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 나는 없었다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1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하긴 세상이 그런 거지. 붙어 있어야 할 때는 그만두고, 내버려두어야 할 때는 매달리고. 한순간 인생이 너무나 멋져서 이게 현실일까 믿기지가 않다가, 이내 지옥 같은 고민과 고통 속을 헤매고! 상황일 잘 풀릴 때는 이 순간이 영원할 것 같은데 - 그런데 그렇지가 않지 - 나락으로 떨어질 때는 이제 절대 위로 올라가 숨쉬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잖아. 그런 게 인생이잖니? (25쪽)

 

 

능력 있고 자상한 남편, 나름 잘 키워 온 세 남매가 있는 중년 여성 조앤에게는 이 말이 해당되지 않았다. 막내딸이 갑작스레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영국에서 바그다드로 향하고 사막에 고립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먼 길을 왔던 것처럼 순조롭게 기차가 자신을 안락한 집으로 데려다 줄 거라 의심하지 않았던 그녀는 기차가 연착되면서 일정이 꼬이고, 읽을 책도 소일거리도 없는 곳에서 오로지 할 수 있는 게 생각밖에 없자 기묘한 의심들을 하게 된다.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동창을 우연히 만나고 그녀에게서 이상한 말을 들었던 것부터, 자신이 바그다드로 향했을 때 기차역에서의 남편의 뒷모습, 세 아이들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 등 그 모든 것을 고립된 사막에서 다시 곱씹게 된다.

 

 

생각밖에 할 게 없을 때 수많은 생각이 사람의 머릿속을 헤집다 떠나가며 몇 가지의 생각은 머무르게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의심으로 시작된 조앤의 생각들은 또 다른 의심을 낳게 되고 결국 그녀가 도달한 진실이란 것에 기겁하게 된다. 마치 자신은 온전히 사막 한 가운데 세워두고 영혼이 빠져 나오듯 한 걸음 뒤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니 그간 허울처럼 살아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 조앤이 도달한 결론은 그랬다. 자신에게 다정다감했던 남편이 자신보다 못한 여자와 사랑에 빠졌다는 것. 세 아이들 중 누구 하나도 자신에게 진실하지 못했으며 조앤 또한 자신이 설계해온 삶에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결과물이 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남편과의 결혼생활이, 자식을 기른다는 게 계획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늘 자신의 생각대로 이끌어나가길 바랐던 조앤은 사막 한가운데서 그제야 자신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 모든 일들을 곱씹어 본 후에 자신은 철저히 외로운 삶을 살았고 남편이 하고 싶어 하는 일 하나조차도 못하게 만드는 여자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런 깨달음이 온 몸을 감싸자 어서 집으로 돌아가 남편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사과하고 전혀 다른 사람이 되기를 다짐한다. 사막에서의 기묘했던 의심의 결과물이란 것이 그녀에게 충격적이고 받아들이고 변화하기 힘든 일들이었지만 그곳에서의 굳은 다짐을 잊지 않기로 한 조앤. 그런 조앤의 바람대로 모든 것이 착착 움직여 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지금껏 조앤이 그러했던 것처럼 자신의 뜻대로 인생은 흘러가지 않았고 그간 그녀가 달고 살아왔다고 생각했던 고독과 외로움도 결국 떨쳐내지 못한 채 남편의 충격적인 독백이 이 소설의 결말을 아우른다.

 

 

몇 날 며칠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면 자신에 대해 뭘 알게 될까? (201쪽)

 

 

분명 조앤은 자신밖에 생각할 일이 없는 상태에서 그간의 삶을 돌아보며 새로운 사실을 추측해갔고 진실에 다가갔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자신이 변화하기를 바랐다. 그렇지만 집에 도착하는 순간, 그녀는 예전의 그녀로 돌아오고 만다. 그리고 남편의 독백으로 조앤에게 앞으로 펼쳐질 운명을 어렵지 않게 예감할 수 있게 되었다.

 

 

여행지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의심과 함께 추리를 해가는 그녀를 보면서 내밀한 내면을 들여다 봐왔다고 생각했다. 남부러울 것 없이 중산층으로 살아온 그녀의 내면에 어떠한 사고와 인생론이 담겨 있는지 세세하게 들여다봤다. 하지만 결국 자신이 만든 틀 속에 고립된 그녀를 보고 있자니 혹시 내 삶도 그렇게 되어버리는 것은 아닌지 덜컥 겁이 났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가정을 꾸려나가야겠단 생각과 동시에 내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아야겠단 다짐을 하게 되었다. 특히 허울 속에 나를 가두는 어리석은 일은 하지 말고 순간순간을 진실되게 살아간다면 최소한 조앤처럼 고립은 겪게 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

 

 

에거서 크리스티의 명성은 너무나 익숙하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녀의 작품을 읽어보지 못했다. 그래서 필명으로 발표한 이 작품이 나에겐 첫 작품이다. 추리소설의 여왕으로 불리는 그녀의 기존 작품과 비교할 수 있는 재량이 내겐 없지만, 추리소설로 치부하지 않고 문학적인 요소를 갖추면서도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게 만들었던 이 작품을 통해 그녀의 작품을 두루두루 읽어보고 싶은 욕망이 일었다. 순식간에 읽어버린 작품이었던 만큼 여운이 강하게 남아서인지 필명으로 발표한 다른 작품들도 꼭 완독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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