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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6 - 양장본 ㅣ 조정래 대하소설
조정래 지음 / 해냄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4월에는 읽다만 장편소설을 읽기로 하고, 첫 번째로 <홍루몽>을 완독했다. 4권남은 책이어서 빨리 읽을 수 있었지만 <홍루몽>을 읽고 나니 자신감이 붙어 <아리랑> 6권을 꺼내들었다. 5권의 리뷰를 보니 역시나 우울해지는 소설의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잠시 쉰다는 것이 4년 동안 방치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정래 작가의 장편을 다 읽고도 유독 <아리랑>만 독파하지 못해 늘 애가심으로 남아 있었는데, 벌써부터 마음이 홀가분해지는 기분이다. 책 내용이 유쾌하지 못하더라도, 5권까지 읽은 과정이 기억나지 않더라도 다시 꺼내들었다는 사실에 스스로에게 용기를 부여해 본다.
오랫동안 읽기가 끊겨 버린 책이라도 읽다보면 신기하게도 기억이 난다는 것을 <홍루몽>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아리랑>은 <태백산맥>과는 달리 인명사전이 없어 걱정이 앞섰는데, <홍루몽> 덕분에 걱정을 덜게 되었다. 거의 백지 상태에서 다시 읽기를 시작했으나, 6권을 읽고 어느 정도 전체적인 분위기의 틀을 잡을 수 있었다. <아리랑>을 읽으니 해외문학을 읽느라 번역체에 익숙해져 있고, 국내소설을 읽더라도 젊은 작가들의 현대소설이 대부분이어서 문체의 아름다움을 느낄 틈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 조정래 작가에 반하게 된 것도 단편속의 군더더기 없는 문체 때문이었는데, 4년 만에 다시 저자의 문체와 조우하게 되니 그때의 감동이 되살아났다. 더불어 오랜만에 만끽해보는 우리 언어의 수려함에 소름이 오소소 돋을 정도로 만족해하며 책을 읽어나갔다.
6권은 총 4부로 이루어진 <아리랑> 2부의 마지막 책이었다. 5권에서 땅을 뺏긴 농민들이 만주로 떠나는 것을 보고 한탄했던 것으로 보아, 6권에서 변화된 동태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일제 감정기가 36년 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이제 10년째를 맞이하는 6권이 답답하기도 했다. 나라를 잃은 설움은 절정에 이르러 3·1 만세 운동을 배경에 담고 있었지만, 앞으로 16년이 흐른 후에 해방될 거라는 사실을 혼잣말로도 할 수 없었다. 들불같이 일어나 전국을 넘어 해외까지 강타한 만세 운동 앞에서 숙연해짐은 물론, 우리 민족의 한이 서려있어 쉽게 간과할 수 없었다. 그렇게 들고 일어난 후에 일본이 어떻게 보복을 가할 지 뻔히 알면서도 일어설 수밖에 없는 그들의 고충을 과연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까?
저자의 대하소설을 읽을 때마다 감탄하곤 하는 것은 역사의 큰 틀과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민중의 세세함을 표현해 내는 역량이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만들어 놓은 수많은 가상인물과(우리가 기억하지 못할 뿐, 그들은 분명 존재했던 사람들이었다.) 실존인물들이 뒤섞여 등장하는 것은 간접경험에 생생함을 부여해 주는 것이었다. 3·1 만세 운동의 중요한 사건으로 역사 속에 묻혀있던 사람들의 등장이 색다르게 다가왔다. 늘 고달픈 농민들의 삶이나 일제 앞잡이들의 이야기만 읽다 보니, 그들의 등장으로 인해 아직 조선이라는 나라는 사라지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이 독립에 힘쓰고 있다는 사실에 용기가 샘솟았다. 3·1 만세 운동이 전국에서 일어난 만큼 여러 장면을 통해 정황을 살펴보게 해주었고, 일본과 만주, 상해 등 해외에 흩어져 있는 조선 사람들의 삶을 파고들어 속속들이 전해 해주었다.
인물 사전이 없었기 때문에 각지에 퍼져있는 인물들의 등장이 당황스럽기도 했다. 너무 오랜만에 읽은 책이었고, 기억에 남아 있을 리 만무했으므로 대화나 저자의 설명을 통해 추측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속 시원히 그들의 행적을 되짚어 볼 수 없었다고 해도, 흐름을 익힐 정도는 파악이 되어서 마치 오랫동안 헤어졌던 이웃을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송수익, 공허 스님, 장칠문, 수국, 방영근, 양치성 등등 역사의 인물로 기억되는 사람들보다 이들과의 만남이 더 반가웠음은(반갑지 않은 인물들도 있었지만) 더 말할 것도 없다. 거기다 전라도의 사투리가 그대로 녹아들어 읽어나가는데 속도가 더뎌지기도 했는데, 전라도에 살고 있어서인지 그들의 언어가 구수하게 들릴 정도였다.
흩어진 조각들은 조금씩 맞춰지기 시작해 앞으로의 이야기를 읽어나갈 원동력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문학평론가 김철님이 좋은 소설의 미덕은 아주 작은 것들의 섬세한 묘사로부터 나온다고 아리랑을 극찬했던 것처럼, 알려지지 않은 보통 사람들의 묘사가 이 소설을 훌륭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곳곳에서 벌어지는 독립운동은 황폐한 농민들의 삶과 어우러져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었다. 끈끈한 민족애로 뭉친 그들이 있어 현재의 내가 있고, 대한민국이 있다는 사실을 진부하도록 말해 무엇하리. 많은 사람들이 역사를 기억하고 있지 않고, 당시의 고충을 잊어 버렸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정도였다. 나도 마찬가지지만 <아리랑>을 통해 역사의 과거를 간접경험하고, 윗세대들의 고달픈 삶을 통해 현재를 조망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3·1 만세 운동이 6권의 주요 사건인 만큼 그 이후에 일본의 횡포는 더 극심해 졌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대학살이 있었고, 조선 사람들은 이 땅에서 더 살기가 팍팍해졌다. 그러나 조선 사람들이 살고 있는 조선 땅에 일본인이 들어왔다고 해서 수많은 사람들의 움직임까지 제재할 순 업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 땅을 잃고 타지로 나간 사람들, 일본인 지주아래 소작농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출세하려는 사람들 등 그 수많은 사람들이 들썩여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앞으로 그들이 어떤 움직임을 통해 어떤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지 지켜보는 것이 중요하다. 역사를 더듬어 보는 것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에서도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은 앞으로 펼쳐질 삶의 의미가 되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