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샤의 어린이 정원 타샤 튜더 클래식 1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음, 타샤 튜더 그림, 엄혜숙 옮김 / 윌북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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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샤 할머니 책은 출간되는 즉시 구입하곤 한다. 그렇게 구입한 책이 내 손에 들어오면 순식간에 읽어내기 바쁜데, 이 책 역시 출간 즉시 구입했음에도 이상하게 집중이 되질 않아 오랫동안 묵혀 두었다. 타샤 할머니의 책 중에서 안 읽은 책이라곤 이 책뿐이라서 책장에 오랫동안 묵혀 있는 게 마음에 걸려 꺼내 읽었다. 시간이 지나면 잘 읽힐 거라 생각했는데 여전히 글은 겉돌았고 타샤 할머니 그림만 눈에 들어왔다. 집중이 그렇게 썩 잘 된 상황이 아니었지만 어찌어찌 끝까지 읽고 해설을 읽다 보니 맙소사! 그 동안 내가 이 책의 의도를 반대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책 제목이『타샤의 어린이 정원』이었으니 이 책에 실린 익숙한 저자의 이름을 보면서도 오로지 타샤 할머니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그래서 타샤 할머니 그림에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이 글을 덧입힌 거라 생각했기에 글이 집중이 되지 않았고 뭔가 자꾸 겉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간 타샤 할머니의 동화책에는 글이 이 책처럼 많지 않았다. 그리고 짤막하더라도 그림이나 타샤 할머니의 일상을 보여주는 사진과 잘 맞아 떨어졌기에 타인의 글이라도 어색함을 느낄 새가 없었다. 그렇게 철저히 타샤 할머니의 시선으로 이 책을 보았기 때문인지 저자의 시와 그림이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림은 따스하기도 하고 환상적이기도 하고 어릴 적 꿈 많은 아이의 모습을 잘 재현한다는 느낌이 충분했다. 그러나 저자의 시는 자꾸 나의 그런 집중을 방해했다.

  타샤 할머니가 저자의 시에 그림을 덧입혔다는 사실을 모른 채 저자의 시가 그림에 억지로 꿰어 맞췄기에 이렇게 어색한 게 아닌가란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길게 쓰지 않아도 타샤 할머니의 의중을 충분히 드러낼 수 있었을 텐데 왜 이렇게 길고 지루할까란 의문만 가지고 있었다. 외국문학을 우리 언어로 옮기다보면 어색한 부분이 있기 마련이고 특히 시는 그런 어려움을 더 가지고 있다고 여기고 있다. 그런 이해를 충분히 하지도 못한 상황에서 그림에 시를 꿰어 맞추고 있다 여겼으니 제대로 읽힐 리가 없었다. 종종 이렇게 그린이와 글쓴이가 다른 경우에 그림과 글이 일맥상통하는 책을 만나는 게 쉽지 않음을 알고 있기에 더 아쉬움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먼저는 이 책의 탄생 배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나의 무지에 있었고 타샤 할머니에 너무 집중 했으며 그린이와 글쓴이가 다르다 하더라도 각기 다른 예술로 지켜봐야 했음에도 그렇지 못한 내 잘못이 크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국내에 출간 된 타샤 할머니의 책 중에서 아직 읽지 않은 책이 딱 한 권뿐이라 더 기대치가 컸기에 아쉬움이 남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큼지막한 책에 그려진 타샤 할머니의 그림은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시도, 그림도 우리의 정서와 다름을 많이 느꼈지만 타샤 할머니의 삶을 여러 권의 책으로 지켜봐서인지 나에겐 익숙할 뿐만 아니라 사랑스럽게만 느껴졌다. 책 속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나의 어린 시절이 저 그림과 같았더라면 참 행복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현재의 행복은 잘 알아차리기 힘들고, 지나 온 과거는 시간이 지나면 미화시키기 바쁘기에 괜한 부러움을 쏟아냈는지는 몰라도 타샤 할머니의 그림은 나에게 늘 그런 행복감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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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를 봤다 - 개정판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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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면 읽는 건 어렵지 않았는데 느낌을 남기기 어려운 책이 있고, 읽는 건 어려웠는데 느낌을 남기기 쉬운 책이 있다. 이 소설은 철저하게 전자에 속한 책이다. 100페이지 정도 되는 소설을 읽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닌데도 읽으면서 병적인 생각이 드러나고 말았다. 다 읽고 난 다음에 느낌을 어떻게 남기지? 책이 좋아 책을 읽었으면서도 어느 순간 리뷰를 쓰기 위해 책을 읽는 것 같아 리뷰를 남기지 않고 책을 읽었던 시간이 3년 정도 있었다. 리뷰를 남기지 않아도 된다는 부담감이 없어 좋았으나 목록을 보고 있으면 그 책 내용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부작용을 낳고 말았다. 그래서 책을 읽으면서도 그런 걱정을 떨쳐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예전에는 책을 읽고 난 느낌에 줄거리가 꼭 들어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줄거리를 간추려 낸다는 것이 무척 어려운 일임을 알고 있음에도 정작 줄거리로만 채워진 리뷰라는 느낌을 감추기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요즘은 마음 내키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느낌을 남기고 있지만 이 책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하다. 줄거리도 제대로 간추려 지지 않고 느낌을 드러낸다는 것은 더 어려운 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저자의 작품을 충분히 숙독하지 않은 상태에서 독특한 작품을 만나고 말았으니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여전히 저자의 다양한 문학세계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저자의 능글맞을 만큼 유머러스하고 진한 묘사는 익히 알고 있다. 에세이와 소설에서 드러나는 그 문체가 좋아 저자의 책을 여러 권 구비해 놓았음에도(읽은 책보다 못 읽은 책이 더 많지만) 이 작품은 그런 문체와 독특한 구상이 만나 탄생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이러니 꽃 피는 나무가 있는 곳에서는 글 따위를 쓰고 있을 수가 없다. 폭포 앞에서 오줌발 자랑하기요, 피라미드 앞에서 집안 제사 지내는 격이다. (7~8쪽)

  첫 장을 열자마자 펼쳐지는 언어의 향연 앞에서 이 책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다 읽고 난 다음에 그럴듯한 느낌을 남기지 못하더라도 이런 문장들을 즐기기만 해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책 내용은 몽롱한 기억의 언저리로 사라져 버렸고 짤막짤막한 작은 이야기들이 모아지기는커녕 한데 섞여서 혼란스럽기만 하다. 그렇게 작은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엮은 저자가 신기할 뿐 나는 그저 지켜보면서 따가라는 방법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어떤 작가가 좋아 그의 작품을 읽으면서도 모든 작품을 다 사랑할 수 없고, 모두 다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좋아하는 작가에 대한 나름대로의 애정은 초기작부터 차근차근 읽으면서 작품의 변화를 탐색하며 즐기는 거라는 결론을 최근에 얻었다. 성석제 작가에 대한 애정이 샘솟기도 전에 뒤죽박죽 읽어 댄 작품으로(그렇게 많은 작품을 읽은 것도 아니지만^^) 조금은 혼란스러워졌지만 여전히 나는 저자의 다른 작품이 궁금하다. 그렇기에 그의 작품을 읽을 것이고 나를 어렵고 혼란스럽게 만드는 작품을 만나더라도 꿋꿋하게 다음 작품을 향해 나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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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1-29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렇습니다. 책이 술술 읽혀지고 느낀 것이 많았는데 이걸 문장으로 표현하기 어려울 때가 있어요. 그러면 깨끗이 포기하고 시간이 조금 흐른 뒤에 그 책을 다시 읽어요. 그러면 적을 만한 내용이 술술 나옵니다. ^^

안녕반짝 2015-01-30 00:28   좋아요 0 | URL
저는 왠만해서는 두 번 읽는 일이 드물어서 기억을 쥐어짜서 리뷰를 쓰곤 해요. 그럴 땐 잡설이 더 많아지지만요^^ 정말 좋아하는 책이라던가 다른 계기가 있는 책들은 두 번 읽기도 하고요^^
 
모르는 여인들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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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여름 방학보다 겨울 방학이 늘 기다려지고 좋았다. 모든 이유를 제치고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 많아서였다. 도서관이나 지인의 책장에서 빌린 책들을 쌓아 놓고 읽을 때의 그 뿌듯함과 느긋함. 하얀 눈이 내리는 날이라도 되면 세상에 혼자 고립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책이 더 잘 읽히곤 했다. 그런 기억이 희미하게만 남아 있을 뿐, 어떤 책을 읽고 즐거워하고 어떤 문장을 보며 감동 받았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다만 이 책을 읽으면서 마치 그 당시에 집중하면서 즐겁게 읽었던 추억이 떠올라 무언가 아련한 느낌이 가시질 않는다.

  첫 단편「세상 끝의 신발」때문인지도 모른다. 발이 푹푹 빠질 정도로 쌓인 눈, 신발, 그리고 토방위에 놓인 순옥 언니의 신발. 이 소재만으로도 내가 자란 시골의 겨울을 추억해 내기에 충분했다. 흰 눈이 쌓인 날이면 제일 먼저 내 발자국을 남기고 싶어 괜히 마당을 이리저리 걸어 다니고 지금의 시골집으로 변모하기 전 나무 마루에 토방이 있었던 집을 기억하기에 더 옛 추억에 빠졌는지도 모르겠다. 소설을 읽는 것이 아니라 어린 시절의 내가 타인에게 이웃집 이야기를 전해들은 것 같은 착각이 이는 것도 아마 이런 역할이 한 몫 했을 것이다.

  늘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은 해외문학이라고 말하면서도 곰곰 생각해보면 국내문학이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초등학교 때는 시간이 남아돌아 닥치는 대로 학급도서를 읽었고 중학교 때는 필독서라는 명목 하에 이해하기 힘든 한국명단편들을 읽었다. 그리고 고등학교 때는 닥치는 대로 읽되 서서히 해외 명작으로 손을 넓혔던 것 같다. 그러다 해외문학에 빠져 국내문학을 등한시 하게 되었고(국내 현대문학을 읽으면 도피하고 싶은 현실이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나 더 피하게 되었던 것 같다.), 가끔 이렇게 괜찮은 소설을 읽으면 국내 문학의 소중함과 매력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책에 실린 일곱 편의 단편을 읽으면서 참 재미있다는 생각은 물론이고, 오랜만에 소설다운 소설을 읽는다는 기분이 들어 반가웠다. 국내문학에 목말라 하면서도 그만큼 등한시 했던 티가 역력히 드러나는 경험이 아닐 수 없는데 그래서인지 더 꼼꼼하고 신중하게 정독했던 것 같다.

  장편소설도 그렇지만 단편집은 한 번 흐름이 끊기면 그대로 묵혀 두는 경우가 많다. 이 소설집도 아껴가면서 읽다 마지막 두 편을 남겨 두고 오랫동안 책장에 묵혀 두었다. 그러다 이 소설을 읽었을 때의 느낌이 되살아나고 그 감정을 다시 한 번 느끼고 싶어 꺼내들었는데 역시나 순식간에 읽어 버렸다. 책장을 덮으면서 아쉬운 마음이 들 정도로 우리 주변에 있는 이야기 같지만 말 그대로 소설 같은 이야기들이라고 생각되는 정갈한 글들. 저자의 필력에서 느껴지는 힘이 나에게 온전히 들어온 기분이었다. 이 상태라면 저자의 다른 글들을 얼른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앞서기도 했는데 역으로 때를 기다려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각기 다른 분위기를 내는 단편들이 한 권의 책에 쌓이기까지의 시간이 8년 만이라고 하니(8년 만의 출간이 정확한 표현이지만) 한 권의 책이라도 쉬이 읽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내가 자라온 배경, 문화, 시대상을 무시하지 못한 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 이유도 크지만 같은 정서를 지닌 눈에 드러나지 않는 감정도 결코 지나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옛날 소설을 읽는 듯한 기분이 들면서도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이야기들이 더 많은데 소설 속에 등장하는 자잘한 소품과 소재들에서 내가 자라온 환경의 비슷한 면을 들춰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 팍팍하다고 생각해서인지 옛 추억이 더 진하게 올라오는 이 시점에, 그냥 아무런 생각도 번민도 없이 눈이 내리는 겨울, 고향집 아랫목에 배를 깔고 누워 재미난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잠시나마 그런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그간 내가 살아온 시절들이 이상하리만큼 소중하게 느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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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 십이국기 1
오노 후유미 지음, 추지나 옮김 / 엘릭시르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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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나에게 주어진 환경에 진부해하며 변화를 바랄 때도 있지만 현실에서의 변화를 바랄 뿐, 전혀 다른 세계로의 이동을 바라는 건 아니다. 지금의 내가 전혀 다른 내가 되어야 한다고 상상한다면 내가 누리고 지키며 살아왔던 지금의 모습이 몹시도 그리울 것 같다. 소중한 사람이 생기면 두려움도 커진다고 했던가. 내가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남편과 아이가 있는 나에겐 이 모든 것을 두고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건 몹시 어려울 것 같다. 그래서인지 평범한 고등학생 요코에게 일어난 일들이 궁금하면서도 다시 그 전의 생활로 돌아올 수 있을지 조바심이 났다.

  어느 날 갑자기 내 앞에 낯선 이가 나타나 위험에 처했으며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허락을 하라고 말한다면 과연 그 상황을 쉽게 납득할 수 있을까? 말로만 한다면 무시하고 지나쳐 버리겠지만 내가 속해있던 일상이 무너지고 다른 세계의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생물들이 나타나 위협한다면 낯선 이의 말을 듣고 따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요코가 그랬다. 교무실에서 담임선생님과 이야기를 하고 있다 게이키라는 낯선 남자에게 황당한 이야기를 듣고 이상한 생물들에게 쫓기다 전혀 다른 세계로 흘러들어와 버렸다. 그 모든 게 순식간에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을 지켜주고 자신의 곁에서 절대 떨어지지 않을 것 같던 정체를 알 수 없는 게이키란 남자와도 떨어져 버렸다. 그야말로 갑자기, 엄청난 재앙이 닥친 것처럼 낯선 세계에서 혼자가 된 요코. 내가 그런 상황이었다면 절대 견디지 못했을 것 같다.

  요코가 혼자가 되어 경험한 세계의 색깔은 어둠이었다. 서서히 그곳이 어떤 곳인지, 어떤 사람들이 살고 어떤 나라가 형성되어 있는지 알아가게 되지만 그 모든 일을 경험하는 요코의 시선에 비친 세계는 어둠이었다. 꼭 흑백 꿈을 꾸는 것처럼 빛이라곤 없는, 암흑의 세계를 걷고 있는 것 같았다. 요코가 떠나 온 세상, 즉 우리가 알고 있는 평범한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곳. 그리고 다시는 요코가 속한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과 자신이 인간의 몸으로 허해를 건너왔다는 이유로 속이고 속이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요코는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무슨 이유로 자신이 이러한 일을 겪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가운데 그 이유를 찾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가 와르르 무너져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10대 소녀의 몸으로 아무런 정보도 없이, 종종 만나는 사람들(늘 요코의 뒤통수를 쳤다.)에 의해 그 거대한 세계를 알아간다는 건 엄청난 에너지와 의지와 목적이 필요했다.

  그랬기에 게이키를 원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코가 낯선 세계에서 만날 때 쥐어준 칼 한 자루로 끔찍한 요마들을 물리쳐야 하고 그 와중에 먹고 살아야 하는 일이며 게이키를 찾아나서는 일까지, 엄청난 고생을 하고 있는데도 게이키는 요코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요코 앞에 나타난 푸른 원숭이는 요코를 더 절망으로 이끌었다. 게이키만 나타난다면 단박에 모든 것이 해결되고 왜 자신이 이런 세계로 와야만 했는지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과정을 쉽게 알려주지 않았다. 그리고 수많은 고난과 역경을 딛고 요코가 이 세계에 흘러온 이유, 요코가 어떤 존재인지가 밝혀졌을 때 그제야 모든 궁금증이 풀렸지만 결코 그 과정은 녹록치 않았다. 늘 의지박약이라고 내 스스로를 폄하하는 나로서는 요코처럼 그런 고행을 할 용기도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선택의 순간에서도 결코 현명하지 못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저기 말이야, 요코. 어느 쪽을 골라야 할지 모르겠을 때는 자신이 해야만 하는 쪽을 골라. 어느 쪽을 골라도 반드시 나중에 후회할 거야. 똑같이 후회할 거라면 조금이라도 가벼운 쪽이 좋잖아. (514쪽)

  요코가 고생하는 게 안쓰러워서 게이키를 원망하면서도 요코에게 또렷한 충고도 할 수 없는 내가 결국에는 그 모든 게 요코가 이러한 운명을 받아들이기 위한 과정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평범하게 인간세계에 살던 내가 다른 세계에서 엄청난 책임을 져야 하는 인물이었고, 게이키가 그런 나를 찾아낸 인물이었다면 모든 게 수긍이 갔다. 하지만 최종 선택은 요코가 해야 했다. 우리도 늘 선택의 기로에 서있지만 운명이 바뀌는 선택 앞에서는 신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요코의 고민과 선택을 존중하면서도 마침내 그녀가 결정한 선택의 결과가 어떻게 펼쳐질지 기대하게 되었다.

  장르소설을 그다지 좋아한다고 말할 수 없는 나임에도 꽤 두툼한 책을 순식간에 읽어버렸을 정도로 흡인력이 있었다. 인간세계와 전혀 다른 세계를 그리다보니 용어라든지 각 나라의 특징과 그 안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는 생명들에게 조금은 이질감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장르불문하고 완성도가 있다면 개인적으로 그 작품을 높이 평가하는 편이다. 1992년도에 일본에서 출간되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현재 읽어도 낯선 느낌이 없었고 다음 이야기가 너무 궁금해 이 시리즈를 꼭 완독하고 싶은 욕심이 일었다. 『퇴마록』이후로 이런 장편 장르소설에 매료된 게 오랜만이라 개인적인 기대감이 큰지는 모르나, 현실을 잊고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갈 정도로 흥미로워 나야말로 다른 세계로 빠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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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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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달리기에 관심을 가진 적이 있었다. 운동을 해보고 싶어 아침 7시에 집 근처의 작은 해안도로를 달렸는데 마침 내가 달리기를 시작한 시기가 여름이라 뭍에서 올라오는 냄새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렇게 3일을 달리다 포기하고 태권도장에 접수한 기억이 난다. 그때 짧게나마 달리기를 하면서 드는 생각은 내 자세가 좋지 않다는 것, 이렇게 잘못 달리다가는 발 근육이 더 안 좋아질 것 같다는 점이었다. 그런 부분이 염려되었다면 더 공부해서 자세를 고쳐서 계속 달리기를 했어야 하는데 허황된 마음으로 시에서 주최하는 마라톤 대회에 나갔다. 초보 러너인 점을 감안해 10km를 신청했는데 먼 거리라는 느낌 보다는 그 구간동안 계속 달려야 한다는 사실이 무척 힘들다는 걸 정확히 경험했다. 거의 도보수준으로 경기를 마쳤지만 달리기에 대한 나의 관심과 허황심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하루키의 에세이를 읽다 보면 그가 얼마나 달리기를 좋아하는지 금세 알게 된다.『먼 북소리』에서는 달리기를 할 수 없는 환경 속에서도 꿋꿋이 달리기를 하는 저자의 모습을 보면서 그가 정말 달리기를 순수하게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책을 좋아하는 내가 심심찮게 듣는 질문은 왜 책을 좋아하냐는 것이다. 책을 좋아하던 초기에는 거창한 대답을 하곤 했었는데 지금은 재미있어서 읽는다고 간단하게 말한다. 저자에게 왜 달리기를 하냐는 질문을 한다면 아마도 달리는 것이 좋아서라고 말할 것이다. 그만큼 달리기 자체를 좋아하고 달리기를 위한 모든 과정과 변화들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나에게 있어 -혹은 다른 누구에게 있어서도 아마 그렇겠지만-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체험하는 것이고, 거기에서 느끼는 감정 역시 처음으로 맛보는 감정인 것이다. 그 이전에 단 한 번이라도 경험해본 일이라면, 좀 더 분명하게 여러 가지 일을 따져볼 수 있을 테지만, 아무래도 처음 겪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간단히 치부하기는 쉽지 않다. (38쪽)

책을 읽으면서 책 내용에 집중하는 시간도 좋지만 잠시 책에서 눈을 떼 사색에 빠지는 것처럼 저자도 달리기를 하면서 할 수 있는 생각들을 하곤 했다. 나이를 먹는 일에 대한 생각 같은 건 평상시에도 할 수 있겠지만 달리면서 하는 생각은 깊이에 차이가 있을 것 같다. 그렇게 저자의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숨만 차지 않을 뿐이지 마치 내가 러너가 되어 그 길을 달리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인다. 저자가 보는 풍경이 내 눈앞에 펼쳐지고 완주했을 때의 짜릿함도 대리만족으로나마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달리기를 시작하기 전, 달리는 과정, 달리고 난 후의 자신만의 생각들을 드러내는 과정이 지루하지 않았고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순수하게 드러낼 때 타인에게도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저자가 달리기를 하면서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시도를 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작은 시도를 해 보려는 움직임. 스스로를 의지박약이라 지칭하는 나는 그런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최근에 무엇을 시도해 보았는지 전혀 생각나지 않아 부끄러운 마음이 들 정도였다. 한계를 뛰어넘는다는 것이 거창한 것이 아니라 평소에 자신이 멈춰선 선을 넘어 보는 것. 그런 시도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저자 또한 달리기를 하면서 한계에 부딪히기도 하고 한계를 뛰어 넘기 위한 노력을 할 때도 있었지만 뛰어넘지 못해 좌절할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다음에는 더 좋은 기록이 나올 거란 희망을 가지며 달리기를 멈추지 않는 모습에 스스로 멈추게 했던 작은 한계들에 당장 도전해 보기로 했다.

달리기를 하면서 평소에는 깊게 보지 않았던 풍경들이나 이런저런 사색에 빠지는 것. 그리고 말은 하지 않지만 함께 달리는 이들과의 동질감 또한 뭔지 모를 뿌듯함으로 다가왔다. 또한 무언가를 좋아하는 사람들에 대해 좀 더 너그러운 마음을 가질 수 있어서 좋았다. 내가 무언가를 좋아하는 것이 있듯이 타인이 좋아하는 것을 좀 더 이해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 어쩌면 그런 마음가짐 자체가 내가 그어놓은 한계의 선을 허물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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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1-27 2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달리기보다 걷기를 좋아해요. 날씨가 추워도 운동 삼아 걸으려고 해요. 평소에 가보지 않는 길이거나 버스 타면서 바라보기만 했던 길을 걸으면 기분이 즐거워요. 미처 보지 못했던 풍경을 발견할 수 있으니까요. ^^

안녕반짝 2015-01-28 01:55   좋아요 0 | URL
전 30대가 넘고부터는 달리기는 거의 안해요. 숨이 차서요. ㅋ 저도 산책을 꽤 좋아하는 편인데 오래하지는 못해요. 체력이 따라주질 않네요^^ 산책하면서 풍경보고 가끔은 음악도 듣는 게 참 좋은데 최근엔 그런 여유조차 갖질 못했네요.