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이 진다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25
미야모토 테루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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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을 읽는 동안 내가 마치 주인공이 되어 대학 4년 동안 테니스만 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대학을 다녀보지 않아 대학생활이 어떤지 직접 피부에 와 닿지는 않았지만, 친구들의 대학생활을 옆에서 지켜보고 함께 대학식당이라든지 학교 행사들을 경험하고 들어서 어렴풋이나마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내가 직접 학업에 뛰어든 게 아니라서 친구들의 학교생활의 깊숙한 부분까지 알 수는 없지만 20대 초반의 치기어리고 어설픈 내면과 부딪히며 그 시절을 보냈던 건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특히나 이성에 눈을 뜨면서 열병처럼 나를 핥고 지나갔던 짝사랑과 첫사랑의 기억들이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나를 지배했었다.

 

  자기가 원하는 학교와 과를 가는 학생이 얼마나 될까? 내 주변에서도 여전히 학교와 학과를 선택해서 가는 사람보다 성적에 맞춰서 가는 학생들이 더 많다. 이 책의 주인공 료헤이도 이런 저런 이유로 처음 생긴 대학에 입학하기로 마음먹었으면서도 등록하기를 망설인다. 그러다 입학절차를 위해 학교에 갔다 자신과 같은 목적으로 온 나쓰코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그리고 그녀 때문에 충동적으로 입학절차를 밟는다. 무엇에 홀린 듯 그렇게 대학 입학을 결정지었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할 뿐, 료헤이가 대학 4년 내내 학업보다 테니스에 집중할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거기다 테니스로 알게 된 친구들과 나름 끈끈한 우정을 맺고 이런저런 일에 휘말리기도 하며, 얽히고설킨 짝사랑의 실태를 알게 되고, 친구의 죽음을 목도하기도 한다.

 

  나 또한 내가 스무 살 적에 친하게 지내고 그네들의 캠퍼스까지 따라가 대학생 아닌 대학생 흉내를 내던 경험을 떠올려보면 피식 웃음만 나온다. 허세보다는 무기력감이 더 지배했었고 친구들의 대학생활이 부럽다기보다는 과연 우리는 더 어른이 되면 무엇일 될까에 짓눌려 있었던 것 같다. 대학을 다니는 친구나 알바로 근근이 생활하면서 방황하는 나나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사실이 놀라웠고 그랬기에 료헤이가 겪는 대학생활에 대한 진부함과 테니스에 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 자신이 의도하지 않게 이런저런 일에 휘말리게 되는 상황에 어느 정도 동질감이 느껴졌다.

그런데 우리 말이야. 그동안 그저 바보처럼 테니스만 했지? 책도 안 읽고 영화도 안 보고 공부도 안 하고 차에 빠지지도 않고 여자아이와 놀지도 않고 그저 테니스만 쳐댔어. 난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나머지 이 년 동안도 철저하게 테니스만 할 거야. 내 앞에 매치포인트가 있다 이거야. 안 그래? (274~275쪽)

 

  료헤이가 가네코의 꼬드김에 넘어가서 테니스부에 들긴 했지만 힘들게 테니스 코트장을 만들고, 맘에도 없던 테니스를 하게 되면서 욕심도 내고 경기에 진지하게 임하는 자세를 보면서 전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또렷한 목표가 있어서 대학에 들어가고 공부를 하고 취업준비를 하는 빡빡한 일정이 아닌 것이 오히려 그들을 더 인간적으로 보게 만들었다. 방황을 해도 대학생이라는 특권일 때 할 수 있는 게 아니냐며 내 스스로를 합리화 시키면서 그들을 바라봤던 게 뭔지 모를 위안이 되었던 것 같다.

 

  료헤이를 비롯한 주변의 친구들이 겪는 일들이 썩 건전하거나 그들에게 큰 영향을 주진 않았지만 테니스를 통해 얻은 건 꽤 많았다. 대학 4년을 버티게 해주었고 그 안에서 소중한 만난 소중한 친구들. 그리고 자신이 짝사랑하던 나쓰코가 점점 멀어지고 있음에도 그녀에 대한 마음을 끝내 지울 수 없었던 일들까지 모두 테니스와 연관이 깊었다. 그랬기에 대학생들의 이야기, 그들의 4년의 기록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드는 이 책을 읽으면서도 마치 내가 그런 삶을 살아온 것처럼 묘한 기분이 들었다. 졸업할 시기가 되고 조금씩 사회로 나아가야 할 상황이 되었을 때 처음 입학했을 때보다 좀 더 세파에 단 듯한 모습조차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료헤이는 아무도 없는 테니스부실로 돌아와 보자기에 싸인 색지를 손으로 살그머니 쓰다듬었다. 그 순간 다쓰미 게이노스케라는 인간의 마음이 료헤이 안에 어둡게 자리 잡고 있던 슬픔을 깨끗이 지워버렸다. 엄청난 맑은 기운이 단숨에 더러움을 흘려보내듯이. (467쪽)

 

  결국 돌고 돌아 나쓰코와의 긍정적인 가능성도 엿볼 수 있었고 은사님으로 인해 마음속에 자리 잡은 슬픔과 더러움이 씻겨나갔던 료헤이를 보면서 그 모든 게 일상적으로 흐르는 삶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그들을 보면서 온전히 동조할 수는 없었지만(타인의 삶을 온전히 동조하는 게 가능할 것 같지도 않지만) 현재의 내 삶도 여전히 흐리고 있으며 아무런 일이 일어난 것 같지 않아 보여도 한 획을 긋고 있음을 깨닫자 괜히 숙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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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나는 없었다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1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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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세상이 그런 거지. 붙어 있어야 할 때는 그만두고, 내버려두어야 할 때는 매달리고. 한순간 인생이 너무나 멋져서 이게 현실일까 믿기지가 않다가, 이내 지옥 같은 고민과 고통 속을 헤매고! 상황일 잘 풀릴 때는 이 순간이 영원할 것 같은데 - 그런데 그렇지가 않지 - 나락으로 떨어질 때는 이제 절대 위로 올라가 숨쉬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잖아. 그런 게 인생이잖니? (25쪽)

 

 

능력 있고 자상한 남편, 나름 잘 키워 온 세 남매가 있는 중년 여성 조앤에게는 이 말이 해당되지 않았다. 막내딸이 갑작스레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영국에서 바그다드로 향하고 사막에 고립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먼 길을 왔던 것처럼 순조롭게 기차가 자신을 안락한 집으로 데려다 줄 거라 의심하지 않았던 그녀는 기차가 연착되면서 일정이 꼬이고, 읽을 책도 소일거리도 없는 곳에서 오로지 할 수 있는 게 생각밖에 없자 기묘한 의심들을 하게 된다.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동창을 우연히 만나고 그녀에게서 이상한 말을 들었던 것부터, 자신이 바그다드로 향했을 때 기차역에서의 남편의 뒷모습, 세 아이들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 등 그 모든 것을 고립된 사막에서 다시 곱씹게 된다.

 

 

생각밖에 할 게 없을 때 수많은 생각이 사람의 머릿속을 헤집다 떠나가며 몇 가지의 생각은 머무르게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의심으로 시작된 조앤의 생각들은 또 다른 의심을 낳게 되고 결국 그녀가 도달한 진실이란 것에 기겁하게 된다. 마치 자신은 온전히 사막 한 가운데 세워두고 영혼이 빠져 나오듯 한 걸음 뒤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니 그간 허울처럼 살아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 조앤이 도달한 결론은 그랬다. 자신에게 다정다감했던 남편이 자신보다 못한 여자와 사랑에 빠졌다는 것. 세 아이들 중 누구 하나도 자신에게 진실하지 못했으며 조앤 또한 자신이 설계해온 삶에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결과물이 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남편과의 결혼생활이, 자식을 기른다는 게 계획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늘 자신의 생각대로 이끌어나가길 바랐던 조앤은 사막 한가운데서 그제야 자신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 모든 일들을 곱씹어 본 후에 자신은 철저히 외로운 삶을 살았고 남편이 하고 싶어 하는 일 하나조차도 못하게 만드는 여자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런 깨달음이 온 몸을 감싸자 어서 집으로 돌아가 남편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사과하고 전혀 다른 사람이 되기를 다짐한다. 사막에서의 기묘했던 의심의 결과물이란 것이 그녀에게 충격적이고 받아들이고 변화하기 힘든 일들이었지만 그곳에서의 굳은 다짐을 잊지 않기로 한 조앤. 그런 조앤의 바람대로 모든 것이 착착 움직여 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지금껏 조앤이 그러했던 것처럼 자신의 뜻대로 인생은 흘러가지 않았고 그간 그녀가 달고 살아왔다고 생각했던 고독과 외로움도 결국 떨쳐내지 못한 채 남편의 충격적인 독백이 이 소설의 결말을 아우른다.

 

 

몇 날 며칠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면 자신에 대해 뭘 알게 될까? (201쪽)

 

 

분명 조앤은 자신밖에 생각할 일이 없는 상태에서 그간의 삶을 돌아보며 새로운 사실을 추측해갔고 진실에 다가갔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자신이 변화하기를 바랐다. 그렇지만 집에 도착하는 순간, 그녀는 예전의 그녀로 돌아오고 만다. 그리고 남편의 독백으로 조앤에게 앞으로 펼쳐질 운명을 어렵지 않게 예감할 수 있게 되었다.

 

 

여행지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의심과 함께 추리를 해가는 그녀를 보면서 내밀한 내면을 들여다 봐왔다고 생각했다. 남부러울 것 없이 중산층으로 살아온 그녀의 내면에 어떠한 사고와 인생론이 담겨 있는지 세세하게 들여다봤다. 하지만 결국 자신이 만든 틀 속에 고립된 그녀를 보고 있자니 혹시 내 삶도 그렇게 되어버리는 것은 아닌지 덜컥 겁이 났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가정을 꾸려나가야겠단 생각과 동시에 내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아야겠단 다짐을 하게 되었다. 특히 허울 속에 나를 가두는 어리석은 일은 하지 말고 순간순간을 진실되게 살아간다면 최소한 조앤처럼 고립은 겪게 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

 

 

에거서 크리스티의 명성은 너무나 익숙하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녀의 작품을 읽어보지 못했다. 그래서 필명으로 발표한 이 작품이 나에겐 첫 작품이다. 추리소설의 여왕으로 불리는 그녀의 기존 작품과 비교할 수 있는 재량이 내겐 없지만, 추리소설로 치부하지 않고 문학적인 요소를 갖추면서도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게 만들었던 이 작품을 통해 그녀의 작품을 두루두루 읽어보고 싶은 욕망이 일었다. 순식간에 읽어버린 작품이었던 만큼 여운이 강하게 남아서인지 필명으로 발표한 다른 작품들도 꼭 완독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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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인생수업 - 지금,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이동섭 지음 / 아트북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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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에게 나는 어떤 존재일까? 보잘것없는 사람, 괴팍스러운 사람, 불쾌한 사람일 거야. 사회적으로 아무런 지위도 없고, 그것을 갖지도 못할, 요컨대 최하 중의 최하급. 그래, 좋아. 그것이 정말 사실이라고 해도, 언젠가 내 작품을 통해 그런 괴팍한 사람, 그런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그의 가슴에 가지고 있는 것을 보여주겠어. (124쪽)

  빈센트의 그림을 좋아하지만 그의 삶에 대한 나의 생각은 스스로 생각한 저 문장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삶의 비극에서 탄생 된 그림은 감탄하게 만들지언정 그의 삶을 위로하기보다 그냥 불행했던 한 사람의 삶으로 치부해버리곤 했다. 간단히 말해 그의 그림과 삶을 밀접하게 접목시키기보다 그림의 탄생 배경만 조금 알려하고 그림 따로, 그의 삶 따로 놓고 보았다는 말이다. 빈센트가 살아 온 삶은 한 사람의 삶이라고 치부하기에 너무 우울했기 때문이었다.

  빈센트의 그림이 좋아서 블로그 이름에까지 그의 이름을 넣었음에도 그간 나는 제대로 그의 삶과 그림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에 관련 된 책을 읽을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들곤 하는데, 워낙 책이 다양한지라 내 마음을 울리는 책을 만나는 일도 드물었다. 그러다 우연히 이 책을 꺼내들었음에도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건, 책이 다양한 만큼 책의 질도, 글쓴이의 열정의 다름을 몇 번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는 동안은 빈센트의 삶을 등한시하던 나의 과오가 조금은 앎과 이해로 전환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먼저는 그에게서 인생을 배웠다는 저자의 접근 방식이 좋았고, 깊이 들여다보니 빈센트는 참 행복한 사람이었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목표를 가진 사람은 성실하지만, 꿈을 가진 이는 행복하다. 가난한 빈센트가 행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꿈을 이루기 위해 매일 열심히 살았기 때문이다. 행복은 일의 결과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얻어진다는 사실에서 그는 처음에 던졌던 질문인 ‘무엇이 내게 행복을 막았는가’에 대한 답을 찾았다. (134쪽)

  작년에 다른 저자의 고흐에 관한 책을 읽을 적이 있었다. 분명 명쾌한 분석과 사실을 근거하고 있음에도 뭔가 글에서 느껴지는 무미건조함을 끝내 지워내지 못했다. 이 책의 저자는 그런 분석과 논리의 정연함이 눈에 확 띠지도 않았고 자신이 프랑스 유학 시절과 국내에서 직장을 다니고, 다시 돌아와 밥벌이를 해야 하는 여러 가지 고충과 일상의 파편들이 때론 생뚱맞게 나열되기도 한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진솔함과 소박함 때문에 빈센트를 바라봤던 저자의 시선도, 그가 배웠다던 빈센트의 삶이 더 피부에 와 닿았다. 빈센트의 삶과 그림이 저자의 인생에 진득하게 녹아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그래서인지 이 책의 제목이 딱 어울렸다.

  무엇보다 저자는 빈센트가 행복했다고 말하고 있다. 스스로 밝히고 그를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도 모두 한결같이 느끼듯이 그는 번듯하거나 타인에게 모범이 되는 삶을 살다 간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방법이 서툴렀을 뿐 자신의 앞가림도 못하면서 더 불행한 사람에게 사랑을 느껴 열정을 불태웠다. 그리고 실연을 당할 때마다 단계를 거쳐 마지막에는 그림으로 치유하고 온 마음을 쏟아 부었으며 그 결과물이 현재 우리가 감탄하며 바라보고 있는 그의 그림들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만 하는 옹고집이었으며 반드시 바로 해야 하는 저돌적인 성향 때문에 가장 힘든 사람은 동생 테오였다. 십여 년 간 형의 이런저런 뒤치다꺼리를 해주었기에 그때는 빛을 발하지 못했지만 빈센트의 바람처럼 영혼을 위로하는 그림들이 탄생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굴곡진 인생을 굽이굽이 살펴보니 비극적이고 불행하다고 느꼈던 부분에서도 그가 얼마나 뚝심 있게 삶을 이끌어갔는지, 행복을 위해 얼마나 부단히 노력했는지 새롭게 알게 되었다. 그 사실들을 새롭게 인지하자 그의 그림이 이전과는 또 다르게 보였다. 마치 붓 터치 하나하나에 사연이 뚝뚝 묻어나듯 빈센트의 영혼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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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베트의 만찬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이자크 디네센 지음, 추미옥 옮김, 노에미 비야무사 그림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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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덧을 겪으면서 음식에 대한 갈망과 회의감을 함께 경험하게 되었다. 음식 냄새가 나를 힘들게 하고 먹는다는 것에 회의감을 느낄 때, 그런 울렁거리는 나의 속과 마음을 달래주는 음식을 만나면 큰 위안을 얻게 된다. 입덧이 조금씩 잦아들고 정말 내 입에 딱 맞는 음식을 만날 때의 그 행복감. 입덧은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지만 입덧을 경험하지 않을 때보다 경험한 후에 음식에 대한 생각이 더 섬세해졌다. 음식이 나를 위로할 수도 있고 세상을 달리 보이게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 임신이 아니었다면 평생가도 느끼지 못할 그런 경험이었다.

  그런 경험을 하고 난 뒤에야 누군가 나를 위해 차려준 음식을 보며 감사할 줄 알게 되었다. 설령 그 음식이 나의 입에 맞지 않더라도 음식을 준비하는 시간과 노력,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바베트라는 프랑스 여인이 마르티네와 필리파 자매의 아버지, 즉 독실한 교파를 일구고 마을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목사님의 100번째(죽은 후의 100번째 생일) 생일에 완벽한 프랑스식을 차리고자 하는 의지를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만 프랑짜리 복권에 당첨됐다는 소식을 듣고 그 돈을 자신에게 쓰기 위해 프랑스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죽은 목사의 100번째 생일상을 위해 모두 써버렸으니 그 요리의 의미가 과연 무엇인지 단박에 이해하기란 불가능했다.

  재작년 성탄절에 친구가 나를 위해 킹크랩을 사준 적이 있었다. 비싸서 자주 먹지 못한 음식이다 보니 늘 먹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하다 직접 먹으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마치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의 행복감을 그때 처음 맛 본 것처럼 음식을 먹으면서 삐져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행복하다고 느꼈던 경험. 그 강렬함은 여전히 잊히지 않는다. 그랬기에 바베트가 만 프랑을 모두 털어서 완벽한 프랑스식 음식을 차렸을 때는 과하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그 음식을 먹는 사람들의 변화를 보면서 어떤 기분일지 어렴풋이 알게 된 것이다. 바베트가 차려낸 그 음식들로 하여금 엄청난 변화를 겪은 사람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속에 사랑이 넘쳐나고 축복이 임했음을 경험한 사람들. 내가 맛있는 음식으로 행복감을 느낀 경험이 없었다면 소설이기에 가능한 이야기라고 치부해 버렸을지도 모른다.

  바베트의 음식이 사람들의 마음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킨 것을 더 명확히 알 수 있는 건 마르티네와 필리파의 지나온 삶의 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목사의 딸이라는 이유때문인지 그들의 성정이 원래 그러한 것인지는 몰라도 금욕적이고 검소하다 못해 모든 걸 포기하며 살아가는 듯한 두 자매의 모습은 그녀들에게 찾아 온 사랑에도 여파를 미쳤다. 사랑이 왔을 때 충분히 잡을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고 독실하게 살아 온 그녀들. 그리고 마르티네를 짝사랑했던 청년이 장군이 되어 다시 재회해서 함께 바베트의 만찬을 즐겼을 때 그들 모두가 변화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과거의 일이 현재로 이어지는 어쩌면 뻔한 결말이 아닌,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 잊을 수 있을 만큼의 황홀한 음식을 맛 본 일. 어쩌면 평생을 가도 경험하지 못하고 변화를 감지할 수 없었을 그들의 마음을 바꾼 건 바로 음식이었단 사실이다.

  세밀하지만 흑백으로 드러난 삽화가 이 이야기에 더 생동감을 주었다. 마르티네와 필리파 자매는 책 속의 묘사된 인물처럼 금욕적이고 절제하는 모습 그대로 등장했고 마치 고흐의 초기 드로잉 작품을 보는 듯한 인물이나 묘사는 이야기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빛을 발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신비한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 이야기의 느낌을 어떻게 남겨야 할지 몰라 오랜 시간 고민했었다. 그러다 바베트가 차려 낸 만찬처럼 내가 경험한 음식과 연관 지으니 그제야 할 얘기들이 생겨났다. 음식으로 행복해질 수도 있고 사람의 마음까지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 내가 겪은 소소한 경험으로 이 이야기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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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5-05-06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쉐프 박찬일이 음식이야기 강연에서 이 영화를 추천하더군요. 재작년 국제영화제 행사였지요. 책이 있군요. 담아갑니다

안녕반짝 2015-05-07 01:16   좋아요 0 | URL
박찬일 셰프의 강연을 두 번인가? 직접 들었는데도 이 영화를 추천한 줄은 몰랐네요^^
 
한나의 여행 비룡소의 그림동화 136
사라 스튜어트 지음, 김경미 옮김, 데이비드 스몰 그림 / 비룡소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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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두메산골에서 자랐다. 하루에 버스가 왕복 10대도 다니지 않는 동네였고 버스에서 내리면 15분 정도 구불구불한 산길을 걸어가야 우리 집이 나왔다.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산골이라 어릴 적에는 그 곳이 세상 전부인양 논과 밭을 뛰어 놀며 다녔는데 조금씩 도시를 경험하고 나서는 이내 내가 자란 산골동네가 시시해져 버렸다. 도시에서 우리 집은 멀리 떨어져 있었고 구멍가게 하나도 없었으며 분교가 되어버린 초등학교마저 멀었다. 그런 나에게 집이란 늘 힘들게 가야 하는 곳으로 인식되었는데 보수적인 교회의 교파의 일원으로 살아가야 하는 소녀 한나에게 큰 도시의 모습은 어떻게 보였을까?

  한나의 여행을 살펴보기 전 한나가 검은 옷을 입고 다니며 농사일을 늘 도와야 하는 이유를 먼저 알아야 한다. 저자 소개 밑에 작은 글씨로 한나는 아미시 소녀이며, 아미시는 보수적인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교파라는 설명이 있다. 주로 미국의 펜실베니이나 주, 오하이오 주 등에 모여 살며 새로운 문명을 거부하고 18세기 생활 방식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한나의 여행을 따라가다 보면 도시를 경험하지 못한 한나는 차치하더라도 그들의 생활방식을 보며 고개가 갸우뚱해질 수도 있다.

  생일 선물로 큰 도시, 현대문명으로 가득 찬 도시를 경험하는 한나는 일기에 그 모든 일을 기록하고 있다. 엄청난 물건이 쌓인 가게를 둘러보기도 하고, 화려한 분수가 있는 공원을 산책하고 배를 타기도 한다. 그 모든 일을 일기장에 기록하면서도 자신이 살고 있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내기도 한다. 데이비드 스몰의 화려하고 섬세한 그림이 한나가 어떤 여행을 하고 있는지 상세히 드러내기도 하고 고향에서는 어떤 생활을 했는지도 알려준다. 대도시와 18세기의 생활 방식을 고집하며 살고 있는 모습이 대조적이면서도 한나에게 이런 모습이 어떻게 보일지 궁금해졌다.

  도시의 수족관을 보며 고향에서 직접 물고기를 보며 현장학습을 했던 것과 비교하기도 하고, 화려하고 큰 교회와 자신들이 드린 예배를 생각하기도 한다. 그렇게 도시를 둘러보며 자신이 살고 있는 고향과 비교하는 한나의 일기를 보며 그렇게 큰 도시를 경험하고서도 결코 자신의 고향을 시시하게 여기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이 책의 마지막에는 미술관에서 본 그림이 마을 풍경과 비슷하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데 집으로 돌아오는 마을 풍경과 미술관의 그림이 닮아 있어 괜히 마음이 푸근해졌다. 잠깐의 여행이었지만 자신이 어디에 살고 있으며 어떻게 생활하는지를 낱낱이 보여주는 한나의 일기. 그리고 한나가 본 풍경과 고향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그려진 그림을 보며 내 고향을 시시하게 생각했던 내가 조금은 멋쩍어졌다.

  저자의 책『도서관』이 좋아 다른 작품을 더 읽고 싶어서 구입한 책인데 같은 책이 있는지 모르고 또 구입한 책이다. 읽은 지 한참 됐지만 언제든 다시 펼쳐도 글과 그림이 정겹다. 이런 책은 아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좋아서 구입하곤 하는데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면 함께 읽으며 느낌을 공유하고 싶다. 그러려면 몇 년을 더 기다려야 하지만 아이와 함께 읽고 싶은 책이라 괜히 마음이 조급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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