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이 진다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25
미야모토 테루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10년 1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읽는 동안 내가 마치 주인공이 되어 대학 4년 동안 테니스만 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대학을 다녀보지 않아 대학생활이 어떤지 직접 피부에 와 닿지는 않았지만, 친구들의 대학생활을 옆에서 지켜보고 함께 대학식당이라든지 학교 행사들을 경험하고 들어서 어렴풋이나마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내가 직접 학업에 뛰어든 게 아니라서 친구들의 학교생활의 깊숙한 부분까지 알 수는 없지만 20대 초반의 치기어리고 어설픈 내면과 부딪히며 그 시절을 보냈던 건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특히나 이성에 눈을 뜨면서 열병처럼 나를 핥고 지나갔던 짝사랑과 첫사랑의 기억들이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나를 지배했었다.

 

  자기가 원하는 학교와 과를 가는 학생이 얼마나 될까? 내 주변에서도 여전히 학교와 학과를 선택해서 가는 사람보다 성적에 맞춰서 가는 학생들이 더 많다. 이 책의 주인공 료헤이도 이런 저런 이유로 처음 생긴 대학에 입학하기로 마음먹었으면서도 등록하기를 망설인다. 그러다 입학절차를 위해 학교에 갔다 자신과 같은 목적으로 온 나쓰코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그리고 그녀 때문에 충동적으로 입학절차를 밟는다. 무엇에 홀린 듯 그렇게 대학 입학을 결정지었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할 뿐, 료헤이가 대학 4년 내내 학업보다 테니스에 집중할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거기다 테니스로 알게 된 친구들과 나름 끈끈한 우정을 맺고 이런저런 일에 휘말리기도 하며, 얽히고설킨 짝사랑의 실태를 알게 되고, 친구의 죽음을 목도하기도 한다.

 

  나 또한 내가 스무 살 적에 친하게 지내고 그네들의 캠퍼스까지 따라가 대학생 아닌 대학생 흉내를 내던 경험을 떠올려보면 피식 웃음만 나온다. 허세보다는 무기력감이 더 지배했었고 친구들의 대학생활이 부럽다기보다는 과연 우리는 더 어른이 되면 무엇일 될까에 짓눌려 있었던 것 같다. 대학을 다니는 친구나 알바로 근근이 생활하면서 방황하는 나나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사실이 놀라웠고 그랬기에 료헤이가 겪는 대학생활에 대한 진부함과 테니스에 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 자신이 의도하지 않게 이런저런 일에 휘말리게 되는 상황에 어느 정도 동질감이 느껴졌다.

그런데 우리 말이야. 그동안 그저 바보처럼 테니스만 했지? 책도 안 읽고 영화도 안 보고 공부도 안 하고 차에 빠지지도 않고 여자아이와 놀지도 않고 그저 테니스만 쳐댔어. 난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나머지 이 년 동안도 철저하게 테니스만 할 거야. 내 앞에 매치포인트가 있다 이거야. 안 그래? (274~275쪽)

 

  료헤이가 가네코의 꼬드김에 넘어가서 테니스부에 들긴 했지만 힘들게 테니스 코트장을 만들고, 맘에도 없던 테니스를 하게 되면서 욕심도 내고 경기에 진지하게 임하는 자세를 보면서 전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또렷한 목표가 있어서 대학에 들어가고 공부를 하고 취업준비를 하는 빡빡한 일정이 아닌 것이 오히려 그들을 더 인간적으로 보게 만들었다. 방황을 해도 대학생이라는 특권일 때 할 수 있는 게 아니냐며 내 스스로를 합리화 시키면서 그들을 바라봤던 게 뭔지 모를 위안이 되었던 것 같다.

 

  료헤이를 비롯한 주변의 친구들이 겪는 일들이 썩 건전하거나 그들에게 큰 영향을 주진 않았지만 테니스를 통해 얻은 건 꽤 많았다. 대학 4년을 버티게 해주었고 그 안에서 소중한 만난 소중한 친구들. 그리고 자신이 짝사랑하던 나쓰코가 점점 멀어지고 있음에도 그녀에 대한 마음을 끝내 지울 수 없었던 일들까지 모두 테니스와 연관이 깊었다. 그랬기에 대학생들의 이야기, 그들의 4년의 기록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드는 이 책을 읽으면서도 마치 내가 그런 삶을 살아온 것처럼 묘한 기분이 들었다. 졸업할 시기가 되고 조금씩 사회로 나아가야 할 상황이 되었을 때 처음 입학했을 때보다 좀 더 세파에 단 듯한 모습조차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료헤이는 아무도 없는 테니스부실로 돌아와 보자기에 싸인 색지를 손으로 살그머니 쓰다듬었다. 그 순간 다쓰미 게이노스케라는 인간의 마음이 료헤이 안에 어둡게 자리 잡고 있던 슬픔을 깨끗이 지워버렸다. 엄청난 맑은 기운이 단숨에 더러움을 흘려보내듯이. (467쪽)

 

  결국 돌고 돌아 나쓰코와의 긍정적인 가능성도 엿볼 수 있었고 은사님으로 인해 마음속에 자리 잡은 슬픔과 더러움이 씻겨나갔던 료헤이를 보면서 그 모든 게 일상적으로 흐르는 삶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그들을 보면서 온전히 동조할 수는 없었지만(타인의 삶을 온전히 동조하는 게 가능할 것 같지도 않지만) 현재의 내 삶도 여전히 흐리고 있으며 아무런 일이 일어난 것 같지 않아 보여도 한 획을 긋고 있음을 깨닫자 괜히 숙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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