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일족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5
모리 오가이 지음, 권태민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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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내 책장을 보면서 놀랄 때가 있다고 말하곤 하는데 그 놀람의 종류는 여러 가지다. 첫 번째는 책 욕심으로 인해 읽은 책보다(오로지 내가 소장하고 있는 책으로 봤을 때) 안 읽은 책이 더 많다는 것. 그러다보니 언제 내가 이 책을 들였는지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우연히 다른 책을 통해서 내 책장에서 재발견 하는 경우다. 거기다 한 가지를 더하자면 똑같은 책을 또 사는 어수룩함도 놀람에 포함이 될게다. 모리 오가이 작가의 작품을 바로 손에 들고 읽을 수 있었던 것은 내 책장에서의 재발견 때문이었다. 히라노 게이치로의 에세이를 읽다 또 다시 언급된 모리 오가이를 보며 그 순간 바로 책장에서 이 책을 꺼내들었다. 책장에 들인지 꽤 됐음에도 히라노 게이치로의 책을 보면서 내가 궁금해 하던 그 작가의 책이라는 사실을 내내 잊고 있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 순식간에 이 책을 읽어 버렸다. 아무런 계기도 없이 그냥 읽어볼까 하고 책을 꺼내들었다면 언제 다 읽을 지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히라노 게이치로를 통해 꽤 오래전부터 궁금해 하던 작가였고 다른 책에서도 그의 단편에 관한 이야기가 종종 언급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내면서 이번이 기회라는 것을 간파했는지도 모른다. 그런 갈증이 오랫동안 묵혀 빨아들이듯 책을 읽어나갔다. 오히려 히라노 게이치로의 에세이는 잠시 제쳐두고 이 책을 먼저 읽었고, 이 책으로 인해 일본 문학이 궁금해 두툼한 다자이 오사무의 책까지 꺼내들었다. 거기다 욕심까지 더해져 가와바타 야스나리 책까지 주문하고 말았다. 상당히 충동적인 행보가 아닐 수 없으나 그만큼 이 책이 오랜 갈증을 해소시켜 주었고 나름 좋았기에 이런 행보도 순식간에 이뤄진 게 아닌가 싶다.

 

  총 네 편의 단편 중 다른 책에서 언급이 많이 되었던「무희」와「기러기」가 가장 궁금했다. 책을 순서대로 읽는 걸 좋아해 바로 그 단편들로 가지 않고 착실하게「아베 일족」부터 읽어 나갔다. 자신이 따르는 무사가 죽으면 할복으로 함께 따라죽는 무사들의 이야기에 절대적인 공감도 할 수 없었고 그들의 이름이 헷갈려 집중력이 떨어졌다. 하지만 무조건 이해할 수 없다고 무심코 넘겨버릴 수도 없었다. 그 당시의 문화와 풍습을 이해까지는 아니더라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역사의 한 부분을 관찰하는 느낌이 들어서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명예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버리고 명예롭게 죽지 못했다고 수군대고, 사소한 실수와 오해가 한 가족의 몰살을 야기하는 이야기에서 비극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절대 공감할 순 없지만 당시의 처지와 분위기를 무시할 수 없었던 사람들의 비극을 말이다.

 

  「무희」와「기러기」는 조금은 신파라고 느낄 정도의 결말을 만난 기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무희」는 독일 유학시절이라는 배경의 신선함은 있었지만(저자의 경험이 바탕이 된 탓도 있겠지만 당시에도 그러한 배경으로 쓰인 작품은 신선했을 것 같다.) 성공을 위해 자신의 아이를 가진 여자를 버리고 귀국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는 절망의 순간에서 딱 멈춰버린 듯 했다. 그 모든 사실을 알고 정신을 놓아버리는 여자. 태어날 아기도, 여자도 지키지 못한 채 일본으로 돌아오는 남자의 이야기가 순수한 사랑으로 순화시키기에는 무리가 있었다는 뜻이다. 거기다「기러기」는 여주인공의 섬세한 심리변화는 흥미로웠지만 고리대금업자의 첩이라는 사실, 첩을 들여놓고도 뻔뻔하게 아내에게 거짓말하는 남편, 그런 남편에게 순종하고 고마워하다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되지만 엇갈림으로 인해 고백조차 못하고 어긋나버리는 여주인공. 우연히 던진 돌에 목숨을 잃은 기러기가 등장함으로 인해 그간 공들여 읽고 있던 이야기와 분위기가 한 순간에 찬물을 끼얹듯 끝나 버렸다. 그래서 신파 같은 느낌이 들었다는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흡인력만은 대단해서 저자의 다른 작품을 더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국내에 번역된 작품 중에 읽을 만한 작품이 없어 다른 일본 작가의 책으로 그 아쉬움을 달래고자 충동적으로 다자이 오사무의 책을 꺼내고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책을 주문했던 것이다.

 

 

  마지막에 실린 짤막한 단편「다카세부네」는 이 소설집의 마무리는 하는 느낌이 들었고, 유배되어 가는 죄인이 아니라 마치 이승을 떠나 다른 세계로 가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죄인, 딱 잘라 결론 낼 수 없는 진실, 그에 반해 희망에 부풀어 있는 인물로 인해 더욱 더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쓰인 이 작품들을 읽으면서 이국적이면서도 당시의 배경이 잘 녹아 있는 작품이라 공간이동을 한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역시 일본 문학도 고전이 더 좋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 흥분이 언제 가라앉을지 모르겠으나 당분간은 일본 문학이든 또 다른 나라의 문학이든 고전에 관한 관심이 진득하게 갔으면 하는 바람까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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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1-31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상하게 저는 일본, 중국문학 고전보다는 서양 쪽을 선호해요. 그래서 책 좀 읽는 사람들도 한 번쯤 읽었을 <삼국지>도 안 읽어봤어요. 오늘자 중앙일보에 삼국지 번역에 관한 기사에 반짝님의 글을 읽고나니 동양고전 쪽으로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

안녕반짝 2015-02-01 07:51   좋아요 0 | URL
저도 <삼국지>는 여전히 읽지 않았는걸요. 전 웬만한 장편소설은 다 소장하고 있는데 읽지 않은 책이 더 많고 특히 전 역사소설은 굉장히 약합니다. ㅜㅜ 전 해외소설을 더 좋아하는데 예전에는 나라별로 많이 읽긴 했는데 요즘은 그냥 책 속에서 많이 언급된 작품들 위주로 읽는 것 같아요.^^
 
지우개
권윤주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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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에 책장 정리를 하다가 우연히 꺼내들었다. 저자의 책을 모두 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책이 덩그러니 안 읽은 책장에 꽂혀 있었던 것이다. 다른 목적으로 책장을 살펴보다 꺼낸 책을 다시 덮을 수 없어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동무 삼아 밥을 먹었다. 밥 한 숟갈 뜨고 눈으로 쓰윽 보며 책장을 넘기는 행위가 오래전부터 있던 규칙인양 그렇게 밥 먹는 속도에 맞춰 책을 읽어 나갔다.

  일러스트로 채워진 책을 읽는다는 표현이 좀 안 어울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글이 현저하게 적기 때문이란 이유보다 그림으로 드러나는 의미들을 읽는다는 의미로 말한 것이다. 처음 이런 종류의 책을 접할 때는 오로지 활자에만 집중해서 금방 읽으니 좋다는 식으로 해석하곤 했는데 몇 번 접하다보니 꼭 글이 없어도 그림에서 전해지는 의미들을 내 나름대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런 의미들이 대단하거나 조리 있게 설명할 수 있는 것들은 아니지만 책을 읽고 보면서 만들 수 있는 나만의 시간이고 나만의 의미로 받아들여도 충분한 것들이다. 그런 의미를 조리 있게 드러내는 건 나의 능력 밖이지만 비스 무리한 느낌이라도 전달하고 싶은 마음에 읽은 책에 대한 리뷰(지극히 개인적인)를 남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저자의 파리 이야기나 뉴욕 이야기가 좋아서 그런 비슷한 책을 기대했지만 이 책에서는 공통된 배경이나 공간이 없이 자유롭다. 그래서 어떤 그림과 글은 이해가 가기도 하지만 갸우뚱 하면서 본 것들도 있었다. 공감을 하기도 하고 의문을 갖기도 하면서 책장을 멈추지는 않았다. 분명 다른 이야기인데 뭔가의 흐름에 이끌리듯 연결고리를 만들어가며 책장을 넘겼던 것 같다. 그러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지우개에 관한 부분을 보면서 잠시 시선이 멈춰졌었다. 지우개로 자신을 조금씩 지워가며 희미해진 자신이 다른 사람들 틈에 섞여 있는 모습을 보는 것. 그런 모습을 갈망하면서도 의도하지 않게 그런 순간들을 맞이했던 기억이 떠올라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존재하지만 존재하고 싶지 않았던 순간. 나는 존재하는데 존재 자체를 무시하는 무리 속에 섞여 있던 순간들. 어쩔 수 없이 지우개로 나를 지워가는 순간에는 그렇게 쓸쓸한 기억들만 떠오르고 말았다.

  그래서인지 저자처럼 ‘지우개는 신기하다.’라고 밝은 의미로만 공감할 수 없었다. 그 문장 속의 저자의 의미는 어떠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여러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을 것 같다. 다만 나에게 와 닿는 의미는 쓸쓸했기에 그런 신기함마저도 슬프게 들렸던 것이다. 또한 필요할 때만 찾아오는 친구 아닌 친구의 이야기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가졌다. 내가 그랬던 적도 있고 내가 당했던 적도 있었던 기억들도 희미하게 떠올랐다. 아무래도 감정이 말랑말랑한 새벽녘에 읽어서인지 낮이라면 지나쳤을 곳에 이상하게 몰입이 되면서 기분이 조금은 감상적이 되어버렸다. 마음가짐과 환경에 따라 책이 다르게 다가옴을 몸소 체험한 순간이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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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푸트니크의 연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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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면 꼭 하루키 책을 들고 간다. 장거리 여행을 할 땐 책 선택에 신중해질 수밖에 없는데 경험을 통해 소음 속에서도 집중이 잘 되는 책이 최고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한껏 욕심을 부려 무겁고 지루하더라고 읽고 있는 책을 늘 들고 갔었는데 한 페이지도 못 읽은 경우도 허다했고 책 선정을 잘못했다는 자책감에 시달리기까지 했다. 하루키 책은 어떤 순간에도 집중할 수 있다는 장점을 발견한터라 과감히 읽고 있는 책을 제쳐두고 이 책을 뽑아서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왕복 6시간의 기차 안에서 느긋하게 음악도 듣고 창밖도 구경하고 멍 때리면서 이 책을 모두 읽어 버렸다.

  하루키 소설은 유명한 작품부터 만나다보니 거부감이 들어(나의 정서와 다름으로 인해) 오랫동안 다른 작품을 읽지 않았다. 그러다 초기작부터 다시 읽어 올라오니 그의 소설 방향도 조금씩 감지되고 차근차근 읽어나간다는 뿌듯함도 생겼다. 원래 이 책을 읽기 위해서는 두 권의 소설을 더 만나야 하지만 도서정가제로 인해 지인에게 부랴부랴 추천 받아 구입한 책이라 어쩔 수 없이 먼저 읽게 되었다. 그래서 해설에서 번역가가 이야기한 다른 작품과의 연계성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없다. 다만 여주인공 스미레가 사라지기 전까지의 내용은 마치 여자 하루키가 쓴 것처럼 섬세해서 17세 연상의 여인 뮤를 사랑하는 동성애를 주제를 하고 있는 이야기임에도 거북하지 않게 빠져들 수 있었다.

  하루키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성(性)에 관해서 조금만 포장하거나 묘사가 덜 한다면 거부감이 덜 들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꼭 감추는 게 능사는 아니지만 나의 상식에 어긋나는 표현과 생각들을 드러낼 때의 불편함은 어쩔 수가 없다. 현실에서는 그러한 소식들을 질리게 들으면서도 유독 문학작품에서는 좀 더 포장되었으면 하는 이상한 바람이 있는 것이다. 그래도 그간 하루키 소설에서 만나 온 거부감보다는 강도가 약해서 불편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동조할 수 없는 동성애 이야기에도 오로지 여주인공의 내면에 안착해 그녀를 따라갔을 정도였으니까.

  그런 그녀가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한 해외출장 겸 여행에서 갑자기 사라져 버리자 유일한 이성 친구가 그 이야기를 이어준다. 뮤의 부탁으로 스미레가 사라진 그리스의 섬까지 간 그는 스미레를 좋아하고 있지만 그녀의 사랑 또한 존중하는 이였다. 그 모든 사실들을 감지하고 있기에 갑작스럽게 그리스의 외진 섬까지는 가는 것도, 그녀의 이야기를 대신 전해주는 것도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입을 통해 들려오는 이야기들이 차분해서 스미레의 행방의 결론에만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이 아니라(물론 그녀의 행방에 대한 결론이 어떻게 날지 몹시 궁금하긴 했지만) 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또 다른 스미레와 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소설이지만 현실에서 일어나는 이야기 같은 착각이 일 정도의 현실감을 유지했기에 스미레가 사라지고 스미레를 찾는 과정에서 환상을 보고 그녀가 다른 세계로 가 버렸다는 사실을 인지하기까지의 과정은 소설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루키의 다른 작품에서 익히 보았던 상세하게 설명할 수 없지만 하루키가 이끄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세계의 존재. 스미레는 그런 세계를 경험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사라졌던 시간동안 누구도 그녀의 행방을 알 수 없어 그간의 이야기는 들을 수 없었지만 꿈처럼 묘사되던 그녀와의 재회에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루키 소설의 묘한 매력은 현실이 아님에도 현실로 받아들이게 되는, 그런 세계가 존재할 것 같은 환상을 갖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야기 속의 다른 이야기를 비유를 들기도 하고 직설적으로 툭 던져놓기도 하는 그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현실의 나는 잠시 잊게 된다. 그리고 소설에 온전히 코를 박고 있다 책장을 끝까지 덮고 나서야 정신이 차려지는 것이다. ‘만약 불완전한 인생에서 모든 낭비가 사라져 버린다면 그것은 불완전함마저도 없어져버리게 되는 것이다.(9쪽)’라는 말처럼 끝이 없는 낭비의 목마름 속을 헤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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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01-30 0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꼭 하루키와 잘 만나고 말겠다...다짐하면서..감사히 읽고갑니다.^^
 
타샤의 어린이 정원 타샤 튜더 클래식 1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음, 타샤 튜더 그림, 엄혜숙 옮김 / 윌북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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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샤 할머니 책은 출간되는 즉시 구입하곤 한다. 그렇게 구입한 책이 내 손에 들어오면 순식간에 읽어내기 바쁜데, 이 책 역시 출간 즉시 구입했음에도 이상하게 집중이 되질 않아 오랫동안 묵혀 두었다. 타샤 할머니의 책 중에서 안 읽은 책이라곤 이 책뿐이라서 책장에 오랫동안 묵혀 있는 게 마음에 걸려 꺼내 읽었다. 시간이 지나면 잘 읽힐 거라 생각했는데 여전히 글은 겉돌았고 타샤 할머니 그림만 눈에 들어왔다. 집중이 그렇게 썩 잘 된 상황이 아니었지만 어찌어찌 끝까지 읽고 해설을 읽다 보니 맙소사! 그 동안 내가 이 책의 의도를 반대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책 제목이『타샤의 어린이 정원』이었으니 이 책에 실린 익숙한 저자의 이름을 보면서도 오로지 타샤 할머니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그래서 타샤 할머니 그림에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이 글을 덧입힌 거라 생각했기에 글이 집중이 되지 않았고 뭔가 자꾸 겉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간 타샤 할머니의 동화책에는 글이 이 책처럼 많지 않았다. 그리고 짤막하더라도 그림이나 타샤 할머니의 일상을 보여주는 사진과 잘 맞아 떨어졌기에 타인의 글이라도 어색함을 느낄 새가 없었다. 그렇게 철저히 타샤 할머니의 시선으로 이 책을 보았기 때문인지 저자의 시와 그림이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림은 따스하기도 하고 환상적이기도 하고 어릴 적 꿈 많은 아이의 모습을 잘 재현한다는 느낌이 충분했다. 그러나 저자의 시는 자꾸 나의 그런 집중을 방해했다.

  타샤 할머니가 저자의 시에 그림을 덧입혔다는 사실을 모른 채 저자의 시가 그림에 억지로 꿰어 맞췄기에 이렇게 어색한 게 아닌가란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길게 쓰지 않아도 타샤 할머니의 의중을 충분히 드러낼 수 있었을 텐데 왜 이렇게 길고 지루할까란 의문만 가지고 있었다. 외국문학을 우리 언어로 옮기다보면 어색한 부분이 있기 마련이고 특히 시는 그런 어려움을 더 가지고 있다고 여기고 있다. 그런 이해를 충분히 하지도 못한 상황에서 그림에 시를 꿰어 맞추고 있다 여겼으니 제대로 읽힐 리가 없었다. 종종 이렇게 그린이와 글쓴이가 다른 경우에 그림과 글이 일맥상통하는 책을 만나는 게 쉽지 않음을 알고 있기에 더 아쉬움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먼저는 이 책의 탄생 배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나의 무지에 있었고 타샤 할머니에 너무 집중 했으며 그린이와 글쓴이가 다르다 하더라도 각기 다른 예술로 지켜봐야 했음에도 그렇지 못한 내 잘못이 크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국내에 출간 된 타샤 할머니의 책 중에서 아직 읽지 않은 책이 딱 한 권뿐이라 더 기대치가 컸기에 아쉬움이 남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큼지막한 책에 그려진 타샤 할머니의 그림은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시도, 그림도 우리의 정서와 다름을 많이 느꼈지만 타샤 할머니의 삶을 여러 권의 책으로 지켜봐서인지 나에겐 익숙할 뿐만 아니라 사랑스럽게만 느껴졌다. 책 속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나의 어린 시절이 저 그림과 같았더라면 참 행복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현재의 행복은 잘 알아차리기 힘들고, 지나 온 과거는 시간이 지나면 미화시키기 바쁘기에 괜한 부러움을 쏟아냈는지는 몰라도 타샤 할머니의 그림은 나에게 늘 그런 행복감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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