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개
권윤주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한밤중에 책장 정리를 하다가 우연히 꺼내들었다. 저자의 책을 모두 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책이 덩그러니 안 읽은 책장에 꽂혀 있었던 것이다. 다른 목적으로 책장을 살펴보다 꺼낸 책을 다시 덮을 수 없어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동무 삼아 밥을 먹었다. 밥 한 숟갈 뜨고 눈으로 쓰윽 보며 책장을 넘기는 행위가 오래전부터 있던 규칙인양 그렇게 밥 먹는 속도에 맞춰 책을 읽어 나갔다.

  일러스트로 채워진 책을 읽는다는 표현이 좀 안 어울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글이 현저하게 적기 때문이란 이유보다 그림으로 드러나는 의미들을 읽는다는 의미로 말한 것이다. 처음 이런 종류의 책을 접할 때는 오로지 활자에만 집중해서 금방 읽으니 좋다는 식으로 해석하곤 했는데 몇 번 접하다보니 꼭 글이 없어도 그림에서 전해지는 의미들을 내 나름대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런 의미들이 대단하거나 조리 있게 설명할 수 있는 것들은 아니지만 책을 읽고 보면서 만들 수 있는 나만의 시간이고 나만의 의미로 받아들여도 충분한 것들이다. 그런 의미를 조리 있게 드러내는 건 나의 능력 밖이지만 비스 무리한 느낌이라도 전달하고 싶은 마음에 읽은 책에 대한 리뷰(지극히 개인적인)를 남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저자의 파리 이야기나 뉴욕 이야기가 좋아서 그런 비슷한 책을 기대했지만 이 책에서는 공통된 배경이나 공간이 없이 자유롭다. 그래서 어떤 그림과 글은 이해가 가기도 하지만 갸우뚱 하면서 본 것들도 있었다. 공감을 하기도 하고 의문을 갖기도 하면서 책장을 멈추지는 않았다. 분명 다른 이야기인데 뭔가의 흐름에 이끌리듯 연결고리를 만들어가며 책장을 넘겼던 것 같다. 그러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지우개에 관한 부분을 보면서 잠시 시선이 멈춰졌었다. 지우개로 자신을 조금씩 지워가며 희미해진 자신이 다른 사람들 틈에 섞여 있는 모습을 보는 것. 그런 모습을 갈망하면서도 의도하지 않게 그런 순간들을 맞이했던 기억이 떠올라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존재하지만 존재하고 싶지 않았던 순간. 나는 존재하는데 존재 자체를 무시하는 무리 속에 섞여 있던 순간들. 어쩔 수 없이 지우개로 나를 지워가는 순간에는 그렇게 쓸쓸한 기억들만 떠오르고 말았다.

  그래서인지 저자처럼 ‘지우개는 신기하다.’라고 밝은 의미로만 공감할 수 없었다. 그 문장 속의 저자의 의미는 어떠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여러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을 것 같다. 다만 나에게 와 닿는 의미는 쓸쓸했기에 그런 신기함마저도 슬프게 들렸던 것이다. 또한 필요할 때만 찾아오는 친구 아닌 친구의 이야기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가졌다. 내가 그랬던 적도 있고 내가 당했던 적도 있었던 기억들도 희미하게 떠올랐다. 아무래도 감정이 말랑말랑한 새벽녘에 읽어서인지 낮이라면 지나쳤을 곳에 이상하게 몰입이 되면서 기분이 조금은 감상적이 되어버렸다. 마음가짐과 환경에 따라 책이 다르게 다가옴을 몸소 체험한 순간이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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