽을 수 없었을 것이다. 어쩔 때는 너무 깊숙이 내 안으로 들어와 그들의 희로애락이 힘겨울 때도 있었지만, 잘 마무리를 하게 되어 나름 뿌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한 호흡에 읽었다면 전체적인 맥락을 잘 이해할 수 있었을 거란 아쉬움이 남는다. 장편을 한 호흡에 읽는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알기에 앞으로 읽게 될 또 다른 장편들은 이렇게 끊어서 읽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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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졸업식 나를 찾아가는 징검다리 소설 3
요코사와 아키라 지음, 이경옥 옮김 / 생각과느낌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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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예전에 우연히 ’나를 찾아가는 징검다리’ 시리즈를 중 한 권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을 읽고 난 뒤 성장소설에 대한 애정이 급격히 상승했고, 성장소설이라는 타이틀만 달고 있어도 사족을 못 쓰고 달려들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정작 ’나를 찾아가는 징검다리’ 시리즈는 못 읽고 있었는데, 우연히 서점에 갔다가 책을 발견하곤 지인을 졸라 구입했다. 책을 묵혀둘 겨를도 없이 집에 오자마자 책을 펼쳐 밤이 늦도록 읽고는 따뜻해지는 마음을 한참동안 부여잡고 있었다. 이래서 내가 성장소설을 좋아하는 거라며 책장에 꽂힌 다른 성장소설을 힐끔거리기도 했다.

 

  성장소설을 읽을 때마다 내가 같은 10대로서 공감할 수 있을 때 이런 책을 만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한다. 정작 내 마음을 울리는 책보다 어려운 세계문학과 국내문학을 주로 읽은 터라, 기억에 남는 성장소설을 읽은 기억이 없다. 그때의 아쉬움을 달래고자 이제야 성장소설을 열심히 읽는지도 모르겠으나 나의 유년시절에 대한 동경도 어느 정도 자리하는 것 같다. 다시 돌아가라고 하면 손사래를 치고 거절하겠지만 10대의 고뇌와 풋풋함이 종종 그리울 때가 있다. 이 책에 나오는 유코도 자신에게 닥친 현실과 존재감 때문에 힘겨워 하고 있었다. 학교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나오고, 밥을 먹을 수 없을 정도로 강박증이 심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학교를 나가는 것이 두려워 집에서만 보내게 되었다. 그런 유코를 이해해 줄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나 같아도 학교에 가기 싫다고 가지 않는 유코를 보며 겁쟁이라고 놀렸을 것이다. 하기 싫은 일은 지금도 실컷 피하면서 유코에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 싶지만, 그런 힘겨운 시간을 모두가 다 거쳐 왔다는 자부심이라기엔 뭔가 석연치 않다. 유코의 고민을 진정으로 이해한 후에 학교를 나가지 않는 것도 나가는 것도 힘들다는 것을 말해주는 사람을 통해 나도 학교를 나가는 동안 힘들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많은 인물이 등장하지 않고, 온통 유코의 내면으로 이루어진 소설을 읽는 동안 마치 유코가 나인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고민의 색깔이 다를 뿐 유코와 내가 고민하고 있는 것은 앞으로 펼쳐진 삶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코가 학교에 나가지 않자 주변에서는 걱정스런 시선으로 인생을 망치고 말거라는 말만 해댔다. 유코의 진심은 묻지도 않은 채(말할 생각도 없었지만) 집에서 은둔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아주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엄마랑 단 둘이 살고 있는 유코에게 엄마를 힘들게 하지 말라는 말들이 들려와도 유코는 도저히 학교에 나갈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이런 두려움을 오랫동안 안고 평생을 그렇게 살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단지 자신의 말을 누군가 귀 기울여 주고 이해해주길 바랄 뿐이었다.

 

  중학교 2학년 2학기 때부터 학교에 나가지 않은 유코에게 새 학년이 시작되면서 새로운 담임선생님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유코가 결석할 때도 유코를 회유하려 선생님이 찾아오긴 했으나 유코는 선생님과 마주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 새로 온 선생님은 다른 선생님과 좀 달랐다. 독특한 웃음 때문에 크큿 선생님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유코에게 왜 학교를 나오지 않느냐, 무엇이 고민이냐는 질문 같은 건 전혀 하지 않고, 교과서를 던져주면서 필요 없으면 재활용 하라는 둥, 배탈이 났다며 화장실을 이용하겠다고 불쑥 찾아오는 둥, 선생님이라고 생각되어지지 않는 행동만 하고 있었다.

 

  그런 선생님을 바라보면서 유코는 조금씩 호기심이 일었다. 학교와 공부 얘기는 일체 꺼내지 않은 채 매주 화요일에 찾아와 엄마와 잠깐 이야기 하고 가는 선생님을 보면서 어쩌면 자신을 이해해줄 수 있는 분이라는 기대까지 한다. 그런 날들이 이어지자 유코는 크큿 선생님의 작은 배려로 인해 하나씩 자신을 깨치고 나온다. 어느새 선생님과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같이 밤바다를 보기도 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내면에 있는 이야기를 하게 되고, 학교에서 받은 상처를 조금씩 치유하게 된다. 온통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는 사람들만 존재한다고 생각했는데, 크큿 선생님은 유코가 마음을 열게 만들어 주었고, 유코의 시선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아픔을 공감할 줄 알았다.

 

  유코는 여전히 학교에 나가지 않았지만, 크큿 선생님으로 인해 세상을 향해 한 발짝씩 내 디딜 수 있었다. 유코 혼자 졸업식을 하던 날, 진심으로 자신을 위해 눈물을 흘려주는 크큿 선생님을 통해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알아 간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 자신과 좀 더 가까워지고 많은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단출하지만 자전거를 타고 바닷가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조금씩 건강해지려는 유코를 보면서, 변화를 이끌어준 크큿 선생님과 묵묵히 기다려준 엄마, 또한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한 발짝씩 내미는 유코가 보기 좋았다. 학교를 나가지 않은 것에 대해 비난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유코에게는 큰 힘이 되었을 거라 생각한다.

 

  유코가 세상을 향해 건강한 발걸음을 내딛는 것을 보면서 유코의 내면을 낱낱이 봐와서인지 괜히 내가 다 뿌듯해졌다.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며, 진정으로 이해해주는 사람이 한 사람만이라도 있다면 겁낼 것이 하나도 없다는 자신감까지 생겼다. 한편으론 유코처럼 등교거부를 하며 내면과 싸우고 있는 상처받은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그들을 모두 보듬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틀에 박힌 교육제도로 아이들을 가두지 않으며, 학교가 생존을 위한 전쟁터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아이들이 출발선에서 조금 늦었다고 해서 결코 패배자가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 자신을 진정 사랑할 때 세상을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된 유코처럼, 아이들에겐 어른들의 관심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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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 가족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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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창한 봄 날씨에 따스한 바람까지 살랑거리니 마음이 싱숭생숭 해졌다. 발길 닿는 데로 조금이라도 걸어볼까 하는 마음도 잠시, 집이 가까워지니 돌아다니는 것 자체가 귀찮았다. 봄바람이고 뭐고 침대에 널브러져 있는데, 사방이 책으로 둘러싸여 있는 방 구조 때문에 책 읽는 것 이외엔 달리 할 것이 없었다. 마침 읽으려고 빼 놓은 <고령화 가족>이 눈에 띄어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그대로 책을 읽었다. 옷을 갈아입었을 때는 책을 다 읽은 뒤였고, 하릴없이 밖을 돌아다닌 것보다 소설 한 편을 읽은 것이 더 나았다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소설의 시작은 궁지에 몰린 48살의 오인모란 사내로부터 시작되었다. 10년 전에 찍은 영화 한편 때문에 빈털터리가 된 그는 마지막 수단으로 일흔이 넘은 엄마네 집으로 들어간다. 엄마 집에는 이미 50이 넘은 문제아 형이 얹혀살고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중학생 딸을 데리고 온 여동생 미연까지 합세해 24평 좁은 아파트에 다섯 식구가 살게 되었다. 모두 성공해서 돌아와도 시원찮을 판에, 전과자인 큰 아들과 영화를 말아먹고 신용 불량자가 된 둘째 아들, 바람피우다 이혼당한 막내딸까지 동네 창피할 정도로 가족력이 화려했다. 그런데도 노모는 세 남매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고, 힘들 때일수록 잘 먹어야 한다며 매 끼니마다 고기반찬을 내놓는다.

 

  그런 살풍경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감독(영화 한편 때문에 붙은 별명)과 오함마(문제아 형)는 매일매일 집에서 빈둥거렸고, 먹을 것 가지고 다툼질하고 가족애라곤 하나도 느낄 수 없는 생활을 이어나갔다. 조카인 민경도 제멋대로였고, 미연은 카페를 꾸려 나가느라 얼굴 마주하기도 힘들었다. 그들의 엄마만이 화장품을 팔며 꼬박꼬박 자식들의 끼니를 챙겨줄 뿐이었다. 이 우울한 가족의 평균연령은 49세. 서로에게 애정을 가질 수 없다면 최소한 피해는 입히지 말아야 할 텐데, 그들이 일으킨 사건 또한 가관이었다. 오감독은 민경이 담배 핀다는 것을 빌미로 용돈을 뜯어내질 않나, 오함마는 조카의 속옷을 보며 자위를 하다 창피를 당하고, 미연은 카섹스를 하다 오함마에게 들킨다. 구성원 제각각이 만들어 낸 모습은 그야말로 암울하고 우울했으며, 이런 가족 이야기를 읽어 무얼 하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럼에도 책을 놓을 수 없었던 이유는 저자가 만들어 낸 언어의 유희와 나름대로 특징을 가지고 있는 가족 구성원, 그런 와중에서도 등장하는 헤밍웨이 때문이었다. 저자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할 때마다 얼굴 표정으로 그 사람을 파악했는데, 가령 형사의 얼굴엔 '털어서 먼지 안 나는 놈 못 봤다' 라든가 민경의 친구 얼굴엔 '죄송하지만 저도 성질 좀 있거든요'라며 특징을 표현해 냈다. 또한 수거함에서 주워온 헤밍웨이 전집을 읽는 오감독을 통해, 무언가 어울리지 않는 문학세계를 인도하면서도 우리네 삶과 결부시키는 것에 또 다른 매력을 느꼈다. 무엇보다 이런 막장가족일지라도 추이를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것은 누구 하나 반듯하지 못했기에, 그들이 삶을 포기한 채 살아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도저히 이 소설을 용납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모습이 좀 구질구질할 뿐 나와 별반 다를 게 없는 그들이 정말 별 볼일 없이 살아간다면, 꽁꽁 숨겨놓은 내면의 절망감이 뭉텅뭉텅 쏟아져 내릴 것 같았다.  

 

  어쩌면 '애초부터 불가능했던 해피엔딩 꿈꾸면서' 살아간다는 오감독의 말처럼, 그 꿈을 놓고 싶지 않은 나의 기대감으로 소설의 끝을 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오감독을 비롯한 가족들은 최악의 상태에서 재회해 어쩔 수 없이 부대끼며 살고 있었고, 점차적으로 밝혀진 가족력은 웬수 같은 형제일지라도 그나마 핏줄이라고 믿고 있던 삼남매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오감독과 오함마는 이복형제였고 미연은 이부남매였다. 오감독은 자신의 가족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했는데, 친형도 아니고 친동생도 아닌 사람들과 살아왔으며, 들춰보고 싶지 않은 엄마의 로맨스까지 알게 되었다. 보는 것만도 답답한 이들의 이야기가 과연 어떻게 마무리되어질지 궁금하면서도, 가능한 해피엔딩을 꿈꾸었던 기대는 갈수록 희미해지고 있었다.

 

  이 가족의 분위기는 민경의 가출로 인해 급물살을 타게 된다. 달랑 쪽지 한 장 써놓고 집을 나간 민경을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방법이 없어 모두 손을 놓고 있었다. 그런 민경을 엄마 미연도 아닌, 밥만 축내는 뚱땡이 오함마가 데리고 들어왔다. 식구들에게 별말 하지 않은 채, 오감독에게만 민경을 찾아 온 대가로 바지사장을 해주다 감옥에 한 번 들어갔다 오면 된다고 했다. 오함마가 그런 행동을 할 거라 생각지 못한 오감독은 무언가 찌르르 하면서도 그것이 가족의 흩어짐과 동시에 애정이 드러나는 시발점이라는 사실을 예견하지 못했다. 오죽하면 사람이 변하면 죽는다고 했던가. 변할 것 같지 않은 오함마가 변화를 주자 복닥거리던 집안은 순식간에 고요해지고 말았다. 미연이 결혼을 해 민경을 데리고 나가자, 민경의 친부가 엄마와 살림을 합쳐 들어왔고, 급기야 오함마는 한 편의 첩보영화 스토리를 들려주더니 해외로 떠나버렸다.

 

  오감독은 형제가 떠난 집에서 평소와 같은 일상을 지내다 오함마가 뒤통수를 치고 간 폭력배에게 죽지 않을 만큼 얻어맞았다. 그 일로 더 이상 오감독에게 남은 것은 없다고 생각할 찰나, 이민 갔던 대학 후배에게서 걸려온 전화 한통으로 그는 다시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또한 오함마에 대해, 콩가루 같은 자신의 가족에 대해 알 수 없는 감정이 샘솟았다. 도저히 일어설 수 없을 것 같던 50을 앞둔 사내에게 연인이 찾아오고, 포르노일지언정 일거리가 생겼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던 해피엔딩'을 가능한 해피엔딩으로 만들기에 충분한 사건이리라. 오감독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식구들 나름대로 각자의 행복을 찾아 떠났으니, 남들이 손가락질 하는 실패한 인생을 살아왔더라도 남겨진 삶은 똑같지 않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책 속의 주인공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의지대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의지와 상관없이 살아가다 보니, 어느새 이만큼 와버린 자신의 모습에 놀랄 때가 많다. 오감독이 진짜 삶은 지금부터라고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느꼈던 것처럼, 막장가족보다 더한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삶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싶다. 막장가족보다 덜 한 상황에 처해있는 사람이라면 말해 무엇하리. 진짜 삶은 지금부터다. 그러니 힘을 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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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상자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어른을 위한 동화 18
한강 지음, 봄로야 그림 / 문학동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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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지인을 만나러 시외로 나갔다. 지인이 한 시간 가량 늦어진다는 연락을 받고 근처에 있는 서점으로 갔다. 지방 소도시에 살다보니 대형서점을 만나기도 힘들어 오히려 책 볼 시간이 생겨 잘됐다 싶었다. 세계문학을 먼저 둘러보고, 자연스레 국내문학을 둘러보다 <눈물상자>라는 책을 발견했다. 책이 얇아서 눈길이 갔고(서점에서 읽기 좋기에), 저자가 한강이어서 관심이 갔다. 그 자리에 서서 책을 읽고 있노라니, 곧 지인이 도착했는데 도리어 덜 읽었다며 핀잔을 주고 책을 마저 읽었다.

 

  어른을 위한 동화라고 해서 더 끌렸고 끝까지 읽고 싶은 욕구가 솟구쳤는지도 모르겠다. 예전엔 어른을 위한 동화 타이틀만 달고 있어도 질색을 했는데, 요즘엔 세속에 찌든 나를 발견해서 그런지 종종 직접 찾아 읽곤 한다. 동화를 읽는다고 해서 순수한 마음이 생길 리 만무하지만 무언가 내가 잊고 있던 감정을 끌어내주는 것에 감사하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서점에서 마주친 <눈물상자>가 적절한 시기에 다가와준 책 같았다. 제목을 보고 나에게 눈물이란 어떤 의미일까를 생각하기보다, 눈물이 적은 편은 아니라며 어떠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을지에 대해 더 초점을 맞췄다. 아니나 다를까 책 속에는 눈물이 너무 많은 사람과 눈물이 없는 사람들이 대조적으로 등장하고 있었다.

 

  어떤 마을에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을 흘리는 한 아이가 살고 있었다. 눈물이 많다는 이유로 친구들과 가족들에게조차 외면당한 아이는 늘 혼자였다. 아이는 갓 돋아난 새싹을 보면서도, 언덕 너머에서 흘러든 피리 소리를 듣고, 키우던 개가 새끼를 낳는 것을 보면서 알 수 없는 눈물을 흘렸다. 자신이 흘린 눈물 때문에 혼자인 아이는 늘 외로웠지만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눈물을 사들이는 아저씨가 아이의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 그 아저씨는 오랜 세월동안 여러 종류의 눈물을 모으고 있었는데, 아이의 순수한 눈물을 받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이는 눈물이 나지 않았고 아저씨와 함께 온 '파란 새벽의 새'를 보자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힌다. 아저씨는 아이의 눈물 받기를 포기하고 눈물을 팔러 간다며 떠나려 하자 아이도 그 아저씨를 따라가게 되고, 거기에서 눈물을 흘리지 못하는 한 할아버지를 만나게 된다.

 

  눈물을 사려는 할아버지는 눈물이 나지 않아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었다.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가족들에게조차 외면당한 할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는 것이 소원이어서 눈물 파는 아저씨를 불러들인 것이다. 눈물 파는 아저씨에게는 여러 종류의 눈물이 있었는데, 할아버지는 그 눈물을 모두 사서 마신 후 오랜 세월동안 응어리졌던 마음을 눈물로 쏟아낸다. 이내 마음이 후련해진 할아버지는 눈물 파는 아저씨가 보여준 눈물 그림자를 통해 어릴 때 어머니의 죽음으로 눈물이 말라버린 사실을 깨닫게 된다. 할아버지는 그제야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러 떠나게 되고, 그 모든 것을 지켜본 아이는 눈물의 의미를 새롭게 깨닫게 된다. 사람 각자마다 눈물 그림자가 있다는 것과 눈물 흘리는 것에 강요를 당한 사람들은 그림자가 흘리는 눈물이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할아버지가 그랬고, 눈물을 파는 아저씨도 보이는 눈물이 없는 축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아이는 그림자를 통해 자신이 흘리는 눈물에서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게 되었다. 강인한 빛깔을 지닌 눈물이 필요하며 단련된 시간이 필요하다는 아저씨의 충고로 인해 아이는 용기를 얻었다. 이유 없이 눈물을 흘리는 것에 더 이상 자책하지 않게 되었고, 눈물에 숨겨진 많은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준 경험에 감사했다. 또한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고 집으로 돌아간다. 아이는 눈물을 많이 흘린다는 이유로 외로움을 느끼고, 존재감을 상실했지만 눈물을 파는 아저씨를 만나고, 눈물을 못 흘리는 할아버지를 만나면서 새로운 삶을 얻게 되었다.

 

  눈물의 종류는 너무나 많지만 나약함의 상징이라고 못 흘리게 된 눈물과 상처로 인해 숨겨진 눈물이 얼마나 많은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되었다. 눈물을 흘리지 못하는 것에 대해 감정이 메말랐다고 치부해 버릴 것이 아니라 좀 더 포괄적인 의미에 눈물을 염두에 두며 왜 그런지 이유를 찾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흘릴 눈물에 슬픔과 고통의 눈물보다 기쁨의 눈물이 더 많았으면 하는 바람이 일지만, 그것 또한 살아가다 보면 우리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니기에 어떠한 눈물이든지 자연스레 나오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 같다. 이 동화를 통해 나에게는 어떠한 눈물이 숨겨져 있으며, 그림자가 흘리는 눈물이 어떤 것일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최근에는 슬픔의 눈물을 좀 많이 흘렸는데, 좀 더 건강한 눈물로 채워야겠다는 다짐과 함께 감정에 더 자유로울 필요성도 느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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